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 주변의 변화. (1)
"왜관을 없애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이야기인가?"
성종은 물론이고, 다른 대신들도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지 의아했다.
왜관에 오는 왜인들이 문제를 일으키기는 하였으나, 왜관으로 인해 생기는 이익이 있었기에 그런 작은 문제는 감수할 만했기 때문이었다.
“태조대왕께서는 향화왜인(向化倭人)과 사절의 내왕을 환영하셨으나 왜구들의 분란이 끊이지 않았었습니다. 해서 태종대왕께서는 이종무 장군으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하게 한 이후 부산포와
내이포, 염포를 열어 왜인들이 거래할 수 있는 왜관을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약탈을 하던 왜구들이 직업을 얻어 상행을 할 것이라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실제 왜관이 만들어지고부터는 왜구의 준동이 확연히 줄어들긴 했으니 왜관을 연 것은 성공적인 제도였다.
“하오나, 처음 왜관이 문을 열었을 때는 왜관에 상주하던 인원이 60명에 불과하였으나, 요즘 왜관에는 왜인이 2천 명 넘게 체류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2천 명이나? 그렇게나 많은 이들이 왜관에 있다고?"
“네. 전하. 왜인들이 많을 때는 삼포 합쳐 3천 명이 넘을 때도 있다고 하며, 왜관의 특성상 다들 남자들이다 보니 그들이 나쁜 마음을 먹게 될까 염려가 되어서 그러하옵니다."
실제 동래부사가 거느린 병졸들의 숫자가 천 명이 겨우 넘는 상황인데, 그 수를 넘어가는 왜인들이 삼포에 있다고 하니 걱정이 되긴 하였다.
"흠. 허나, 왜관에서 벌어들이는 이익이 있을 터인데, 그것은 어찌할 것인가? 인원수를 정하여 체류하는 왜인들의 숫자를 줄이는 것이 맞을 것 같구나."
"그렇게 체류 인원을 제한하게 되면 체류하지 못한 왜인들이 다른 곳에서 분란을 일으킬까 염려되옵니다."
"허나, 무조건 없앤다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지 않은가."
"소신이 생각한 방안으로는 조선 땅에서 왜관을 없애는 대신 섬인 대마도에 왜관을 설치하는 것이 어떠하는지요."
"대마도에 왜관을?"
대마도가 조선의 속주로 등록은 되어 있으나 실지로는 왜인들의 땅이었기에 왜인들의 땅에 왜관을 만드는 게 말이 되는가 싶었다.
"정확하게는 왜관이 아니오라 자유무역 상관을 여는 것이옵니다."
"자유무역 상관?"
“네. 조선의 상인이든 왜의 상인이든 누구든지 와서 거래를 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자는 것이옵니다."
원종은 준비해온 서류를 성종에게 몰렸다.
"소신의 부산포 분점에서 올린 자료를 보시면 왜관에서 이루어지는 거래 건수와 거래 금액이 많이 줄었다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흐음. 거래 금액이 몇 년 사이 절반가량 줄어들었군. 어찌 이리 줄어든 것인가?"
성종은 물론이고, 근래 상업에 관심이 많아진 이들은 왜관의 거래가 줄어든 이유가 궁금했다.
"왜관에서 그동안 거래되어온 물건들은 물소의 뿔과 후추, 설탕이었사옵니다. 정향이라던지 유황이라던지 다른 물건도 있사오나, 왜관에서 거래되는 물건은 왜의 땅에서 나는 물건들이 아니었습니다. 말라카를 위시한 저 멀리 남국의 물건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춘봉 상단이 말라카를 다녀오며 남국의 물건들이 더 싸게 들어오다 보니 거래 금액이 줄어든 것이로군.”
“맞사옵니다. 물소의 뿔과 후추, 설탕은 이제 왜에서 구해 오는 것보다 더 저렴하게 구매가 가능하다 보니 왜관의 거래 건수나 금액이 줄어들어 버린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왜관에서 나오는 이익도 더 줄어들겠군. 왜의 거래가 줄어드는데 왜관의 왜인들은 늘어나니 그들이 돈을 벌지 못해 들고 일어날 수도 있겠어. 그대의 염려가 심히 마땅하다."
"그리고, 소신이 부산포에 있을 때 대마도의 도주가 소씨에서 아비루(阿比留) 씨로 바뀌었습니다."
“도주가 바뀌었다고?"
“그렇사옵니다. 본래 대마도의 도주였던 아비루씨족이 소씨를 물리치고 다시 도주가 된 것이옵니다."
외교를 담당하는 예조에서는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난리가 났다.
