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쉐프 조선을 부탁해!-256화 (256/327)

< 256. 또 다른 후예들. >

“죄송하오나. 상(尙)왕 전하, 소인들은 조선의 사신으로 온 것이 아니옵니다. 소인들은 조선의 상인들로서, 사신들 간의 일은 알지를 못하옵니다.”

“사신이 아니라 상인이라고?”

그제야 상왕은 자신의 잘못을 알았는지 말을 얼버무렸다.

“그렇다면, 상거래를 하고 조선으로 돌아갈 때 우리의 국서를 그대가 전해주었으면 한다.”

“네. 기꺼이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상행을 올 때 그 답신을 반드시 가져와야 한다.”

“네? 반드시 이옵니까?”

“그렇다.”

유구 왕국이 조선 조정에 보낸 국서의 답신을 반드시 가져오라는 말에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그 국서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상황에서 ‘반드시’라고 확답하는 것은 리스크가 너무 컸다.

그리고, 조선은 알게 모르게 유구를 무시하고 있었는데, 이것도 왜구들의 활약 때문이었다.

왜의 상인들은 왜관을 벗어나 거래를 하고자, 유구의 상인이라고 속이고 악성 거래를 했는데, 이 때문에 유구를 왜구와 동급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충분히 답신을 줄 수 있는 사안이라도 답신을 고의로 주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었다.

이는 실록에도 수치로 나와 있는데, 유구는 조선에 40여 번의 사신과 사절을 보내었는데, 조선은 유구에 단 3번의 사절을 보낸 것이 전부였다.

“그렇다면 그 국서의 내용을 소인이 알아도 되겠습니까? 그걸 알아야 다음에 올 때 반드시 답신을 가져올 수 있을지 없을지를 확답드릴 수 있을 것 같사옵니다.”

“우리 유구국이 조선국에 요청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예전 유구 산남국을 떠나 조선에 망명한 ‘오후사토(うふさと)’의 후예를 보내 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몇 해 전에도 국서를 보내었지만, 답이 없으니 답답하다.”

“오후사토의 후예요?”

원종은 오후사토가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오래전에 이곳에는 세 개의 나라가 있었소. 그 세 나라 중 남쪽 산남국의 왕이었던 자요.”

내가 줄을 서기로 했던 왕자의 외할아버지. 즉, 상왕의 장인인 아지(按司 토호, 족장등의 명칭) 기토마루가 설명을 해주었다.

그에게 설명을 듣고 보니, 이것도 오래된 은원이 걸려있는 문제였다.

그의 말마따나 12세기 오키나와섬은 3개의 나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섬의 북쪽은 산북국(山北國), 섬의 중간은 중산국(中山國), 섬의 남쪽은 산남국(山南國)으로 나누어져 싸우고 있었다.

오키나와섬의 크기가 제주도의 1.3배 크기밖에 되지 않는데, 섬 안이 세 개의 나라로 나누어져 싸우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다, 1416년 중산국의 왕 파지(巴志)가 북쪽의 산북국을 병합하고, 이어 1429년 남쪽의 산남국을 정복해 오키나와를 통일했다.

이후 파지왕은 다시 조선에 산남국 출신인 ‘오후사토’의 후예를 돌려 달라고 사신을 보냈었다.

“응? 그런데, 시간이 좀 이상하군요. 지금 상왕 전하의 나라인 중산국에서 산남국을 정복하기 전에 산남국의 왕이 조선에 망명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시간 계산을 해보니 그 산남국의 왕 오후사토가 조선으로 망명한 것이 태조대왕 때의 일이었다.

“아, 그것은 ‘오후사토’가 산남국의 왕이었지만, 그의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도망을 친 것이네. 당시에는 쫓겨난 왕인 ‘오후사토’를 불러들여 산남국에 왕이 두 명 있는 상황을 만들어 보고자 그를 돌려 달라고 사신을 보냈었던 거네.”

“네? 숙부에게 쫓겨난 왕이 조선에 망명했었다고요?”

그제야 유구에서 몇 해 전에 보낸 국서의 답이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세조가 제위에 있는 시기에 삼촌에게서 도망친 조카 왕의 후예들을 보내 달라고 했으니 조선 조정에서는 켕기는 게 있다 보니 아예 답신을 주지 않은 것이었다.

오키나와나 조선이나 권력 앞에서 조카와 숙부는 서로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지금은 이미 산남국을 멸망시킨 지 오래인데, 그 후예는 왜 필요한 것이옵니까?”

“자네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상왕께서 왕이 되실 때까지 많은 부침이 있었네. 특히나, 남쪽이 조금 시끄럽네. 그리고, 그들은 언젠가는 다시 산남국의 후예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있어. 우리는 그 믿음을 없애기 위해 ‘오후사토’의 후예들을 돌려달라고 하는 것이네.”

