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 이 시대의 네트워크. (2) >
조선의 도자기를 보면 상감 무늬가 들어가 있는 소수의 도자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청자와 백자는 민무늬 자기였다.
이는 도자기를 굽는 1,300도의 온도를 견디는 안료가 없기 때문에 표면에 그림을 그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선에선 상감기법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도자기의 겉면을 조각칼로 파내고, 그 파인 흠에 다른 흙을 채워 넣어 색을 달리하는 방식이었다.
하나, 상감기법으로 만드는 도자기의 제작법 자체가 어려웠기에 생산량을 늘리기가 힘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송나라 시절 전해진 청자를 주로 만들었는데, 세월이 흐른 지금의 도자기 유행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송을 이어 들어선 원나라는 용천청자라 불리는 송나라 때의 비취색 도자기보다 흰색의 백자를 더 선호했는데, 이는 몽골인들의 흰색 숭배와도 관련이 있었다.
몽골인들은 어머니의 흰 젓만큼 숭고한 것은 없다고 여겨 흰색이 가장 원초적인 아름다움의 색이라 생각했는데, 이런 흰색에 대한 추종으로 인해 추부백자라고 불리는 백자 자기의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이러한 원나라의 영향으로 조선에서도 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부여, 신라 때부터 흰옷을 즐겨 입어 왔던 민족성과도 어울렸기에 흰색의 백자가 조선에서도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선의 백자는 중국에서 만들어지는 청화백자와는 달리 안료가 없기에 민무늬 백자가 주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도자기의 표면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코발트 푸른색의 안료는 중국에서도 나오지 않았고, 유일하게 중동 이란의 카샨 산맥에서만 나왔다.
카샨 산맥은 실크로드를 다니는 상인들이 들리는 길이었기에 중동 상인들이 코발트 안료를 중국에 들여와 팔았고, 이 코발트 안료와 경덕진의 백자가 만나 청화백자라는 도자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조선에서도 세조 시절 명나라에서 구해 온 청화백자에 반해 이와 같은 청화백자를 만들어 내라고 명을 내렸었다.
이때의 코발트 블루는 회회청(回回靑)이라고 하여 전량을 중국에서 들여올 수밖에 없었는데, 그 값이 비싸 세조가 국내에서 만들 방법을 만들라고 한 것이었다.
이에 전라도 순천에 사는 구치동(丘致峒)이라는 인물이 1464년 토청(土靑)을 발견하여 이를 완수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지만, 그의 사후 예종, 성종 시절 국내의 토청 색이 회회청에 미치지 못해 푸른색이 아닌 검청색으로 나오게 되자 결국 회회청을 다시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 회회청 문제로 조선에서는 제대로 수출할 수 있는 청화백자를 만들어내지 못했고, 왜란을 겪으며 도공들이 끌려가 버렸기에 조선말 서양의 청화안료가 수입되기 전까지 제대로 수출할 수 있는 청화백자를 구워내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내가 코발트 블루 안료를 구해가고 회회청에 비해 철분이 많아 색이 검게 나오는 토청에 비소(As)를 섞어 색 보정을 한다면, 조선에서도 수출할 수 있는 청화백자를 내놓을 수 있을 터였다.
“흠. 푸른 안료라. 그걸로 본자기를 만들려고 하는 것인가?”
“맞습니다. 본자기에 푸른 안료로 그림을 그려 청화본자기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월에 생산되는 수량이 작기에 경쟁이 안된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무턱대고 안료를 줄 수는 없네.”
“그럼 어찌하면 안료를 구매할 수 있습니까?”
“조건이 있네. 북경에 올리는 물품을 제외하고 판매할 수 있는 청화본자기는 우리를 통해서만 판매할 수 있게 조건을 걸지. 그렇지 않다면 우리도 안료를 줄 수가 없어.”
“그런 조건이라면 좋습니다.”
처음에는 이 조건대로 청화본자기를 남경상인에게만 팔면 되었다.
하지만 자기의 바닥에 한글로 조선산이라고 남겨둔다면, 발걸음이 끊겼던 이슬람 상인들이 자연스레 벽란도로 오게 될 터였다.
벽란도에 이슬람 상인이 직접 와 도자기를 사 간다면 남경 상인이 직접 벽란도로 오지 않은 이상은 우리가 파는지 확인이 불가능할 터였다.
조선에선 인삼 외 특산품이라고 할만한 게 없었고, 그 수량 또한 부족했기에 이슬람 상인들이 오지 않았는데, 청화백자가 조선에서도 나온다고 알려지면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벽란도로 올 것이었다.
남경 상인들이 제안한 조건을 받아들고 춘봉 상단의 서명을 남겼다.
본자기 3세트를 팔고, 회회청 100근을 받았는데, 은 600냥이라고 생각하니 이 회회청만 토청으로 대체할 수 있어도 국부 유출은 줄어들 것 같았다.
“배로 바로 돌아가는 것입니까?”
