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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쉐프 조선을 부탁해!-251화 (251/327)

< 251. 독해져야 한다. >

#251. 독해져야 한다.

원종은 상인 히로타의 의견을 받아들여 섬의 마을들을 약탈하게 했지만,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이들도 왜구가 되고 싶어 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왜구가 되어야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들로 인해 죽거나 피해를 당한 사람들을 생각했고, 앞으로의 일 때문이라도 나서는 게 맞았다.

유구와의 설탕 무역을 위해 이곳을 자주 다니게 된다면, 여기를 본거지로 하는 해적들과는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출진하는 박치산에게는 손속에 사정을 두라는 말로 마음을 달래었다.

박치산도 사람을 아끼는 원종의 이런 마음을 알기에 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마을로 들이닥치지 않았다.

해가 졌다는 이유가 있기도 했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달아날 수 있는 시간을 준 것이었다.

이런 기회를 주었음에도 도망치지 않았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

“마을 입구에 따로 진을 치는 이들도 없고, 마을에 남자들이 아예 없는 듯하였습니다.”

해 뜨기 전에 정찰을 다녀온 정찰병의 말에 박치산은 뭔가 시원섭섭했다.

하지만, 이게 함정일 수도 있었기에 정찰병을 더 보내어 주위를 크게 살피게 했고, 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방패와 창을 든 병사들을 앞세워 마을로 진입했다.

“나리. 저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해적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웬 노인네가 한 명 나와 무릎을 꿇으며 처량하게 이야길 했다.

“아무런 연관이 없다라. 그럼 마을의 남자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그...그것이...해적들이 무서워 다들 다른 섬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흥. 해적들이 우리가 두려워 도망친 것이겠지. 마을의 남녀노소를 가리지 말고 모두 이곳으로 모이도록 해라.”

노인은 일이 힘든 것 같자 어찌할까 고민했지만, 결국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마을 사람 100여 명이 모였는데, 대부분이 여자와 아이들, 노인들이었지 남자는 하나도 없었다.

“집을 뒤져 숨은 이를 찾아내어라. 귀중품으로 보이는 것과 곡식을 다 꺼내어 여기로 모아라.”

200여 명의 병사들이 마을을 뒤지고, 짐을 끌어내자 마을 사람들은 움찔하였지만, 반항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숨어있던 남자들을 다섯 명 발견해서 무릎을 꿇렸는데, 몸에 승선총통의 납탄을 맞은 상처가 있었다.

상처에서 납탄을 빼내고 치료한다고 도망치지 못한 것 같았다.

“저들의 몸에 난 상처나, 숨겨둔 무기들을 보니 이곳이 왜구들의 본거지구나. 집을 불태우고 이들을 묶어서 배로 옮겨라.”

그런 박치산의 태도와 행동, 그리고 이어진 선원들의 행동을 통해 그가 한 조선어를 대충 눈치챈 몇몇의 마을 사람들이 무릎으로 기어와 애원하며 말했다.

“아, 안 됩니다! 저희 집입니다!”

“나, 나리 한 번만 봐주십시오. 살아가려면 집이 있어야 합니다. 흑흑.”

“왜구들에게 자비는 없다. 이제 너희들은 섬을 떠나 다른 일을 하며 살게 될 것이다.”

“노, 노예가 되는 것입니까?”

“흐어엉. 한 번만 봐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나리 살려주세요.”

왜구들의 말을 배워서 아는 박치산은 이들의 말에 가슴이 아팠지만, 명을 내렸고, 왜구들의 말을 모르는 선원들은 마을 사람들이 눈물로 매달리며 애원해도 매몰차게 사람들의 두 손을 엮어 묶었다.

다른 마을도 첫 마을처럼 남자들이 없었고, 물자를 징발하고 사람들은 묶어 배로 끌고 갔다.

“이 섬에 있는 마을에선 저항이 없었습니다. 250명의 마을 사람을 잡았사오며 곡식과 여러 물자들을 징발하고 마을은 불태웠습니다.”

“잘했군. 바로 출발하여 다케시마 섬도 정리를 해버리지.”

원종은 해적들이 이미 배를 타고 도망치고 그 가족들만이 남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다케시마섬의 마을도 같을 것 같았다.

“바로 출발하면 아니 되옵니다. 수십 인의 목을 쳐 효수하여야 합니다.”

사츠마의 상인 히로타였다.

