소설리스트

천재 쉐프 조선을 부탁해-286화 (286/327)

286. 야합.

“민심이 천심이긴 하나, 고래로부터 독하고 악한 군주가 많았었음을 생각해 주시옵소서."

한명회의 말은 민심이 돌아서는 경우가 있더라도 제왕의 자리에 오른 이들이 많았다는 말이었다.

"그럼,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께서는 출병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러하옵니다. 허나, 요청한 3만 명이 아닌 단 천명을 보내야 하옵니다."

"천명을요?"

“네 전하. 그리고, 남경의 태자에게도 연이 닿는 자가 있으면 몰래 지원을 하여야 하옵니다.”

"흐음.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둘 다를 돕되, 그렇게 표나지 않게 도와주고 생색만 내라는 것입니까?"

"맞사옵니다. 체면치레만 하면 되옵니다. 천 명의 기병을 선발대로 출병시키고 이후 병사를 모아 보낸다고 해야 하옵니다. 그리고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대처해도 늦지 아니합니다."

“부원군의 말이 옳은 것 같소이다. 만귀비가 이길 것 같으면 그때 부랴부랴 병사들을 내어 보내어도 늦지 않을 테지요. 그리고, 그 반대로 태자가 이기게 된다면, 물자를 지원해주었고, 만귀비에게 천 명만을 보내었다는 것을 강조한다면 조선에 화가 미치지는 않겠지요."

한명회는 자신의 의견을 성종이 단박에 알아듣고 수렴하자 기분이 좋았다.

딸인 공혜왕후 한씨가 죽은 이후 서로의 관계가 끊어지고, 서먹한 관계가 되었지만, 동반자적인 입장은 여전한 것이었다.

"부원군의 의견을 받아 기병 일천을 편성하여 인솔할 장수를 인선하라. 그리고, 남경의 태자 측에 연이 닿는 이를 알아보라."

“전하. 소신이 알기로는 수군 훈련원의 도정 전원종이 태자 측의 군수를 맡은 텅신황과 안면이 있는 사이라고 들었나이다."

“그럼, 춘봉 상단을 통해 태자 측이 필요한 물자들을 어느 정도 도와주도록 하고, 태자 측에 줄을 대도록 하시오."

***

“명나라의 난(亂)에는 그렇게 대응하기로 했지만, 이 일이 남 일 같지가 않습니다.”

노사신은 일이 파해 집으로 가려는 한명회를 붙잡곤 심각하게 이야길 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국본(國本)의 문제가 우리 조선에도 있지 않습니까?"

“국본이라...”

사실, 한명회는 영의정에서 물러난 이후 궐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을 쓰지 않은 척을 했지만, 궐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가장 큰 문제가 바로 후사 문제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한창때인 성종은 정력이 월등하여 1계비인 윤씨와 2계비인 윤씨, 후궁 김씨, 정씨, 엄씨까지 줄줄이 회임을 시켰었고, 출산일이 되자 줄줄이 왕자들과 공주들이 태어나고 있었다.

거기에 남국의 귀비 4명도 출산을 했기에 궐에서 아이 우는 소리가 어디에 가든 들리는 상황이었다.

“아직은 왕자들이 어리기에 세자로 책봉은 하지 않고 있으나, 원자(元子 임금의 맏아들로 세자 책봉 전의 호칭)에 대한 말이 많습니다.”

“궐을 떠나있어 그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해주시오."

"흐음. 그러니깐 말입니다. 일주일 차이로 두 분의 왕자님이 나오셨습니다."

***

성종도 사람이다 보니 한명회의 딸이자 자신의 첫 부인인 공혜왕후가 병석에 누웠을 때는 여인을 탐하는 것을 자중했었다.

허나, 말라카에서 데려온 4명의 귀비를 진상 받자 꾹 눌러 참았던 정염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거기에, 후사가 없는 왕이다 보니 내관들이나 궁내부에서도 성종의 행동을 막지 않았기에 자연스레 매일 밤 귀비들의 방을 드나들었다.

물론, 국본을 위해 1계비인 윤씨와 먼저 합방을 하게 하였고, 윤씨가 회임을 하자 그 이후로 남국의 귀비들에게 정염을 풀게 했다.

하지만, 세상일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말처럼 가장 먼저 회임한 계비 윤씨가 10달을 채워 산달이 되었을 때 그보다 먼저 태어난 왕자가 있었다.

바로 남국의 귀비인 '타두'가 산달이 멀었음에도 사내아이를 낳아 버린 것이었다.

흔히 말하는 팔삭둥이였다.

회임이 늦었어도 이렇게 두 달 먼저 출산을 해버리니 계비 윤씨의 왕자를 원자로 만들겠다는 계획 자체가 무너져 버린 것이었다.

