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9. 소탕작전. >
“이게 무슨 소란이냐!”
쁘이근동은 밖에서 들리는 혼란한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배...배들이 불에 타고 있다고 합니다!”
“뭐!? 그럼 어서 가서 불을 꺼라! 슈동빈은 어디에 있는가?”
이때만 해도 쁘이근동은 단순한 화재라고 생각을 했었기에 슈동빈을 불러 부주의를 따져 물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불을 끄러 나간 이들이 다시 뛰어 들어오며 명나라 관군이 쳐들어왔다고 하자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이럴 수가...”
쁘이근동의 눈에 들어온 정박지는 이미 불바다가 되어 있었고, 쾅쾅거리며 쏘아져 오는 화포 소리에 정신이 나갈 정도였다.
불에 타지 않은 배를 찾아 어서 빨리 여기에서 도망치는 것이 유일한 살길로 보였다.
쁘이근동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겨우 배를 찾아 오르고 출발하려는데, 슈동빈이 그런 그를 찾아왔다.
“대형! 이렇게 도망치면 어쩌려고 그러오?”
“어쩌긴 살아야 할 것 아니냐? 이 배도 불타면 결국 사로잡혀 죽을 수밖에 없다.”
“산다고 끝이오? 맨몸으로 살아서 뭐 하려고 그러오? 동굴에 쌓인 재물은 어찌할 거요? 다 버리고 갈 거요?”
목숨이 제일 중요하다고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던 쁘이근동의 머리에 재물이 생각나자 혼란하던 머릿속이 금세 정리가 되었다.
근 몇 개월 동안 모아온 재산이 있어야 다시 사람을 모으고 해적질을 해먹을 수 있을 터였다.
“모두 배에서 내려라! 동굴 속에서 짐을 들고 나온다!”
칼을 뽑아 든 쁘이근동의 말에 여럿이 배에서 내려 동굴을 향해 움직였다.
하지만, 그들이 배에서 멀어지자 눈치를 보던 해적들이 배로 뛰어올랐고, 더는 기다리지 않고 바로 출발을 해버렸다.
“저...저저 개 같은 놈들이!”
“대형! 그게 문제가 아니오. 저길 보시오. 배에 걸린 깃발이 다르오! 명나라 수군이 아니오.”
쁘이근동은 슈동빈의 말에 화포를 쏘는 배들을 살폈다.
“정말이구나. 명나라 배가 아니야. 태극 문양? 그럼 저건 어디의 깃발인 것이냐?”
해적들이 이리저리 이야길 하다 태극 문양의 깃발을 아는 자가 나왔다.
“조선이란 나라의 춘봉 상단 깃발입니다! 우리가 공격해서 재미를 본 적이 없는 곳입니다.”
“뭐? 우리와 척진 적이 없는 곳이라고? 그런데 왜 공격을 하는 건데, 아니 공격을 떠나 어떻게 저놈들이 화포를 저렇게 쏘는 거냐고?”
쁘이근동은 어이가 없었다.
화포는 명나라의 정예 수군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고, 자신이 있던 여송국(呂宋國 필리핀 루손섬)에서는 화약이 귀해 화포가 있어도 쏘지를 못하는 물건이었다.
그런 화포를 수십 번이나 쏘고 있으니 이건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대형. 헌데, 이상한 거 같지 않소? 뭍으로 올라오는 이들이 없소. 바다에서 화포만 쏘고 있소.”
“그렇구나. 오! 그래. 이건 뭍으로 올라올 병사들이 없다는 것이다. 정규군이 아니라 상단이니 당연하지.”
슈동빈은 물론이고, 옆에 있던 다른 이들도 쁘이근동의 말에 동의했다.
뭍으로 올릴 병사가 없기에 귀한 화약을 써가며 화포를 쏘는 것이라 여겼다.
“명나라의 수군도 아니고, 뭍으로 올라올 병사도 없다면, 아무리 화포가 있다고 해도 우리가 이길 수 있다. 소선을 모으고, 사람을 모아라! 배에 올라타 화포를 뺏고, 배도 빼앗는다!”
쁘이근동의 확신에 찬 말에 도망칠 배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던 해적들이 안정을 찾으며 모여들었다.
그러곤 5~6명이 타는 작은 소선 여러 척에 20여 명씩 올라타, 화포를 쏘고 있는 배로 향했다.
칼을 흔들고 창을 내지르며 배로 달려드는 모습에 다른 이들도 용기를 얻어 물에 뛰어들었고, 도망칠 배를 구하지 못한 해적들도 죽기 살기로 춘봉 상단의 배로 몰려들었다.
“보아라! 화포 소리가 멈추었지 않으냐! 우리가 몰려들자 화포를 쏘는 놈들이 놀란 것이다! 어서 노를 저어라! 갑판에 가장 먼저 올라가는 놈에게는 은자 10냥을 주겠다!”
정박해 있던 배들이 모두 불타 화포 사격을 멈춘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이 틈새의 시간에 소선들이 몰려들자 원종은 깜짝 놀랐다.
해적들이 도망치지 않고 이렇게 달려들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금세 상황을 파악하곤 명을 내렸다.