“아니네, 서창 태감 왕직이 소개장을 준 왕척 순무에게 갑시다. 왕직 말로는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준다고 했으니 한번 가 봅시다.”
이 순무(巡撫)라는 관직은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로 지방의 군관이나 지방관을 감찰하는 일을 주로 하였는데, 조선으로 치면 관찰사와 비슷했기에 지방권력자였다.
그래서 조금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하기 위해 찾아가는 것이었다.
***
“화약을 달라는 말이요?”
남경에 머물고 있던 순무 왕척은 나라에서 교역을 금지한 화약을 달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네. 정화 태감의 뒤를 따라 영파를 지나 대월, 참파, 시암까지 가려고 하온데, 왜구들이 너무 설쳐대기에 화포를 쏘아 퇴치하였더니 화약이 필요하옵니다.”
“허허허. 화약을 달라고 하다니.”
아무리 사촌이고 자신을 순무에까지 이르게 밀어준 왕직이라곤 하지만, 화약은 그만큼 위험했다.
“북경에서 서창의 왕직 어르신께 이야길 하니 남경에가서 순무 어르신께 달라고 하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화포도 주실 수 있다면 구매하고 싶습니다.”
서창의 우두머리인 왕직은 이런 말 없이 그저 필요한 도움이 있을 때 가 보라는 말만 하며 소개장을 써주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길이 50m에 달하는 정크선이 생겼기에 지금 필요한 것은 화약이었고, 왕직이 진짜 그렇게 이야기했는지 바로 확인도 안 되었기에 일단 우겨보는 것이었다.
“화포와 화약. 흠. 이거 난감하구만. 조선에서 온 배에는 화포가 몇 개나 있나?”
“3척에 총 12문의 화포가 있습니다. 하오나, 이번에 용강 조선소에서 배를 하나 구매하였기에 거기에 무장할 화포와 화약이 없습니다.”
“흠. 3척이면 작긴 하군. 왜구들이 달려들 만해.”
“그래서, 순무 님께 찾아왔습니다. 이것은 순무 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미리 준비해둔 본자기 한 세트와 일전에 받아 두었던 홍삼을 순무에게 건네었다.
“으흠. 북경에 계신 형님의 간곡한 소개로 왔으니 화포 두 문과 200근의 화약을 주도록 하겠네. 서창에서 하는 일이니 알려져도 크게 문제는 될 것 없지만, 비밀로 해야 할 것이야. 내일 밤 배를 타고 병선이 드나드는 부둣가로 배를 몰고 오게나.”
“감사합니다.”
***
“머, 멈춰 보시오!”
순무를 만나 목적한 바를 이루고 나오는데, 우리를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조선 말을 쓰긴 했으나 명나라의 관복을 입고 있는 청년이었다.
“신라방 사람이오?”
관인은 내가 아닌 김일휘를 먼저 보았는데, 김일휘의 모자에 달린 꿩 깃털을 보고 신라방 사람인 것을 알아본 것 같았다.
“맞소이다. 산동 위해에 있는 신라방 사람이오. 그쪽은?”
“이제는 없어진 남경 신라방 출신으로 석군이라 하오.”
석군은 같은 신라방 사람이라는 것에 기뻐했다.
“남경의 신라방은 그럼 없어진 것이오?”
“그렇소이다. 신라사람들이 다 흩어졌고, 그래서 신라방도 없어졌소이다. 몇 년 만에 신라사람을 만나니 말이 잘 나오지 않을 지경이오.”
외국에 나갔을 때는 같은 나라 사람만 보아도 반갑다고 했는데, 다 흩어지고 몇 년 동안 보지 못한 동향 사람을 보는 것이라 석군은 아주 많이 반가워했다.
석군은 자신의 집으로 우리를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해줬는데, 우리가 왕척 순무에게 화포와 화약을 받아 낸 것을 알고 있었다.
“조선에서는 화약을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까?”
“화약을 만들 수는 있으나 초석, 염초가 부족하네. 유황이나 다른 것은 많으나 초석이 없어 만들어 쓰고 싶은 만큼 만들어 내지를 못하네.”
“아, 초석이 문제였군요.”
“중국에는 사천 땅과 감숙 땅에 초석 광산이 있어 가져온다고 하던데, 거기서 나는 초석을 가져와 남경에서도 화약을 만드는 것이오?”
“제가 군문에 있지 않아, 정확하게는 모르오나, 사천과 감숙, 산동에서 초석을 가져와 화약을 만드는 것은 압니다.”
“산동에 초석 광산이 있다는 겁니까?”
조선과 왜에는 없는 초석 광산이 중국에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한반도와 가까운 산동반도에 있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네. 임기시(临沂市)에 초석 광산이 있습니다. 장수성과 산동성의 경계에 있고, 운하가 가까워 남경을 비롯한 남부에서는 임기시에서 나오는 초석으로 화약을 만듭니다.”
급히 중원 전도를 꺼내어 산동의 임기시가 어디인지 보자 서해에 배를 대고 육로로 움직인다면 하루면 닿을 곳이었다.