“이번에 도주가 된 아비루씨는 예전 고려 때부터 왜국의 조정을 섬기기보단 고려의 조정을 섬기길 원했다고 하옵니다. 해서 이렇게 조선의 신하가 되겠다고 서신을 보내왔사옵니다.
현재는 소씨를 물리치고 정리가 되지 못하였으나, 정리가 되는 대로 사절을 보내온다고 하였사옵니다.”
원종이 건네는 서신을 예조에서 받아 확인해 보니 대마도 도주의 인장이 찍혀있었고, 조선에 귀부하고 싶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해서 중요성이 떨어진 왜관을 대마도로 옮기고 그곳에서 왜인들과 조선 상인들이 자유롭게 거래를 하는 무역 상관을 만드는 것이 어떠할까 싶사옵니다."
“조선에 귀부하겠다는 새로운 대마도 도주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골칫거리가 될 수 있는 왜인들을 조선 땅에 들이지 않겠다는 것이군. 전하. 그럴듯한 계획이옵니다."
지원 사격해주는 한명회의 말에 성종도 고개를 끄덕였다.
"왜관 무역의 이익은 대마도에서도 얻어 올 수 있을 것이니 큰 타격은 아닐 것이고, 오히려 부사들의 병사 수보다 많은 왜인들을 내보낼 수 있으니 괜찮은 방안 같구나. 예조에서는 대마도주인
아비루씨에게서 사절이 온다면 왜관을 들고 가 대마도에 설치하는 것을 타진해 보라."
성종의 말이 떨어지자, 눈치를 보던 이들도 나섰다.
대마도는 섬이 작아 식량이 나지 않으니 삼포에 2천 명씩 있는 왜인들이 줄어들 것이라는 말부터,
아비루씨가 친 조선이라면 아예 수군을 대마도에 보내야 한다는 말도 나왔다.
물론, 이렇게 대마도를 끌어안는 방책들은 원종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였다.
자유무역 상관이 들어서게 되면 왜관개시처럼 제한된 교역이 아니라 열린 교역이 되므로 제대로 경쟁과 흥정이 붙을 터였다.
그렇게 자유무역항처럼 된다면 대마도 자체에서 나오는 이익이 상당할 수도 있었다.
***
“큰 아주버님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아니, 중국이 잠잠해질 때까지 내려오라고 했는데, 오지는 않고 웬 편지람. 형이 살 집도 마련해 뒀는데 말이지."
원종은 한양에 있는 동안 이번에 얻은 새집에 살림을 차렸는데, 남대문 앞에 있는 최홍서의 집이었다.
이익금 교환권 사건 이후 최홍서는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유배를 갔는데, 그 유배지가 산수갑산(三水甲山)이라 불리는 함경도 갑산이었다.
현대에는 개마고원이라고 불리는 땅이었는데, 겨울에는 영하 20도가 넘어가는 험지 중의 험지였다.
더구나, 지금 시대는 현대보다 더 추운 소빙하기에 해당하므로, 겨울 평균 온도가 영하 25도는 될 터였다.
그런 땅에 환갑을 바라보는 이가 유배를 갔으니 거기서 죽으라는 소리였다.
그리고, 젊은 권항필은 탄광 노역형이 내려졌는데, 역시나 살아서는 탄광을 벗어나지 못할 터였다.
이런 최홍서와 권함필 덕분에 사대문 안에 기와집이 4채나 생겼고, 한강 변을 따라 선 시전의 점포들도 여럿 챙겼으니 도성에서 춘봉 상단의 영향력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춘봉 상단이 이렇게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것을 큰형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는데, 5개월 넘게 오지도 않은 채 편지를 보내왔으니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 네가 보내준 날아다니는 쌀 덕분에 아주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
원길은 오늘도 원종이 알려준 벽돌 오븐에 불을 피워 온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빠지는 열기를 이용해 냄비를 올리고는 여진족 족장들이 가져온 양고기를 잘게 썰어 올려 구웠다.
나름 어린 양고기였지만 냄새를 잡기 위해 후추와 소금을 넉넉히 뿌려 구웠고, 양파와 당근, 파도 넣어 익힌 다음 생쌀인 안남미와 카레 가루를 넣고는 물을 냄비가 찰랑거릴 정도로 넣었다.
"쿤드레차 족장이 이 뼈들을 좀 갈라 주시겠소?"
쿤드레차 족장은 살을 발라낸 양의 넓적다리뼈와 척추뼈를 늘 들고 다니는 작은 손도끼로 찍어 쪼개었다.
그렇게 쪼개진 뼈는 오븐에 넣고 뚜껑을 닫았는데, 뚜껑이 열리지 않게 쿤드레차 족장의 손도끼를 빌려 빗장을 채웠다.
