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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쉐프 조선을 부탁해!-217화 (217/327)

< 217. 종이 패키지가 필요합니다만. (1) >

“아니, 무슨 놈의 절에 중은 몇 없고, 노비들이 더 많은 것입니까요? 이 많은 노비들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요?”

철금이는 들판에서 땅을 고르고 있는 수십 명의 노비를 보며 놀라고 있었는데, 이 노비들이 다 절에 소속된 노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라에서 내린 것이니 어디서 난 것이 아니다. 어서 올라가자꾸나.”

사람들과 오르고 있는 곳은 포천의 왕방산이었는데, 이 왕방산 일대가 왕산사라는 절의 사원전(寺院田)으로 여기서 나는 재물로 왕산사가 운영되는 것이었다.

철금이가 놀라고 있는 이 사원전의 크기도 태조와 태종때 대규모로 개혁이 되면서 줄어든 것이 이 정도였다.

태조와 태종은 물론이고, 세종대왕 시절에도 이런 절의 재산에 대한 개혁이 있었는데, 면세전(免稅田)과 노비의 수, 수행하기 위해 상주하는 중의 숫자까지 규제하여 절의 힘을 뺐다.

그런 규제를 했음에도 오래된 고찰의 경우에는 가진 재산이 어마어마했는데, 이는 고려시대 사원전이 워낙에 크기도 했고, 그 사원전에서 나오는 재물로 고리대금업까지 했기에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절이 고리대금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선 초기 왕들에게 규제를 당하고 혁파를 당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 옳게 되었다는 생각이 되었다.

하지만, 양(陽)이 있으면 음(陰)이 있듯이 사원전을 받지 못한 절의 경우에는 재정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고, 그런 절의 경우에는 중들이 미투리 신발을 만들어 팔거나 종이를 만들어 절을 운영했다.

그런 작은 절에서 만들어진 미투리 신발과 종이가 모이는 곳이 이 일대에서는 왕산사였고, 한양의 경강상인(京江商人)들은 그런 미투리와 종이를 받아 방납 물품으로 사용했다.

공납 물품으로 조정에 올려야 하는 물량을 지방에서 못 맞추면 왕산사의 물건들이 아주 요긴하게 쓰이는 것이었다.

“그러니깐 시주께선 종이를 만드는 닥나무를 우리에게 주고, 우리는 종이를 만들어 시주에게 줬으면 한다는 말입니까?”

“네. 맞습니다. 물론, 종이 수량에 따라 곡식을 드릴 것입니다.”

왕산사의 주지승인 도심은 제조직에 있다는 소년의 제안에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조정에 종이를 만드는 조지서(造紙署)가 있는데, 절에 닥나무를 주고 만들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혹여 다른 양반들처럼 일만 시키고 약속하신 곡식을 주지 않으려고 야료(惹鬧)를 부리는 것입니까요?”

주지인 도심의 말을 들으니 양반들의 행패를 겪어 본 것 같았다.

“양반들이 절을 깔보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저는 그들과 다릅니다. 소생은 절의 스님들이 불법(佛法)을 공부하는 데 도움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서로의 이득이 있기에 이러는 것입니다.”

“서로의 이득이 유자와 불자가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만.”

“그런 유, 불교의 문제는 생각지도 않습니다. 그저 절은 종이를 만들어 주고 곡식을 받고, 저는 닥나무로 종이를 만들어 이득을 얻으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하오나, 이 조건이 너무 좋은 것 같아 의심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지인 도심은 내가 제시한 조건이 너무 좋다고 의심을 했는데, 이러한 도심의 모습에 쓴 웃음이 날 수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 양반들이 절에 들어가 두부를 만들어 내오라는 패악질은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었지만, 이미 조선 초부터 절에 난입하여 중을 때리고 못살게 구는 일은 횡행하고 있었다.

통치 이념으로 유교를 받아들인 태조 시절부터 불교를 전국적으로 폐(廢)하여야 한다는 신하들의 반발이 있었고, 태종 때에는 유학자들과 대신들이 들고일어나 허망한 불교를 없애버려야 한다고 외쳤었다.

허나, 태조가 조선을 창업하고 한양으로 천도를 가능케 한 도선비기(道詵秘記) 때문에 불교를 보호해 주었고, 태종은 중국이 불교를 믿으니 중국의 눈치를 봐야 한다며 불교를 보호해 주었다.

중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유학자들과 신하들은 그런 태종의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사원전과 노비의 수를 제재하는 명을 내리게는 만들었었다.

이러한 억압과 유학자들로 대변되는 양반들이 절과 중들을 깔보는 상황이니 주지인 도심의 의심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탁발을 돌아야 하는 스님이 있으면 우리 춘봉 상단에 보내주시오. 우리 춘봉 상단은 불교를 배척하지 않는다는 것을 만인들 앞에서 보여주겠소.”

