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 종이 패키지가 필요합니다만. (2) >
“채 뜨는 것도 그렇게 큰 발틀과 채를 쓸 필요 없네. 여기 이것으로 바꾸게나.”
“네? 지금 쓰는 외발 뜨기 발틀의 반도 안 되어 보이는데요.”
“맞네. 딱 반의 크기네. 이젠 이 발틀로 종이를 만들 것이네. 외발 뜨기의 줄은 이제 필요 없네.”
한지를 만들 때는 닥풀과 물, 섬유질이 섞인 물통에 발틀과 채를 넣어 섬유질 물을 떠서 만드는데, 한번 종이를 뜰 때 최대한 큰 크기로 떠야 좋았고, 전지(70 X 135cm) 크기를 기본 사이즈로 했다.
그런 전지 크기의 종이를 뜨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큰 발틀을 써야 했고, 물 안에서 좌우로 움직여 떠야 했기에 발틀을 움직이는 데 큰 힘이 들었다.
그래서 발틀 드는 힘을 줄이기 위해 발틀을 천장에 매달린 줄에 묶어서 사용했는데, 줄이 한 가닥이라고 외발 뜨기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중국은 두 발 뜨기가 기본이다)
하지만 원종이 건넨 발틀은 본래 크기의 반인 4절지(35 X 70 cm) 크기의 종이를 뜨는 발틀이라 줄을 연결하지 않고, 그냥 양손으로 잡고서 물을 뜰 수 있었다.
그리고 원종의 나무 발틀은 안쪽으로 3cm가량 들어 가 있어 마치 액자와 같은 모양새였는데, 그 안으로 천으로 된 채를 넣는 것도 기존의 방법과 달랐다.
“이제까지 외발 뜨기로 해온 것처럼 좌우로 흔들어 가며 섬유질을 채에 올리지 않아도 되네. 그저 물이 있는 그대로 이 발틀 안에 가득하게 뜨면 되는 것이네.”
원종은 직접 시범을 보이며 발틀에 물을 떴는데, 안쪽으로 있는 3cm가량의 공간에 흰 물이 가득했다.
“이 물이 아래로 빠질 수 있게 그냥 옆에 놓아두면 되네.”
원종은 준비된 50개의 발틀에 일일이 물을 떠서 옆에 놓아두었고, 가장 먼저 떴던 발틀에 물이 빠지며 그 안쪽으로 섬유질이 소복하게 가라앉아 있자 발틀을 뒤집어엎었다.
그러자 발틀 안의 천으로 된 채가 쏙 빠지며 준비된 작업 천 위로 떨어졌다.
“이게 종이 1장이네.”
전통적인 한지로 만든 것보다 3~4배는 더 두껍게 나온 종이의 모습에 중들은 웅성거렸다.
“지금 보면 뭔가 종이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나무와 짚, 면포의 부스러기가 강하게 잘 결합 된 것이네.”
원종은 그렇게 미리 떠 두었던 발틀을 뒤집어 종이를 계속 쌓았다.
“이렇게 50개가 쌓이면 본격적으로 물을 빼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이것도 내가 만든 압착기로 하면 쉽네.”
압착기 또한 한양에서 분리해서 가져와 성도암 경내에 설치했는데, 교환권을 찍을 때 쓰는 압착기를 약간 손본 것이었다.
50장의 종이를 압착기로 누르기 위해 세 명의 중들이 달라붙어 도르래를 돌리기 시작했고, 압착기에 눌러진 종이에서 물이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하며 종이의 면적이 늘어났다.
“여기 압착기에서 8할의 물이 빠지게 되네. 물론, 계절에 따라 압착의 강도를 달리해야 할거네.”
그렇게 물을 뺀 종이는 압착 되어 눌러진 상태 그대로 건조실로 옮겨졌는데, 이 건조실도 이제까지는 없던 방식이었다.
전통 방식의 한지 건조는 물기가 있는 종이를 한 장씩 떼어내 벽에 붙이고 그 반대쪽 벽에서 불을 때 벽을 통해 전해지는 열기로 종이를 말렸다.
하지만 원종은 그렇게 불을 때 건조하는 게 아니라 건물 안에 빨랫줄을 수십 개 치고 그 빨랫줄에 옷을 걸듯이 종이를 널어 말리는 자연 건조법을 택했다.
“이렇게 말리게 되면 새끼줄의 모양이 종이에 남겨지지 않을까요?”
“맞네. 하지만 주름은 도침 작업(주름을 없애기 위한 두들기는 작업)으로 없앨 수 있네. 물론, 그 도침 작업도 자동으로 돌아가는 물레방아를 이용하니 사람이 크게 힘쓸 일은 없을 것이네.”
