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 왜구. (2) >
“엇! 배들입니다!!”
두 섬 사이의 만을 지나가자 섬에 가려져 있던 곳에서 작은 배들 30여 척이 우리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북을 쳐라!”
둥둥둥 두~웅!
삼식이와 박치산은 급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선내에 있던 이들도 갑판으로 올라오며 정해진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상인 히로타의 배는 어찌하고 있느냐?”
원종은 이 사태가 사츠마 번의 상인 히로타의 농간인가 싶어 앞서가고 있는 히로타의 배를 살폈는데, 그 배의 갑판도 난리가 나 있었다.
사츠마 번의 히로타가 이 일에 관여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지역 왜구의 소행이라는 말인데...
“난파선이 있고 토호들이 물건을 들고 있다는 그놈들이 판 함정이구나.”
원종도 활과 화살을 챙겼고, 선원들도 다들 긴 창과 방패를 들고 갑판에 도열하기 시작했다.
“두령! 놈들의 대응이 너무 빠릅니다! 훈련된 놈들 같소이다.”
“흥. 저것이 허장성세라는 것이다. 뱃놈들에게 그 어느 누가 훈련을 시킨다는 말이냐? 너희들은 본 적이 있느냐?”
“그...그게 본적은 없지만, 그래도 행색들이 예사롭지 않소이다. 크허억!”
하게마루는 옆에서 주저하는 나카이를 단칼에 베어 버렸다.
“처음부터 불을 토해내는 쇠기둥이니 뭐니 하면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 짜증 났었다. 이놈처럼 헛소리를 지껄일 놈이 또 있느냐?”
나카이의 피가 뚝뚝 떨어지는 하게마루의 칼을 보자 부하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츠마 번에서 온 배는 보내주고 다른 배에 달라붙어라! 배로 기어 올라가라! 불화살을 쏴라!”
하게마루는 배운 것은 없지만, 오랫동안 해적질을 하며 몸에 익힌 것은 있었다.
뱃사람들은 불을 두려워한다는 것이었다.
배에 불이 붙고, 돛이 타오르면 금방 끌 수 있는 불임에도 다들 혼란에 빠진다는 것이었다.
그런 뱃사람들의 습성을 이용해서 돛을 불화살로 태우고, 갑판에 불화살을 쏘아대면 아무리 괄괄한 뱃사람이라도 혼란에 빠져 방어를 하지 못했었다.
이번 조선 상인들의 배는 그 기세가 사뭇 날카로워 보였지만, 이들도 바다 위에서 배가 불탄다는 공포심에 빠진다면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쉽게 혼란에 빠질 것으로 생각했다.
작은 배들이 큰 배를 에워싸듯이 달라붙어 돛을 불화살로 태우는 것에 성공을 하자, 하게마루는 조선 상인들의 재산이 이미 자신의 것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조선 상인들의 배에서도 불화살이 날아들어 자신들의 배 돛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불은 무시하고 노를 저어 들러붙어라! 갑판을 빼앗아야 한다!”
“와아아아!”
“죽여라!!”
“조란환(鳥卵丸)을 넣은 현자총통(玄字銃筒)을 쏠 준비가 되었습니다.”
박치산의 말에 원종은 발포를 명하려고 했으나, 그 반대로 현자총통을 쏘는 것을 멈추게 했다.
“가까이 붙은 적들에게 조란환을 쏘는 것이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지만, 근접 백병전에 대한 경험이 선원들에게 없으니 그 경험을 쌓게 해봅시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단, 승선총통은 써도 되니 승선총통과 선원들의 능력을 한번 봅시다.”
“충!”
박치산은 승선총통을 맡은 선원들을 준비시켰고, 편곤과 장창을 든 이들을 준비시켰다.
“배가 붙었다! 줄을 걸어 올라가라!”
왜구들의 작은 배가 대운선의 좌우로 들러붙자 갈고리가 던져 올라왔다.
사령들이 대도를 들어 갈고리 줄을 끊어 내려고 했으나 줄 속에 쇠로 된 심지가 있어서 그런지 잘 잘리지 않았다.
그런 줄을 타고 왜구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긴 장창을 든 선원들의 저항이 펼쳐졌고, 그 찌르기를 이겨내고 올라오던 왜구들은 편곤에 대가리가 터져 나갔다.
