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 선원학교. (1) >
뺨뺨 빠라라랑~! 둥둥둥둥!
군영에서 나온 취라치들이 힘차게 취각 나팔을 불었고,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진고 북을 고수가 신나게 두들겨 대었다.
이 소리에 맞추어 일제히 배들의 흰 돛이 펴졌고, 배들이 나루터를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배에 탄 선원들은 난간에 도열해서 오색의 깃발을 흔들며 기휘가(旗麾歌)를 부르기 시작했다.
[휘는 오색이요 기도 역시 오색이라
휘로 지휘하고 기로서 답하네.
중앙에는 황, 후미에는 흑, 전방에는 적이라
좌에는 청이니 우에는 백이라 모두가 조화롭구나.
동서남북 사방의 휘를 보아라
들면 출동이요 내리면 정지로다...]
기휘가는 조선의 건국을 도왔던 정도전이 만든 군가로 깃발에 따라 움직이는 군대의 모습을 나타내는 노래였다.
노래로 깃발의 색에 따라 움직이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했고, 행군가로도 쓸 수가 있는 것이었다.
수군에서는 이러한 깃발과 북소리에 따라 진퇴를 명령했기에 수군들은 모두 다 아는 군가였기에 다들 목이 터져라, 불러대었다.
나루에서는 취라치들이 나팔을 불며 음악을 연주하고, 배에 탄 선원들은 깃발을 흔들며 기휘가를 불러대니 구경 나왔던 백성들은 이 집단적인 울림에 감정이 벅차오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남자아이들은 집채보다 더 큰 배를 타고 움직여 나가는 모습에 멋짐을 느꼈고, 수군이 되어 선원이 되면 1년에 백미 20섬을 받는다는 소리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물어물어 춘봉 상단 옆에 있다는 수군 모병관에게 달려갔다.
***
“단주님! 수군이 되겠다고 지원한 자가 200명이 넘었습니다. 출항 행사를 할 때 입소문을 낸 것이 제대로 적중한 것 같사옵니다. 최대치인 200명으로 마감을 해야겠지요?”
“다행이로군. 취라치를 부르고 제대로 환송식을 한 것이 먹혔구만. 내 마음 같아서는 지원자 모두를 받고 싶지만, 200명으로 한정하게나. 오래달리기를 시켜 200등 밖은 탈락시키게.”
“네. 하온데, 수군이 되겠다고 지원한 이들이 대부분 10대 소년들이옵니다.”
“10대? 돈이 필요한 20~30대가 아니고?”
“네. 다들 아직 댕기 머리를 한 아이들입니다. 아마도, 아비들이 지원을 시키지 않았나 싶습니다.”
딸린 처자식이 많기에 장가를 간 이들이 주로 지원하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듯했다.
“그럼, 내년부터는 지원 자격을 만들도록 하지. 나이는 18세 이상으로 하고, 글자를 아는 자나 외국의 말을 아는 자들에 대해 가점을 주는 것도 기준을 만들어 보자고.”
금산이와 수군 지원에 대한 기준을 만들고 규칙을 정하자 왠지 ‘무과’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은 인재를 뽑기 위해서 아예 날짜도 정해서 미리 공시하는 걸로 해야 할 것 같았다.
“헌데 이 200명의 지원자를 각 수영에 어떻게 보내주면 되는 것입니까?”
이제까지 수군은 수영의 관할 도서나 연안에서 군역으로 사람을 그냥 데려다 썼기에 각 수영에서 자체적으로 신병들에게 일을 가르치고 훈련을 시켰었다.
그러다 보니 수군으로 지원한 200명이 있다고 해도 그 지원자들이 어떻게 배치가 되고 하는 것을 병조는 물론이고 수영 사람들도 아무도 몰랐다.
그저 선원으로 뽑아간 만큼 수군을 뽑아 배치한다는 큰 틀만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원종은 아예 수군으로 가는 신병들을 선원학교에서 훈련시켜 보내기로 결정했다.
자신의 손을 거쳐 간 이들이 수군에 채워지면 질수록 이득이었기 때문이었다.
“지원자들은 한 달 후 배에 태워 목포로 금산이 네가 인솔해서 내려오거라. 나는 미리 내려 가 준비를 하마.”
***
압구정동에 지었던 한옥을 장터나 가패 등에 들어가는 재료를 만드는 작업장으로 내주었는데, 집을 정리하고 나니 짐도 별로 없었다.
마누라가 앞으로 쓰게 될 활자 압착기가 가장 큰 짐이었다.
다우선을 타고 목포로 접어드니 원종이 예전에 알던 그 목포가 아니었다.
야트막한 노적봉 봉우리 앞으로 있던 일본식 건물들이 있던 신시가지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고, 기억 속의 반듯한 해안선이 아니었다.
