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0. 사람을 남기다. >
박치산은 물론이고, 시쭈꾸와 텅신황은 원종의 잔머리에 감탄했다.
도망친 해적들이 알아서 다른 소굴로 안내해 줄 거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로잡은 해적 300여 명과 재물들을 지키기 위해 시쭈꾸는 대만에 남았고, 해적들의 배로 숫자를 늘린 25척의 배가 다시 출항을 했다.
“이 근방 사람들에게는 삼종도(三鐘島)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해적선들 30~40척이 항시 들락거리는데, 특별한 우두머리는 없는 것 같습니다.”
돌격선으로 해적을 쫓아 찾아낸 거점이었다.
종 모양의 섬 3개가 붙어 있는 섬이었는데, 각 섬마다 작은 마을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래서 배들도 한곳에 정박해 있지 않고, 여러 곳으로 나뉘어 정박해 있었다.
“우리 배를 나누어 섬 두 곳의 배들을 포격하면 나머지 섬에서는 배들이 도망치거나 우리에게 올 것인데, 그들은 대만과 텅신황이 맡아주시오.”
성과가 좋았던 수단인 포격 후 도망치는 이들을 잡는 방법을 그대로 다시 쓰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해적들의 반응이 좀 달랐다.
멀리서 우리 배가 오는 것을 본 해적들은 태극 문양의 깃발을 알아보았고, 바로 닻을 올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람을 받고 움직이는 우리가 더 빨랐고, 차대전(次大箭)과 노포(弩砲)의 불화살이 날아들어 돛을 태우자 해적들의 배는 제대로 도망치지 못했다.
노포의 불화살에 돛이 타버린 배들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기에 현자총통에 철환탄과 조란탄을 섞어 쓰기 시작했다.
퍼펑! 콰앙! 와자작!
조란탄이 한번 갑판을 휩쓸자 갑판에 서 있는 이들이 한 명도 없었다.
상체에 구멍이 나며 몸이 박살 나 죽은 이들을 보자 남은 해적들은 무기를 버리고 옷을 벗어 던지곤 바닥에 엎드려 항복하기 시작했다.
10여 척의 배를 불태워 가라앉혔고, 10여 척을 나포했다.
대만과 텅신황도 6척의 배를 나포했는데, 도망친 배들은 사방으로 줄행랑을 쳐서 쫓을 수가 없었다.
이 삼종도도 마찬가지로 가져올 수 있는 재물은 모두 다 챙겼고, 섬에 있는 마을에는 불을 질러 정리를 했다.
해적 포로 200여 명과 배 16척을 챙겨 가오슝만으로 돌아왔다.
“하하하! 내 속이 이렇게 개운한 적은 처음이오! 이리 화끈한 해적 소탕이라니!”
2번의 소탕 작전으로 500명이 넘는 해적 포로들과 26척의 배, 그 배를 가득 채울 만큼 많은 양의 향신료와 비단 등을 챙겼기에 텅신황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삼등분으로 재물을 나누는데, 워낙에 전과가 컸기에 분위기가 화목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포로 300명과 배 10척을 가지기로 했고, 대만과 텅신황은 각각 100명의 포로와 배 8척씩을 가지기로 했다.
“당분간은 이 근방이 조용할 터이지만, 토벌당한 해적들이 힘을 모아 대만으로 쳐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시쭈꾸님은 그걸 조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실제, 대항해 시대 카리브해와 남미에서는 해적들이 총독령을 점령해서 약탈하는 경우도 있었기에 대만도 조심해야 했다.
“산악 민족도 있지만, 만으로 들어올 때부터 북을 쳐서 알리기에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걱정을 하시니 이번에 얻은 재물로 군사를 늘리도록 하지요.”
“현명하십니다.”
“저기...단주. 배에 설치된 화포를 구할 수는 없겠소?”
텅신황은 자신이 가지게 될 포로와 배의 절반을 내놓는 조건으로 화포 2문을 줄 수 없냐고 물었는데, 원종은 생각도 하지 않고 단번에 거부를 했다.
“아마도, 명나라의 민간인은 법적으로 화포나 화약을 가지거나 쓸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화포를 준다고 해도 문제가 생길 것이니 단념하시지요.”
민란을 우려한 명나라는 법으로 화포의 민간 소유 자체를 불법화했기에 텅신황은 실망을 했다.