한마디로, 통일전에는 산남국의 공략을 위해서 ‘오후사토’와 그 식솔들이 필요했고, 통일 후에는 산남국에서 반란이 일어나지 않게 ‘오후사토’의 후예들을 데려와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원종은 이야길 듣고 나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일단, 조선에 있었을 때 유구에서 망명을 왔다는 ‘오후사토’란 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그 후예들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조차 몰랐다.

그 존재 여부조차 알 수가 없다 보니 그들에 대한 답신을 꼭 들고 오겠다는 약속을 하기가 참으로 애매했다.

‘아니다. 오히려 확답을 해주기 좋구나.’

원종은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우선 국서를 조정에 들고 가서 정식으로 접수를 시키는 것은 쉬웠다.

그리고, 그 후예를 찾아보았으나 이미 역병으로 다 죽었다고 서류를 정리해 버리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답신을 들고 오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상왕이 그동안은 사신을 보내고 해도 답이 없었는데, 이리 쉽게 오는 게 이상하다고 의심을 가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그 후예들을 찾아본다고 답이 늦었다고 답신에 명시를 해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 오후사토가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조선에 망명했다는 것이었다.

만약 유구의 국서에 이 부분이 명시되어 있다면, 조선에서는 ‘선조’ 때문이라도 절대 답신을 주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조정 안에서 꼼수를 부려 본다면 그게 또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상왕께서 주시는 국서가 그 ‘오후사토’의 후예들을 찾고, 유구로 데려오는 것에 대한 답신이라면 소인이 책임을 지고 답신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상왕은 한참이나 고민하던 원종이 흔쾌히 일을 맡겠다고 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하하하. 상인은 그 신용을 중시한다고 했다. 방금 뱉은 말을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다.”

“네. 소인이 뱉은 말에 대한 신용을 지키는 만큼 상왕께서도 소인의 사정을 헤아려주시길 바랍니다.”

“어떤 사정인가?”

상왕은 오래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사탕수수를 섬 북쪽에서 재배할 수 있게 땅을 내주었고, 삼별초의 후예들이 오키나와로 건너와 마을을 세우는 것도 허락해 주었다.

***

“그럼, ‘오후사토’가 왜 조선에 망명을 갔는지를 꼭 빼야 한다는 말이오?”

“네. 단순히 유구를 떠난 이로 명시해 주셔야 합니다.”

원종은 유구의 국서를 작성하는 국사(國師) 진가타에게 문제가 되는 부분을 빼달라고 했다.

“허나 그 사유를 적지 않으면 왜 오후사토의 후예들을 돌려보내라고 하는지에 의문이 들 터인데.”

“단순히 죄를 저지르고 떠난 이로 해주셔야 일이 쉽게 진행이 될 것입니다. 왕위 계승의 문제가 끼게 되면 유학적인 계승 논쟁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일이 진행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흠. 그래도...”

“그렇게 일이 쉽게 진행되어야. 소생이 다시 유구로 빨리 돌아올 수가 있습니다. 국사께서는 대장경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까?”

“아, 그렇군. 그래. 불경을 빨리 받으려면 그래야겠구만.”

“공식적인 조선의 사절단은 예(禮)에 맞게 오고 가는 준비가 많지만, 상인의 방문은 쉽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상인은 예를 차리지 않아도 되지.”

“소생이 자주 오다 보면 좀 더 조선과 유구가 가까워질 것이고 불경도 여러 가지를 들고 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국사께서도 저를 도와주셔야 저도 국사님을 도울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옳거니. 그것이 부처님의 말씀이 더 퍼지는 것이니 부처님께서도 원하시는 것일 거네. 자네의 말대로 국서를 써주겠네.”

이 당시에는 불경도 모두 다 수기로 써서 옮겨 썼기에 유구나 왜의 경우에는 불경이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뇌물이자 교역의 물꼬를 트는 상품으로써 불경을 찍어내야 할 것 같았다.

***

아끼꼬는 좁은 선내에 가두어져 있다 햇빛이 가득한 갑판으로 나오자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오빠와 마을의 남자들이 바다로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다음 날 웬 무사들에 의해 마을이 불태워졌었다.

그리고, 사로잡혀 배에 태워질 때만 해도 평생 노예로 손발이 뭉개질 때까지 일을 해야 할 것이라 여겼었다.

하지만, 햇빛이 밝다 못해 뜨거운 땅으로 옮겨진 이후로는 뭔가 대우가 달라졌다.

“너희가 조선 사람이 된다면 노예가 아닌 노동자가 될 것이며 일에 대한 품삯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왜의 왕을 따른다면 노예가 되어 평생을 묶여 있어야 할 것이다. 너희는 조선 사람이 되어 노동자가 되겠느냐, 아니면 왜구가 되어 묶여 살아야 하는 노예가 되겠느냐?”

마을 사람들을 잡아 왔던 험상궂은 무사들이 고개를 조아리는 것을 봤을 때 지체가 높으신 분인 것 같았다.

그런 높은 분이 일일이 마을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 선택을 하게 만들었으니 다들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다.