조리를 빌미로 무기를 받아 치운 것이었다.
“자 이제 시간이 저 요리를 만들어 줄 것입니다. 음식이 되는 시간 동안 방목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 봅시다."
압록강 너머 동항에 세운 상관에서 여진족들이 가져오는 가죽을 매입해주고, 춘봉 상단에서 가져오는 곡식과 직물을 팔아주니 여진족들은 춘봉 상단을 무시하지 못했다.
더구나, 여진족장 무찰라타와의 협업으로 만든 치즈, 버터 작업장으로 많은 이득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자, 서로 작업장에 우유와 양젖, 염소젖을 팔기 위해 줄을 섰고, 자체적으로 만든 치즈와 버터도 들고 올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원길의 영향력이 여진족들 사이에서 커질 수밖에 없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여진족 족장들의 분쟁이 있을 때 그 중재를 맡아주는 존재가 되어있었다.
오늘도 그런 족장 3명이 방목지 문제로 다툼이 생기자 원길에게 중재를 부탁하러 온 것이었다.
헌데, 이 중재라는 것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세분 족장 모두 찰타랍 산은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방목지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한 조상에서 갈라진 것이 아니오?”
“우린 저리 나약한 여울 부족과는 다르다. 한 조상이라는 게 말이 안 된다."
"우리야말로, 저런 쓸데없이 도끼만 들고 다니는 쿤드레차와는 같은 조상에게서 나오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에 갈라졌겠지만, 적통은 가장 가까운 우리 우만칠레족에 있다. 그래서 찰타랍 산은 우리의 땅이다."
여진족들은 족보도 없었고, 장자상속과 막내 상속이 각 부족마다도 달랐기에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갔어도 서너 세대만 지나도 누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세 부족이 다 조상에게 물려받았다고 우기고 자신들의 방목지라고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크게 보면 한 집안 씨족일 것이 분명한데 이런 상황이 되어 버렸으니 원길도 난감했고, 해결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원종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앞으로 이런 일이 더 생기지 않게 한글과 한자로 각 씨족의 족보를 만들어 주고,
각 씨족들이 가지고 있는 땅의 지도와 소유권 증서를 만들어 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이 동항과 인근의 땅은 문경 전씨 일족의 땅이라고 소유권도 만들어 두었다.
"이렇게 서로 우기기만 하니 해결책이 나오지 않소이다. 옛날이었다면 부족 간에 전쟁을 치러 해결하는 방법을 취했을 거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서로가 손해이기에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니겠소?
그러니 내 말을 한번 따라주시겠소?"
“어떤 방법인지 먼저 들어보고 싶다.”
“이 찰타랍 산을 방목지가 아닌 공동경작지로 만듭시다."
"뭐? 우리더러 농사를 하라는 말인가?"
“흥! 아무리 조상들의 기운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땅을 파고 살 정도는 아니오.”
“우리도 마찬가지요. 농사를 할 바에는 옛날 방식으로 전쟁을 치르겠소."
세상이 바뀌어 돌아가는데도, 여진족들은 여전히 말을 타고 날뛰는 야생의 삶을 존귀하다 여기고, 땅에 묶여 땅을 파는 삶을 하찮게 여겼다.
“세 부족에서 농사를 하라는 말이 아니오. 농사는 중국인이나 조선인에게 맡기고, 그 이후 찰타랍 산에서 나오는 농산물에 대한 수익을 나누는 것이 어떻냐는 것이오."
"오호! 오래전 조상들이 금나라를 세워 중원을 장악했을 때 중국인들에게 땅을 경작시키고, 세금을 받았듯이 하자는 말이오?"
“맞소이다. 바로 그런 방식이오."
원길은 구구절절 소작(小作)에 대해 설명하고 개념을 알려주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세 부족장이 옛 금나라처럼 찰타랍 산을 소유하고, 그 산에서 경작하는 중국인이나 조선인을 백성으로 여겨 세금을 받아 내는 것이오. 이러면 서로가 싸우지 않아도 되고, 농사를 직접 하지 않아도 되오."
세 부족장은 양과 말을 먹일 방목지가 경작지가 된다는 것이 불만이긴 했지만,
옛 조상들처럼 땅을 파먹는 이들에게서 세금을 받아 낸다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마치 옛 금나라가 금방이라도 재현되는 것 같았고, 자신들은 그런 왕공이 되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럼 그 농사를 지을 이들은 잡아 오면 되는 것이오?"
여진족장들은 당장이라도 중국이나 조선의 변방으로 달려가 사람을 납치해 올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