“그냥 이대로 떠난다면 놈들은 다시 돌아와 마을을 만들고자 할 것입니다. 효수를 하고 정기적으로 와서 퇴치하겠다고 경고를 남기셔야 합니다.”

“저항하지 않은 자를 죽여 효수하는 게 너무 하지 않은가?”

히로타는 원종의 말을 듣고는 조선인들은 너무 무르다고 생각했다.

“조선의 귀인께서는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시어, 당의 천자들처럼 덕을 베푼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덕을 베풂 받은 이가 그 덕을 알지 못하면 헛된 덕일 뿐이옵니다. 그런 덕을 베풀면 마츠우라 씨족이라 불리는 해적들은 오히려 무르다고 조선 상인들을 더 만만하게 볼 것이옵니다.”

한마디로 덕을 베풀어 살려주고 혹독하게 하지 않으면 놈들은 힘을 길러 다시 공격해 올 것이라는 말이었다.

히로타의 말에 원종은 깨닫는 게 있었다.

삼국지의 유비가 덕을 베풀고, 의를 지켜 후대에도 호인으로 칭송받지만, 실제 삼국지의 주인공은 간악하고 차갑게 행동한 조조라고 하는 것이 후대의 평가였다.

유비처럼 덕을 베풀어 정치를 하고 행동한다면 후대의 칭송은 받을 수 있을지언정, 당대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힘들지도 몰랐다.

서주의 참사나 부친의 친구인 여백사의 일족을 죽이는 것만큼 과감하고 결단력이 있어야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

단순히 음식 장사를 하고 식문화를 바꾸겠다는 그런 일에는 유비처럼 덕으로 행동해도 되었지만, 지금은 원종이 서 있는 위치가 너무나도 달라졌다.

몇 해 전의 원종에겐 삼식이와 몇몇 종들이 전부였지만, 지금은 삼식이 밑으로도 수백 명의 수하가 있고, 대 선단을 거느리며 조선의 상계를 움직일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었다.

이런 자리에서는 유비의 덕보다는 조조의 과감한 결단력이 필요했다.

그것이 조직을 크고 강하게 이끄는 방법이었다.

친인들을 모은 동아리의 회장과 큰 사업을 하는 대기업의 회장은 그 행동이나 사고방식이 달라야 했다.

아니, 달라져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었다.

덕보다는 공포와 힘으로 적을 굴복시켜야 피해를 줄일 수 있고, 이득을 더 볼 수 있는 것이 이곳이었다.

이득이 되면 삼키고, 손해가 되면 바로 뱉어 버리는 왜인들의 차가운 성정도 원종에게는 필요한 것이었다.

적에게는 독해지고, 잔인해져야 했다.

그것이 내 조직을 아끼는 리더의 사고방식이었다.

“히로타의 의견을 받아들이겠다. 마을 촌장의 목을 치고, 어제 죽은 이들의 목을 잘라 효수하라. 새로운 마을이 들어서지 못하게 효수된 목 아래에 다시 마을이 들어선다면 또 와서 마을을 불태울 것이라고 경고하라.”

박치산은 직접 나서 촌장의 목을 쳤고, 어제 죽은 왜구들의 목 30여 개를 잘라 장대에 매달아 해변에 세웠다.

그리고, 왜어와 한자로 경고문을 써서 효수한 목 밑에 걸어 뒀다.

[...해적질을 하는 자들은 모두 죽일 것이며 마을은 불태울 것이다. 정 먹고살 것이 없다면 사츠마 번의 성하 마을 춘봉 상단을 찾아오라. 그러면 먹고살 방도를 알려줄 것이다....]

미시마무라섬의 맞은편에 있는 죽도 다케시마의 마을로 가니 여기에도 남자들은 없고 여자들과 아이들, 노인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묶어서 배에 태웠고, 마을을 불태웠다.

해변에는, 촌장과 몇몇의 목을 잘라 효수했다.

여자와 아이들은 우리 배에 태웠고, 몇 없는 남자들과 노인들은 해적들의 작은 배에 태워 줄을 연결해서 끌고 갔다.

유구에서 노예로 팔아도 되고, 아니면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예로 써먹어도 되는 것이었기에 살려서 데려가는 것이었다.

***

“왜구들과의 싸움이 있었지만, 생각보다는 원양항해가 어렵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삼식이 네가 바다 위에서 태풍을 겪어보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진짜 대만 섬에서 겪어본 태풍은 조선에서 겪는 태풍보다 훨씬 더 강하였다.”

