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3. 대마도에 오다. >
“헌데, 단주님. 왜로 교역을 하러 가는데 사기가 아니라 옹기나 토기를 많이 들고 가시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왜국의 상인들이 왜관 개시에서 사 가는 것을 보면 다 도자기와 같은 사기이지 이런 옹기나 토기가 아닙니다.”
동래 지점을 맡고 있는 희재는 상품 선정이 잘못되었다며, 옹기나 토기가 아닌 도자기를 들고 가야 한다며 상품을 바꿔 실어야 한다고 단주님이 감을 잃었다고 열변을 토했다.
실제 왜와의 교역에서 이득을 보려면 희재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원종은 이번 교역에서 크게 이득을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이득을 볼 생각을 아예 하지 않고 있었다.
원종은 이번 교역에서 왜국의 지배층이 아닌, 서민층에게 춘봉 상단과 조선 상단의 이름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삼국시대는 물론이고 통일신라 시대까지 한반도의 도래인들이 왜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고, 신라구(寇)라고 불리는 신라의 해적들이 왜국의 해안가를 휘젓기도 했었다.
하지만, 고려 시대가 되며 원나라의 영향으로 수군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고, 이후로는 반대로 왜구에게 침입을 당하는 입장이 되며, 한반도와 왜의 교역은 몇몇 상인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게 되었다.
물론, 관에서 움직이는 통신사가 있었지만, 통신사는 사절의 성격이지 교역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대마도는 왜구들의 보급기지이자 교두보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도 사실 고려가 제대로 대처를 했다면 생기지 않았을 문제였다.
원나라와 고려의 1차 왜국 원정에서 대마도를 점령하고 유지했으나, 1차 원정이 실패하며 원나라가 철수할 때 고려도 대마도에서 철수해 버렸었다.
만약, 고려가 대마도를 그대로 점령하고 있었다면, 지금처럼 대마도가 해적들의 교두보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 대마도를 점령하고 있었다면 섬 주민들의 식량을 대어야 하는 문제가 있었으니, 빠듯한 살림의 고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 같긴 했다.
어쩔 수 없이 고려는 대마도에서 철수해 버렸고, 철수하면서 대마도와 거래하며 수출하던 곡식들도 수출을 금지해 버렸다.
그러다 보니, 밭이 부족하여 자급자족이 되지 않는 대마도는 살기 위해 왜구가 될 수밖에 없었고, 2차 원나라와 고려의 침입 때는 일치단결하여 아예 섬에 원나라와 고려군이 올라오지 못하게 방어를 한 것이었다.
그때, 이후로 대마도는 고려와 조선에게 침입을 당하는 입장이었기에 주민들의 속마음에는 은연중에 외부 세력, 특히 조선에 대한 경계심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해서, 원종은 이번에 교역을 하며 원나라와 고려의 침입을 받았던 대마도와 일기도(壱岐島 이키섬)에 서민들이 쓰는 옹기와 토기를 저렴하게 뿌리려고 하는 것이었다.
대마도 소씨 같은 지배층을 갈아치우는 것은 단시간의 힘으로 가능했지만, 그 아래 민초들의 마음을 돌리려면 미리 베풀어 둬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돈이 안 되더라도 옹기와 토기, 실과 바늘, 소금을 많이 싣게 했고, 하층민들에게 저렴하게 물건을 주며 호의를 베푸는 이들로 조선 사람의 인식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었다.
“에휴. 이득 없이 싸게 베푼다고 하시니. 저는 도련님의 의도를 모르겠습니다요.”
“하하하. 네가 모른다고 일이 끝나느냐? 너는 나와 삼식이가 왜에 다녀오는 동안 내해 교역이 꼬구려 들지 않도록 신경을 쓰도록 하거라.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지금의 일도 다 이해하게 될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해 교역은 믿고 맡겨 주십시오. 수군들이 어딜 가나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 보니 왜적이나 그런 것은 걱정도 안 하고 있습니다요.”
“그렇게 방심할 때 일이 터지니 늘 초심을 잃지 말거라.”
“네. 아! 그리고 동래부사에게는 배들이 탐라로 간다고 이야기를 해두었으니 왜로 가는지를 모를 것이옵니다요.”
