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 해적과의 조우. >
“아마도, 우리를 북경에서 온 대신들의 대리인으로 보는가 봅니다.”
“대신들의 대리인?”
“네. 상단주께서 가지고 있는 표찰이 서창에서 나온 표찰이지 않습니까? 그걸 본 관리들은 아마도 우리 뒤에 서창의 태감들이 있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김일휘의 이야길 듣고 보니 머리가 돌기 시작했다.
감합무역으로 무역을 국가에서 관리하고 운영하게 되면, 자연스레 감합무역의 감합부(勘合符)를 얻기 위해 줄을 설 것이었다.
이 감합부도 현대인의 관점에선 자기 나라 국왕의 명을 받고 조공무역에 참여한 상인이 들고 올 것으로 생각하지만, 동아시아에서 조선을 제외하곤 몇십 년 이상 가는 왕조가 몇 없었다.
현대 한국의 광역시만 한 작은 영토를 가진 작은 나라들도 동남아시아에는 많았기에 그러한 나라들이 조공으로 오는 경우에는 애초에 감합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이들은 자연스레 감합부를 관리하는 관리나 감합무역을 총괄하는 관료들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러한 상인들 덕에 관료들의 재산은 착실하게 늘어나고 있을 터였다.
뒷돈을 주고라도 감합부를 받게 된다면 북경이나 남경에 가서 장사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기기에 북경의 대신들에게 줄을 대는 상인들이 있을 것이고, 항주의 관리들은 내 표찰을 보곤 서창에 줄이 닿아 있는 이로 여기는 것이었다.
결국, 서창이란 호랑이를 뒤에 두고 호가호위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해금령으로 인해 이득을 보는 특정 집단이 생긴 것이었다.
본래 이 해금령은 왜구로 인한 해안가의 치안과 방어를 위해 내렸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후왕박래(厚往薄來 갈 때는 후하게 하고, 올 때는 박하게 한다)의 기본 원칙을 따랐다.
신하국을 자처하는 이들은 가볍게 오더라도 후하게 쥐여 보낸다는 원칙인데, 천자를 따르기 위해 찾아오는 신하국에 덕을 베풀겠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 해금령으로 인해 세계로 뻗어 나갈 기회를 본인들 스스로 막아버리는 자충수가 되어 버렸고, 나라의 부(富)는 축나고 신하들의 부(富)는 늘어나게 되어 버렸다.
뭐 덕분에 서창의 위세를 빌어 경덕진에서 나오는 저렴한 자기들을 정크선에 가득 실을 수 있었고, 신라방 사람들의 도움으로 의약재도 잔뜩 실어서 남방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
“참군 나으리! 정우현과 정좌현에서 흩어진 배들이 보이는데, 뭔가가 이상합니다.”
누전선의 돛대 위에 올라가 망을 보는 참돌이의 말에 염호진은 망원경을 받아 들었다.
오목렌즈와 볼록렌즈를 가죽으로 말아 만든 원시적인 망원경이었기에 상이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눈으로 보는 것에 비해 더 멀리 볼 수 있는 장점은 확실했다.
망원경을 통해 보니 네댓 척의 배들이 흩어져 움직이지 않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뭔가 이상했다.
바다에서 배들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저리 흩어져 가만히 있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바다에서는 늘 만일을 대비해야 했다.
“정우현으로 배의 방향을 변경하고, 다른 배에도 알려주거라. 돛잡이와 조타수는 저 배들에 둘러싸이지 않도록 방향을 바꿔가며 한쪽으로 둘 수 있도록 계속 방향을 변경하라!”
염호진의 말에 화포대를 맡은 최공손도 움직일 수 있는 화포를 좌현으로 움직여 언제든지 화포를 쓸 수 있게 준비하기 시작했고, 방패수와 활과 노를 쓰는 이들도 자기 자리를 찾아 서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신호 깃발을 통해 다른 배에도 알려졌는데, 정크선에 탄 원종에게도 보고가 되었다.
원종은 배에서 독방을 쓰고 싶어 정크선으로 옮겼는데, 용강 조선소에서 받아들인 조선 기술자들도 정크선에 함께 타고 있었다.
정크선에 타고 있던 수군들과 화포대도 중국에서 얻은 화포 2문을 좌측으로 옮기고는 만반의 준비를 했고, 원종도 그간 쓰지 않던 활을 챙겨 들고 나섰다.
멀리 보이는 배들이 단순한 고기잡이배나 무역선이라면 이런 준비가 헤프닝처럼 넘어갈 수 있겠지만,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자 네댓 척이라고 생각했던 배들이 아홉 척으로 늘어났다.
이런 아무것도 없는 바다에 아홉 척이나 있자 이들이 해적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놈들도 우리를 발견했는지 돛을 올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아홉 척 중 두 척은 누전선 만큼 큰 배였다.