나름의 호의를 베풀겠다는 이야기에도 꿈쩍하지를 않았다.

“그리고, 천축이나 중원으로 불경을 구하러 가는 스님이 있다면 우리 상단의 배로 태워 드리겠소. 그리고, 활자 인쇄의 기술을 우리가 가지고 있으니 불경의 인쇄에도 도움이 되겠소이다. 이 정도면 내가 농을 하는 게 아니라는 믿음이 생기십니까?”

이런 원종의 모습에 진실함이 보였는지 도심도 한번 믿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관세음보살. 소승이 다른 양반들의 패악에 눈이 닫혔던 것 같습니다. 그럼 어떤 종이를 만들어 드리면 되겠습니까? 아예 종이를 만드는 승려들을 불러 모으도록 하겠습니다.”

도심의 명으로 주위 산의 암자에서 종이를 만드는 승려들을 불러 모았는데, 모여든 승려가 20여 명이 넘었다.

“종이를 만드는 중들이 참으로 많군요. 한데, 저 주지의 말처럼 조정에 조지서가 있는데, 여기에서 종이를 만들어야 하옵니까? 그리고 저는 왜 여기에 데리고 오신 것입니까요?”

“바로 이거 때문이네.”

자신을 종이 만드는데 왜 데리고 온 것인지 궁금해하는 철금 앞에 한자(약30cm) 크기의 함을 내놓았다.

철금이는 함을 열어 보려고 했으나 일반적인 함과는 여는 방법이 달라 한참을 끙끙거리다 겨우 함을 열 수 있었다.

한데, 열린 함의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제조 어른 이게 무엇인지 도통 모르겠습니다요.”

“종이로 만든 함으로, 그 종이함을 만들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네.”

철금은 말을 듣고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만, 종이로 만든 함이라는 말처럼 들어 보니 확실히 나무로 만든 함보다 가벼웠다.

“철금아 한양 육조 거리에 먹거리를 파는 장터를 만들게 되면 어찌 되겠느냐?”

“그야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릴 것이옵니다.”

“그렇지. 가패 때도 그랬었지. 하지만,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남자는 길에 그냥 서서도 음식을 먹을 수도 있지만, 여인들은 그러지를 못하더구나.”

“그렇지요. 여자가 입을 벌려 뭘 먹는 모습이 색정적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보니 어쩔 수가 없지요.”

“그래. 그런 여인들과 집에서 나오지 못하는 병자들을 위해서 이 종이 함을 만드는 것이다. 네가 만드는 닭고기 꼬치를 이 종이함에 넣어 가 집에서 가족들과 같이 먹는다면 어떻겠느냐?”

“그렇게 되면 장터가 북적거리고 하더라도 상관없이 집에서 가족들과 편하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사옵니다.”

“그래 이걸 포장이라고 한다. 이전에는 음식을 포장해서 간다는 개념이 없지만, 남녀가 한자리에서 같이 먹지를 못하니 이렇게 포장해서 가는 것을 장터에 도입할 것이다.”

“흠. 좋은 생각 같습니다. 하지만, 이 종이함을 만드는 데 돈이 들지 않겠습니까요? 문외한인 저도 종이를 만드는데 큰돈이 든다는 것을 압니다요.”

“어느 정도 돈이 들겠지. 하지만, 이 종이함을 만듦으로 해서 다른 종이도 쉽게 만들 수 있게 될 것이니 거기서 나오는 이득으로 손해가 없어지게 될 것이다.”

**

“이제까지 종이를 만들던 방법은 너무 힘이 많이 드는 방법이오.”

원종은 24명의 승려를 데리고 미리 알아본 성도암이라는 암자에 도착해 종이 만드는 방법을 직접 보이게 했다.

그리고,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드는 종이를 보고 뱉은 첫마디가 힘이 많이 들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다들 종이를 만드는데 닥나무로만 만들고 있지만, 보릿짚과 귀리짚, 버드나무와 갈대까지 섞어서 쓸 것이네. 그리고, 이것도 같이 쓰네.”

원종은 소매에서 천 뭉치를 꺼내었는데, 다들 종이를 만드는데 왜 천을 꺼내는지 알지 못해 의아해했다.

“내가 만드는 종이는 이런 천이 들어가고 닥나무와 여러 가지 나무가 들어가는 종이요. 그리고 만드는데 고되지 않을 것이오.”

“저기. 시주님 말 중에 죄송하오나, 갈대를 넣어 만드는 노화지(蘆花紙)나 보리 짚으로 만드는 고정지(藁精紙)는 만들어 보았기에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되지 않게 종이를 만드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맞습니다요. 춘봉 상단의 일꾼들이 돕는다고 해도 도침(두들기는)과정의 경우에는 어깨가 빠지게 두들겨야 종이에 주름이 없어지지 않습니까요. 아무리 아는 것 없는 중이라지만, 놀리지 마십시오.”