아직도 공식적으로는 해금령이 존재했고, 말라카로 가는 것은 설탕과 후추, 물소 뿔이라는 상품 수입의 목적이 있었지만, 왜로 가는 것은 그런 목적이 없다 보니 조정에 보고를 하지 않고 출발하는 것이었다.
해서 동래부사에게는 탐라로 간다고 속이는 것이었다.
사실, 세종대왕 시절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한 이후 대마도를 경상도의 속주로 편입했었다.
그래서 대마도는 조선의 속주였기에 조선 사람이 대마도에 가는 것은 해금령에 해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마도는 왜에서도 속주로 편입되어 있었기에 조선과 왜 둘 모두의 속주였다.
물론, 대마도인들의 생활문화가 왜의 습성을 따르고 있었기에 왜국으로 보는 게 맞긴 했다.
그래서, 삼식이의 선단 10척의 배는 부산포에서 출발하는데도, 마중하는 이도 없었고, 태극 선단처럼 나팔을 불고 군가를 부르지도 못하고 왜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배도 눈에 바로 보이는 대마도로 가지 못하고 크게 둘러서 대마도의 남쪽 부근으로 향했다.
아침 일찍 부산포를 출발했기에 정오가 되기 전에 대마도 포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배를 대는 포구에서는 대마도의 도주가 사는 잔원성(桟原城 사지끼바라성)이 바로 보였는데, 성도 크지 않았고, 성하 마을이 가장 번화가였음에도 가옥이 채 100여 채가 되지 않았다.
대마도 사람들은 10척의 큰 배가 아무런 통보 없이 다가오자, 다들 비상이 걸렸고, 우리는 배를 세우고 작은 배를 내려 사람을 보내었다.
“그러면 왜국에서는 신분을 숨기실 겁니까뇨?”
“그래야지. 삼식 행수의 사촌 동생으로 하지.”
“그래도 되겠습니까뇨? 천것의 동생이라니...”
“삼식이 형 이제는 천것이 아니지 않소. 당당한 대 춘봉 상단의 대행수이니 어깨에 힘도 좀 넣고, 자신감을 가지시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허, 내가 괜찮다니깐 그러네. 말투까지 변해가며 배운 왜어로 능수 능란하게 상대를 다뤄주면 되는 거야. 그리고 이것도 쓰고.”
원종은 삼식이의 머리에 탕건과 갓을 쓰게 하고, 자신도 중인들이 쓰는 작은 갓으로 바꾸어 쓰고 옷도 갈아입었다.
“그럼. 방설환도 판매하니 단주님을 의원이라고 소개하겠습니다.”
“네 삼식이형.”
배에서 내린 작은 배에는 일전 왜관에서 거래를 하며 대마도의 상인에게 받은 초대장이 들려 있었다.
초대장을 확인한 이들은 배를 댈 수 있게 해주었는데, 모든 배를 대게 허락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10여 명만 내렸는데, 항구에 올라서 보니 우리에게 보이는 눈빛이 긍정적인 눈빛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왜 왔냐는 그런 눈빛을 하고 있었기에 황당하기까지 했다.
교역으로 먹고 사는 섬인데, 교역을 위한 선단이 왔음에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대마도 사람들의 이런 눈빛은 도주인 소 사다쿠니(宗貞国)와의 접견을 위해 대기할 때 들려오는 이야기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헤이쿠치는 왜 저런 상단에게 초대장을 보낸 거지? 규모가 저리 크면 우리를 거치지 않고, 바로 본토와 거래를 하려고 할 것인데, 헤이쿠치는 왜 저런 대형 상단에 초대장을 써준 것이지?”
“부산포에 가 있던 헤이쿠치도 사정이 있었겠지. 그리고 주군께서 헤이쿠치와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뭔가 결정을 내려 주시겠지. 식사 준비는 다 되었는가?”
도주의 성이라고 해도 규모가 크지 않았고, 벽도 얇다 보니 이야기가 다 들려왔는데, 아마도 대마도 사람들은 자신들을 거치지 않고 바로 교역을 할까 싶어 걱정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섬에 상륙했을 때도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은 눈빛을 보낸 것이었다.
대마도는 중계 무역으로 이득을 봐 왔는데, 우리가 그 이득을 빼앗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이런 착각을 어떻게 이용할지 원종은 생각을 가다듬었다.
