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8. 종속. (2) >
“그럼 4월 이후로는 해적의 위협 없이 지나갈 수 있다는 말인가?”
“네. 보통 4월 중순부터 바람 방향이 바뀌게 되어 저 아래 남쪽에서 올라왔던 해적들이 돌아가게 됩니다. 대월과 그 인근에서 올라왔던 어부 출신 해적들이 돌아가는 것이지요.”
“전업이 아닌 부업으로 하던 해적들이 줄어 든다는 이야기로군.”
“네. 남중국해의 어부들이 우기가 되어 고기를 잡지 못하자 올라와 해적이 되는 것인데, 이제 고기를 다시 잡을 수 있으니 돌아가는 것이지요.”
“그런 이들이 돌아가게 되면 수월하게 움직일 수는 있겠군.”
해적질도 계절풍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 신기했고, 왜구와 중국인 해적, 동남아 해적 중에서 1/3이 없어지는 것이라 이런 시기를 잘 알아야 할 것 같았다.
나지쭈와 이야기 하고 있는데, 삼식이가 곤란하다는 듯이 왔다.
“단주님을 뵙고 싶다는 상인들이 있는데 만나 보시겠습니까?”
“무슨 일로 보자고 하는 거지? 거래 건이라면 삼식 행수가 알아서 하면 되지 않나?”
“그것이 거래 건이 아니라, 해적에 대한 이야기라고 합니다.”
“해적?”
“네. 우리 대운선의 화포를 보더니 해적 퇴치를 같이 하자고 합니다. 이야길 해보시겠습니까?”
“흠. 일단 이야기나 들어보지.”
삼식이는 4명의 상인들과 함께 왔는데, 의복을 보니 중국인들이었다.
“텅신황이라고 하오. 양주(揚州)의 상인이외다. 조선에서는 수군을 상선의 선원으로 태운다는 소릴 듣고는 믿지 않았는데, 화포를 보고는 믿을 수밖에 없었소이다. 해서, 남쪽으로 돌아가는 해적들을 함께 쳤으면 하는데, 어찌 생각하시오?”
“빼앗긴 화물이나 배를 찾는 게 아니라, 돌아가는 해적들의 뒤를 치자는 말이오?”
“그렇소이다. 해적들이 약탈한 물건을 가득 들고 내려 간다고 하는데, 그때 놈들을 쳤으면 하오.”
동남아의 해적들을 대상으로 해적질 하자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상인과 해적의 차이가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원종도 사략함대(私掠艦隊)를 도입할 생각은 있었지만, 훗날 유럽인들이 아시아로 오면 그때나 시작하려고 했었다.
헌데, 그런 유럽의 사략선 개념과는 다른, 약탈을 위한 해적선 토벌을 하자고 상인들이 먼저 나서니 원종도 생각을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유럽인들이 오고 나서야 하려던 사략 면장 제도의 도입 시기를 앞당겨서 실시해야 할 것 같았다.
더구나, 이 사략 면장 제도를 시작하는 곳이 조선이 아니라 대만이라는 것도 본래 계획과는 다른 점이었다.
본래 유럽의 사략선 제도인 사략면장(Letter of Marque)은 보통 2가지의 면장으로 나뉘게 되는데.
첫 번째는 일반 허가장으로 1200년대 유럽 국가끼리의 전쟁 중에 만들어진 허가장이었다.
국가 간의 전쟁 시 적국의 배를 공격하거나 약탈하는 것을 무제한으로 허락하는 허가장이었다.
전시에 민간인들의 배를 해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 증서가 쓰인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특별허가장으로 전시가 아닌, 평시에 해적에게 피해를 당한 상인이나 민간인이 신청하면 발급해 주는 증서가 있었다.
타국의 해적선에게 피해를 본 이들이 자기가 피해 입은 만큼 그 타국의 배를 공격하여 피해 당한 만큼 수익을 얻는 것을 허락하는 증서였다.
한마디로 한정이 있는 허가장이었다.
당연히 두 종류의 허가장 중에서 많이 발급 된 것은 첫 번째인 무제한 약탈 증서였다.
하지만, 이런 무제한 약탈 사략 증서를 대만에서 발급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바로 대만의 적국이 없다는 것이었다.
유럽에서는 여러 나라가 영토분쟁과 왕권계승의 분쟁으로 얽혀 있었기에 이 사략 면장이 아주 좋은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만은 그렇지 않았다.
주위에 있는 나라라고 해봤자 중국과 조선, 일본 밖에 없었고, 그런 나라들과는 분쟁이나 전쟁이 있을 수 없었다.