서창의 왕직이 있을 때 미리 초석 광산에 줄을 대어 둔다면 훗날 화약이 필요할 때 초석이 부족해서 만들지 못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물론, 염초 밭이라고 하여 사람과 동물의 분뇨와 잿물로 만들 수도 있지만, 인도의 초석이나 중국에서 초석을 구입 해 올 수 있다면, 긴 시간 동안 염초 밭을 일구지 않아도 화약을 만들어 비축할 수 있을 터였다.
“산동 위해에 살면서도 초석 광산이 있는지는 몰랐소이다.”
“나도 물자가 들어오고 나가는 서류를 보고 알고 있는 것뿐이외다. 위해 신라방 이야기나 더 해주시구려. 요동의 발해방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참으로 신기하오.”
“항주에도 신라방이 있었고 100여 인이 있었으나 이제 몇 없소이다. 나도 항주 신라방에 가는 길에 들린 것이라 시간이 된다면 나와 같이 항주 신라방에 가는 게 어떻겠소?”
“좋소이다. 산동 위해는 멀지만, 항주는 가까우니 그래도 다녀올 수 있을 것이오.”
석군은 급히 휴직을 내고 가족들을 데리고 우리 배에 올랐는데, 병선이 드나드는 부둣가에서 화포와 화약을 받을 때도 석군이 아는 이들이 있어 일이 수월하게 끝이 났다.
이런 신라방 사람들이 있었기에 용강 조선소에서 정크선을 인수할 수 있었고, 산동 임기에 초석 광산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는데, 이런 인적 네트워크가 중국 교역지마다 있어야 했다.
중국인들과 직접 거래하기보다는 교역지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같은 민족에게 물건을 사고, 팔아 그들이 자생할 수 있는 자본을 만들어 줘야 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조선에서 나는 물산을 팔고 살 수 있어야 했는데, 조선에서 나는 것이 인삼밖에 없다 보니 자연스레 신라방이든 발해방이든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런 중국 교역지마다 인적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도 결국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이었다.
그리고 나도 신라사람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갓 옆에 꿩 깃털이라도 꽂아둬야 할 것 같았다.
***
“중국의 화포 크기는 천자총통만 하오나, 그 재질이 청동이 아니라, 통짜 쇠로 되어 있는 것 같사옵니다. 물론, 잘 깨지지 않는 연철이긴 하오나, 발포 시 충격이 쌓이면 화포가 터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중국 화포 두 문을 본 최공손은 화포가 생긴 것에 기뻐했으나, 그 재질이 아쉽다고 했다.
조선에서도 청동, 구리가 부족하여 크기가 큰 천자총통보다 현자총통을 주로 만들었기에 중국의 화포가 연철로 만들어진 것도 이해할만했다.
“다만, 중국의 화약은 조선 화약과 비교해서 손색이 없습니다. 초석과 유황의 질이 좋아서 그런지 훨씬 더 폭발력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건 다행이구만. 화약에 초석을 얻을 방법도 알아 왔으니, 왜구가 나타나면 그때 시험해 보게나.”
“왜구 놈들이 안 나타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요.”
수리가 된 정크선에 중국에서 얻은 화포 2문을 실었고, 누전선에서 여유분으로 들고 있던 화포도 한문씩 옮겨 실어 5문으로 장비를 했다.
큰 정크선에 누전선 3척이면 웬만한 왜구들은 화포로 정리가 될 것 같았다.
***
“정녕 이런 하품(下品)의 실과 도자기를 가져가도 돈이 되는 것이오?”
“물론입니다. 감합부(勘合符)를 가진 이들에게 파는 것도 다 이런 것들입니다. 상품(上品)으로 치는 물건은 정말 몇 개 없습니다.”
항주 신라방 사람 신철은 이런 하품의 상품이라도 본국에 가져가면 돈이 된다며 이런 물건을 사기 위해 상인들이 온다고 이야길 했다.
중국의 감합무역은 입항할 때 관리가 나와 황제의 도장이 찍힌 문서와 표찰을 확인했는데, 여기서 감합(합쳐서 살핀다)라는 말이 나왔다.
조공무역의 증거로 표찰을 반으로 쪼개 조공국에서 증표로 주었는데, 이것을 입항할 때 서로 표찰을 맞추어 확인되어야지만 입항이 허락되었다.
명나라의 해금령으로 인해 생긴 무역 방식이었다.
조선처럼 매번 사신단과 함께 오는 것이 아닌, 이런 조공무역을 허락받은 나라의 상인들만이 이런 표찰을 받았기에 항주와 영파에서는 표찰을 든 상인들의 배가 늘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배는 대련 발해방의 표식을 하고 있었기에 항구에 드나드는 데 문제가 없었고, 석군과 내가 왕직에게 받은 표찰이 있었기에 이런 감합무역과는 상관이 없었다.
“아마도, 우리를 북경에서 온 대신들의 대리인으로 보는가 봅니다.”
< 195. 이 시대의 네트워크.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