도주인 소 사다쿠니와 헤이쿠치란 상인의 이야기가 끝이 났는지 안내하는 이가 나왔다.
“본래 식삼헌(방문 답례품을 주고받으며, 술과 국을 3번 내는 것)을 하여 대접의 식을 치러야 하나, 급작스러운 방문이라 식삼헌을 치르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통보 없이 갑작스레 왔으니 그런 예를 취하지 않는 것이 어찌 보면 맞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안내된 연회장에는 방석이 줄을 서서 놓여 있었는데, 상단의 우두머리가 누구인지 알아보고자 배치한 것 같았다.
가장 윗자리에는 삼식이가 앉았고, 그 옆으로 내가 앉았다.
다들 어린 자가 두 번째 자리에 앉자 흥미로워했다.
도주가 나오기 전에 밥상이 들어왔는데, 꽤 큰 밥그릇에 밥이 담겨 있었고, 반찬으로는 생선구이와 채소절임, 채소 국이 나왔다.
외부의 손님이 왔음에도 찬이 2개밖에 오르지 않은 것이 홀대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살림살이가 본래 이렇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밥상이 끝이 아닙니다. 식사의 순서에 따라 이걸 먹고 나면 또 상이 들어올 겁니다.”
통역으로 함께 온 채솔이가 옆에서 이야길 해주었다.
선원학교의 역관 과정을 마친 채솔이는 어릴 때 왜인들과 어울려 살며 컸다고 했는데, 어릴 때 왜구에 잡혀갔다가 20살이 넘어 조선으로 돌아왔기에 왜놈들의 습성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이였다.
밥을 다 먹으면 식사 코스처럼 이어서 상이 올라온다는 소리에 상을 제대로 살폈다.
왜인들은 몸집이 작기에 밥그릇도 작다는 고정 관념이 있었지만, 의외로 밥그릇이 컸다.
거의 2홉 반(0.4리터 분량)에 가까운 곡식을 담을 수 있는 크기였고, 수북까지는 아니라도 잡곡밥이 가득 담겨 있었다.
고정 관념처럼 왜인들은 식사량이 적다고만 생각했는데, 의외로 곡물량이 많았다.
“왜국은 이른 아침 묘(卯 새벽 5~7시)시에 밥을 먹고 미(未 오후 1시~3시)시에 밥을 또 먹습니다. 오후 늦게는 거의 무엇을 먹지 않습니다. 그래서 밥을 많이 먹는데, 대마도는 해산물이 많아 식량 사정이 나은 편입니다.”
미시쯤에 점심을 먹는데, 우리가 정오에 도착했으니 나름대로 밥때에 맞춰서 온 것이긴 했다.
역시 먹을 복은 있는 것 같았다.
채솔의 설명을 듣고 있으니 대마도주 소 사다쿠니가 들어왔다.
“조선의 춘봉 상단을 초대한 것은 맞으나 이리 갑자기 올지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대접에 부족함이 있소이다.”
유교의 영향인지, 다들 젓가락을 들지 않았는데, 밥과 생선이 식어 가는데도 소 사다쿠니는 삼식이와 우리를 보고 이야기만 했다.
“지나가는 길에 들렀다고 하는데, 어디로 가는지 물어도 되겠소? 그리고, 조선은 해금령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리 배가 나와도 되는 것이오?”
소 사다쿠니는 대형 선박으로 본토와 조선이 직접 거래하게 되는 것을 방해해 보려는 듯이 해금령을 들고나왔다.
대마도는 세종 25년 계해약조를 맺으며 세견선을 매년 50척 조선으로 보낼 수 있었기에 어떻게든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해금령에 대한 준비는 다 되어 있었다.
전권대사의 마패가 찍힌 교역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흠. 춘봉 상단은 해금령을 피해 외국과 교역이 가능한 것이었군. 그래서 어디로 갈 생각인 것이오? 복강(福岡 후쿠오카)이오?”
“본토의 다자이후(太宰府, 현 후쿠오카)에도 들리지만, 그곳이 목적지가 아닙니다. 구주(규슈)를 지나 저 멀리 유구(琉球)까지 갈 생각입니다.”
“류큐?”
소 사다쿠니는 유구로 갈 것이라는 삼식이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