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 최고의 금은 소금이라. >
“전(田)이라면... 둔전(屯田)을 만들자는 것이옵니까?”
“둔전은 이미 목포 진에서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둔전으로는 그런 돈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두 분이 생각하는 그런 단순한 전(田)이 아니라 소금을 만드는 염전(鹽田)을 만들자는 말입니다.”
“염전을요? 염분(鹽盆 제염장을 말함)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수영과 몇몇 관에서 운영 중인 것이 있습니다.”
“절제사께선 염분으로 관염(官鹽)을 만들어 보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맞습니다. 의창에 소금을 저장하고 흉황에 대비하고자 관에서 관염을 만드는 것이 허용되지 않습니까?”
“네. 관염에 대해서 허용은 하오나...”
목포진 만호 정원지나 수군 우후 이현기가 염분 제염장에 대해 말을 하다 멈춘 것은 이 소금 만드는 일이 그렇게 큰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조선 시대에 천일염을 도입하여 소금을 만들어 팔면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은 많이 하지만, 조선은 고려대에 이어 소금을 전매제로 취급을 했다는 것이었다.
조선의 소금 전매에 대한 것을 제대로 알려면 고려 말기 때부터 살펴봐야 하는데, 고려는 소금을 만드는 염분소, 제염장의 경우에는 군호처럼 염호를 지정하여 소금만을 생산하게 했다.
문제는 고려 말 원나라 침입 이후 왕권이 약해지자 세제가 문란해져 염세가 제대로 걷히지 않았고, 전매제였음에도 사사로이 소금을 사고파는 염상들이 나오게 되었다.
그런 소금의 거래를 지방 호족이나 사사(절)에서 임의로 하게 되자, 염세가 걷히지 않았고, 충선왕 때 이 염세를 제대로 걷기 위해 관리를 파견하여 세제를 개편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소금에 대한 세금을 가중하게 만들어 소금을 생산하는 염호의 이탈을 불러왔고 소금 가격이 폭등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왜구까지 발호하여 염호가 피해를 당하자 고려말 소금 기근이 생길 정도가 되어 구황염(사람이 살기 위해 필요한 소금) 조차 먹을 수 없는 백성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문제는 조선왕조로까지 이어지는데, 태조는 교서에서 각 도에서 백성들이 구워 만든 소금을 관에서 매입하여 거래하는 의염창의 관제를 정하였다.
그렇게 어느 정도 소금이 안정화 되자 해안 지역의 주군에 염장을 설치하게 하여 소금을 생산하게 하였는데, 이때 고려의 염호제가 해체되고 신역(身役)으로 하는 역(役)화 되었다.
세종이 의염색(義鹽色)이란 관을 만들어 소금의 전매제와 공급을 조절했는데, 이때 널리 알려진 종친 군마마들이 소금가마를 가지고 소금의 거래를 전매한다는 것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런 군마마들의 소금가마에 속해서 일을 하는 염간들은 신분은 중인이지만, 신량역천의 신분이 되어 염분소에 묶여 일하는 관노와 같게 되었다.
문제는 수군처럼 신량역천의 관노와 같게 되니 대우가 좋지 않게 되었고, 역 중에서도 일이 힘든 천역이었기에 도망치는 자가 속출하여 소금값이 폭등하게 되었다.
결국, 의염색이 소금의 유통판매권을 독점하는 데 따르는 폐해와 염간에 대한 가중한 수탈, 수송의 곤란 등을 들어 이계전(李季甸) 등 일부 신하들이 강력하게 반대하여 세종 28년(1446) 의염색을 폐지함으로써 다시 소금에 대한 것은 사재감으로 이관되었다.
조정에선 소금값 폭등으로 인해 구황염 조차 사람들이 구하지 못하게 되자 소금값을 안정적으로 잡기 위해 해안가의 여러 관에서 의창을 채우거나 흉황에 대비하기 위해 사사로이 염분소를 두고 운영하는 것을 눈감아 주게 되었고, 그제야 소금값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덕분에 세조 대에 소금값이 쌀 1두(한 되의 10배로 약 18리터)에 소금 2~3두로 거래되는 가격 안정을 찾았을 수 있었고, 고려 시대 616개의 염분소가 있던 것이 조선 시대에는 1626개까지 늘어나게 되었다.
조선이 소금을 전매제로 묶어두긴 했으나 소금값의 안정을 위해 관에서 어느 정도는 사사로이 소금을 생산하는 것을 허용하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안정적으로 판로가 있기에 소금을 만들기만 하면 돈이 되지만, 정원지나 이현기가 크게 호응하지 않은데는 이유가 있었다.