이미 방아를 찧어내는 모습을 보았기에 중들도 도침 작업이 편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계절이 건조할 때는 사나흘, 비가 오거나 습할 때는 보름까지도 종이를 말려야 하네. 말린 후에는 도침 작업만 하면 되니 이제까지 종이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인력이나 시간을 반 이상 줄일 수 있을 거네.”
중들도 제작 과정을 생각해보니 원종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이제까지의 힘들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제작법이 아니라, 재료의 손질도 크게 필요 없고 만드는 과정도 간단한 원종의 방법이 좋을 것 같았다.
물론 제대로 된 진짜 종이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전제는 있었다.
빨래 걸듯이 걸린 종이가 말라가는 동안에도 계속 맷돌을 돌려 닥나무와 버드나무, 갈대와 짚을 갈았고, 옷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천을 방아로 돌려 계속해서 종이를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줄에 널린 종이들이 다 마르자 종이를 걷었는데, 한지와는 다른 느낌의 두껍고 뻣뻣한 종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후 종이를 쌓아 도침 작업으로 물레방아의 부드러운 방아가 두 시진을 두들기자 종이가 얇아지며 크기가 늘어났고, 주름이나 자국이 사라진 매끈한 종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종이에 원종이 붓으로 글을 썼고, 좌우로 당겨보고 했음에도 쉽게 찢어지지 않았다.
물론 찢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찢으면 찢어지긴 했다.
“보게나 어떤가? 쓸만해 보이는가?”
“네. 신기하옵니다. 이런 쉬운 방법으로 종이를 만들 수 있을 줄이야.”
중들은 쉽게 만들어진 종이였지만, 쉽게 찢어지지 않는 종이라며 신기해했다.
전통 한지에는 부족하지만, 유럽의 전통적인 종이 제작법을 조선의 한지 방식과 잘 섞어 만든 것 같았다.
본래 유럽의 전통 제지 방식은 닥나무 같은 나무를 아예 넣지 않았고, 100% 면과 마 같은 천만으로 종이를 만들었다.
그래서 색이 희고 섬유질 간의 결합이 좋아 고급종이로 인정을 받았었다.
그런 섬유질 간의 결합에 닥나무나 짚의 섬유질이 들어가면 결합이 약해지지만, 유럽에는 없는 닥풀이란 것이 있었기에 그 결합력을 끌어올릴 수 있던 것이었다.
“재료 준비 작업에 사람이 고정으로 들어가 있고, 발틀을 뜨는 사람도 고정된다면 한 명이 하루 동안 150여 장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들 때는 어느 정도 가능했나?”
“예전 방식은 닥나무를 찌고 삶아서 피를 벗기는 작업부터 다 같이 준비를 해야 했기에 하루에 몇 장이라는 걸 계산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한 달에 500장 내외가 한계였습니다.”
“그럼 재료 준비 기일이 길기에 하루에 20장도 안 되었다는 말이군.”
단순하게만 양으로 계산해도 엄청난 생산 혁명이었다.
“준비 작업에 10여 명이 들어가고 발틀로 뜨는데 10여 명이 들어가면 하루에 1500장은 만들 수 있겠구만.”
“네. 이 방식대로 한다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하루에 한 명이 150장을 만들 수 있다면 10명이 하루에 1500장, 한 달이면 45,000장을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쉬는 날이나 업무 강도를 좀 줄여줘서 한 달에 4만 장의 종이를 생산하면 1년에 48만 장이었다.
조선 중기 명나라에 조공 되던 종이의 양이 병자호란 전에는 1년에 7,500권이었는데, 백면지 1권에 50장의 종이가 들어갔으니 375,000장의 종이가 조공으로 바쳐졌었다.
그런 조공 물량을 성도암에서 생산되는 종이만으로도 감당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 병자호란 후에는 청나라의 강력한 요구로 1년에 9만 권씩을 바치게 되었는데, 뇌물과 선물로 사용된 비공식적인 수량까지 치면 1년에 10만 권의 종이를 중국으로 보내야 했다.
효종은 이러한 종이 물량을 조지서(造紙署)에서 만들어 낼 수가 없자 전국의 절에서 종이를 만들어 바치게 했는데, 종이 만드는 고된 일을 이겨내지 못한 중들이 절을 떠나 도망치자, 절이 텅텅 비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이후 청나라가 중국 전역을 통일한 이후로 청나라에서 조선을 유화책으로 달래었는데, 다른 조공은 다 줄여 주었지만, 유일하게 조선의 종이는 계속 더 많이 바치도록 했다.
유화책을 하는 중에도 줄이지 못할 정도로 조선의 한지 품질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청나라가 원했던 전통 한지에는 비길 수 없지만, 저렴하게 생산이 가능하고, 두꺼워 양면을 쓸 수 있는 종이였기에 상품의 경쟁력은 충분했다.