“이거 누전선 세척에 정크선 한 척이면 남방항로에 충분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니구나.”
항주에서 내린 김일휘가 있다면, 이런 왜구의 규모에 대해 이야기라도 들을 수 있는데, 항주에서 내려 버렸기에 모든 왜구의 규모가 저 정도인지 알 방법이 없었다.
놈들도 우리가 오른쪽으로 돌아 한쪽으로 자신들을 두려는 것을 아는지 최대한 넓게 분산하듯이 퍼져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참군 나으리 한쪽으로 두고 지나치는 것이 안 될 것 같습니다요.”
“흐음. 크게 선회하여 회전진으로 돌린다!”
염호진은 적들을 좌현에 두고 치고 빠지는 작전이 되지 않자 배를 원형으로 돌려 네 척의 배로 원을 만드는 방어진으로 움직임을 바꾸었다.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인 누전선은 바닥이 뾰족한 첨저선에 비해 큰 파도에 약했지만, 그와 반대로 배를 회전시키는 것은 바닥이 뾰족한 첨저선보다 빨랐다.
이러한 회전 속도의 이점을 가졌기에 원을 그리듯이 도는 회전진을 선택한 것이었다.
배들이 가까워져 갑판에 탄 이들의 모습을 서로 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는데, 봉두난발에 칼을 들고 있는 놈들이 한가득하였다.
놈들은 기세를 올리겠다고 소리를 지르고 혀를 내밀며 소리를 질러대었는데, 왜놈들처럼 머리를 밀고 훈도시를 걸친 놈들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옷을 걸친 놈들도 보였다.
아마도 왜국 본토에서 온 왜구들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모인 해적들인 것 같았다.
“놈들이 이쪽을 대장선으로 알았나 봅니다. 도련님은 제 뒤로 오십시오. 참군나리가 놈들을 쫓을 때까지 버텨야 합니다요.”
방패수 청남이가 귀면 방패를 들고 내 앞으로 섰는데, 청남이 말대로 큰 정크선이 대장선인 줄 알았든지 아니면 화물이 가장 많다고 여겼는지 아홉 척 모두 우리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덕분에 누전선들은 회전진으로 돌다가 방향을 바꾸어 다시 놈들을 좌현에 두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생각지도 못한 모루와 망치 전술처럼 되어 버린 것이었다.
[콰앙!] [쾅!]
갑판에 임시로 만들어진 화포대에서 불이 번쩍였는데, 방패 틈 사이로 보니 쏘아진 대장군전 두 발 모두 해적선의 옆으로 떨어졌다.
이 시대 화포 자체의 정확도가 떨어지기도 했지만, 정크선에 실린 화포도 중국제이다 보니 더 안 맞는 듯했다.
비록 화포가 피해를 주지는 못했지만, 해적들은 화포 소리에 놀라 기세가 죽어 버렸는데, 덕분에 활을 가진 이들이 용기를 내어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원종도 방패 틈으로 보며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는데, 순간 우지끈하는 소리가 들리며 정크선이 휘청했다.
“이런! 충각(衝角)에 꿰뚫린 것 같습니다.”
급히 뱃머리 아래를 보니 해적선 한 척이 정크선에 들여 박혀 있었다.
“아이씨! 이거 은 200냥짜리라고 이 새끼들아!”
정크선 선체에 다 닿은 해적선에서 갈고리가 던져지고 해적 놈들이 정크선에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퍼퍼펑!][퍼엉!][콰쾅!][쾅!]
순식간에 사방을 울리듯이 폭음이 들려왔는데, 돌아간 누전선 세척에서 발사된 화포 소리였다.
모루와 망치처럼 뒤에서 해적선을 노린 누전선의 화포는 그 위력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현자총통에서 발사된 장군전 4발이 제대로 해적선에 박혀 들어가며 해적선들이 휘청거렸다.
[콰앙!][퍼엉!]
이어 정크선에 있던 화포에서 다시 불을 뿜었는데, 이번에는 해적선 갑판에 있던 해적들이 떡메에 맞은 떡 반죽처럼 널브러지기 시작했다.
“조란탄이었구나!”
첫발에서 장군전이 맞지 않자 쇠 구슬처럼 작은 조란환을 넣어 발사한 것인데, 그게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정크선 갑판으로 오르기 위해 줄지어 있던 해적들이 싹쓸이 되다시피 자빠져 버린 것이었다.
“갈고리를 잘라내어라!”
방패수인 청남이가 해적들의 화살이 날아오지 않자, 큰 칼을 들고 갑판에 걸쳐진 갈고리 줄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방패수들도 방패를 놔두고 칼을 빼 들고 뱃전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배에 올라오는 해적 놈들을 막기 시작했다.
[퍼엉!][콰쾅!][쾅!]
