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 혼례식. >
“네. 주위 논밭을 늘리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오랫동안 살아야지요.”
1970년대 이루어졌던 강남 개발을 먼저 해서 한양 도성에 집중된 인구를 좀 퍼트리긴 해야 했다.
그리고 창고를 지을 부지도 생각해야 했다.
지금도 한양의 공랑점포 창고는 포화상태처럼 물건이 가득했고, 벽란도의 창고도 절반가량이 곡식으로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이 벽란도와 한양을 오가는 다우선이 있다곤 해도 이틀이 걸리는 거리였기에 그 중간쯤에 큰 창고를 만들어 유통이나 적재의 편리성을 따져야 했다.
그러려면 한강 인근의 땅이어야 하는데, 훗날 일반 화물 부두가 들어서는 김포 아라뱃길 인근으로 땅을 사고 창고를 만들면 딱 맞을 것 같았다.
창고도 지금의 초가를 짓는 방식이 아닌 석회와 모래를 섞은 콘크리트도 튼튼하게 만들어야 했고, 그런 개발을 하려면 할 일이 태산이었다.
“신 대감 집에서 보낸 연길(涓吉) 택일단자(擇日單子)에 따라 납폐(納幣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혼수품을 보내는 일)를 내일 보낼 것이다. 네가 외국에서 가져온 설탕과 후추는 물론이고 여러 진귀한 것을 미리 보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성의 없다는 소리는 듣기 싫어 납폐를 소달구지로 보내었다.”
“잘하셨습니다.”
개발도 중요했지만, 일륜지 대사인 혼인이 눈앞이라 여기부터 신경을 써야 했다.
보통 사대부의 혼례 절차는 중매자가 양가의 혼사를 의논하는 의혼(議婚)을 하고, 양가에서 동의하면 신랑집에서 신붓집으로 청혼서와 신랑의 사주를 보내게 되는데, 이걸 납채(納采)라고 했다.
신붓집에서는 신랑의 사주를 보고 신부와 신랑의 궁합이 나쁘지 않다면, 신붓집에서 납폐(納幣)와 전안(奠雁)할 날짜를 정해 택일단자(擇日單子)를 보낸다.
이걸 연길(涓吉)이라고 했다.
지금 원종과 종희의 혼인 단계가 연길까지 온 것이었다.
이후로 신랑 집에서 날짜에 맞춰 혼수품을 보내는 것이 납폐(納幣). 이후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찾아가는 것이 초행(醮行)이었다.
이때 신랑이 암수 기러기를 신붓집에 바치는데, 기러기는 한번 짝을 이루면 그 짝과 평생 동안 조우한다고 하여 기러기를 신붓집에 바치며 신부와 평생을 함께 하겠다고 약속을 하는 것이었다.
이 행위를 전안(奠雁)이라 했다.
이후 신붓집에서는 초례청을 차리게 되는데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예복을 입고, 가운데 혼인 상을 두고 마주 절을 하는 혼인 상 행사를 초례청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초례청에는 음양의 화합을 상징하는 청색과 홍색의 초를 쓰고, 솔가지와 대나무, 암탉과 수탉, 밤과 대추, 붉은 팥과 검은콩을 올려 음양이 함께 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신랑도 해가 뜨는 동쪽에 서며, 신부는 해가 지는 서쪽에 서서 처음 만나는 교배례(交拜禮)를 하고, 합환주를 마시는 합근(合巹)을 하는 것이 초례예식이었다.
이후로는 다들 알다시피 신방(新房)을 차려 합방을 하고, 신랑의 집으로 가는데. 이걸 신행(新行)이라 했다.
신랑집으로 가는 신행 여행이 지금의 신혼여행이 된 것이었다.
그리고, 신랑집에서 신부가 시부모와 시댁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데 이걸 폐백(幣帛)이라 하며 밤과 대추를 신부의 치마폭에 던져 줘서 아들딸을 몇 명 낳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묘현(廟見)이라고 하여 사당에 모신 조상이나 윗대의 묫자리를 찾아 인사를 드리며 새로운 며느리가 왔다고 예를 올리면 혼례가 끝이 나는 것이었다.
이후 시댁에 인사를 다 드리고 시댁 식구가 되었다고, 신붓집에 인사를 하러 가는 근친(覲親)까지 하게 되면 이제 여자는 신붓집의 딸이 아니라 시댁의 며느리가 되는 것이었다.
이 혼례의 예에 따라 원종은 관복을 입고, 말을 타고 초행(醮行)에 나섰다. 신숙주 대감의 집 인근에서 아침부터 노복들이 청소를 하고 길을 터서 지나다니는 이들이 아예 없을 정도였다.