명을 받는 호위대와 선원들도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남규슈에서 이런 일을 겪어 보았기에 당황할 일이 없었다.
“현자총통으로 조란환(鳥卵丸)을 쏠 수 있게 화약을 바꾸어라! 방패수는 곤을 들어라! 창병과 함께 올라오는 놈들을 막고, 다른 이들은 투사 무기가 준비되면 바로 대응하라!”
퍼펑! 퍼엉!
박치산의 빠른 대응에 엄지손톱만 한 조란환 수십 발이 쏘아졌고, 갈고리를 걸어 올라오려는 이들에게는 승선 총통에서 산탄이 쏘아졌다.
타당! 타-앙!
“아악!” “내 눈!”
분명 화포 소리는 아닌데, 작게 터지는 소리가 나면 갈고리에 매달려 있던 이들과 대기하던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꼬부라졌다.
꼬부라진 이들이 죽는 것은 아닌데, 몸에 두세 곳의 구멍이 나며 피가 솟구치자 용기백배하던 이들도 기세가 꺾일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배 위에서는 갑판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막는 창병과 곤을 든 병사들이 빽빽하게 서 있었으니 해적들은 일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길, 허허실실(虛虛實實)에 당했구나. 놈들은 우리가 도망치지 않고, 달려들도록 함정을 파두고 있었던 거야! 더러운 놈들!’
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배 위로 올라갈 것인지 아니면 물러설 것인지를 쁘이근동은 선택해야 했다.
“대형. 물러나야 합니다! 놈들의 준비가 너무 좋습니다. 동굴에서 버티며 시간을 끌어야 합니다.”
쁘이근동은 슈동빈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제길. 물러난다! 놈들의 기만술에 당했다. 동굴 입구에서 분전하며 화포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놈들을 기다려 조진다! 이번엔 우리가 함정을 파자!”
쁘이근동은 슈동빈의 말마따나 배를 탈취하는 것이 어렵다면 동굴에서 버티며 협상을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 같았다.
“우리가 동굴에서 시간을 끌게 되면 도망친 이들이 다른 해적들을 데리고 올 것입니다. 그때는 이 조선 놈들이 뒤통수를 맞게 될 겁니다.”
슈동빈의 말처럼 다른 해적들의 원군을 기다리든지 아니면 버티며 협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은 머리가 있는 슈동빈이 알아서 잘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헉.”
하지만, 같이 도망치던 슈동빈이 피를 토하며 앞으로 꼬부라졌다.
꼬부라진 슈동빈의 등엔 화살이 깊게 꽂혀있었다.
“제길...제길...”
쁘이근동은 얼마 남지 않은 병력을 데리고 동굴로 들어갔고, 평시 슈동빈이 준비해 두었던 장애물을 동굴의 입구에 치며 항전의 의지를 다잡았다.
“100여 명 정도 되는 이들은 동굴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어찌할까요?”
“상륙해서 잡아야지. 당나귀에게 현자총통을 짊어지게 해서 2문을 들고 가도록 하지.”
원종의 명이 떨어지자 배가 섬에 닿았고, 줄을 지어 방패수들과 창병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미 여러 번의 연습과 훈련을 받았기에 오와 열을 맞춰 병사들이 바닷가에 늘어섰다.
이런 정예병의 모습에 지레 겁을 먹은 이들이 투항을 해왔고 정보를 털어내었다.
“쁘이근동은 동굴 속에 함정을 만들어 두고 있습니다. 아마 시간을 끌기 위해 동굴에서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얼마나 큰 동굴이기에 사람들이 들어가서 버티는지가 궁금했다.
투항한 이들을 따라가 보니, 동굴의 입구가 예닐곱 사람이 함께 들어갈 정도로 컸다.
투항한 이들의 말을 들어보니 동굴 안에 마실 물도 있고, 식량이나 무기도 비축이 되어 있다고 했다.
“연기를 불어 넣어 투항하게 하는 방법이 가장 좋지만, 이야길 들어보니 다른 작은 구멍이 여러 개가 있어 연기가 빠져나간다고 합니다.”
“그래도 정공법으로 가지. 동굴 안으로 불붙은 젖은 나무를 넣어 연기가 들이차게 만들고, 연기가 빠져나가는 곳을 막아나가자고.”
“넵. 시행하겠습니다.”
박치산은 궁수들과 조란환을 채운 현자총통을 동굴 입구에 배치하고는 젖어 연기가 나는 불붙은 나무들을 던져 넣기 시작했다.
***
텅신황과 대만의 배들은 도망치던 10여 척의 배를 나포하여 섬으로 왔다.
“두 척을 놓쳤습니다. 그들이 다른 해적들을 이끌고 올까요?”
“동굴에서 항전하는 이들은 소식을 듣고 해적들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겠지. 하지만, 화포를 쏘고 20여 척이 넘는 배가 동원된 우리를 해적들은 공격하지 않을 것 같군.”
원종은 확정하듯이 이야길 했는데, 해적들의 습성을 잘 알고 있기에 내린 판단이었다.
