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 주변의 변화 (2)
“잠시만 멈추시오. 사람이 없어서 강제로 사람을 잡아 온들 그들이 제대로 농사를 짓겠소이까?"
"하면, 그런 사람을 어디서 구하겠다는 것이오?"
"다들 평상시 자신의 부족을 생각해 보시오. 부족의 젊은이들도 다들 말을 치는 것을 원하지 양을 치는 것을 원했소이까?"
"흠, 이왕이면 다들 말을 치고 싶어 하지."
“암, 대평원의 남자라면 말을 치고 제대로 달릴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은 법이지.”
"그것 보시오. 말을 치고 싶어 하는 이에게 말을 맡겨야 하듯이 농사를 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농사를 맡겨야 하는 법이오.”
“그렇게 땅을 파먹고 싶어 하는 자가 있소?"
“이 근방에는 잘 없으니 멀리서 데리고 와야 할 테지요. 그리고 농사를 짓는 이들에게도 얼마 정도의 수확물을 줄 수 있는지를 알려줘야 사람을 모을 수 있을 것이오."
“그럼, 옛 금나라에서는 세금을 얼마 정도 거두었는지 혹시 아시오?"
“옛 금나라에서는 수확물의 7할을 거두었으나, 지금 그렇게 한다면 아무도 여기까지 와서 농사를 지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오. 그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최소 4할 혹은 5할은 되어야 이곳까지 와서 농사를 지을 것이오."
“4할에서 5할이면 절반이나 되는데. 그들에게 주고 남는 것으로 세 부족이 나눈다면 오히려 땅 파먹는 이들보다 못한 거 아닌가?"
천하게 땅을 파는 이들보다 더 적게 받는다고 생각하자 들떠 있던 부족장들의 마음이 식어 버렸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렇게 볼 수 있지만, 달리 보면 수지맞는 장사인 겁니다. 그렇게는 생각이 안 되십니까?"
수지맞는 장사라는 말에 부족장들은 또 마음이 혹했다.
“자, 찰타랍 산을 다른 부족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아예 없는 방목지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 곡식이 생기는 것이니 수지맞는 장사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찰타랍 산을 내가 가지고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이득이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찰타랍 산을 가지기 위해서는 피를 흘려야 하는데, 옛날처럼 부족끼리 싸워서 피를 흘릴 겁니까?"
아무리 야생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 역시 사람이 죽어 나가는 전쟁의 무서움은 잘 알고 있었다.
전쟁으로 흐를 피와 그로 인해 꺼져갈 생명을 아끼고자 이렇게 자리에 모인 것이니 세 부족장은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피를 흘리지 않고 이득을 보기 위해서는 공동경작지로 만들어 수익을 나누는 것이 가장 타당해 보였다.
“우리 여울 부족은 찬성하지. 땅을 파먹는 이들에게 4할을 주고 남는 6할에서 2할씩 나눠 받는다면 동의하겠다."
세 부족 중에서 가장 세가 작다고 평가받는 여울 부족이 동의하자 쿤드레차 부족과 우만칠레 부족도 못 이기는 척 동의를 했다.
피를 흘려 다투기보다는 경작을 맡기고 거기서 나오는 이득을 취하는 게 옳다고 여긴 것이었다.
“피와 죽음을 아껴 이렇게 협의를 이루어 낸 것이 다행이외다."
원길은 마치 준비되어 있었던 것처럼 서류를 꺼내와 조건을 기입하기 시작했다.
“우선 농사란 것이 첫해는 수확량이 거의 없는 것이라 첫해에 거두어들이는 것은 없는 것으로 합니다. 이후, 2년 차부터 수확량의 6할을 거두어 나누는 것으로 합시다.”
“타당하오. 헌데, 궁금한 것이 있소. 첫해에는 수확량이 없는데 그때는 어떻게 버티는 것이오?"
“나와 춘봉 상단이 농사꾼들이 먹을 식량을 대어줄 것입니다."
"으응? 그러면 손해가 아니오? 그대는 뭐가 남는다는 말이오?"
분명 찰타랍 산에서 나오는 수확물의 6할은 여진족이 4할은 농민들이 가지니 원길이나 춘봉 상단이 받아 가는 수익은 없었다.
받는 수익이 없는데, 2년 가까이 식량을 대겠다는 것이 부족장들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손해가 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오랜 기간으로 보면 이익이 생기게 됩니다. 농민들도 먹을 것만 있다고 사는 게 아니고, 옷이나 약도 있어야 제대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아, 수확물을 받아 주고 물건을 파는 데서 수익을 내겠다는 것이군. 헌데, 그것은 지금도 할 수 있는 것 아니오? 손해를 보면서까지 안 해도 될 터인데."