영아 사망률이 높은 시대였기에 타투가 낳은 아이이든 계비 윤씨가 낳은 아이이든 아직 이름이 내려오지는 않았으나, 과연 누구를 원자로 정하냐는 것이 문제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법도상 귀비 타두가 낳은 왕자가 원자가 되어야 했지만, 태후는 물론이고 다른 종친들은 다른 인종의 피가 섞인 왕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그리 원하지 않았다.

물론, 중국 동진(東晋)의 곤륜노 후였던 이능용의 전례가 있기에 귀비 타두에게서

태어난 원자가 왕이 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처럼 일주일 늦게 태어난 계비 윤씨의 아들이 원자로 정해지길 원하는 종친이나 대신들이 많았다.

이렇듯 명나라의 태자 문제처럼 조선에도 잠복된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노사신은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정리가 필요하다고 가장 웃어른이자 권세가인 한명회에게 나서주길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야길 들은 한명회의 머리에선 뭔가가 번쩍이며 스쳐 지나갔다.

영민한 그의 정치 감각이 날카롭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지금 여러 귀비들에게서 몇 분이나 왕자님이 태어나신 건가?”

“두 달 사이로 네 분의 왕자님이 나섰습니다. 그중 두 분은 남국 귀비의 배에서 나오셨습니다.”

첫째 왕자와 셋째 왕자가 귀비들의 소생이라고 했는데, 어쩌면 외가가 없는 조선의 왕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었다.

"흐음. 어린 아기씨들이니 상황이 변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좀 더 기다려 보세나.”

한명회는 누구의 편을 들지 않고 시간을 가지자고 물러 나왔지만, 원자를 낳은 귀비 타두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의중을 물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던 반응이 타두에게서 나오자 잘 웃지 않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성종에게 시집보낸 딸이 죽고 이제 권력을 놓고 말년의 안락함을 즐기려 했었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생각한 대로 일이 돌아가자 늙어 힘이 빠져가던 몸에 다시 힘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신정(신숙주 4남)과 한보(한명회의 아들)에게 연락하여 당장 오라고 하거라."

***

“나는 중국 송나라의 승상인 한충헌(韓忠獻)을 빗대어 권력이나 부귀를 탐하지 않았다는 평을 위해 이곳에 정자를 짓게 하고 압구정이라 이름을 붙여 머물고 있었다."

급하게 한명회가 부른다는 소리에 친우들과 술을 먹다 말고 온 신정은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아들인 한보 또한 그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했다.

“허나, 세상이 내게 다시 권력을 주려고 하는가 보구나."

한보는 한명회의 말을 듣고, 정계에 다시 복귀하는 것으로 바로 알아들었다.

“헌데, 아버님이 복귀하시더라도 예전과는 다르실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전하께선 이제 어르신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하시는데, 왜 다시 나서려는 겁니까?”

한보와는 다르게 신정은 삐딱하게 물었다.

“뭐가 다르고, 뭐가 탐탁지 않다는 말이냐?"

“국구(國舅 왕의 장인)일 때와는 많이 다를 거라는 말입니다. 전하께서도 이제 어르신의 말이라고 무조건 따르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면 내가 다시 국구가 되면 되지 않느냐."

"엥? 어디 숨겨둔 딸이 또 있는 겁니까?"

신정이 알기로는 더는 시집 보낼 딸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보 형을 보는데, 한보 형도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고 있었다.

"설마, 제 딸을 시집보내려고 하시는 겁니까?"

“이번에 난 손녀 말이냐? 그 아이는 지금의 원자에게 시집 보낼 것이다."

"그러면, 어르신은 왕비의 아버지인 국구가 아니잖습니까. 한보 형이 국구가 되는데,”

"하하하. 내게 생각지 못한 수양딸이 생겼느니라."

"수양딸이요? 그럼 그 수양딸을 전하의 비로 만드시겠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수양딸이 어디 진짜 딸만 합니까? 그 수양딸의 친부나 혈족이 있을 터인데."

“그래 네 말이 맞다. 수양딸이라고는 하지만, 수양딸의 아비와 혈족이 있겠지. 하지만, 이번에 생긴 수양딸은 이미 귀비이며 이번에 원자를 낳았다.

그리고 그 친부와 혈족이 있다고 해도 조선에는 없다."

“예? 설마, 남국에서 온 귀비 타두를 수양딸로 삼으셨다는 말입니까?”

신정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설 정도였다.

“그렇게 되었다. 이제 다시 국구가 될 수 있겠느냐?"

"허허허허. 이게 무슨. 하하하하."

신정은 한명회의 말을 듣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타두 귀비께선 그렇게 하자고 하셨습니까?"

"물론이지. 내가 타두의 아버지이자 원자의 외할아버지가 되어 주기로 하였느니라.”

한명회의 말에 공조참의로 있으며 주워들은 말이 있던 한보는 무릎을 쳤다.

