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 선원학교. (2) >
“얼래? 이건 뭐래? 삼지창? 이걸 왜 주는 거래?”
밥시간이 되어 주먹밥을 받기 위해 줄을 선 양근은 비싼 유기로 만든 것 같은 숟가락을 받아 들고 되물었다.
“몰라, 삼지 숟가락이라고 하던데, 이제 이걸로 밥을 먹는다고 하더라고.”
“이걸로? 아니 무슨 밥이길래 이런 특이한 숟가락을 주는 거지. 찍어 먹으라는 건가? 국물은 못 먹겠는데.”
양근이는 손에 든 포크 숟가락을 이리저리 휘둘러 보며 밥을 퍼먹는 모습을 했다.
“모르지. 하여튼, 이제는 이걸 늘 들고 다니라고 하더라고. 개개인에게 보급해 주는 거니 잃어버리면 다시는 안 준다는군.”
“뭐 공짜로 숟가락을 주는 거야 좋긴 한데, 이런 건 처음이라 난감하구만.”
줄을 서서 움직이다 보니 다시 나무로 된 접시 그릇을 받았는데, 접시 그릇을 들고 움직이니 아낙이 잡곡밥을 퍼주었다.
“오! 오늘은 주먹밥이 아니구만.”
연이어 국자로 노란색의 국물이 밥 위에 부어졌고, 줄을 따라가다 보니 볶은 고기와 야채, 김치, 소금으로 숨이 죽은 채소를 그릇에 올려주었다.
“이야! 이거 진수성찬이잖아!”
“고기가 진짜 4점이나 있는데.”
“그러게 오늘도 주먹밥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어.”
수군들은 바닥에 그냥 주르륵 앉아서 밥을 먹기 시작했는데, 원종의 걱정과 달리 반찬이 작다거나 접시 하나에 몰아넣어 거지 취급하느냐는 불만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노란색의 양념 국물이 맛있다고 접시 그릇을 핥아먹는 이가 나올 정도로 다들 함바식당 스타일에 거부감이 없었다.
“이야 이거 오랜만에 든든하게 먹었구만. 저녁도 이렇게 나오면 좋겠는데 말이지.”
“이 그릇도 우리가 씻는 게 아니라 그냥 저기 쌓아두면 아낙들이 씻는다고 하더라고. 삼지창 숟가락만 자신이 씻어서 들고 가래.”
“이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편하고 좋은데.”
다들 잘 먹었다고 배를 두드리며 웃으며 가는 수군들을 보니 원종은 의아했다.
조선에서는 개인 상이 아니라, 그릇 하나에 음식을 쌓거나 담아 먹는 것을 거지 밥, 각설이 밥이라고 해서 천것들이나 먹는 방식이라 여겼었다.
해서 원종도 수군들이 거지 취급한다고 불만을 토로할 줄 알았는데, 그냥 다들 만족하게 먹었다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뭔가 잘못 알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으리... 그 닭이나 동물들 먹이로 먹을 수 있게 남는 잔반 담는 통을 두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남은 잔반이 하나도 없습니다요.”
“그게 진짜인가? 잔반이 아예 없다고?”
“네. 다들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싹싹 다 긁어 먹었습니다.”
“그럼, 이제까지 주먹밥이라 잔반이 남지 않은 게 아니라 그냥 다 깨끗하게 먹어서 잔반이 안 나온 거라는 말이더냐?”
“네. 수군 역(役)을 지는 이들은 없어서 못 먹었으면 못 먹었지 어디 음식을 남기겠습니까?”
“하하, 그렇구나. 그랬어...”
원종은 그제야 수군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리대가 없는 며칠간 집안의 가솔들이 만든 주먹밥만 먹고도 다들 아무런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는 것도 기억이 났다.
그때는 수군들이 불만이 있더라도 내가 있기에 아무 말 하지 않는 건가 싶었었다.
하지만 오늘 밥을 먹이고 반응을 지켜보며 깨달은 것은 이제까지 수군들이 먹어왔던 것이 개판이었기에 간단한 주먹밥에도 만족했던 것이라는 거였다.
그랬기에 오늘처럼 부족한 1식 3찬의 밥에도 행복해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한양에서 고관이나 먹을 걱정 없는 사람들만 상대하다 보니 수준이 그들에게 맞춰져 있었던 것이었다.
수군 역(役)을 내가 얕잡아 본 것이었다.