“갯벌에 벌막장을 만들어 함수를 모아 끓인다고 하여도 만들어지는 소금양이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함수를 끓일 땔감도 만만치 않게 들어가기에 이득이 그리 크지가 않습니다.”
“다른 수영의 경우에도 소금값 충당을 위해 자염을 만들고 있으나 장작이 부족하여 수군을 움직여 섬을 돌며 나무를 벌목해서 불을 때는 상황입니다.”
결국 자염이 돈이 되긴 하지만, 자염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땔감이 없기에 돈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땔감만 있다면 돈이 된다는 뜻이었다.
먼 훗날 어사 박문수가 부산 김해 명지 일대에 영조의 명으로 만든 명지 염전에서는 6개월 만에 18,000석의 소금을 생산해 내었는데, 이는 명지, 김해 일대의 갈대를 베어 땔감으로 썼기 때문이었다.
낙동강 하류에 넓게 펼쳐져 있는 갈대를 베어 불을 때면 일주일만 지나면 다시 갈대가 자라나 있어, 땔감 걱정 없이 자염을 생산해 영남 일대의 소금을 거기에서 다 생산해 낼 정도였다.
이곳 전라도에도 그런 갈대밭이 많이 있지만, 해안선이 발달해 있는 전라도에서는 자염보다는 천일염을 만드는 것이 훨씬 더 이득이었다.
“내가 만들려고 하는 염분소, 아니 염전은 기존의 자염과는 다르네. 자세히 설명하기는 힘이 들지만, 그래서 참여할 것인가 말 텐가? 내가 생각하는 염분소 염전이 만들어 지면 이제까지 알고 있던 염분소에서 나오는 소금양은 우습게 보게 될 거네.”
두 사람은 이제까지 염분소와는 다르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원종을 따라야 할지 말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참여를 하게 되면 어떤 것을 내놓아야 하는 겁니까?”
선원학교와 지척에 있는 목포 진 정원지는 나름 적극적이었다.
“뭐 크게 내놓을 것이 있나. 그저 목포 진의 수군을 동원할 수 있게 내어주면 되네. 수군 우후께선 직계 병졸이 100여 명이니 병졸을 내놓기보다는 이 근방 도서에 큰 염전 작업을 알리고 편의를 봐주는 일을 해주면 되네.”
“그 정도의 일이라면야 밑지는 것이 없으니 참여하겠습니다.”
더 생각도 없이 참여하겠다는 정원지의 말에 이현기는 꺼림직한 것이 있었으나 군제로 보면 절세사인 원종이 상사인지라 강제로 명을 받을 바에는 자진해서 참여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여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수료식이 끝나면 저기 쌓여있는 검은 돌을 가지고 비금도로 갈 것이니 목포 진에서 수군들을 보내주게나.”
***
밥을 든든히 먹은 아이들은 각 수영에 데려다줄 삼식이의 선단에 승선했는데, 아이들은 한 달간의 동고동락이었다고 서로 다시 만나자며 건강을 빌며 큰소리로 안녕을 외쳤다.
“훈련소 헤어질 때 다들 꼭 보자고 하지만, 진짜 볼일은 거의 없지.”
원종은 저렇게 울며불며해도 훈련소 동기는 다시 보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조선은 현대와 달랐기에 또 모를 일이었다.
아이들을 데려다주기 위해 온 삼식이의 선단에서 배 3척을 받았는데, 한선 1척과 중국 해적에게서 노획한 배 2척이었다.
이 세척에 짐을 싣는 방법이나 입출 하는 법을 수군들에게 가르쳤다.
물론 배를 움직이는 일에는 다들 십 년 가까이했기에 날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제 본격 실습인가 하는 거구만. 비금도는 몇 번 가보긴 했는데, 거기로 저 검은 돌을 왜 가지고 가는 거지.”
“그러니깐 실습인 거지. 우리는 모르는 상품을 들고 외국으로 나가서 물건을 팔아 오듯이 뭣 때문인지는 모르는데 물건을 싣고 가야 하는 거지.”
“하긴. 그렇지.”
선원들은 잘 모르고 있겠지만, 비금도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천일염이 만들어지게 되는 섬이었다.
특히나 같은 면적의 다른 섬에 비해 해안선의 길이가 2~3배에 달할 정도로 해변과 갯벌의 면적이 넓어 염전을 만들기 좋은 조건을 가진 섬이었다.
더구나 예전 고려 시대에 삼별초가 항전도 했던 지역이라 포구가 만들어져 있었고, 작은 성도 있었기에 왜구가 쳐들어온다고 해도 항전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이 장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비금도는 양반은 한 명도 없고, 그저 물질로 먹고사는 100여 호의 사람들만이 있는 작은 섬일 뿐이었다.
그래서 배가 3척이나 비금도 포구에 와 닿자 촌장과 몇몇을 빼고는 산으로 도망칠 정도였다.