원길은 '그것보다 더 미래를 보는 겁니다.'라고 이야길 해주고 싶었지만, 말을 아꼈다.
이곳 동항에 사람이 늘고 제대로 된 도시가 만들어지면 지금 지출하는 손해는 충분히 회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도시가 만들어지게 되면 여진족 부족장들은 방목지를 찾아 떠날 수밖에 없기에 미리부터 대도시를 만들겠다는 그런 사실을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대신에 다른 이유를 들었다.
“저는 여진족들 간에 다투고 싸우지 않길 원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아."
식량을 대며 손해를 보는 것이 여진족들을 위한 것이라고 하자 부족장들은 할 말을 잃었다.
자신들을 위해 손해를 감수하겠다니 세상 이런 자가 어디 또 있겠는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이후 부족 간의 다툼을 몇 번 중재해 주었습니다.
헌데, 주된 다툼의 이유가 방목지 문제더군요. 그래서 이런 다툼을 없앨 수 있는 방안으로 찾은 것이 바로 이 방법입니다.
공동 경작을 해서 이득을 서로 나눈다면 피 흘리며 다툴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타당하오. 조상들이 물려주신 방목지로 싸우는데, 그런 땅을 공동지로 만들어 이득을 얻는 것이니 싸울 일이 줄어들 것이오."
"그리고, 경작을 하게 되면 그 맺히는 낱일은 곡식이 되지만, 낱일을 맺게 만드는 줄기 대는 동물들의 먹이가 됩니다. 물론, 방목지보다는 못하지만, 말과 양에게 먹일 수 있는 것이 늘게 되니 도움이 될 겁니다. 아, 물론 이것도 비율에 맞춰 나눌 것입니다.”
"목초도 제대로 나누는 것이니 불만이 있을 수 없지."
"그렇게 말과 양에게 먹일 것이 늘어난다면 치즈도 더 많이 생산되게 될 터이니 우리 모두의 이익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주위의 부족들이 조상에게 받은 방목지로 다투게 된다면 이런 방법이 있다고 알려주십시오."
"하하하. 싸움 없이 방목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우리가 알려주지 않아도 소문이 날 거요."
원길은 부족장들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잽싸게 4장의 협정서를 만들었고, 앞으로 이런 문제가 다시 일어나지 않게 부족의 족보와 땅문서도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킁킁 그런데, 저 음식은 언제 다 되는 거요? 냄새가 그럴듯한데."
“아차차 다 되었습니다. 시간이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원길은 급히 냄비의 내용물들이 눌어붙지 않게 휘저으며 쌀이 제대로 익었는지 확인했다.
원종이 천축에서 구해왔다는 카레 가루가 제대로 밥알에 녹아들어 먹음직스러운 노란색을 띠고 있었다.
양고기와 채소들도 카레의 영향으로 노랗게 색이 물들어 식욕을 자극했다.
“그 옛날 삼장법사가 경(經)을 구하러 천축으로 갔다는 것은 아실 겁니다. 이 노란 가루가 바로 그 천축에서 나는 것인데, 카레 가루라고 한답니다."
"오! 천축에서 온 카레 가루! 귀한 것이군."
"이렇게 쌀에 카레를 넣어 끓여 만든 음식을 빠에야(Paella)라고 한다는데, 자 한번 드셔 보십시오."
"파에야? 이름이 특이하군."
"하하하. 사실 저도 정확한 이름은 모릅니다. 동생이 카레 가루를 구해서 줄 때 먹는 방법을 알려주며 써준 것이라 빠에야인지 파에야인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정체불명의 외국 음식이구만. 우선 양고기보다 쌀이란 것이 더 많이 들어가 있는 것은 별로군."
"뭐, 고기보다 곡식이 많긴 하지만, 한번 맛을 보게 되면 왜 저 멀리 천축까지 가서 이 노란 가루를 가져왔는지를 알게 될 겁니다."
원길은 정체불명의 음식을 먹는 것을 꺼림칙해하는 부족장들에게 빠에야를 덜어 주었다.
“우선 숟가락으로 맛을 보십시오."
여진족들이 나름 문명화되었다곤 해도 주로 먹는 것이 고기류였기에 수저를 쓰기 보다는 손으로 먹는 수기가 보통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곡류를 먹는 것 자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방목지 중재를 해준 원길의 체면을 봐서라도 숟가락을 들어 먹어줘야 했다.
