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3.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닌. >
“그러니깐 나리께서 찾으시는 곳이 바닷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땅인데, 그게 10여 일 전후로 들어차는 갯벌이라는 말입니까?”
“그래 맞네. 10여 일이 없으면 5~6일에 한 번씩 들어차는 곳도 괜찮네.”
“흐음. 어디 보자.”
본래라면 선원들이나 염전 노동자들이 머물 생활관부터 지어야 했지만, 먼저 염전을 만들 장소부터 정해야 했다.
바닷가에 살지 않는 일반 사람들은 밀물과 썰물이 교차 되는 것이 하루에 한 번 물이 들어차고, 물이 빠진다고 생각을 하지만, 실제로는 이게 지역에 따라 좀 달랐다.
태양과 달의 위치에 따라 들어차는 해수면의 높이는 달라지는데, 지형에 따라 매일 물이 들어차는 지형이 있고, 어떤 곳은 일주일이나 보름에 한 번씩 해수면이 높을 때만 물이 들어오는 지형도 있었다.
즉, 원종이 원하는 지형은 태양과 달이 일직선에 놓여 해수면의 높이가 가장 높아지는 사리 때(한사리 ·대조(大潮)라고도 한다)에만 물에 잠기는 곳을 찾는 것이었다.
그렇게 촌장 만천이를 따라 원종은 비금도를 세 바퀴나 돌며 원하는 곳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산자락이 있어 경사가 있는 섬의 남서쪽보다는 북동쪽의 지대가 낮은 곳이 염전을 일구는데 알맞은 장소였다.
장소를 정하자 선원학교에서 만들었던 50명이 생활할 수 있는 생활관 두 동을 만들기 시작했고, 집회를 하거나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모임 장소와 소금을 저장할 저장고도 세 동이나 만들었다.
그러면서 목포에 있던 300명의 수군을 모두 불러들여 염전을 만들 갯벌 땅을 다지기 시작했다.
먼저 300평 규모의 해수를 저장하는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사리 때 물이 들어온 이후 둑에 막혀 빠져나가지 못하게 구리 주석으로 된 수문을 만들어 달았다.
밀물 때는 수문을 통해 물이 둑 안에 들어왔다가 썰물 때는 수문을 닫아 바닷물을 가두는 형태였다.
바닷물을 더 많이 가두기 위해 땅을 깊게 팠고, 그렇게 해수를 저장하는 저수지가 만들어졌다.
1차 증발지는 조수 간만의 차가 아무리 커도 1차 증발지까지 밀물이 올라오면 안 되었기에 그 높이를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사리 때 밀물의 높이를 직접 확인해서 높이를 잰 이후 증발지 땅을 다지기 시작했다.
1차 증발지부터 2차, 3차 증발지까지 사람이 올라가 돌리는 수차로 물을 옮겨야 했기에 각 증발지의 높이는 한 뼘 차이만을 두었고 각 증발지의 넓이도 300평 크기로 만들었다.
염전의 바닥은 진흙을 접착제 삼아 문경에서 구워 온 검은 타일을 깔았는데, 육일 후 밀물이 왔을 때 1차 증발지로 바닷물을 옮겼다.
그리고 2차 증발지가 만들어져 1차 증발지에서 수차를 돌려 물을 옮기는데, 6월의 강한 햇빛에 벌써부터 허연 소금기가 1차 증발지에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4차 증발지까지 만들고, 5차 증발지를 만들어야 하나 고민하는데, 3, 4차 증발지에서 사각형의 소금 결정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바닥에 검은 타일을 깔았기에 흰 소금 결정이 더 잘 보이기도 했다.
“나으리 저게 소금이란 말입니까?”
“그래 한번 꺼내 먹어보게나.”
만천이는 섬사람이고 젊은 날에 염분소에서 일을 해보기도 했지만, 이렇게 사각형의 결정이 만들어지는 소금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알을 들어 살펴보고 혀를 대어봤는데 짠맛이 혀를 타고 입안을 채웠다.
“으윽, 진짜 아주 많이 짭니다. 자염보다 훨씬 더 짭니다.”
만천이를 따라 소금 알갱이를 먹어본 다른 이들도 너무 짜다며 퉤퉤거리며 침을 뱉었다.
“자염에 비한다면야 더 짤 수밖에 없고, 먹어보면 은근히 쓴맛도 날 것이네.”
“아, 그러고 보니 너무 짜서 쓰게 느껴진 건가 했는데, 그게 아니라 진짜 짜면서 쓴맛이 나는 거군요.”
“이 쓴맛을 없애려면 불에 한번 굽고 가루를 잘게 만들면 대부분이 사라지지만, 그렇게 하기엔 다시 땔감이 들어가야 하니 안 하는 게 좋네. 그냥 쓴맛이 나는 대신 자염보다 가격을 더 싸게 해서 이 천일염을 팔 것이네.”
