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7. 종속. (1) >
바다에서 안쪽으로 들어간 가오슝 만은 거친 파도를 막아주는 자연항의 모습이었기에 언젠가는 이 만이 꽉 들어찰 정도로 배가 몰려들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1~2년 만에 되지는 않을 것이라 여겼었다.
헌데, 20여 척의 배가 만에 정박해 있었고, 만을 따라 들어선 대나무 집들은 촘촘하다고 할 만큼 난립해 있었다.
둥둥둥둥!
우리 배들이 만으로 들어서자 곶에서 근무하던 자들이 북을 쳤는데, 북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마중을 나왔다.
“엇? 어찌 그대가 온 것이오? 그러고 보니 배가 다르군.”
이 가오슝 만에 마을을 만들 때 지배자로 내세운 군장 시쭈꾸는 나를 보고 놀랐다.
“태극 문양의 배가 들어왔다고 하기에 염호진 선장의 배가 다시 돌아온 것이라 여겼는데, 그대가 와서 놀랐소이다.”
시쭈꾸는 염호진의 선단만 해도 큰 배가 10여 척이 넘어 규모가 크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큰 배로 이루어진 10척의 선단이 오자 놀란 것이었다.
아들인 나지쭈가 조선에 다녀오며 춘봉 상단의 부유함이 어마어마하며, 큰 배가 수십 척이 있다고 들었을 때는 쉽게 믿어지지 않았었다.
이제 10대 중반의 아이였기에 그 보는 눈에 통찰력이 없어 그 겉만 보고 내실을 못 보는 것이라 여겼었다.
하지만, 이역만리로 이런 큰 배를 수십 척 보낼 정도라면 상단의 힘이 웬만한 소국에 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상단이 있는 조선이 가진 국력도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근히 대만 섬의 산악 민족들이 모여들어 자신의 세가 커지자 시쭈꾸는 마음속에서 웅심(雄心)이 생겼었다.
하지만, 대운선이란 화포가 놓인 큰 배를 보자 춘봉 상단이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생각에 웅심이 쪼그라들었다.
어찌 보면 아들인 나지쭈가 조선에 다녀오며 부인을 얻고, 아이까지 임신해서 산달이 다가오다 보니 그것에 대한 반발이었을지도 몰랐다.
“염참군의 선단이 올라간 지 얼마 되지 않았나 보군요. 나지쭈 자네를 보고 여기가 조선이라 착각할 뻔했네. 하하하.”
시쭈꾸의 옆에 서 있는 나지쭈는 한복을 입고 있었고, 상투까지 틀고 있었는데, 그 외향이 그냥 조선인의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중 나온 이들의 절반 정도는 한복을 입고 있었고, 대만섬의 산악 민족으로 보이는 이들은 얼굴에 문신을 한 채로 한복을 입고 있다 보니 기괴하기도 했다.
“조선의 국왕께서 제게 벼슬도 내려 주셨는데, 관복을 늘 입을 수 없어 한복을 입고 있는 것이지요. 이번에 염 선장이 올라갈 때 아버지도 조선에 한번 가셨어야 했는데, 그게 아쉽습니다.”
“언젠가는 가보겠지만 아직이다. 네가 못 미더우니 내가 자리를 비우지 못하는 것 아니냐.”
“저도 조만간에 자식을 보게 됩니다. 이제 저도 애가 아닙니다.”
은근한 아버지와 아들의 신경전을 보고 있으니 이게 구세대에서 신세대로의 교체에 따른 고충인가 싶었다.
“시쭈꾸 군장께선 태어날 아이를 보고 가시겠다는 것이군요. 그렇게 아이의 재롱을 보는 것이 큰 흥복이지요.”
원종이 부자 사이에 끼어 두 사람을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원종이 떠날 때는 어설프게 지어진 대나무 집이었지만, 어느새 기와장이 올라간 기와집이 되어 있었고, 2년의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얼추 국가의 형태가 만들어져 있었다.