“그럼, 내가 조선인이 되는 것은 어떻겠소? 중원에서 도래한 성씨의 조선인이 많다고 하던데, 나도 덩씨로 조선인이 되겠소이다.”
“그래도 안 될 겁니다. 우리가 화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 선원들이 모두 다 수군 출신이기에 가능한 것이고, 제가 조정의 녹을 받는 자이기에 화포를 배에 설치할 수 있는 겁니다. 화포는 조선이든 명이든 민간인이 소유할 수 없습니다.”
“끄응. 아쉽구만. 그 화포만 배에 달 수 있으면 해적 놈들을 벗겨 먹는 것이 아주 쉬울 것 같은데. 아깝도다.”
텅신황은 정크선의 크기가 대운선의 크기와 비슷했기에 정크선에 화포만 설치할 수 있으면 이번 토벌처럼 해적들을 쉽게 토벌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국법이 막고 있다면 그 국법을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을 친구로 두십시오. 그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조언입니다.”
“국법을 바꿀 수 있는 친구? 북경의 고관들에게 허락을 구하라는 것이군. 흐음.”
텅신황은 이번에 보았던 화포의 엄청난 위력에 반하였기에 어떻게든 북경으로 가서 화포의 소유 허락을 받고 싶었다.
그러곤, 남중국해에서 올라온 해적들뿐만 아니라 왜에서 온 해적이나 자국 출신 해적들을 토벌해서 일확천금을 얻고 싶었다.
이런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텅신황이 있는 것처럼 그 반대를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바로 남중국해에서 올라와 해적질을 하던 해적들이었다.
남중국해 출신 해적들이 주로 모이는 기착지 두 곳이 공격당했고, 수백 명의 해적들이 포로로 끌려가자 자신들이 있는 본거지로도 조선 상단의 배들이 들이닥치진 않을까 두려움에 떨었다.
그래서 예상보다 더 빨리 해적들이 남쪽으로 사라져 버렸고, 해적 토벌도 끝이 나버렸다.
해적들을 털고 얻은 향신료와 포목은 텅신황에게 판매를 했고, 그 돈으로 중국 남부에서 식량을 구매했다.
물론, 오키나와의 상인 케하루도 우리에게 포목류를 저렴하게 구매했고, 사츠마의 상인 히로타도 저렴하게 물건을 매입했다.
노예의 절반은 대만의 시쭈꾸에게 팔아 대만의 경작지 개척에 투입을 했는데, 그 노예들로 돌을 캐내어 승전비를 세우게 했다.
텅신황이 해적 토벌의 승전을 너무도 좋아했기에 승전비를 꼭 세우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올해는 안 되겠지만, 내년에도 이맘때 꼭 대만으로 오겠으니 그때도 손발을 맞추어 같이 해적을 퇴치합시다.”
“그렇게 하지요. 그럼 내년 4월 15일 대만으로 모이도록 합시다.”
“좋소이다. 그럼 내년에는 최대한 세를 불려 오겠소이다. 하하하.”
내년을 기약하며 텅신황이 먼저 떠나고, 우리도 오키나와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오키나와 상인인 케하루를 따로 불렀다.
“그래. 케하루 자네는 어찌할 것인가?”
“네? 그게 무슨 말이온지...”
사실 케하루는 어찌할 것이냐는 물음을 듣자 떠오르는 게 하나 있긴 했다.
오키나와를 출발할 때 자신의 외가 어르신인 김수에게 들은 게 있었다.
상단주인 원종이 고려의 왕족이니 대할 때 늘 예를 지키도록 하라는 말이었다.
그런 왕족이 어찌할 것인지를 물어오는 것이라면 밑으로 들어올 것인지 아닌지를 묻는 것이라 판단했다.
“소인에게도 약간이나마 고려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원종 님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눈치가 빨라서 좋군. 네게 이번에 얻은 배 여섯 척을 줄까 하는데, 오키나와는 물론, 규슈 남부에서 대만 섬을 지나 중국 남부까지 이르는 상행로를 네가 맡을 수 있겠느냐?”
“여, 여섯 척을 제게 주신다는 말입니까? 마...맡겨만 주십시오!”