암수 기러기를 건네는 전안(奠雁)은 이미 죽은 신부의 아비를 대신해 작은 아버지인 신숙주의 삼남 신찬이 기러기를 받았다.
신찬의 옆에는 호부견자의 대표인 4남 신정이 있었으나, 혼인식에 참여한 한명회나 서거정 같은 노신들이 있었기에 눈치를 보며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대청 마당에 차려진 초례청에 들어서자 그제야 신부인 신종희가 몸종들의 부축을 받으며 나왔다.
본래라면 이 자리에서 신부를 처음 보아야 했으나 이미 가패에서 차를 마시며 몇 번 보았고, 선물도 미리 몇 번 주고받았기에 다른 신부들처럼 얼굴을 몰라 긴가민가하는 일은 없었다.
이제 14살인 어린 소녀가 머리 장식을 하고 연지곤지를 찍고 나온 모습은 예쁘거나 아름답기보다는 꼬맹이들의 결혼 놀이 분장을 한 것 같아 귀여움이 한가득했다.
어린 소년과 소녀가 혼례식을 치르는 좋은 모습에 신숙주는 입이 벌어져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고, 옆에 있던 한명회는 자신에게 딸이나 손녀가 있었어야 했다며 그런 신숙주의 기분을 맞추어 주었다.
물론, 신종희는 한명회의 외손녀이기도 했으니 한명회의 이런 입바른 소리도 자신이 기분이 좋으니 하는 것이었다.
예식의 진행자인 창홀(唱笏)이 홀기(笏記 식순)에 따라 절을 하라고 하면 절을 하였고, 술을 나눠 마시라고 하면 몸종들이 주는 술잔을 나눠 마셨다.
그러다 보니 예식은 끝이 났고, 혼인식의 클라이막스인 합방을 하게 되었다.
입춘이 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해가 빨리 떨어져 초저녁인데도 벌써 어두워졌다.
찬모와 몸종이 술과 술상을 올리고 문을 닫고 나갔는데, 지체 높은 양반가의 혼인이다 보니 신혼 방을 훔쳐보기 위해 창호지 문을 뚫고 하는 일은 없었다.
“흠흠. 부인 이리 좀 오시오.”
“...”
“우리가 처음 본 사이도 아니고, 뭘 그렇게 하시오.”
“...그, 그것이 아니오라, 다리머리 장식이 무거워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종희는 몸종들이 부축하여 방에 앉힌 이후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그게 자신이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머리에 가채나 장식 족두리를 올리는 다리머리가 무거워서 움직이지를 못한 것이었다.
원종이 얼른 머리에 고정된 다리머리와 족두리를 들어 빼주었고, 긴 소매로 인해 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기에 입고 있던 원삼(圓衫) 예복도 벗겨 주었다.
그제야 혼자서 움직일 수 있게 된 종희가 제대로 고개를 들 수 있었는데, 붉은색의 연지 곤지가 찍혀서 그런지 뽀얀 피부가 더 밝아 보였다.
다리머리를 빼며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할 수 있게 비녀도 챙겨 주었고, 그 앞으로 술상을 들고 와 놓았다.
“이 소고기 당수를 한번 먹어보시오. 내 밑에 철금이란 요리사가 있는데, 쟤 나름대로 황과(黃瓜 오이)를 넣고, 사과를 갈아 넣어 당수를 특별히 만들었다고 하오.”
막상 둘이 남게 되자 할 말이 없어 철금이가 특별하게 했다는 탕수육을 먹어보라며 술상에 올라와 있는 요리 이야기를 했다.
종이를 만들러 절에 가서 버섯 당수를 만들었고, 버섯 대신에 고기를 써서 만들면 더 맛이 난다고 당수육을 덜어 주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절에 들어가서 오지 않자 스님으로 출가를 한 거 아니냐며 걱정했다는 이야기에 종희도 웃어 주었다.
“그렇게 집을 떠나서 오래 있어야 한다면 저도 데리고 가주세요.”
“그렇게 하겠소이다. 여자들이 집에서 살림만 해야 하는 것에는 나도 반대요.”
사실, 원종은 종희에게 시킬 일이 있었다. 바로 관리 일이었다.
지금은 문경과 한양, 벽란도, 동래에서 따로 일이 돌아가고 있었는데, 이렇게 따로 돌아가는 사업체의 보고를 받고 정리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더구나 춘봉 전장과 장터까지 돌아가게 된다면 그 뒤를 서포트 해줄 운영지원 같은 일을 해줄 사람도 필요했기에 종희가 딱이었다.