“선원학교에서 실습을 나왔고, 사람이 살지 않는 남쪽 갯벌 해안가에 염분소를 만들려고 하오.”
“염분소를 여기에 만드시겠다고요? 여긴 나무가 그렇게 우거지지 않아 제대로 생산이 안 될 터인데요.”
“그건 걱정 말게나. 우선은 짐부터 내리겠네.”
선원들은 배운 대로 3척의 배에 실린 짐들을 내리기 시작했는데, 납작한 검은 돌 외에도 면포와 잡곡, 솥 같은 생활용품이 실려 있었다.
“촌장이 길잡이를 해주게나 각 집마다 병마 절제사이자 춘봉 상단의 단주님이신 전원종 님이 선물을 주셨네.”
촌장 만천이는 이게 무슨 일인지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저 해안가에 염분소를 만들면 만드는 것인데, 섬에 사는 이들에게 집집이 방문해 생활 물품을 준다고 하니 이걸 믿어야 할지 걱정이 되었다.
각호의 사람 수를 파악하여 노역에 데려가기 위해 인원을 확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그렇게 눈을 굴리지 않아도 되네. 우리도 수군으로 역을 사는 이들이네. 우리 천한 것들의 생활을 아시기에 절제사님이 이렇게 솥이나 잡곡을 주시는 것이네. 같은 섬, 사람인 우리가 왜 속이겠나.”
촌장 만천이는 같은 섬사람이라고 해도 쉽게 믿지 못했는데, 그래도 진짜 솥과 물건이 쌓여있기에 집마다 안내하여 선물을 전해주는 일에 동참했다.
“아니, 염분소를 만든다고 하는데, 왜 우리에게 이렇게 뭘 주는 거지?”
“난들 아나. 아마도 노역을 시키려고 하는 거겠지.”
“근데, 노역을 시킨다고 해도 난 좋을 것 같은데, 솥이나 포는 물론이고 잡곡을 다섯 되나 받았는데, 이거 그냥 먹다가 체할 것 같아서 노역이라도 해서 뒤끝을 깨끗하게 해야지.”
“아차! 그렇구나. 잡곡 다섯 되를 주고 나중에 열 되로 돌려달라고 할 수도 있구나.”
“이런 제길. 그럼 이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여?”
“우선 내일 아침 일찍 다 몰려 가보세나. 잡곡은 다들 먹지 말고 챙겨 들고나오고.”
이미 구율미로 관에서 장난질을 한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받은 선물들을 들고 포구로 몰려들었다.
“어허, 진짜 이 사람들 속고만 살았나? 우리 단주 님은 절대 안 그런다니깐.”
“어찌 사람 속을 알겠소? 우리는 이걸 받고 나중에 배로 돌려줄 이유가 없소이다.”
“다시 가져가시우. 우린 안 속소.”
비금도에 염전을 만들게 되면 주민들에게 불편을 끼칠 것 같아 선의로 선물을 준비해서 주는 것이었는데, 주민들이 이렇게 나오니 원종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만큼 치이고 살아온 섬사람들의 안쓰러운 상황을 알 것 같았다.
“그럼, 이걸 가져가고 염분소에서 일을 하는 것으로 합시다. 한 가구당 10일씩만 일해주면 이 곡식과 솥 포목을 가져가도 좋소이다.”
“10일? 열흘 일한다고 이걸 준다고? 그것도 믿을 수 없소이다.”
“그럼, 이걸 노역으로 따지면 며칠 일하는 게 맞을 것 같소?”
섬사람들은 자기네 끼리 이야길 하다 보름이라 정했지만, 포목의 두께가 두꺼운 것을 알고는 더쳐서 20일은 일해줘야 알맞다고 정리를 했다.
“좋소이다. 그럼 이 물건들 다 가져가고 20일간 노역을 해주시오. 그러면 되겠소?”
연판장인가 종이에 뭘 써야 한다고 이야길 했지만, 섬마을 사람 중에서 촌장인 만천이도 글을 몰랐기에 뭘 써달라고 이야기도 못 했다.
보다 못한 원종이 품에서 마패를 꺼내어 종이에 찍고, 언문으로 20일간 노역의 대가로 준다고 써주었다.
하지만 글자는 가로로 누워 있는 게 아니라 세로로 세워져 있는 거라고 누굴 또 속이냐고 말을 하니 원종도 갑갑했다.
“내일부터 촌장부터 몇 명에게 언문을 가르쳐 줄 것이니 내일부터 언문을 배우시오. 그러면 이 종이 계약서를 알아볼 것이오.”
아예 이참에 섬에 학교를 만들어서 의무교육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232. 최고의 금은 소금이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