터~엉! 타~앙!
총통의 발포 소리라고 생각하기에는 작은 폭발음이 울렸다.
“크아악!”
“악!”
들러붙은 배에서 대운선으로 올라타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왜구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한두 명이 아니라 네다섯 명씩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지기 시작하자 배에 오르기 위해 움직이던 왜구들에게서 난리가 났다.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나면 작은 뭔가가 날아들어 사람을 상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이건 도대체 무엇이냐? 어디서 날아오는 것이냐?”
타당! 타~앙!
다시 작은 폭발음이 들렸지만, 하게마루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작은 뭔가가 자신의 몸을 물어뜯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작은 돌게가 몸의 생살을 집게로 잡아 뜯는 것 같았다.
아픔이 느껴지는 곳을 보니 몸에 작은 구멍이 나 있었고,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이...이게 도대체 무엇이길래...크흑...”
하게마루는 부하들이 배에 올라탔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배의 갑판까지 올라간 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줄에 매달려 올라가다 머리가 깨져 떨어진 이들이 보였고, 그 이외에는 자신처럼 몸에 구멍이 나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이들이 전부였다.
“도대체 이 몸에 구멍을 뚫어내는 것이 뭐냔 말이다!”
하게마루는 쓰러지며 분노에 차서 외쳤지만, 대답해 주는 이가 없었다.
그러자 자신의 칼에 맞아 죽은 나카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불을 토해내는 쇠기둥이 있다고.
“이게 불기둥에서 쏟아진 것이구나. 크흑...”
하게마루가 알고 있던 배에 불이 붙으면 노련한 뱃사람도 혼란스러워진다는 말은 물과 칼 위에서 살아온 왜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말이었다.
상선에 붙은 불들은 금방 잡히었지만, 공격을 하기 위해 불을 잡지 않았던 왜구들의 배에는 큰불이 일어났다.
그렇다고 상선의 갑판에도 오르지 못했기에 진퇴양난이 된 왜구들은 물에 빠져 도망을 치거나 무기를 버리고 항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전투 상황을 지켜본 원종은 조총의 전 단계이자 함선 전투에 최적화된 승선총통에 대만족했다.
***
“사로잡은 왜구가 150여 인이 되오나 부상자가 있어 줄어들 수도 있사옵니다.”
“우리 측 피해는?”
“죽은 자는 없사오나 크게 다친 이가 다섯이 있사옵니다.”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노획물은? 저들의 배는 쓸 수 있겠던가?”
“불에 타 쓰기 힘든 것을 빼고 11척은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헌데 쓸 곳이 마땅찮습니다.”
왜구들이 타고 움직인 배들은 원양으로 타고 다니기에는 힘들 것 같았지만, 근해에서는 충분히 상선이나 어획용으로 쓸 수 있는 배들이었다.
다만, 지금 있는 곳이 규슈 남단이었기에 당장 우리가 쓸 수가 없는 게 아쉬웠다.
“흠흠. 미천한 소인이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사츠마 번의 상인 히로타는 이제까지 선단의 주인이라 여겼던 삼식이 어린 소년에게 존대를 하고 보고하는 모습에 놀랐었다.
그리고, 정리를 하는 중간에 군관으로 보이는 박치산과 그 호위들의 무장을 보곤 보통의 상인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검을 찬 사무라이를 50여 명이나 데리고 다니고, 일반 선원이라 생각했던 이들도 모두 훈련을 받은 병사들이니 그 신분이 보통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조선의 왕족일지도 모르지.’
해서 히로타는 원종에게 말을 건네는 것에도 아주 조심스러웠다.
“말하게. 무슨 의견인가?”
“그것이 조선의 귀인들이 보기에는 저 소도(小早)선들이 허술해 보일지 모르겠으나 왜구들은 저 배를 타고 류큐까지도 나아가 노략질을 해옵니다.”
“40척(약 12m)밖에 안되는 작은 배로 류큐까지 간다고? 대단하군. 목숨을 아주 내놓고 노략질을 했군.”
“그것이 노략질이 아니면 먹고 살기 힘들기 때문이옵니다.”