원종은 본래 오키나와까지 오는 상행로를 삼식이에게 맡길까 했었는데, 삼별초 후예들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로 계획을 수정했다.
단순히 후추와 사탕수수 경작지로 오키나와를 써먹기보다는 대만과 중국 남부를 아우르는 개별 상권으로 만들고 자립할 수 있는 힘을 주기로 한 것이었다.
중국의 화교처럼 해외 한민족을 키우기 위한 준비였다.
외국에 뿌리내린 한민족의 중흥을 위해서는 내가 직접 와서 뿌려주는 것 외에도 자립적으로 만들어 내는 힘과 자본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케하루의 상단을 만들어 자체적으로 영향력을 키울 수 있게 해주려는 것이었다.
노예까지 100명을 받게 된 케하루는 이후로 삼식이와 함께 다니며 춘봉 상단에 대해 배우게 되었고, 가로쓰기 한글과 조선말을 특별강습으로 배우게 됐다.
그리고, 이런 케하루의 변화에 사츠마 번의 상인 히로타는 왠지 모를 소외감을 느꼈다.
배에서 쏘는 화포라는 것의 대단함을 알았기에 그런 대단한 세력에 케하루가 들어가게 된 것이 부러웠다.
그리고, 케하루처럼 중국 남부에서 나는 물건과 대만에 모이는 남쪽 이국의 물건들을 매입해서 규슈 남부에 팔아 이득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번주를 위해 어떻게든 금을 모아 받쳐야 하는 것이 자신의 형편이었다.
케하루와 자신의 처지가 비교가 되자 왠지 모르게 화가 났다.
물론, 이런 부분은 번주가 빌린 금을 지불하기만 하면 끝이 나는 고비이긴 했다.
하지만, 케하루의 대우를 보며 느끼는 박탈감이 너무나 컸다.
자신은 대를 이어 사츠마 번의 번주에게 충성을 하고 있음에도 언제나 번주에게 받는 대우는 무사들 다음이었다.
자신이 벌어들인 돈이 있어야 번주의 가신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인데도, 그런 돈을 벌어 오는 상인들을 번주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에 반해 원종은 상인과 무사를 같이 대우해 주었고, 교역을 중히 여기는 모습이 히로타에게 크게 다가왔다.
결심을 굳힌 히로타는 오키나와로 출항하는 전날 원종을 찾았다.
“오키나와와 규슈를 거쳐 조선으로 가시는 길에 소생도 따라가도 되겠습니까?”
“따라오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왜인들은 조선으로 오더라도 마음대로 거래를 하지 못할 터인데. 왜관에서만 거래를 할 수 있을 것이네.”
“원종 님의 사람이 된다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응? 내 밑으로 들어오겠다는 것인가? 그대는 사츠마 번의 사람이지 않은가? 주군을 배신하겠다는 건가?”
“배신이라기보다는...더 큰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싶습니다.”
“하하하. 상인이 큰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곤 하지만, 이건 너무 뜬금없군.”
원종은 돌아가는 길에 규슈의 곡창지대인 ‘사가’나 ‘구마모토’에서 식량을 조달하는 일을 맡아줄 현지인을 구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조선인이 아닌 왜인이라면 그 특유의 폐쇄성과 신뢰성 문제가 있기에 될 수 있으면 조선에서 넘어간 사람을 찾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인은 큰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고 하는 히로타를 보니 왠지 모르게, 기존의 왜인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익에 충성한다는 마인드가 왠지 현대인의 마인드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츠마 번의 번주를 위해 일하며 얻는 이익보다 내 밑에서 일하는 것이 더 큰 이익을 줄 것 같은가?”
“네. 사츠마 번은 그 한계가 명확합니다. 하지만, 원종 님에게는 그 한계가 보이지 않습니다.”
우선 사츠마 번은 가문 내 가독 상속 문제로 심심하면 분쟁이 났고, 내부가 곯아 있으니 밖으로 뻗어 나가기도 힘이 들었다.
그에 비해 원종 측은 그런 내부적 문제가 없으며 밖으로 뻗쳐 갈 수 있는 확장성이 무궁무진해 보였다.
좁은 남 규슈의 크기에 비하자면 오키나와와 대만섬, 남중국에 이르는 상행로의 길이가 월등하게 길었으며, 상단의 본거지인 조선까지 생각한다면 사츠마 번과 비교하기가 미안할 지경이었다.