음식도 제대로 조리가 된 음식이 올라왔는데, 나지쭈의 부인인 김 씨가 제대로 음식을 할 줄 아는 것 같았다.
특히나 전통 방식대로 수기(手技)로 식사를 했던 시쭈꾸와 일족들이 숟가락으로 식사를 하는 것이 엄청난 변화였다.
이슬람의 전통 방식인 큰 그릇을 두고 둘러앉아 먹는 방식이 아니라 아시아 유교식으로 개별 상을 받아먹는 모습에 원종은 감탄을 했다.
“아, 이렇게 바뀐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에서 먹었던 졸깃했던 쌀을 들고 와 재배해 먹는데, 손으로 먹으니 너무 달라붙었고, 밥이나 찬이 너무 빨리 쉬어버려 조선처럼 숟가락을 쓰게 된 것입니다. 젓가락은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찰기 있는 쌀은 손으로 먹기 힘들기에 자연스레 숟가락을 쓰게 되었고, 둘러앉아 먹는 이슬람의 방식도 바뀌게 만든 것이었다.
“좋은 변화이네. 숟가락과 젓가락을 쓰는 것이 음식을 더 오래 먹을 수 있는 방법이네.”
원종과 나지쭈가 자연스레 식사 시간에 조선말을 쓰며 대화하는 것에 다시 시쭈꾸는 거부감이 생겼다.
왠지 모르게 자신이 지켜왔던 조상들의 말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는 상실감이 거부감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 출신의 며느리가 오며 다양해진 음식을 먹을 때는 그런 거부감이 또 줄었다.
그리고, 조선 말이나 중국 말은 자신도 상인들과 거래하기 위해서 배우기는 해야 했다.
시대의 흐름인데, 이제까지 살아왔던 방식을 바꾼다는 것에 거부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찌 이리 사람들이 많이 늘어난 것이오? 내가 대만을 떠날 때와 비교해서 네다섯 배는 늘어난 거 같은데.”
“그게, 물고기를 잡는 그물을 주고 간 것이 좋아 만에서 잡아들이는 물고기가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거기에 주고 간 배로 교역을 해서 곡식을 가져오자 산악 민족들이 내려왔습니다.”
“결국 먹을 식량문제였군.”
“네. 산악 민족들에게 땅을 개간하는 법을 알려주고, 농사짓는 법을 알려줬기에 올해는 곡식도 많이 늘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심었던 후추와 정향이 잘 자라 그것을 팔게 되자 소문을 듣고 상인들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생활방식이 다른 이들이 모이게 되면 문제가 생길 것인데, 그런 문제는 없는가?”
“그렇지 않아도, 산악 민족마다 말이 다르고, 우리도 말이 다르다 보니, 읽고 쓰기 쉬운 한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춘봉 전장에서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했던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먹거리 단어부터 보급하겠다는 것이군.”
“네. 먹고 입고 하는 문제에서 한글과 조선 말이 쓰이다 보면 언젠가는 다들 한글과 조선 말로 이야길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당당하게 한글을 보급해서 대만의 산악 민족들을 하나로 묶을 거라고 하는 나지쭈를 보니 조선에서 몇 달 살면서 제대로 국뽕이 들어찬 것 같았다.
군장 시쭈꾸는 아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상들의 말을 잃게 되겠지만, 예전 군장 시절에 비해서 몇 배나 늘어난 사람들을 생각하자, 아들이 물들어 온 조선식 말과 글이 필요하고, 꼭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단주님이 오신 김에 하나를 부탁하고자 합니다. 저희 왕가의 족보(族譜)를 만들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족보를 만든다고요?”
이슬람 계열의 참파 왕국 사람이 유교적 관점에서 만들어지는 족보를 만들고 싶다고 하니 뭔가 재미가 있었다.
한 가문의 계통과 혈족관계를 알기 위해 족보를 만드는데, 실질적으로는 같은 성씨를 쓰는 이들의 단합과 그 조상에 대한 공경을 위한 책이 족보였다.