화포가 없는 상황에서도 20척의 배와 싸워 이기려면 해적들도 못해도 25척은 동원해야 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화포가 있다는 소릴 듣는다면 그 정도의 세력이 있어도 움직이지 않을 터였다.
어쩌면 경쟁자가 없어졌다고 오히려 좋아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섬을 계속 돌며 경계하는 배를 3척 띄우게나. 나머지는 챙길 수 있는 것을 챙기게.”
춘봉 상단과 대만, 텅신황 각자가 한 척의 배를 내어 섬을 계속 돌며 경계하게 만들고는 섬 안에 있던 모든 것을 챙기기 시작했다.
“해적질로 모은 재물의 대부분은 모두 다 동굴 안에 있다고 하는데, 어찌하시겠습니까? 연기가 빠져나가는 구멍은 두 곳을 찾아 막았으나 산이 험해 더 찾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해. 내일 아침까지 불을 피워 연기를 넣고, 쁘이근동의 목을 잘라 나오는 자들은 배 한 척 분량의 재물을 주고 떠나게 해주겠다고 크게 외치게.”
“내분을 일으키겠다는 것이군요. 즉시 시행하겠사옵니다.”
***
“대형! 놈들이 동굴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연기가 빠져나가는 곳 중에서 가장 큰 두 곳이 막혔습니다. 콜럭 콜럭.”
“써글.”
쁘이근동은 슈동빈의 말을 듣고 동굴로 들어왔지만, 협상을 하고 꾀를 내어야 하는 슈동빈이 죽고 없자, 그저 버티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매운 연기에 다들 고통스러워하다 잠을 자는 중에 영원히 잠들어 버리는 이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대형. 더는 목이 매워 못 참겠소. 이러다 다 죽소. 내게 병력을 주시오. 죽기로 뚫어 보겠소.”
동굴에 설치된 함정의 이점을 써볼 새도 없이 뛰쳐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쁘이근동은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대형이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운 정예들을 모아 돌파를 시도했다.
“철질려(鐵蒺藜 마름쇠)를 밟고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동굴 입구가 연기로 가득 차자 박치산은 철질려 수십 개를 동굴 입구에 뿌려두었었다.
“궁수들은 보이면 바로 화살을 날려라! 포수들도 바로 준비하라!”
박치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기를 뚫고 나오는 이들이 있었다.
궁수들의 화살이 쏘아졌으나 해적들은 화살을 막기 위해 방패를 들고 있었기에 크게 상하는 이가 없었다.
퍼펑! 퍼엉!
하지만, 조란환을 장전한 현자총통 2문이 불을 뿜자 나무 방패가 뚫리며 방패를 든 선두가 무너져 내렸다.
궁수들이 그 사이로 화살을 날리자 순식간에 예봉이 무너졌다.
크아악! 아악!
연이어 창병들도 창을 들어 밀어붙이자 연기를 피해 밖으로 나오려던 해적들은 다시 안쪽으로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다.
“제길, 제길! 화포를 동굴 앞에 설치하다니 미친놈들.”
쁘이근동이 분노에 몸을 떠는데, 동굴 밖에서 말이 들려왔다.
“쁘이근동의 목을 잘라 나오는 자는 배 한 척 분량의 재물을 들고 갈 수 있게 해주겠다! 그렇지 않고, 쁘이근동과 같이 항전한다면 모두가 죽을 것이다!”
크게 들리는 소리에 화를 내려다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이들의 눈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입을 닫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을 따르면서 오랫동안 칼 밥을 함께 먹었던 이들이 몇 보이지 않았다.
소선을 타고 공격할 때 사람을 잃었고, 동굴로 들어올 때, 그리고 방금 돌파를 하며 자신과 가까웠던 이들이 대부분 죽어 버렸다.
그렇게 부하들의 눈치를 보던 쁘이근동의 목은 다음 날 아침 누구인지도 모를 이에게 잘려져 동굴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
“수괴인 쁘이근동의 목이 맞는다고 합니다. 저들은 어찌합니까? 진짜 배 한 척 분량의 재물을 줘서 보내 줍니까?”
시쭈꾸는 물론이고, 텅신황도 목적을 달성했으니 저들을 다 죽이자는 눈빛을 보내었다.
동굴에 쌓여있던 재물을 끄집어내었는데 거기에 남중국과 다른 나라의 여자들도 잡혀있었다.
상자에 갇혀서 상품처럼 취급되는 여인들의 모습에 눈이 돌아 버린 자도 있었다.
그런 이들이 나서서 약속을 무시하고 모두 죽이자고 했다.
하지만 원종은 사로잡은 300여 명에 가까운 해적 포로들을 훗날 써먹기 위해서라도 약속은 지킨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약속대로 배 한 척 분량의 재물을 주고 보내 주도록 합시다.”
30여 명의 해적들을 곱게 보내 준다는 말에 반발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약속을 했기에 지킨다는 것을 강조하며 보내 주었다.
***
“풀어준 놈들은 소선을 붙여서 쫓고 있나?”
“네. 돌격선을 한 척 붙여 쫓고 있습니다.”
“친절하게 다른 놈들에게 안내를 해주니 따라가서 털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