기억하던 목포 땅의 절반 가까이가 매립되어 만들어졌다는 것을 그제야 기억해 냈다.
그런 노적봉 앞으로는 목포진(木浦鎭)이 있었는데, 수군 진영으로 수군만호가 배치되어 세곡선의 운반로를 지키는 곳이었다.
그리고 목포진 수군만호 정원지는 원종이 도착한다는 소식에 포구까지 나와 있었다.
“수군우후(水軍虞侯)께선 아직 안 오신 것이냐?”
“네. 아마도 오늘 도착하시긴 힘드실 것 같사옵니다.”
정원지는 혼자 병마절제사이자 사옹원 제조인 전원종의 환영식을 처리해야 했다.
‘아니, 이제 14살밖에 안 된 어린 아해가 정3품인 병마절제사라니. 미쳤구나 미쳤어. 아무리 당상관이 겸대 하는 무관직이라고는 하나 어찌 이럴 수 있다는 말인가.’
본래 수군 우후는 수군도안무처치사 도진무(水軍都按撫處置使都鎭撫)라고 불렸는데, 병마 도절제사의 막료였던 것을 세조 때 수군 우후로 이름을 바꾼 것이었다.
이름이 바뀌고 업무가 조금 달라졌지만, 여전히 병마도절제사의 업무를 보조하는 업무를 했는데, 그런 수군우후가 상관인 병마절제사가 오는데도 오지 않은 것이었다.
어린아이의 비유를 맞추기 싫어 수군 우후인 이현기가 고의로 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정원지는 속으로 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오는 병마절제사는 저 멀리 중국을 넘어 말라카라는 머나먼 나라에도 다녀올 정도로 용기가 있고, 근래 많이 다니는 춘봉상단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소문이란 늘 과장되고 거짓이 섞이기 마련이었다.
아마도 그 아비나 나이 차이가 나는 형들이 만들어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정원지는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어서 와주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목포진에 눌러 앉아있는 300여 명의 수군들 때문이었다.
경상 우수영의 참군 염호진이 수군 중에서 360명의 선원을 뽑았는데, 그 수군들이 목포진에 눌러 앉아있었기에 얼른 절제사가 와서 그들을 인수해갔으면 했다.
삼각형의 돛을 쓰는 이국적인 배가 포구에 닿자 꼬마 양반과 그 가솔들이 내리기 시작했는데, 정원지는 인사를 하고 가마를 대령했다.
“이런 것은 과례(過禮)이니 필요 없습니다. 유달산 일대로 선원학교의 부지가 정해졌다고 하니 그쪽으로 먼저 가봅시다.”
원종은 수군 만호 정원지를 따라 유달산 일대를 둘러봤는데, 훗날 목포해양대학교가 들어서는 곳 인근이었다.
대학교가 생길 곳에 선원학교를 짓는 것이니 뭔가 상통하는 느낌이 있어 괜찮았다.
“대지를 구매하려고 했으나, 이 일대가 조정의 땅이라 그럴 필요가 없었사옵니다. 해서 여유자금으로 미리 나무와 자재들을 구매해 두었습니다.”
상단의 일꾼들이 제대로 일을 해주었다.
원종은 정원지가 안내하는 목포진에 갔는데, 본청에는 접대를 위한 상이 아주 거하게 차려져 있었고, 이 일대에서 기생들도 다 불러 모았는지 수십 명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풍악이나 이런 잔칫상도 필요가 없소이다. 하지만 이왕 만든 것이니 진에 있는 모든 수군들을 불러 모아 나눠 먹게 합시다.”
작은 소반만 준비하여 정원지와 마주 앉아 식사하며 이야길 했는데, 앞으로는 이런 허례를 준비하지 않도록 신신당부했다.
“헌데, 수군이 200명이 아니라 360명이라는 말입니까?”
“네. 저도 수군 지원자에 맞는 인원만 선원이 된다고 명을 들었으나, 이미 염호진 참군이 360명을 뽑아놓고 갔기에 어찌해야 할지 몰라 놔두고 있었습니다.”
참군 염호진이 명을 받고 선원을 마구 받아들였을 때 인원을 줄이지 않고 놔둔 것이었다.
“다른 수영에서는 말이 없었습니까?”
“말은 있었으나 뽑힌 이들이 다들 복귀하길 거부하여 그냥 놔두었습니다.”
선원으로 쓸 수 있는 사람이 늘었다는 것은 좋았지만, 명령 불복종이 일어나도 손을 쓰지 않았다는 말에 조선 수군의 운영이 개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수영에서는 새로 뽑힌 200여 명을 빨리 배치해 주길 원할 것입니다. 수군에 지원했다는 그 200명은 언제 각 수영으로 보내주는 것입니까?”
“우선 360명의 수군으로 선원학교를 지으면 거기서 기초 훈련을 해서 신병들을 수영으로 보내줘야 하겠지요.”