천일염의 쓴맛을 없애기 위해서 죽통에 넣어 구워 죽염을 만들거나 프랑스나 유럽의 방법처럼 증발지를 더 세분화하고, 갯벌에 사는 식물들을 통해 쓴맛을 없애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들어가는 비용문제로 인해 도입이 불가능했다.
지금으로서는 4차 증발지까지 바닷물에 들어있는 중금속이나 다른 물질들이 비중 차이로 증발지 아래로 가라앉아 걸러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만한 소금이었다.
검은색 타일을 쓴 것이 효과를 본 것인지 5차 증발지까지 가지 않고도 4차 증발지에서 소금 생산이 가능하자 본격적으로 기다란 나무 밀대로 소금 결정들을 증발지 중앙으로 밀어 모으기 시작했다.
“정말 신기하구먼, 소금산이 이렇게 만들어지다니.”
증발지의 중앙에 만들어진 소금산은 높이가 50cm밖에 되지 않는 소금 무덤이었지만, 이 소금 무덤이 백미 1석 가격이라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기에 다들 만들어진 소금산을 보며 신기해했다.
“바닷물이 마르면 짠맛의 흰 소금기가 생긴다는 것은 알았는데, 이렇게 큰 알갱이의 소금이 만들어지니 신기할 뿐이야. 절제사님은 이걸 어찌 아셨을까?”
“그러니깐 저 어린 나이에 절제사님이 되신 게 아니겠나. 그리고, 우리를 싣고 왔던 상선을 보게나. 그런 상선이 20척이 넘는다고 하는데, 20척이면 충청 수영보다도 배가 더 많은 거야.”
“대단하시구먼. 대단하셔.”
“그리고, 이 소금밭을 20개나 더 만든다고 하셨으니 이거 조선 팔도의 소금을 우리가 다 좌지우지하게 되는 것이여.”
“염전에서 일하면 1년에 백미 10석을 준다고 하는데, 나는 배 타지 말고 염전에서 일을 할까 싶어. 선원에 비해 반밖에 안 받는 거지만, 염전에서는 죽을 일이 없잖여. 새끼들도 데려오면 여기서 같이 살 수도 있고.”
“그렇지. 거기다 염전에서 일하면 소금도 1년에 1가마를 주신다고 하니 나쁘지 않다니깐.”
“나쁜 게 아니라 수군 시절에 비하면 신선놀음이지. 배곯을 걱정을 하나 죽을 걱정을 하나?”
“자자 다들 배를 탈지 염전에서 일하지 고민은 잠잘 때 하고, 어서 소금가마에 소금을 집어넣어. 가마니에 넣어서 한 달을 둬야 물이 완전히 빠진다고 하니깐 어서 옮기세.”
일꾼들이 옮겨 담는 소금가마도 망실이 많은 짚 가마가 아니라, 베로 만든 가마에 겉을 짚으로 다시 엮은 이중 가마였다.
이렇게 해두면 간수가 빠진 이후 바로 옮길 수 있기에 특별히 만든 가마니였다.
소금을 저장하는 저장고에도 바람으로 빨리 건조시키기 위해 나무로 큰 선풍기를 만들고, 회전축을 사람이 돌리게 했다.
마을에서 일을 해주기로 한 아낙이나 어린애들도 와서 소금에 선풍기를 돌려주는 것이었다.
원종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소금을 보며 대충의 계산을 했다.
저수장과 1, 2, 3, 4차 증발지까지 각 300평씩 총 1500평이 소요되었다.
헥타르로 따지면 0.5 헥타르였다.
원종이 현대에서 전통 요리법 연구회에서 천일염과 암염에 대한 자료를 보았을 때 보통 3천 평, 1헥타르에서 소금이 200가마 정도 생산이 된다고 했었다.
한 가마니의 무게가 120kg이니 1년 내내 1헥타르의 염전에서 소금을 생산하게 된다면 24톤 가량을 생산할 수 있는 것이었다.
10헥타르면 3만 평의 염전으로 240톤.
100헥타르 30만 평의 염전이면 2400톤.
1000헥타르 300만 평의 염전이면 2만 4천 톤이 생산 가능했다.
비금도의 크기가 48.490k㎡였기에 1000헥타르 9.9k㎡ 규모의 염전은 충분히 조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1000헥타르서 생산되는 2만 4천 톤의 소금만으로도 조선의 소금값을 실제적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왜냐면 현대 대한민국에서 1년에 소비되는 소금의 양은 1년에 약 50만 톤으로 단순 계산으로 5천만 명에 50만 톤이니, 조선의 인구가 대략 천만 명쯤으로 소금 10만 톤이면 조선 전체의 소금양을 커버할 수 있는 것이었다.
즉, 비금도의 1000헥타르 염전으로 조선에서 소비되는 소금의 24%를 감당할 수 있으니 소금값을 올리고 내리는 것도 가능했다.
또 바로 옆에 있는 도초도와 암태도도 비금도와 비슷한 크기의 섬이었기에 각각 1000헥타르의 염전을 만든다면, 세 개의 섬 900만 평의 염전으로 조선에서 소비되는 소금의 70% 이상을 만들어 낼 수도 있었다.