물론, 현대 중국의 경우에는 그 유명한 문화혁명 때 족보를 가진 이들을 싹 청소해버려서 한국과 일본에만 남은 구시대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씨족의 관계와 가부장적인 지금 시대에는 이 족보를 만들어 남김으로써 대만 왕가가 유교적인 중앙집권적 나라로 변화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책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 족보를 만들겠다는 시쭈꾸의 말은 이슬람의 문화권에서 유교문화권으로 변화해 가겠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문제는 참파 왕국 군장 출신인 시쭈꾸와 그 아들인 나지쭈의 이름만 봐도 그 성씨가 모호했다.
지금의 중동 아랍 이슬람 문화권은 자신의 이름에 할아버지와 그 위 할아버지의 이름을 넣어 긴 이름으로 자신의 가문을 소개하지만, 동남아의 이슬람인들은 그런 내려오는 역사를 가지고 있더라도 제대로 이어져 오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정말 오래된 가문의 경우에는 탄생설화 같은 것이 있겠지만, 중간에 삐져나오듯이 만들어진 가문은 그런 조상을 사칭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래서 단주님께서 힘을 써주셔서 조선의 왕께 성씨를 받아 주십시오.”
나지쭈는 권위 있는 왕가에서 성씨를 받아서 족보가 시작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사실, 왕가의 성씨를 제외하고는 이런 케이스의 성씨가 가장 많을 터였다.
“그렇게 하지. 그럼, 내가 성씨를 받아오면 그때 군장께서 왕에 오르고, 정식으로 조선에 방문을 하시면 될 것입니다.”
조선에서는 성씨를 내려 정식으로 제후국을 만드는 일이었기에 반대할 리가 없었다.
“갈비찜이옵니다.”
만삭은 아니지만, 배가 불러온 임산부임에도 김씨 부인이 음식을 내어 왔는데, 사실 이제 10대 후반의 여자아이라 김씨 부인이라고 호칭하는 것도 애매하긴 했다.
나온 갈비찜은 조선에서 먹던 대로 간장을 바탕으로 푹 곤 스타일이었는데, 기묘한 향이 있었다.
마늘과 생강으로 고기 잡내를 없애긴 했지만, 거기에 더해 동남아 특유의 향신료로 고기 잡내를 없앤 것 같았다.
먹음직스러운 간장의 짭조름한 냄새에 마치 아로마 향수를 뿌린 것 같은 향이 섞여 있었다.
“정향이로군.”
푹 익혀 부드러워진 갈비찜을 맛보는데, 정향의 알싸한 맛과 팔각의 맛도 느껴졌다.
뭔가 한국식 갈비찜에 오향가루를 넣은 것 같은 기묘한 동남아 음식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맛을 내는 요리가 떠올랐다.
바로 노냐(Nonya)요리였다.
정화의 원정 이후로 동남아에 화교들이 퍼져 살기 시작했는데, 이 당시 화교들의 성비는 9:1일 정도로 남자가 많았다.
그래서 화교들은 어쩔 수 없이 동남아 여인들과 가정을 꾸릴 수밖에 없었는데, 문화와 문화가 섞이며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졌다.
그게 바로 프라나칸(Peranakan)이라고 부르는 화교 후예들의 문화였다.
아버지의 중국과 어머니의 동남아가 섞이며 노냐요리라는 새로운 음식이 만들어졌고, 그 요리를 먹고 자란 혼혈들을 프라나칸(Peranakan)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중국 화교들이 즐겨 먹는 고기 요리에 동남아 인들이 즐겨 먹는 향신료가 섞여 들어간 것이었다.
이 노냐(Nonya)라는 말 자체가 ‘부인’이라는 말이었기에 노냐요리는 그런 혼혈 화교 가정의 가정식 요리였다.
헌데, 그 혼혈 화교의 가정 요리가 대만의 왕가에서 먼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조선 사람들이 좋아하는 고기 요리에 동남아 여러 곳에서 모인 향신료를 곁들이는 것이 역사와 다르게 만들어지자 원종은 재미있었다.