히로타의 말을 듣자, 생각나는 게 있었다.
임진왜란 때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이 명나라군의 참전으로 전쟁이 길어지자 조선 백성들을 왜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세금을 5할만 받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이게 너무 과하다고 오히려 항쟁이 일어났는데, 소서행장은 조선의 백성들이 들고일어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었다.
왜냐면 당시 왜의 세금은 생산물의 70~80%를 세금으로 걷어갔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세율이 일본 전국시대에 따른 특수성이 있긴 있었지만, 당시의 일본 다이묘들은 70%를 세금으로 걷어도 인자한 주인이라며 칭찬을 할 정도였다.
해서 소서행장은 조선에서 생산물의 5할만 세금으로 받겠다고 나름의 선정을 펼친 것인데, 이전에 3할에서 4할의 세금을 내던 조선 백성들은 너무 가혹하다며 들고일어난 것이었다.
“조선의 귀인들이 보시기에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소도선과 쓸 곳 없어 보이는 왜구들이지만, 충분히 사용하실 수 있으니 챙겨가시지요. 오늘 사로잡은 이들을 태워 유구에 가시면 이득이 될 것입니다.”
상인 히로타는 은근슬쩍 노예무역을 하라는 말을 둘러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사로잡은 이들을 팔아야 오늘 입은 피해가 보상이 될 것이옵니다.”
“좋네. 그대의 의견을 받아들이겠네.”
“개중에서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솎아 내 목을 잘라야 합니다. 그래야 뒤탈이 없을 것이옵니다. 그리고...”
히로타는 말을 망설였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하게. 설령 나쁜 말이라고 해도 개의치 않겠네. 나는 그렇게 막힌 사람이 아니네.”
“병사들을 내어 미시마무라섬과 다케시마섬을 치시지요.”
“섬을 치라고? 약탈하라는 말인가? 아니면 점령을 하라는 말인가?”
“흠. 귀인의 세(勢)라면 두 섬을 점령하여 마츠우라 씨족을 표방해 도주를 칭한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두 섬은 조선과 떨어져 있으니 점령을 한다고 해도 큰 이득이 없을 것이옵니다.”
“맞다. 들이는 공에 비해 이득이 없다. 그럼 약탈이라는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이 왜구들이 어디서 왔겠습니까? 두 섬에 있는 마을 자체가 왜구들의 마을입니다. 겉으로는 옛 화족인 마츠우라 씨족의 속하들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그 이름을 칭하는 것일 뿐입니다. 마을을 쳐 부릴 수 있는 자들을 부리는 것이 이득일 것입니다.”
히로타의 말을 들으니 그의 말이 맞았다.
그냥 놔두면 또 섬에서 왜구들이 커서 나올 뿐이었다.
다만, 약탈하고 노예로 잡아가는 양심의 문제가 걸릴 뿐이었다.
“소신은 저 상인의 말을 따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옵니다.”
호위대를 맡은 군관 출신 박치산이었다.
“오늘 현자총통을 쓰지 않았던 이유가 선원들과 호위대의 전력 점검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지 않았사옵니까? 그렇다면, 이 두 섬을 들이치는 것도 한 번쯤은 연습을 해보는 것이 어떨까 하옵니다.”
박치산의 말이 잔인한 말이었지만, 어찌 보면 실전연습으로 이만한 상대를 찾기도 어려웠다.
적당히 약하면서도 토벌해야 하는 필요성과 당위성이 있는 적이었다.
이보다 더 좋은 연습 상대는 없을 듯했다.
“좋네. 허락하지. 박 대장이 나를 대신해 두 섬의 마을을 정벌하고, 우리 손해를 만회할 수 있게 물자를 조달해 오게.”
“충! 맡겨 주십시오.”
“다만, 그 손속에 사정을 둘 수 있으면 최대한 사정을 둬 주게나.”
그렇게 미시마무라섬에 배들이 정박했고, 선원들과 호위대가 내려졌다.
전체 인원이 다 나서는 것이 아니라 방패와 장창을 들어 공격하는 것을 익힌 수군들과 호위대 400명이 내린 것이었다.
“우리 측으로 전향한 왜구의 말에 따르면 이 섬에는 두 곳의 마을이 있다고 했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때 바로 들이치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