그래도 노예가 되기는 싫었기에 다들 조선 사람이 되겠다고 이야길 했다.

팔푼이가 아니라면 자진해서 노예가 될 이는 없을 터였다.

“그럼 앞으로 네 이름은 명자다. 이게 네 한글 이름이다. 명자의 머리를 손질해주고, 옷을 지급해 줘라.”

아끼꼬 아니 이제는 명자가 된 여인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받았다.

본래 글을 알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이름을 쓴 글자라는 말에 종이를 소중히 챙겼다.

그리고, 위로 말려있던 머리는 풀어서 댕기 머리를 하게 되었고, 입고 있던 옷과는 다른 조선인들의 옷을 받게 되었다.

“자 다들 단주님께 이름을 받았으니 오늘은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쓰고, 어떻게 발음이 되는지를 배운다. 최소한의 의사소통이 되면 그때부터 일을 하게 될 것이다.”

털보 만철이와 화물담당 선원들이 150여 명의 왜인들에게 일일이 말을 가르치며 글자를 가르쳤다.

글을 배운다는 것에 사람들은 필요 없다고 여겼지만, 글을 모르면 밥을 주지 않는다는 소리에 다들 죽기 살기로 조선 말과 글을 배웠다.

식사를 할 때도 콩밥과 그 위에 올려진 반찬을 보면 평상시 마을에서 먹는 것보다 못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루 두 끼를 준다는 말에 너무도 놀랐다.

“아끼꼬...아니지 이제는 명자라고 불러야 되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저도 모르겠어요. 잡혀 왔지만, 노예로 막 부리거나 어디로 팔지는 않을 것 같은데. 도통 모르겠어요.”

“거기 왜어를 쓰는 자 누구인가? 조선 사람은 조선어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제 왜어를 쓰는 이는 식사를 주지 않을 것이니 조선어로 이야기를 해라!”

털보 권철의 말에 왜인들은 더듬거리며 조선어를 쓰려고 노력했고, 이런 노력 때문인지 채 일주일이 가기도 전에 간단한 의사소통은 조선말로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제 다들 한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으니 삼강오륜과 이 책을 보아라. 사람이라면 지켜야 하는 예의를 배울 수 있는 책이 삼강오륜이며, 이 책은 상단주님이 저 멀리 중국과 대월, 말라카를 다녀오며 남기신 여행기이다.”

‘춘봉 상단의 수기’라고 이름이 붙은 책에는 ‘세상은 넓고 교역할 것은 많다’라는 부제가 달려있었다.

“상단주님은 사람 취급받지 못했던 우리 같은 뱃사람들과 너희 같은 왜구들까지도 아끼시는 분이시다. 오늘 너희들이 먹고, 마시고, 입고 있는 옷까지도 모두 다 상단주님이 내려주신 것이니 그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

명자는 선원들의 이런 말이 없더라도 은혜를 입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섬에서 왜구라 일컬어지며 해악한 존재라 여겨지던 이들에게 이름을 주고 글자를 알려주며, 먹이고 입힌다는 것은 그 어떤 다이묘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있었으니 명자나 마을 사람들은 일주일 만에 그 누구보다 상단주를 신봉하는 조선인이 되어 있었다.

“명자. 이제 이 글자를 다 알겠는가?”

그리고, 은근히 자신에게 자주 뭔가를 물어보고 신경을 써주는 순갑이라는 선원이 싫지만은 않았다.

“선단이 대만 섬에 다녀온다고 하는데, 한 스무날 정도 걸릴 것이네. 명자에게 어울리는 선물을 사 올 것이니 그때까지 건강히 있게나.”

명자는 얼굴을 붉히며 그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런 순갑이와 명자처럼, 총각 선원들은 이제 조선인이 된 처녀들과 정분이 나기 시작했고, 몇몇은 삼별초의 후예들과도 정분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원종은 뭔가 뿌듯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정에서 조선 사람이 더 나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유구 항로의 안정성도 자연스레 높아질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유구 항로의 종착점인 대만섬으로 선단은 출발했고, 미야코섬과 구로시마섬을 거쳐 대만섬에 닿을 수 있었다.

본래 유구와 조선은 여름철 태풍이 움직이는 모양대로 필리핀해에서 불어오는 계절풍을 타고 조선이나 규슈 북부에 바로 닿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경로는 빠른 만큼 너무 위험했다.

조선에 표류했던 하멜이나 일본에 표류했던 여러 서양인들 모두가 그 계절풍을 타다 태풍을 만나 난파되어 표류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빠른 길이 있지만, 안전을 위해 근해로만 다닌다고 쫄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배 한 척 사람 한 명이 아까운 시점이었기에 모험을 택할 이유가 없었다.

대만섬의 동쪽에 배가 닿아 해안선을 타고 시쭈꾸가 정착한 가오슝으로 향했는데, 2년 만에 온 가오슝은 예전에 보았던 그 가오슝이 아니었다.

“인구가 왜 이렇게 늘어난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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