그리고, 이런 문화가 섞인 요리가 더 퍼질 수 있게 김씨 부인에게 굴 소스를 만드는 법과 코코넛 물로 밥을 안치는 법, 돼지고기와 게살을 섞어 미트볼을 만드는 법도 알려주었다.
“김씨 부인께서는 조선 문화의 선봉장이시니 자긍심을 가지시고, 음식을 만들어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조선의 음식에 동남아 향신료를 합치는 창의성을 발휘한 그녀에게 옷감을 선물로 주었고, 따로 은도 챙겨 주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숙소로 향하는데 대만까지 따라온 사츠마 번의 상인 히로타는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은 오키나와를 지나면 당이라 불리었던 중국이 바로 나타날 것이라 생각했었다.
헌데, 그 크기가 규슈에 못지않은 큰 섬이 있었고, 그 섬에는 조선의 조공국과 같은 나라가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그런 조공국의 왕가와 말을 편하게 하는 원종의 신분에 대해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는 오키나와의 상인인 케하루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몇 해 전 중국 남부로 갔었을 때만 해도 이러한 나라가 있는지도 몰랐었다.
헌데, 만을 따라 늘어선 가옥을 보면 능히 수만이 사는 큰 도시와 같았으니 자신이 있는 오키나와와 너무도 비교가 되었다.
***
“헌데, 저 정박해 있는 배들은 출항을 하지 않던데, 왜인가?”
“아, 해적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마 한 보름만 더 지나면 배들이 북쪽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보름이면 해적이 해결된다는 건가?”
“네. 염호진 선장이 이끄는 큰 선단이 아닌 이상은 3, 4월에 중국 남부를 쉽게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나지쭈의 말에 해적질도 시기가 있는 건가 싶었다.
작가의말
정향은 약간 매운듯하면서도 꽃향기가 납니다.
늘 푸르고 키가 큰 나무에 분홍 꽃이 피는데, 이 꽃이 정향의 원료입니다.
꽃이 피기 바로 직전에 봉우리채 따서 햇볕이나 불을 지펴 말리는데, 이 말린 꽃봉오리가 마치 못을 닮았다고 해서 못의 모양을 본뜬 글자인 못 정(丁) 자를 써서 정향(丁香)이라고 하는 거지요.
영어로는 클로브(clove). 역시 이 말도 클루(clou 못)에서 유래 되었습니다.
정향은 고대부터 대표적인 묘약 중 하나로 향기가 좋을 뿐 아니라 우리가 쓰는 향료 가운데 부패 방지와 살균력이 가장 뛰어나다고 합니다.
현재도 정향은 햄, 소스, 스프 등 서양 요리에서 필수적으로 쓰이는 향신료입니다.
정향의 수확량이 부족할 때 동인도회사에서 다른 향료들을 섞어서 팔아 난리가 난 적도 있을 정도로 귀한 향신료였습니다.
그래서 동인도회사는 떨어지는 정향의 가격을 방어하기 위해 산더미 같은 정향을 태워 버리거나, 생산량 조절을 위해 정향 나무를 뽑아 버리기도 했습니다.
현재 정향의 90%가 동아프리카에서 생산되는데, 이것도 동인도회사의 삽질에 따른 결과입니다.
프랑스인인 모리셔스 총독이 동남아에서 정향을 빼돌려 아프리카에 심게 되어 정향을 유럽으로 수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정향의 가격은 더 떨어져 버렸고, 아프리카에서 수확되는 걸 모르던 동인도회사는 인도네시아의 정향나무를 뽑아 수량을 조절하려고 했었습니다.
덕분에 과거 1위 생산지였던 인도네시아에서는 오히려 정향이 부족해 현재는 아프리카에서 수입을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더 디테일하게 살펴보면 인도네시아에서는 향신료로 정향을 쓰기보다는 담뱃잎과 정향을 혼합해서 크레텍이라는 정향담배를 만들어 피우는데, 이 담배를 만들기 위해 정향을 대량으로 수입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