다시 누전선에서 장군전과 조란탄이 쏘아지자 해적들은 이기기 글렀다고 여겼는지 배를 돌리기 시작했다.
물론, 장군전에 맞아 조타 키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두 척은 꼼짝하지도 못했고, 한 척은 벌써 가라앉고 있었다.
정크선의 뱃머리를 충각으로 공격했던 배도 배가 끼어 꼼짝달싹 못 했기에 움직일 수 있는 다섯 척이 뱃머리를 바꾸어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누전선에서 불화살이 날아와 돛을 태워 버리자 제대로 도망치지 못하고 배 위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혼란에 빠진 듯했다.
참군 염호진의 배가 급히 우리 쪽으로 왔으나 괜찮다고 손을 흔들어 주고 장내 정리부터 하라고 했다.
“뱃머리는 어떤가? 침몰하겠는가?”
수군들이 선내로 들락거렸는데, 배가 살짝 기울어지긴 했지만, 가라앉는 느낌은 없었기에 어느 정도는 안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크선에 타고 있던 조선 기술자들이 올라왔는데, 몸이 흠뻑 젖어서는 괜찮다고 보고했다.
“더는 물이 들어차지 않습니다. 박혀 있는 돌격 선을 빼내기만 하면 연안으로 움직여 고칠 수 있습니다.”
정크선은 조선의 한선들과는 달리 내부에 격벽이 있어 한쪽이 부서지더라도 다른 쪽으로 물이 넘어오지 않았는데, 이런 격벽 구조가 배를 살린 것 같았다.
어쩌면 해적 놈들도 이런 격벽 구조를 알기에 정크선에 돌격선을 들이박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크선을 정리하고 보니 해적선들도 정리가 되고 있었다.
반항하는 해적 놈들은 화살로 쏴 죽여 버렸고,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이들과 물에 빠진 자는 건져 올려 줄에 묶기 시작했다.
사지 멀쩡한 놈들이 120여 명에 달했는데, 일어서지 못하는 자들은 그냥 바닷속으로 던져 버렸고 시체들도 그대로 바다에 던져 버렸다.
장군전에 맞은 두 척이 가라앉아 일곱 척의 해적선을 나포할 수 있었는데, 조타 키가 고장 난 두 척을 빼면 다섯 척은 수리해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해적들의 배에서 포로로 묶여 있던 이들도 30여 명 있었는데, 대월에서 온 상인들과 인근에서 잡힌 중국인이라고 했다.
“이 배에 있는 물건은 모두 다 내 물건이니 손대지 마시오! 항주에가서 팔아야 하는 상품이오!”
포로로 있다 풀려난 대월 상인의 이름은 취엉청이라고 했는데, 자신들을 구해준 것에 대해서는 크게 감사하지 않고, 해적선에 있던 상품들이 다 자신의 것이라며 소유권을 주장하는데 핏대를 세웠다.
“어떻게 할까요?”
“상인이 들고 있던 감합부는 확인했나? 진짜 대월에서 인정하는 상인이 맞는지부터 봐야지.”
“해적들이 빼앗아 갔다고 합니다.”
“그럼, 신분을 증명할 수 없잖은가.”
염호진과 이야기 하는 중에도 취엉청은 해적들이 항복하며 내놓은 무기들을 가져가 자기 무리에게 주려고 했는데, 대충 보기에도 하는 짓이 꼴통이었다.
“저놈도 묶어. 예의로서 이야길 했다면 사정을 봐줬겠지만, 예의를 차려줄 만한 자가 아닌 듯하군.”
염호진의 눈짓에 수군들이 달려들어 취엉청의 일행들을 다시 묶었다.
놈은 시끄럽게 뭐라고 떠들어 대었는데, 입안에 거적때기를 쑤셔 넣어 조용히 시켰다.
“네놈들의 신분이 확인되지 않았으니 해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놈들도 손발을 같이 묶고 눈을 가려 갑판 구석에 던져두어라.”
취엉청의 일행 10여 명도 같이 묶어두니 중국에서 잡힌 20여 명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여인들이었고 험한 꼴을 당한 것 같았다.
“고향마을이 가는 길에 있으면 보내주겠다. 돌아갈 곳이 없다면 조선으로 데리고 가겠다. 어찌하겠느냐?”
“저놈들은 그럼 어찌 됩니까?”
“명나라에 현상금이 걸려 있다면 관아에 넘겨 목이 잘릴 것이고, 현상금이 없다면 노예로 팔 것이다.”
목이 잘리거나 노예로 팔릴 거라고 하자 여인은 웃으며 절을 했고, 다른 포로로 잡힌 사람들도 절을 했다.
“은인들이 조선으로 가자고 하면 가겠습니다.”
이런 여인들의 말에 총각 수군들의 입에 미소가 떠올랐다.
< 196. 해적과의 조우.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