세종대왕 시절 중인이 죄를 짓자 수군 역(役)을 지게 만들어 신량역천(身良役賤)의 벌을 내렸는데, 그렇게 수군으로는 못산다고 자살을 선택했을 정도로 조선 사람들은 수군으로 사는 것에 거부감을 가졌었다.
제대로 사람 취급을 못 받을 정도였으니, 당연히 대우도 박했을 것이고, 보급 또한 개판이었을 것이 뻔했다.
그제야 제일 처음 거제도에서 선원을 뽑는다고 했을 때 수군역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몰려들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형만 권관(權管) 그럼 수군들은 평상시 뭐를 먹는 건가?”
이번 360명의 수군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 선원이 되기보다는 선원학교에 남아 나를 보좌하기로 한 형만 권관을 붙잡고 물었다.
“보통은 배를 타면 하루에 두 끼를 주는데, 소금 주먹밥이 전부입니다. 김치 줄기라도 있으면 다행입죠.”
“다른 반찬은 아예 없이?”
“그렇습죠.”
이야길 들어보면 들어볼수록 뭔가 이상했다.
과연 그걸로 힘을 낼 수 있을까?
아무리 다 큰 성인이라고는 하나 그렇게 주먹밥 같은 형태의 식사만 해서는 몸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 것 같았다.
“사실... 수군으로 배를 타면 평상시 주먹밥만 제대로 나와도 감지덕지합니다요. 오늘처럼 밥에 3가지 반찬, 아니 노란 국물 양념도 있었으니 4가지 반찬이었으니 오늘 먹은 것은 진수성찬입죠.”
“그럼 배를 타지 않을 때는 뭘 먹나?”
“그때는 잡아먹어야지요. 사실 수군이 매일 배를 타는 게 아닙니다. 밭을 일구는 둔 병처럼 농사도 하고, 갯벌에서 조개도 줍고, 자염을 굽는 곳에 가서 일도 하고 합니다. 그런 것도 없으면 바다에서 그물질을 하거나 해루질을 해서 먹을 것을 구해야지요.”
이야길 듣고 보니 알 것 같았다.
본래 나오는 식사량으로는 부족하니 그렇게 농사와 갯벌에서 주워 먹는 것으로 버티는 것이었다.
수군으로 나라의 군인이 되어도 제대로 먹을 것조차 챙겨주지 않는다는 현실을 알고 나니 답답했다.
이러한 열악한 대우를 받는 수군들임에도 훗날 임진왜란이 닥쳤을 때는 나라를 구했고, 그 이후에도 바뀌는 것 없이 계속 신량역천의 신분으로 대우받으면서도 수군으로 역을 졌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답답했다.
이놈의 나라는 백성들에게 해주는 것도 없는데, 백성들이 알아서 나라를 구하겠다고 의병을 조직하고 한목숨 버려가며 나라를 구해내고 하였으니, 참으로 어리석은 나라에 뛰어난 백성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문제였다.
국방이 문란해지는데도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조선의 관료들이 문제였고, 거기에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게 막는 신분제도도 문제였다.
설령 깨어있는 자가 이 문제를 거론해도 해결이 되지 않을 것이니 답이 없는 문제였다.
그저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식사를 제공해주고, 제대로 군인들이 대우받게 만들어 주는 게 지금 내가 할 일 같았다.
그게 나라를 위한 일이었다.
***
그리고 수군에 지원한 아이들 200명도 배를 타고 목포에 도착했는데, 이 훈련생들은 기존의 수군들보다 더한 놈들이었다.
밥을 급하게 한번 다 먹고 다시 줄을 서는 아이들도 부지기수였고, 밥을 받을 때 더 달라고 생떼를 쓰는 아이들도 많았다.
다들 먹고 살기 힘들다 보니 선원이 되어 돈 벌어 오라고 보낸 것이라 빈민가 출신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있을 때 먹어야 한다는 식탐이 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 다들 앉아 먹을 수 있는 식당이 만들어졌고, 50명이 살 수 있는 생활관 10개가 만들어지자 목포 진에 있던 수군들도 모두 옮겨왔다.
500명이 넘는 이가 있다 보니 매일 들어가는 곡식량도 엄청났고, 그런 밥을 할 사람도 동네 어멈들만으로는 부족해서 취사병을 따로 뽑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 최초의 취사병으로 15살 17살 먹은 남자아이들 4명을 뽑았고, 이들은 취사병을 하며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했다.
취사병을 뽑는 김에 현대의 군 조직처럼 체계도 잡았다.
선원이 되겠다는 이들 중에서 학교에 남아 교관이 될 이부터 뽑았는데, 선원들보다는 돈이 적지만 육지 근무라는 소리에 나름의 베테랑들이 자원했다.