“아하! 선원학교이자 수군학교였군요.”
원종은 정원지에게 숙소를 지을 동안은 목포진에 수군들을 머물게 해달라고 했고, 사흘 후부터 공사에 들어가니 수군들을 유달산으로 보내 달라고 했다.
원종은 용당동에 마련된 집에 머물며 서류작업부터 했는데, 성종이 지원자만큼만 선원으로 고용할 수 있다고 했기에 160명의 수군은 다른 항목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선원반에 200명, 화기반에 100명, 조선반에 40명, 통역반에 20명을 배치했다고 서류를 만들었는데, 선원의 숫자를 지원자 숫자에 맞추었으니 그 속을 들여다보지 않은 이상은 문제를 모를 터였다.
***
“목포진에 그냥 머물며 훈련을 받아도 되지만, 이제는 수군이 아닌 선원이 되는 것이기에 목포진에 계속 머무를 수가 없는 법이다. 그리고, 이 선원학교에는 앞으로 수군이 될 후배들도 오게 될 것이니 그들을 위해서도 머물 곳을 만들어야 한다.”
머물 곳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에 수군들의 고된 노역이 생각나 얼굴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숙소와 건물을 만드는 동안 아침은 간단한 건번 죽을 배급받게 될 것이고, 이른 점심과 저녁 식사도 배급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수당으로 목포 포구에 있는 춘봉상단에서 쓸 수 있는 교환권을 받게 될 것이다.”
“교환권 그게 뭐지?”
“저화(楮貨) 같은 건가?”
“춘봉 상단에서 곡식을 살 수 있는 종이 증서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훈련 기간에는 훈련비로 이 교환권을 줄 것이다.”
“오! 그럼 곡식을 따로 준다는 말이잖아.”
“역인데, 곡식을 준다면야 할만하지.”
6개월 동안 자신이 살아야 할 집을 짓는다는 것보다도 곡식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 수군들에게는 더 의욕을 만들어 주었다.
“저기 쌓아둔 구운 벽돌로 집을 만드는데, 저기 기술자의 말을 듣도록.”
문경 가마에서 구워온 벽돌과 검은색 타일이 한편에 잔뜩 쌓여 있었는데, 이제는 가까운 강진에서도 구워올 터였다.
50명씩 들어가 살 수 있는 군대의 생활관 같은 기다란 건물을 만들게 했는데, 300명에 가까운 인원이 투입되자 터다지기가 금방 끝이 났고, 흙 반죽을 만들어 바닥 평탄화 작업에 바로 들어갔다.
일하는 수군들을 보고 있으니 작업에 특화된 한국 군인의 DNA가 이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유서 깊은 노역이란 생각에 공병조도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노가다를 뛰고 난 이후에는 한식뷔페인 함바집이 기본 세팅되어야 했다.
조리실을 만들지 못하는 며칠은 미리 만들어온 주먹밥으로 대충 때울 수밖에 없었지만, 조리실이 만들어지면 제대로 된 밥을 해주어야 했다.
50명분의 밥을 안칠 수 있는 큰솥 10개를 걸 수 있게 아궁이를 만들었고, 작은 솥 5개를 걸 수 있는 아궁이도 별도로 만들었다.
불을 땔 때 나오는 열기를 이용할 수 있게 부엌 옆으로 숙소도 지었고, 열기를 이용해 어포나 훈제를 할 수도 있는 작업장도 붙여 지었다.
화기반이나 통역반의 경우에는 강의실이 필요했지만, 그건 나중에 최공손이 오면 원하는 방식으로 짓게 하면 될 것이라 우선은 화장실과 세면대를 만들어 최소한의 생활 시설부터 지었다.
그리고 공사를 시작한 지 나흘째 아궁이 화덕이 마르자 본격적으로 조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해서, 인근의 아낙들을 조리원으로 고용해서 밥과 찬을 만들게 시켰다.
“그러니깐 그릇을 들고 줄 서는 수군들에게 밥과 반찬을 일일이 퍼줘야 한다는 말입니까요?”
“맞네. 최종적으로는 그냥 알아서 자율배식하게 하는 것이지만, 초반에는 다들 밥 욕심이 커서 그게 힘들 거네. 그러니 일일이 어멈들이 밥과 찬을 퍼주어야 하네.”
큰 가마솥으로 만든 밥과 채소와 볶은 고기반찬, 김치와 채소까지 해서 1식 3찬이었다.
이 밥과 찬을 둥글고 큰 접시에 담아주게 했는데, 여기에 조선에서 인기가 없어 남아도는 카레 국물을 밥 위에 부어주게 했다.
문제는 큰 접시에 밥을 담아 함바식당처럼 먹는 것에 수군들이 거부감이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 230. 선원학교.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