성도암 같은 작업장을 3곳만 돌려도 내수 사용은 물론이고 수출품으로 팔 수 있는 특산품 종이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종이가 흔해진다면 책도 저렴하게 찍을 수 있을 터였고, 이제까지 금속 활자를 만들었음에도 인류의 발전에는 공헌하지 못했다는 조선 활자에 대한 가치평가도 달라지게 될 터였다.
한글로 만들어진 종이책을 보급하고, 아래에서부터 지식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토대의 조건을 이제 갖춘 것이었다.
“그럼 이 종이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만드신 시주의 이름을 붙일 것입니까?”
제대로 종이가 만들어졌다는 소식에 왕산사의 주지 도심 선사도 왔는데, 이 종이로 평판이나 명예를 챙길 것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아닙니다. 흔하게 볼 수 있고, 가격이 저렴해 흔하게 쓸 수 있다는 의미로 ‘흔하지(紙)’로 할 것입니다. 한자가 아닌 순수한 언문 이름입니다. 물론, 뒤의 지는 어쩔 수 없겠지요.”
“흔하지라. 부처님의 불법을 흔하게 여기라는 말처럼 귀한 종이를 흔하게 여기라는 뜻이군요.”
“그런 말이 있었군요. 그렇지 않아도 이 흔하지 종이로 언문으로 된 불경을 찍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한자나 천축어를 모르는 불자들이 쉽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미타불. 나의 불심이 얕아 알아보지 못했소이다. 시주는 부처님이 보내주신 분이셨구랴. 소승은 그것도 모르고 시주를 의심했었다니.”
도심 선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고 흔하게 볼 수 있게 언문 책을 만든다는 소리에 감탄을 했다.
“제 생각이 아니라 선원들이 그런 불경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그렇습니다. 중국에서 불경을 구한 선원들이 뱃길의 안녕을 기도드리고 싶어도 언문으로 된 불경이 없어서 제대로 부처의 가르침을 배울 수도 없었고, 기도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하더군요.”
“아, 깊은 산속에서 불도를 찾았으나, 넓은 바다에서 불도가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군요. 아미타불. 소승이 힘닿는 대로 불경을 언문으로 만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불경을 찍어주시기만 한다면, 흔하지 종이를 만들며 받기로 한 곡식은 반만 주셔도 됩니다.”
“네?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일반 교양서를 찍으며 불경도 찍어주겠다고 한 것인데, 부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일이니 대가를 반만 받겠다고 하니 엄청난 이득이었다.
“본래 중이 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중의 일인데, 이 흔하지 종이를 만드는 것 자체가 중의 일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옵니다. 소승의 마음 같아서는 반도 받지 않고 싶으나. 중의 입도 입인지라 하하하.”
“그렇다면 아예 스님들 중에 배를 타고 불법을 전해주실 그런 스님은 안 계시겠습니까? 선원들의 마음도 안정시키고, 불법이 전해지지 않은 다른 나라에서 부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도 필요합니다.”
“아미타불. 그런 일이라면 소승이 종단에 연락을 하여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첩첩산중에 틀어박혀 불도를 닦는 것이나 망망대해 배에 갇혀 불도를 가르치는 것이나 무엇이 차이가 있겠습니다. 무량수불.”
이왕 서로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대항해시대 서양의 배들이 신부와 전도사를 태우고 항해를 했듯이 스님을 태우고, 불심으로 선원들의 멘탈 케어를 하는 것이 괜찮을 듯싶었다.
***
“발틀의 두께를 두 치(약 6cm)로 해서 두꺼운 종이를 만들었습니다. 헌데, 시주님이 시킨 대로 만들긴 했사오나 이렇게 두꺼운 종이를 쓸 수나 있겠습니까? 책으로 만들면 두께가 아주 많이 두꺼워 집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책을 만들려는 종이가 아닙니다.”
원종은 두껍게 만들어진 종이를 살펴보곤 나무 자를 대어 칼집을 내어 접기 시작했다.
사각형에 손잡이까지 달린 치킨 포장 상자가 금세 만들어졌다.
그리고 미리 만들어 두었던 ‘춘봉 꼬꼬’ 도장을 양옆에 찍었다.
“그래. 이제 진짜 식문화에 제대로 된 변혁을 일으킬 수 있겠구나.”
원종은 치킨 상자를 아주 뿌듯하게 이리저리 둘러보며 좋아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닭을 잡아서 치킨을 튀겨서 주고 싶었지만, 절에 있다 보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저기 제조님. 그럼, 이제 종이와 종이함을 만드는 것이 끝났으니 한양으로 돌아가는 겁니까요?”
“그래 정기적으로 종이를 가져오는 날짜만 협의하면 된다.”
“휴우. 다행입니다요. 절에서 절밥만 먹다 보니 맥아리가 없어져서 살이 빠져 죽을 뻔했습니다요.”
“그러고 보니 자네 제대로 된 비건... 아니 절밥 한번 배워 볼 텐가?”
< 218. 종이 패키지가 필요합니다만.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