그 교관들을 정식 권관(權管)으로 임명하고 생활관을 지휘 인솔하게 만들었다.
야간 근무도 만들었고 선원학교의 문 입구를 지키는 수문병도 만들었다.
그리고 교관들에게 기초 제식훈련을 먼저 가르쳐 수군들과 아이들에게 제식훈련을 가르쳤고, 줄을 서서 배식받아 먹는 것과 근무교대를 하는 것까지 규범을 잡아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이들이 학교에 온 지 한 달이 되어 수료식을 진행했다.
[전형과 중축이 수병이 되어
선 채로 산처럼 움직이지 않네.
후형은 뒤에서 정병이 되어
먼저 나아가 치는 용맹 당할 수 없네...]
정도전이 만든 오행출진가(五行出陣歌)를 오와 열을 맞춘 200명의 아이들과 그들을 둘러싼 360명의 수군이 크게 부르자, 목포진에서 온 수군만호 정원지와 전라 수군우후 이현기는 아주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특히나 이현기는 무과를 급제하고 북방에서 군관으로 근무한 경험도 있었지만, 이렇게 몇백 명이 모여 노래를 부르고, 수료식을 하는 것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사실 조선의 군제 상 일반 병사에게 뭔가를 가르치고, 하는 것은 병영에 도착하여 배우는 것이라 이런 학교라는 자체가 생소했다.
하지만 노래를 부르는 이들의 표정이 밝고, 다들 건강해 보였기에 사기가 높아 보여 꽤 긍정적으로 훈련 학교라는 것을 보고 있었다.
한 달간의 훈련이었지만, 가장 모범이 되었던 훈련생 세 명에게 원종과 이현기, 정원지가 각각 은 3냥씩을 하사하며 포상을 했다.
그리고 모든 훈련병들에게 유기로 된 삼지창 숟가락을 건네주었다.
훈련소를 수료했다는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숟가락에 1기라는 글자를 새겨 주는 것이었다.
다들 수영에 가면 이 숟가락을 쓸 일이 없다는 것을 교관들에게 들어 알았지만, 3년 후 다시 선원 학교로 돌아올 것을 약속하는 증표로 여겨 다들 소중하게 숟가락을 받았다.
그리고 훈련소의 마지막 밥을 먹는데, 원종과 다른 군관들도 줄을 서서 밥을 받았다.
오늘은 수료식이라고 특별히 1식 5찬이었다.
닭고기를 간장에 졸인 반찬과 구운 생선, 콩나물무침과 김치, 단무지까지 접시 그릇 가득 올려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율 배식이 된 카레 국도 있었기에 어찌 보면 1식 6찬이었다.
“저 아이들에게 한 달 동안 이렇게 먹였다는 것입니까?”
수군 우후 이현기는 500명에 달하는 인원에게 이렇게 밥을 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목포진 만호 정원지는 이미 몇 번 와서 밥을 같이 먹어 보았기에 놀라지 않고 설명을 했다.
“이런 밥을 하루 2번 주고, 아침에는 죽을 따로 줍니다. 절제사님의 사재로 병사들을 이리 먹이니 병사들이 짚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들라 해도 뛰어드는 강병이 되었습니다.”
“허허허. 각 수영에서 다들 선원이 되고 싶다고 안달 난 수군들 때문에 문제라고 하더니 이 밥만 봐도 그 수군들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제 목포진만 해도 수하들이 밥때가 되면 선원 학교로 안 가시냐고 물어보는 통에 아주 귀찮은 판입니다.”
“흠, 이런 밥을 줄 수 있는 재물이 생기게 되면 그걸 개인적으로 쓰지 않고, 병사들에게 베풀겠다고 약조만 하신다면 제가 목포진이나 우후의 병사들에게 베풀 의향도 있습니다.”
“허허. 목포진에만 400명이 넘는 수군이 있고 우후의 직계로 100명이 있는데, 감당이 되시겠습니까?”
정원지는 아무리 원종이 부자라고 해도 매일 1000명의 밥을 감당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원종이 농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충분히 감당이 됩니다. 다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두 분께서 해주셔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흐음. 어떤 일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재물이 들어가는 것을 해줄 정도라면 문제가 있는 일이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군요.”
수군 우후 이현기는 뭔가 불법적인 일일까 싶어 되물었다.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저 병사들을 두세 달 움직여 전(田)을 만드는 일입니다.”
< 231. 선원학교.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