"그렇지 않아도 원자를 누구로 세워야 하냐고 말이 많은데, 아버님이 귀비를 수양딸로 삼아 힘을 실어 준다면 수양딸이지만, 친딸같이 아버님을 우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주 묘수입니다.

묘수예요."

"하하하. 그렇지."

한명회와 한보 부자가 기분 좋아 웃는 것을 보는 신정은 기분이 상했다.

“헌데, 이걸 다 결정하고 나서 제게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제가 귀비들을 진상했다는 것을 모르시는 것도 아니고."

“암. 알다마다. 그래서 너를 부른 것이 아니냐. 내가 죽고 나면 누가 국정을 주도할 것이냐? 결국은 한보와 너밖에 없지 않으냐.”

“뭐, 물론, 그건 알지만, 왜 제가 모르게 일이 진행되었냐는 게 불만인 겁니다."

“그래 너는 본래 불만이 많았지. 그러면 너는 그것을 이야길 하고 다니거라. 그러면 자연스레 너에게 불만이 많은 사람이 모일 것이다."

“흥. 저와 사이가 틀어져 보이게 해서 반대파를 모으겠다는 것까지. 어르신은 진짜 늙은 너구리이외다. 에잇. 이미 다 결정난 거 같으니 난 가보겠소이다.”

사실, 신정은 자신이 가져다 바친 여인이지만, 귀비들과 혈연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자주 그들과 만나기 위해 찾아가는 것이 곤란했었다.

한명회처럼 노쇠한 대신이라면 자주 찾아가 귀비를 만나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터지만,

평소에도 색을 밝히고 난잡하게 노는 자신이 귀비들을 찾아가게 되면 그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귀비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가 애매했는데, 그걸 한명회가 알아서 한다니 어찌 보면 신정 자신에게는 이득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을 아예 언질도 주지 않고 처리해 버린 한명회에게는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

“너는 신씨 집안의 앞으로를 어찌 보느냐?"

다시 술을 마시러 간다며 나가는 신정의 뒷모습을 보며 아들 한보에게 물었다.

“신정은 신뢰하기 힘든 자이지만, 가주가 된 삼남 신찬은 믿을 만합니다."

“그래. 신찬은 믿을 만하지만, 능력이 부족하지 능력이 있는 신정은 신뢰가 부족하고."

“동감합니다. 그리고, 그 밑으로도 그리 눈에 띄는 이는 없습니다."

“잘 보았다. 내 그래서 신씨들이 가지고 있던 권세를 회수하여 내 외손녀 사위에게 줄 것이다."

“외손녀사위라면 전원을 말하는 것입니까? 혈연으로도 이어지고, 그 능력 또한 이미 검증되었으니 그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것이 맞을 것 같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원자를 생산한 수양딸을 맞아들인 것이다. 딸 없이도 다시 국구가 된다고생각하니 재미있구나. 하하하.”

서로의 이익을 위해 수양아버지와 수양딸이 되었지만, 이역만리 타지에 온 타두의 입장에서는 한명회의 그런 제안이 천군만마를 얻는 것과 같다고 여기고 있었다.

특히 분명 먼저 태어난 원자인데, 원자로 인정을 하지 않는 분위기를 타두도 알고 있었기에 한명회의 제안을 두 팔 벌려 받아들였다.

결국, 한명회가 힘을 실어 주자 귀비 타두가 낳은 왕자 ‘이비'가 원자로 인정되었다.

성종은 그런 한명회가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원자 문제로 갈리지려던 조정의 중심을 잡아 준 그의 공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인척이 된 한명회가 국본을 튼튼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

원종은 이 이야기를 동항에서 전해 듣게 되었는데, 원 역사와는 다르게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그 여파를 파악하기 바빴다.

'본래 계비 윤씨의 배에서 나온 아이가 원자가 되고, 세자가 되어 훗날 연산군이라 불리는 이용이 되는 것인데. 일이 이리 꼬이는구나.'

분명 회임도 계비 윤씨가 한 달이나 먼저 했음에도 팔삭둥이로 먼저 원자가 나왔으니 어찌 보면 이것 또한 하늘의 뜻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이 일이 자신에게 이득이 될지 아니면 손해가 될지 알 수가 없었다.

"형님은 어디에 계신지 알아내었느냐?"

"전 목사님은 여진족들과 함께 방목지에 사냥을 가셨다고 하는데, 전령이 아직 찾지를 못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허허허. 평원의 민족들이 하는 가을걷이를 위한 사냥까지 여진족장들과 직접 가버리면 어쩌자는 것인지."

원종은 입으로는 형이 무책임하게 동항을 비우고 여진인들과 사냥을 나갔다고 구시렁거렸지만, 속으로는 그 반대였다.

이런 방식으로 형이 동항을 비웠기에 만귀비의 여진인 동원령도 전달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형의 행동으로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여진인들이 많았으니 큰 공을 세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단주님, 오키나와에서 봉서가 도착하였사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