그 외 오키나와나 동남아시아의 소국들이 있겠지만, 그 소국 소속의 상인들은 정말 눈을 씻고 찾아봐야 있을 판이었고, 해적들은 국적을 논할 방법이 없었다.
거기에 더해서, 사략 면장의 본래 기능인 전시에 민간인의 배를 해군으로 끌어들인다는 목적도 이룰수가 없었다.
대만 소속의 상인이나 배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유럽식의 사략 면장을 변형해서 대만 만의 사략 제도를 만들어야 했다.
이 부분은 나 혼자서 결정할 수 없었기에 중국 상인들에게는 내일 확답을 주겠다고 우선 돌려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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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깐 단주님의 말은 해적들을 공격하는 상인들에게 우리 대만의 배와 선원들을 빌려주겠다는 사략 증서를 팔라는 것입니까?”
“맞습니다. 일주일에 은 10냥으로 30명의 선원과 그들이 타는 배를 빌려주겠다는 증서를 팔자는 겁니다.”
일주일의 시간 동안 배와 선원들을 상인들에게 빌려준다는 것을 시쭈꾸와 나지쭈 부자는 이해하지 못했다.
정확하게는 왜 그런 증서를 만들어 팔아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오후에 왔던 중국 상인 텅신황을 보면 자신의 세력이 강했다면 자기의 배로 해적들을 토벌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세가 부족하여 해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헌데, 대만의 배 3척과 90명의 선원을 빌릴 수 있게 되면 어찌 될까요?”
원종의 말에 시쭈꾸는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배를 빌려 세를 불릴 수 있다면 해적들을 공격해 이득을 얻으려는 텅신황 같은 상인들이 늘어나겠지요. 헌데, 그러면 우리 대만에는 어떤 이득이 있는 것입니까? 은 10냥은 너무 박한 이득입니다.”
“맞습니다. 아버지 말처럼 은 10냥으로 배와 선원을 빌려줬는데, 배가 상하고 사람이 죽으면 손해입니다.”
“이득이 그 은 10냥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해적을 토벌한 이후 얻는 장물의 절반을 비율에 맞게 나눠 가져야지요. 그런, 계약 조건을 그 증서에 담아야 합니다.”
즉, 사략 면장이 아니라, 해적을 토벌할 때 병력을 빌려주겠다는 증서를 은 10냥에 판다는 것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MOU(정식계약 체결에 앞서 행하는 문서) 증서를 파는 것이었다.
“이 증서를 상인들이 사게 되면 자연스레 해적들을 토벌하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나게 될 것이고, 대만으로 상인들이 몰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 상인들이 모이게 되면 해적 퇴치는 더 쉬울 것입니다.”
“흠. 선원은 우리 사람이니 배를 가지고 도망은 못 칠 것이고. 해적 토벌 외에는 다른 일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니. 괜찮긴 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 이 사략 증서를 팝시다.”
아들까지 찬성했고, 시쭈꾸가 생각하기에도 손해보다는 이득이 많을 것 같은 제도였다.
“이번에는 제 선단이 동원되어 퇴치에 나서고, 그렇게 얻는 배들은 이후 사략 증서의 계약에 쓰면 될 겁입니다. 거기에 선원들도 수익 배분을 해주겠다고 하면 산악 민족이 적극적으로 지원을 할 겁니다.”
이렇게 원종이 나서주겠다고 하니 시쭈꾸도 증서를 만들어 파는 것에 찬성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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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략 증서를 구매하겠습니다. 동원되는 배와 선원의 병력에 따라 이익이 배분되는 것이 좀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요.”
상인 텅신황은 사략 증서의 설명을 듣고는 그 효용을 바로 알아봤다.
배 한 척과 선원 30명을 은자 10냥에 빌리는 것이 정말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해적 퇴치를 위한 병력을 빌려 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 작은 규모의 해적들은 몸을 사리게 될 것이라고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상인들이 이 곳으로 모이게 되면 이 땅의 가치도 크게 오를 터였다.
“남경으로 올라가는 중간에 들리는 기착지로만 생각했는데, 이곳에 저희 상관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런 상업적인 부분은 저와 이야길 하시지요.”
나지쭈가 상인들을 데리고 나가며 새로운 거래를 만들어 내는 모습을 보니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싸움 없는 거래는 없다.’란 말이었다.
바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현관에 쓰여있는 말이었다.
‘No Business With out Battle.’
유럽의 히트 상품인 사략선 사업이 아시아에서도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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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배에 다는 깃발이 없는 겁니까?”
배들이 출발하기 전에 어떻게 움직일지 의논을 하는데, 군장 시쭈꾸가 움직이기로 한 배 4척에는 소속을 나타내는 깃발이 걸려있지 않았다.