가장 세가 작은 여울 부족의 족장 사예나추가 먼저 나섰다.
겨울이 지나 양이 비쩍 말라 있을 때가 아니라면 입에 대지 않았을 곡식을 먹는 것이 마땅치 않았지만, 노란색으로 색이 입혀진 쌀을 입에 퍼 넣었다.
"으응?"
사예나추는 냄비에서 끓을 때 맡아졌던 냄새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그 냄새의 맛이 이런 맛인 것에 놀랐다.
이제까지 혀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처음 느껴보는 맛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릿하게 느껴지면서도 꼬릿꼬릿한 느낌이 드는 맛은 침샘을 자극해서 입안을 침으로 가득 채워 버렸고, 밥은 금세 씹혀 목구멍으로 사라져 버렸다.
먹을 것이 없을 때만 먹었던 곡물의 맛이 이런 맛이었나 기억을 살폈지만, 그가 이제까지 먹었던 곡물들과는 그 궤가 달랐다.
더불어, 천축의 가루에 반응해서 이리 침이 나오는 것이 사예나추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씹을 때마다 느껴지는 특이한 맛은 묘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었고, 입맛을 자극하고 있었다.
마지못해 들었던 숟가락이 이제는 적극적으로 움직여 음식을 입안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런 사예나의 돌변한 모습에 호기심을 가진 다른 두 족장도 숟가락을 움직여 카레 빠에야를 입에 넣었다.
"어엇, 이제까지 먹었던 뭉쳐있어서 먹먹했던 그런 밥이 아니군. 뭔가 잘 씹히는군.”
“맞아, 신기한 맛과 처음 먹어보는 식감의 쌀이라니.”
다른 족장들까지 카레 빠에야의 중독성 있는 맛과 식감에 빠져 버렸다.
“우리 찰타랍 산에서 이 쌀을 키워낼 수 있나? 이제까지 명나라나 조선에서 얻어온 곡식과는 맛이나 식감이 다른데.”
“이 카레 가루란 것의 가격은 비싼가? 이 특이한 맛은 처음 먹어 보는 거야. 천축의 맛이란 게 이건가?"
“하하하. 안타깝게도 이 카레 가루는 천축에서 들여와야 하는 것이고, 이 쌀 또한 저 멀리 대월국 안남이란 지방에서 나는 쌀이라 이곳에서는 재배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상단이 있으니
언제든지 구해서 드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건 다행이군."
“그럼, 여기에 이걸 더 올려 드십시오."
원길은 이제까지 뚜껑이 닫혀 있던 오븐의 뚜껑을 열고 양의 넓적다리뼈와 척추뼈를 꺼내었다.
오븐 속에서 뜨거운 열기로 잘 구워 졌는지 골수에 있던 기름기가 잘 배어 나와 있었다.
원길은 뚜껑을 막고 있던 손도끼로 뼈를 조각내어서는 뼈 중간에서 열기에 구워진 골수를 놋숟가락으로 발라내었다.
원길은 마치 곤약같이 탱탱 거리는 골수 고기를 삼등분하여 부족장들의 빠에야 위에 올려주었다.
빠에야를 만들 때 양고기가 들어가긴 했으나, 카레와 쌀이 들어가고 물이 졸아들며 곡물에 기름이 흡수가 되었기에 기름기가 거의 없는 상태였다.
그런 빠에야 위에 기름에 절인 골수 고기가 올라가 냄새를 풍기자 빠에야의 맛과 향도 달라져 버렸다.
"유... 육향이 어찌 이렇게 달라지는 거지. 이건 마치 양 한 마리의 골수를 다 모은 것 같은 맛과 향기이지 않은가."
야인이라 불리는 여진인들은 몽골인들과 마찬가지로 만주 벌판에서 목축을 하며 살았기에 어릴 때부터 말과 소, 양의 골수를 구워 먹는 것이 흔한 일이었고, 흔한 음식이었다.
헌데, 한 숟갈? 정도밖에 되지 않는 골수가 빠에야 위에 올려져 같이 먹었을 뿐인데, 그 골수의 향이 이제껏 먹었던 빠에야의 맛을 바꿔 버렸다.
중재를 부탁하며 세 부족장들이 양을 가져와 원길에게 주었고, 그 양을 잡은 것이니 뭔가 특별한 양도 아니었다.
헌데 이런 농밀한 골수의 맛이 느껴지니 부족장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골수를 맛있게 하는 방법이 따로 있는 거요?”
"물론입니다."
원길은 늘 먹던 골수임에도 맛이 다르다며 놀라는 부족장들을 보며 아주 기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