“태풍을 차치하더라도, 유구로 가는 길에 이리 섬이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 설령 태풍이 온다고 해도 재빠르게 섬으로 피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건 삼식이의 말이 맞았다.

막연하게 유구로 가는 원양항해가 힘들 것으로 생각했는데, 하루나 반나절 사이로 정박할 수 있는 섬이 있었다.

섬에서 나오는 양식이 작기에 큰 마을은 들어설 수 없었지만, 충분히 쉬어갈 수 있는 거리에 섬들이 하나씩 있었다.

이렇게 쉬어갈 수 있는 섬들이 있었기에 훗날 사츠마 번에서 병사들을 내어 유구 오키나와를 점령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아마미오섬이 보입니다!”

아마미오섬은 유구 왕국의 왕실이 있는 오키나와섬과 더불어 가장 큰 섬이었는데, 규슈 본토와 10여 일 거리였기에 왜어와 유구어를 같이 쓰는 이들이 많았다.

특히나, 섬의 토호들은 규슈에서 유학했던 경우도 있었기에 의복이나 생활방식에서 규슈의 것을 따르는 이들도 있었다.

이런 친규슈적인 토호들이 있기에 훗날 사츠마 번에게 쉽게 통합이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사츠마 번의 상인 히로타가 자리를 주선해 여러 토호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대운선의 조리사들에게 가르친 초밥이 연회에 올라왔다.

식초와 설탕, 해산물 가루를 넣어 밥을 양념했고, 계란지단을 만들어 올린 계란 초밥을 선보였는데, 지금 시대에는 없는 메뉴였기에 토호들은 이것이 무엇인지를 몰라 먹기를 망설였다.

내가 먼저 젓가락을 들어 한입에 먹는 것을 보여주었고, 삼식이와 히로타도 젓가락을 들어 입에 쏙 넣어 먹자, 토호들도 따라서 입에 넣기 시작했다.

“오! 이 노란 것은 계란인가? 계란에서 어찌 이런 부드러움이.”

“식초를 넣어 만든 밥의 초 맛이 입안을 채우면 달곰하면서 짭짤한 폭신거림이 채워지는구나. 역시 본토의 요리는 뭔가가 다르구만.”

“계란도 사츠마 번의 계란으로 만들었으니 더 맛있는 것 같군.”

“역시, 계란도 본토의 계란이로군. 하하하. 아주 입에 달라붙어.”

토호들은 계란 초밥의 맛에 감탄하면서도 사츠마 번의 상인인 히로타의 체면을 세워주고자 계란도 사츠마 번의 것이 맛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이런 토호들의 행태를 보는 원종은 웃음이 나왔다.

이 계란 초밥에 쓰인 계란은 이곳 아마미오섬에서 구한 계란이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10여 일의 짧은 항해였고, 배에도 닭을 몇 마리 싣기는 했지만, 이렇게 계란을 많이 생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으니 이곳 아마미오섬의 계란을 쓰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 사실을 히로타도 알고 있으면서도 웃으며 받아주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재미가 있었고, 현대 일본의 행태와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 일본에서는 스시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자 다음 단계로 했던 문화 작업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같은 참치로 만든 스시라도 일본 본토에서 먹는 스시가 최고이며 맛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본토의 오리지널 맛을 느껴보고 싶으면 일본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이 성공해서 많은 외국인들이 일본을 찾아 50년, 100년의 역사를 가진 장인들이 하는 스시집에 방문하여 맛을 보았고 원조는 역시 뭔가 다르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하지만, 이것도 사실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아무리 냉장 보관이 발달해도 그 바다에서 갓 잡은 어패류가 최고의 맛을 내는 법이었다.

도쿄의 큰 시장에 들어오지 않고, 지역에서만 소비되는 수산물도 있었고, 아보카도 같은 재료를 쓰는 새로운 스시는 아예 일본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도 일본에서 먹는 아보카도 스시도 일본이 최고라고 입을 모아 말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스시는 재료가 그 반이라고 할 만큼 재료의 신선도가 중요한 음식이었다.

한마디로 무조건 일본 본토로 가서 50년, 100년 된 장인의 가게에 가기보다는 갓 잡은 신선한 재료가 있는 지역의 스시 가게가 최고의 스시 맛집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회가 벌어지는 중간에 원종은 자리를 나와 아마미오섬의 어부들을 몇 명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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