“자네의 마음은 잘 알겠네. 하지만, 자네를 영입한다고 해도 내게는 이득이 없네. 조선에서 규슈, 오키나와를 거쳐 대만으로 이어지는 상행길은 케하루에게 맡기기로 했네. 자네를 내 밑에 둔다면 그 상행길이 겹치게 되네.”
원종에게 히로타가 효용성은 있었으나 이미 같은 일을 할 케하루가 있었기에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원종이 미지근한 분위기로 자신을 거부하자 히로타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필요가 없다고 여기서 내쳐질 수는 없었다.
그 필요성을 자신이 만들어 내야 했다.
“소생은 조선과 세토내해(瀬戸内海)를 이어주는 상행길을 개척하겠습니다.”
세토내해란 규슈와 왜의 본토인 혼슈, 그 사이의 시코쿠섬이 있는 좁은 바다를 말하는데, 조선 통신사가 부산을 출발해 교토로 향하는 길이었다.
즉, 히로타의 말은 조선에서 뱃길로 오사카까지 가서 왜의 왕실이 있는 교토까지의 상행로를 맡고 싶다는 말이었다.
왜의 근해 무역을 잡고 싶다는 말을 듣고 보니 나쁘지 않았다.
세토내해는 진짜 왜구들이 어마어마하게 설치는 곳이었는데, 그런 곳을 개척하겠다고 하니 그 자신감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히로타가 있으면 세토내해를 거치지 않고, 대마도에서 북규슈를 거쳐 동해와 인접한 북쪽 바닷길로 움직여 교토로 가는 상행로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좋다. 히로타 네게 이번에 얻은 배 네 척과 포로들을 주겠다. 조선에서 교토로 가는 상행로를 개척하는 일을 맡기겠다. 중국 남부와 이국의 향신료는 케하루가 가져다줄 것이니 그것으로 수익을 만들어 보아라!”
“감사합니다.”
“네가 제대로 일을 해낸다면 우리 상단의 5대 선단 행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히로타의 영입이 확정되자, 원종은 5대 선단 행수라고 말부터 뱉은 행수들의 상행로 구획을 정리했다.
◆염호진의 선단 – 중국을 거쳐 말라카를 오가는 대양선단.
◆케하루의 선단 – 규슈 남부, 오키나와, 대만, 남중국을 오가는 선단.
◆히로타의 선단 – 규슈 북부에서 교토까지의 항로를 만드는 개척 선단.
◆희재의 선단 – 중국 북방과 조선 근해. 대마도를 아우르는 선단.
◆삼식이의 선단 – 직계 선단으로 조선 근해와 발해방 사람들을 돕기 위한 북방 항로 선단.
삼식이의 선단은 직계 선단으로 언제든 쓸 수 있어야 했기에 교역 일보다는 선원들의 훈련과 탐험에 특화된 전투선단이라고 봐야 했다.
“히로타 자네는 먼저 조선인이 되어야 하네. 조선식 상투를 틀고 옷을 바꿔입게. 그리고, 가족들 전체가 움직인다면 한양이나 벽란도 혹은 부산포에 집을 마련해 주지.”
“감사합니다. 가족 전체가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완전한 조선인이 될 수 있게 성씨를 내려 주십시오.”
“성씨라...”
원종은 고민하다 고구려와 백제의 성씨인 고(高)씨를 선택했다.
“네게 고씨를 내리겠다. 예전 왜국에 도래하여 문물을 전해주었던 백제씨의 염원을 담은 성씨다.”
“고 히로타! 백제씨의 염원을 이름에 담아 항로를 개척하겠습니다.”
***
“그런데, 이 휘어진 모양의 칼들은 해적들이 쓰던 칼들인데, 무엇 때문에 챙긴 것입니까?”
“오키나와의 초의 후예들에게 주기 위한 것이네. 칼을 다시 녹여 괴를 만들기에는 벼려둔 날이 아까웠거든. 그래서 초의 후예들에게 주려는 것이네.”
원종은 단순하게 삼별초의 후예들에게 남는 칼을 준다고 한 것인데, 사탕수수밭에 자라는 잡초를 쳐내고, 훗날 수확할 때 이 칼로 베어내라고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배일욱과 김수는 다르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