이렇게 되면 고기를 염장하거나 젓갈을 만들 때 소금에 들어가는 돈이 적게 들어 먹거리에 대한 위기감부터 없애버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섬이나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많이 잡는다고 해도 비싼 소금으로 인해 제대로 염장을 할 수가 없었고, 바닷바람에 말리거나 하는 것도 어종에 따라 제한이 되기에 기껏 잡은 물고기를 내륙으로 보내지 못해 버리거나 썩히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그런 망실되는 어패류를 소금으로 염장해 제대로 활용한다면 조선의 식량 생산량의 4~5%는 그냥 늘릴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이 소금을 내 마음대로 다 팔아 치울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구황염이나 소금값 문제로 관에서 염분소를 만들고 자염을 굽어 쓰는 것을 허락해 주고 있다지만, 이 정도 규모라면 허락의 여부를 떠나 조선을 뒤엎는 일이라고 잡혀가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결국, 법의 허점을 찾아야 했다.
먼저 국내 시판용으로는 종친인 대군 소유의 소금가마 권한을 사서 유통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대군 소유의 가마에서 소금을 생산할 권리를 가진다면 여기에서 소금이 만들어져 팔리는 것을 이상하게 볼 이는 없을 터였다.
더구나, 우리 상단에서 개인에게 소매로만 팔 것이기에 그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 것이고, 염장 음식 또한 상단에서 직접 만들어 유통할 것이기에 거기에 소비되는 양을 계산하기도 힘들 터였다.
이후 남는 소금을 외국에 수출한다면 비금도에서 만드는 소금 물량의 비밀을 오랫동안 숨길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것도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결국 염전이 커지게 되고 거기서 나오는 물량을 알게 되면 조정의 백태클에 들어올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다 차려 놓은 밥상을 다시 빼앗기게 될 터였다.
염전 같은 생산 시설을 숨기고 힘을 기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결국, 왜 밖에 없구나. 왜 밖에 없어.”
왜를 식민지 삼아 규슈 지역에서 염전을 만들어 소금을 생산하고, 조선과 중국에 수출하면서 삼각무역으로 부를 쌓는다면 조선 조정의 입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터였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무력이 바탕이 되어야 했다.
수군들은 어떻게든 만들어 내고 있지만, 실제 점령전을 펼칠 육군은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몰랐고, 장수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왜를 정벌해 식민지 삼으려면 최공손에게 총도 만들게 해야 했다.
“이거 장기 프로젝트로구만 장기 프로젝트야.”
***
원종은 소금 염전이 만들어지는 동안 한양으로 올라갔는데, 이미 생산되고 있는 소금을 유통하기 위해서는 종친들의 소금가마 제염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보통은 1년 단위로 소금가마를 운영하는 권리를 종친들에게 돈을 주고 구매를 하는데, 우연인지 아닌지 나와 있는 소금가마 제염권의 주인이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이었다.
월산대군의 집에 방문해 제염권을 사러 왔다고 하자 보통은 그 집의 청지기와 계약을 하고 끝나는 것이 보통인데, 예전부터 인연이 있었다고 대군이 직접 맞아 주었다.
헌데, 오랜만에 본 월산대군은 기억 속의 대군이 아니었다.
“군마마. 풍채가 너무 좋아지신 것 같사옵니다.”
“하하하. 이게 다 자네가 들여온 설탕 때문이지 않나. 더불어 자네가 우리 부엌어멈에게 가르쳐 준 가수저라와 호떡 같은 달달한 것을 자주 해 먹으니 이렇게 살이 붙을 수밖에. 그리고, 단것을 먹으면 고민 걱정이 사라지니 내가 어찌 좋아하지 않겠는가.”
그러고 보니, 왕이 될 수 있는 계승 서열로 따지면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 다음은 월산대군이었다.
다만, 제안대군이 어리고, 월산대군은 몸이 약해 동생인 잘산군을 왕으로 한다고 했지만, 월산대군이 특별히 아프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부인이 한명회의 딸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왕이 되지 못하고 그저 조용히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 된 것이었다.
거기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단 음식으로 풀고 있었으니 몸이 비대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자네가 전라도로 내려갔다고 들었는데, 금전적으로 빠듯한가 보구만. 제염권을 사려고 하는 걸 보니.”
“네. 전하. 호기 있게 제 사재를 털어 선원학교를 운영하려고 했으나, 힘에 부치옵니다.”
“하하하. 그렇다면 뭔가 새로운 음식을 내게 해 준다면 제염권을 좀 저렴하게 해주겠네.”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전하께서도 드셔보지 못한 것을 대군마마께 해드려야지요.”
“하하하. 그거 위험한 말이로군. 하지만, 또 기대가 되는구만.”
< 233.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닌. > 끝
작가의말
참고로 한국의 염전 면적은 약 11,000헥타르로 자동화와 기타 설비로 인해 50만 톤 이상의 소금 생산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오히려, 과잉 생산으로 인해 염전으로 등록만 되어 있고 소금 만들기를 포기한 염전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