“놀리는 게 아니네. 농을 하고자 내가 여기까지 왔겠는가? 그렇게 사람의 인력이 들어가야 하는 도침 작업이나 도해(물기 제거를 위해 두들기는 것) 작업에 사람이 아닌 기계를 쓸 것이네.”

중들에게 손짓하여 성도암 경내를 조금 벗어났는데, 물소리가 들렸다.

“우선 그런 힘든 작업을 기계로 할 수 있게 이 계곡에 물레방아를 설치할거네. 자동으로 돌아가는 방아를 만들어 둔다면 도침과 도해 작업에 사람이 두들기는 일이 사라질 것이네.”

물레방아를 설치하여 힘든 일을 줄이겠다고 하자 그제야 중들은 이 어린 양반이 제대로 뭘 하려고 왔구나 하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닥나무를 삶아서 흑피와 백피를 나누는 것도 할 필요 없네. 김에 찌는 것도 하지 않네.”

“네? 그게 말이 되는 것입니까? 아, 설마, 중국에서 만드는 것처럼 맷돌에 나무를 갈아서 만드시겠다는 것입니까?”

“맞네. 그렇게 하면 일이 확 줄어드네.”

“하오나, 그렇게 하면 종이가 잘 찢어지게 되고 오래 가지 않게 됩니다. 그 방법을 알면서도 쓰지 않는 이유입니다.”

“잘 아는구만. 그대의 이름이 뭔가?”

“중해라는 법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해 그대의 말처럼 조선의 종이가 중국에서 인기가 있는 것은 그 질김의 차이 때문이네. 맷돌에 갈지 않고 일일이 수작업으로 닥나무를 손보고 했기에 질겨서 잘 찢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장점이지. 하지만, 내가 원하는 종이는 그런 질긴 종이가 아니네. 내가 원하는 것은 쉽게 만들 수 있는 종이네.”

“소승들은 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질기고 좋은 종이를 만드는 방법이 있는데, 더 품질이 나쁜 종이를 원하신다고 하시는 겁니까?”

“모든 이들이 다 질기고 품질 좋은 종이를 원하는 게 아니오, 잘 찢어지지만 싸고 마음대로 쓸 종이가 필요한 경우도 있는 법이오. 우선은 다들, 산 아래에서 방앗간을 지을 자재를 옮기는 것부터 도와주시오.”

중들은 원종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우선은 자재를 옮기는 일을 돕기 시작했고, 물레방아를 만드는 일까지 나서서 도왔다.

그렇게 시작된 왕방산의 물레방아 공사는 일주일이 걸렸고, 원종의 명으로 한양에서 실어 온 2m 크기의 화강암 맷돌이 성도암 경내에 설치되었다.

닥나무와 보리의 짚, 버드나무를 맷돌에 갈기 위해 승려들 4명이 매달려 맷돌을 돌렸고, 그렇게 갈려진 것들은 뜨거운 가마솥에 끓여져 걸러졌다.

“정녕 잿물에 넣지 않아도 되는 것이옵니까? 중국에서 만드는 방법과도 다르옵니다.”

“중국의 방식이 아니니 잿물에 넣지 않아도 되네. 자네들은 노란 접시꽃인 ‘황촉규’나 제대로 가져와 닥풀을 만들어 주게나.”

중들은 황촉규의 뿌리를 찧어 물과 함께 발로 밟아 닥풀을 만들었는데, 끈적거리는 이 닥풀이 섬유질을 붙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설마 바로 이 물에서 채를 걸러 종이를 만드옵니까?”

“아니네. 저 물레방아를 왜 만들었겠나? 일단 이 면포와 마를 잘게 자르게나.”

중들을 동원하여 한양에서 실어 온 자투리 천을 잘게 자르게 시켰고, 그 잘린 천들을 뾰족하게 가시가 박혀있는 방아에 넣었다.

쿵쿵쿵 찧어대는 가시 박힌 방아질에 자투리 천들은 금세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이 가시 방아에 하루를 찧고, 둥근 방아에 다시 하루를 찧어야 하네. 그리고 곤죽처럼 되면 그것을 닥풀에 섞고 가마솥에 걸러진 나무와 짚 가루들과 섞어 채를 뜨면 되네.”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종이 만드는 방법이온데, 정녕 이 방법으로 종이가 만들어지는 겁니까?”

“물론이네. 그러니 믿으시게나.”

원종이 중국의 제지술까지 알고 있는 중들에게 큰소리를 치는 이유가 있었는데, 이 자투리 천을 넣어 만드는 제지술이 바로 프랑스의 제지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종이에는 구텐베르크의 성경이 인쇄되었으니 견뢰도는 충분했다.

< 217. 종이 패키지가 필요합니다만.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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