시쭈꾸가 아랍어로 쓰인 깃발이 있다고 했지만, 저 깃발을 보고 알아보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싶었다.
참파 왕국의 군장 출신이었음에도 가문을 나타내는 문장 같은 것이 없었기에 하나 그려주기로 했다.
물론, 현대 대만의 국기인 ‘청천백일만지홍기’를 참고해서 그려주려는 것이었다.
파란색의 천에 흰색으로 태양을 그려 넣은 단순한 모양이었는데, 파란색은 바다를 상징하고, 흰색의 태양은 이 대만섬을 뜻한다고 알려주자 시쭈꾸 부자는 태양처럼 떠오른다는 의미에 좋아했다.
텅신황도 그런 깃발을 보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태양은 본래 붉은색이고 붉은색은 복을 부르는 색이지만, 지금 출전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붉은색은 피를 상징하니 흰색의 태양이 맞을 것이오.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로 부르도록 하시오.”
그렇게 청천백일기를 단 4척의 배와 태극 문양의 태극기를 단 춘봉상단의 10척, 텅신황과 상인들의 배 6척까지 해서 20척의 배가 해적 토벌을 위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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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들과 해적들에게서 도망쳐 나온 이들의 정보로 남중국해 출신 해적들의 본거지 여럿을 확인했는데, 기선 제압의 의미도 있었기에 가장 큰 소굴을 첫 타겟으로 잡았다.
“40여 척의 선박이 섬에 정박해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단주님의 말씀처럼 깃발이나 그런 것을 유심히 살폈는데, 제대로 된 식별 깃발이 있는 배들은 없었습니다.”
“놈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은?”
“집은 몇 채 없고, 이야길 들어보니 큰 동굴이 있어 거기에 거주한다고 하였습니다.”
“흠. 그렇다면 일이 쉬울 수도 있겠군.”
바닷가의 집이 아닌 동굴 안쪽에 놈들이 있다면 반응이 굼뜰 수밖에 없을 터였다.
“뭉쳐서 정박해 있는 배들을 화포로 공격하고 불로 태우면 떨어져 있던 배를 타고 놈들이 도망칠 것입니다. 대만의 배들과 텅신황의 배들은 그런 도망치는 놈들을 잡아 주시면 됩니다.”
화포와 불로 적선을 불태우고, 도망치는 이들을 붙잡는 단순한 작전이었다.
그대로 학익진을 펼치듯이 배를 넓게 벌려 놈들의 섬으로 다가갔음에도 우릴 보고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배를 측면으로 돌려 방포 준비를 하라!”
“발사 충격에 대비하라! 화약에 불이 붙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하라!”
“연습만 하며 제대로 쏘아보지 못한 것을 오늘 쏟아붓는다. 북소리에 바로 발포하고, 이후로는 포대장의 명령에 따라 자유 발사하라!”
둥둥둥!
북소리가 울리자 그대로 포수들이 심지에 불을 붙였고, 퍼-엉! 퍼펑! 하는 발포 음이 귀를 두드려 댔다.
두 척의 대운선 측면에서 12문, 7척의 누전선 측면에서 14문 해서 총 26문의 현자총통에서 차대전(次大箭배를 뚫는 큰 화살)이 날아 올랐고, 큰 쇠뇌인 노포(弩砲)에서도 불화살이 발사 되었다.
이제까지 본거지에 공격을 받아 본적이 없었던 해적들은 이런 일에 반응이 느릴 수밖에 없었는데, 정박했던 배에 불이 붙고, 차대전에 맞은 배의 돛대가 기울고 하자 그제야 ‘앗 뜨거!’ 하며 난리가 났다.
“어서 불을 꺼라! 뭣들 하는 거냐! 도망치지 마라!”
“섬에서 도망쳐도 갈 곳은 없다! 불을 끄고 나가야 한다!”
몇몇 정신을 차린 수괴들이 큰 소리로 외쳐대었지만, 평소 억압된 명령만 따르던 이들은 공격을 받는 처지가 되자 명을 따르지 않고 자기 살길만 찾기 시작했다.
물론, 불타오르는 배로 불 화살과 화포가 계속 날아들었기에 불을 끌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도 있었다.
정박한 배를 살리는 게 힘들다고 판단한 눈치 빠른 몇몇은 따로 떨어져 있는 배에 올라타 섬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대만 수군과 상인들에게 나포될 수밖에 없었다.
“발포 중지! 발포 중지! 상황이 끝이 났다! 그만 쏘도록 해라!”
상황이 종료 된 것 같았기에 화포 발사를 중지시켰는데, 이는 원종의 착각이었다.
“작은 배들이 몰려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