그렇게 종희를 써먹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 그냥 꼬마 숙녀가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할 필요자원으로 보였다.
실세 신숙주의 손녀이자 한명회의 외손녀였기에 배경도 화려해 사대부 부인들이나 친우들에게 로비도 가능했다.
또 제대로 한문학 교육도 받았기에 고급 인력이었다.
“내 앞으로 많은 기대를 하겠소이다.”
“뭐... 뭘 말입니까요?”
종희는 기대한다는 말에 얼굴이 붉어졌는데, 이런 반응을 보면 뭔가 놀리는 재미도 있을 것 같았다.
“당연히, 부부생활 아니겠소. 그만 잠자리에 듭시다.”
전생에 여자 경험이 있는 원종이 종희의 손을 잡고 이끌었는데, 단순히 손만 잡혔음에도 종희는 말도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빨리 누우시오!”
원종의 닦달 아닌 닦달에 종희는 누워 눈을 꼭 감았다.
드디어 그날(?)이 왔구나 하는 생각에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몸 위로 올라온 것은 폭신한 이불이였다.
“하하하. 뭘 기대한 거요? 일단 오늘은 그냥 잡시다.”
원종은 촛불을 끄고 그 옆에 나란히 누웠고, 종희에게 팔베개를 해주었다.
“조금 더 크면 합시다 좀 더 크면.”
좀 더 크면 하겠다는 원종의 말에 종희는 마음이 놓여서는 원종에게 안겨 왔다.
그렇게 첫날이 저물었다.
***
날이 밝자, 일반적인 옷을 입을 줄 알았으나, 다시 몸종들이 들어와 치장을 했고, 무거운 다리머리 장식을 다시 올렸다. 움직이기 힘든 원삼 예복도 다시 입혔다.
그러곤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가마에 올랐는데, 신랑집으로 신행을 가는 것이었다.
4명이 드는 사인교 가마의 위에는 나쁜 기운이 올 수 없게 호랑이 가죽을 올렸고, 가마 안 방석 아래에는 숯과 소금을 깔았다.
그리고, 가마에 오를 때 어머니인 한 씨가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며 목화씨를 넣어 줬다.
“이제 가마를 타고 나가면 너는 전씨 집안 사람이 되는 것이다.”
종희는 그런 어머니를 안아보고 싶었지만, 머리 장식이 무거워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런 모습을 보니 일부러 머리 장식을 무겁게 하는 건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같은 서울이라도 도성인 강북과 강을 건넌 강남 압구정의 거리가 있었기에 아침 일찍 출발한 신행이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좁은 가마에서 고생했지만, 시부모에게 절을 올려 폐백(幣帛)을 했고, 방으로 와서야 그제야 무거운 머리 장식과 원삼을 벗을 수 있었다.
본래라면 조상의 사당에서 절을 올리고 하는 묘현(廟見)을 해야 했지만, 문경 본가가 아니었기에 생략되었다.
온종일 무거운 머리 장식을 이고 있어야 했던 종희를 위해 방에 들자마자 머리 장식을 내려줬고, 원삼도 벗겨 주었다.
“스트레칭 아니, 팔다리를 쭉! 펴서 몸을 이완시키시오. 허리 굽어지겠소.”
20kg에 가까운 것을 머리에 이고 있었으니 디스크가 안 온 것만 해도 다행이나 마찬가지였다.
엎드리게 하고 눈대중으로 배운 스포츠 마사지를 해주자 몸이 풀리는지 종희는 금세 잠이 들어 버렸다.
현대의 예식장에서 하는 생략이 많이 된 결혼식도 하고 나면 몸살이 나는데, 연이틀 동안 무거운 다리머리를 이고 있어야 했으니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일이었을 터였다.
종희를 재우고는 철금이 차려준 술상을 들고 아버지와 술을 한잔했는데, 이제 아들 셋을 모두 출가시켰다고 좋아하셨다.
그런 원종의 눈에 첩의 자식인 진기와 향희가 보였는데, 아버지의 눈엔 그 둘이 자식으로 보이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깔끔하진 않았다.
***
“이 당수라는 음식이 아주 맛있는데 제게도 알려주세요.”
“그럴까? 그런데, 내가 이 당수육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절에서 버섯으로 만들어 줬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종희의 말처럼 내가 절에서 만든 것은 이야기 해주었지만, 실제 중국에서 탕수육이 만들어지게 된 이야기는 해주지 않은 것 같았다.
실제 이 탕수육이란 음식은 중국인들의 굴복의 역사와 관련이 있는 음식이었다.
< 220. 혼례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