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 신선들이 먹는 것 >
김(金).
사실 김이라고 정확하게 규정된 해조류는 없다.
그저 김과 김파래 속에 속하는 모든 해조류인 홍조식물을 통칭해서 ‘김’이라고 부를 뿐이다.
한문으로는 해의(海衣) 또는 해태(海苔)라고 하는데,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문헌상의 첫 기록이 나온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한반도 사람들이 신라 시대부터 김을 채취해 먹었다고 쓰여있고, 중국의 본초강목에도 ‘신라인들은 허리에 새끼줄을 묶고 깊은 바다에 들어가 채취해 온다’라고 쓰여있었다.
‘김’이란 명칭은 병자호란이 끝난 인조 18년(1640년)때 전남 광양의 김여익이란 자가 해변에 떠밀려온 참나무 가지에 붙은 김을 보고 나무에 붙여 키우는 방식으로 김양식을 시작하며 상품화시킨 것이 유래였다.
김 양식에 성공한 김여익의 성씨를 빌어 ‘김(金)’이라고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러한 홍조식물인 해조류는 물에 젖어 있을 때는 검붉은 색을 띠는데, 열을 받아 색소가 파괴되게 되면 녹조 성분만이 남아 초록색으로 색이 변하는 것이었다.
숯불로 달구어진 놋쇠 뚜껑의 열기로 인해 초록색이 된 김은 마치, 산봉우리에 푸르게 자라난 녹음과 같은 모습이었다.
“이 김은 신선들이 산다는 나무의 숲을 뜻하온데, 산에 나무가 우거져 숲이 만들어지면 자연스레 나무에서 물이 나와 개울이 흐르게 되옵니다.”
미리 만들어 두었던 육수를 담은 주전자를 들어 산봉우리 사이로 물을 흘려 넣었다.
“이렇게 숲이 있고 물이 흐르게 되면, 수생 생물이 생기고 바람에 산초(山草)의 씨가 날아와 뿌리를 내리고 그 산초의 맛이 물에 스며들게 됩니다.”
미리 잘게 썰어 두었던 파와 양파, 배추, 쑥갓, 버섯을 넣어 산봉우리를 빙 둘렀고, 꽃게의 살을 발라 둥글게 만든 경단을 육수에 넣었다.
“이렇게 산초와 수생 생물이 생기면 이런 것들을 먹기 위해 네발 달린 짐승과 새가 모여들게 되고, 하나의 생태계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원종은 미리 핏물을 빼두었던 꿩고기와 돼지고기, 소고기를 꺼내어 육수에 넣었다.
육수는 이미 뚜껑 아래 숯불에 달구어져 허연 김을 뿜어내며 끓고 있었는데, 푸른색의 천이 덮인 탁자 위에 구름처럼 김이 솟아오르니 그 모습만 봤을 때는 신선들이 산다는 섬에 구름이 몰려와 맺힌 모양새 같았다.
“이렇게 신선들이 살 것 같은 신선도(神仙島)가 만들어지면 사람들도 그 경외심에 제단을 만들어 공물을 바치게 되는데, 콩을 갈아 만든 희디흰 두부 제단에 전분으로 만든 면을 올리게 되옵니다.”
두부와 당면이 육수에 들어가자 금세 육수가 줄어들었지만, 고기와 채소에서 육수와 채수가 흘러나왔기에 기름지고 군침을 삼킬 수밖에 없는 국물이 만들어졌다.
“형님에게 듣기로 만귀비님의 피부는 백옥과 같고 눈에는 총기가 흘러 선인(仙人)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해서 저는 신선들이 살고 있다는 신선도를 요리로 만들어 보았사옵니다. 선인과 같으신 만귀비님께 가장 어울리는 음식이라고 생각하옵니다.”
원종은 만귀비와 한부인이 음식을 먹을 수 있게 그릇과 수저를 챙기곤 뒤로 물러났다.
“내가 선인과 같으니 신선들의 세상을 음식으로 만들어 주다니. 오호호호. 늘 천세를 외치며 아부하는 자들과는 급이 다르구나. 어서 먹어보자꾸나!”
만귀비는 자신을 신선처럼 여기며 신선들의 세상을 요리로 만들었다는 것에 대만족했다.
웃어른인 한부인이 제대로 자리에 앉기 전에 젓가락을 들었는데, 시중을 드는 궁녀는 무엇부터 집어 드려야 할지 알 수 없어 곤란해했다.
세상에 처음으로 나온 신선로(神仙爐) 요리였기에 원종이 나서 국자로 음식을 퍼 넘겨주었다.
“신선도에서 만들어진 모든 생명의 근원은 이 숲과 물입니다. 바싹하게 구워진 김을 그냥 드셔도 되고, 육수에 담아 같이 드셔도 됩니다.”
[바사삭!]
녹색으로 바싹하게 구워진 김을 한 부인과 만귀비가 씹었는데, 씹기가 무섭게 가루로 녹아떨어지며 김 특유의 향긋하고 고소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오! 이런 맛이 있었을 줄이야. 조선에서 나고 자란 나도 처음 먹어보는구나.”
공녀로 명나라고 오게 된 한 부인도 김을 처음 먹어본다며 김의 고소한 맛에 감탄했다.
그리고 국물을 한 모금 맛보았는데, 고기와 채소의 깊은 맛이 우러난 탓에 감칠맛이 입안을 맴돌았다.
원종은 이후 팽이버섯부터 시작해서 채소를 그릇에 덜어 주었고, 고기도 게살과 꿩고기부터 돼지와 소로 이어지게 시중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국물에 푹 익히고 적셔진 두부와 당면을 건져 주자 곡물이 주는 단백함과 깔끔함에 두 사람은 과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배가 불러 물도 한잔 더 못 마실 정도로 배가 불렀다.
“이 땀을 보거라. 아주 만족했느니라. 뜨거운 음식을 바로 눈앞에서 조리하는 것도 좋았지만, 음식을 만드는데 이야기가 있고, 그런 이야기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신선들의 섬이라고 하니 더 마음에 들었느니라. 그래. 이 음식의 이름이 뭐라고?”
“신선로(神仙爐)이옵니다.”
“신선들의 화로라... 음 좋구나. 좋아. 찬 바람이 불어올 때, 기운이 없을 때 만들어 먹으면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음식이로구나. 숙수는 신선로를 만드는 법을 배워 익히도록 하게.”
만귀비는 신선로가 마음에 들었는지, 숙수들을 불러 일일이 어떤 재료와 어떤 순서로 만들어야 하는지를 배우게 했다.
사실, 이 신선로라는 음식은 중국에서 들어왔다는 말도 있고, 조선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졌다는 말도 있는 태생이 모호한 음식이었다.
조선 연산군 시절 허암 정희량이 사화를 피해 승려가 되었는데, 이때 ‘이천년(李千年)’이라는 이름의 승려로 천하를 유랑하였다.
그는 화로를 하나 들고 다니며 산과 들에서 얻은 채소와 풀을 물에 담아 화로에 익혀 먹었는데, 이 화로 그릇에 숯불의 불과 물의 음양 조화인 수화기제(水火旣濟)가 담긴다고 하며 신선의 음식이라고 했다.
해서 선인들의 조화가 스며든 음식이라고 하여, 이것이 바로 신선로의 기원이라는 것이었다.
승려 이천년이라는 자에 의해 천하에 알려진 신선로 요리는 그 맛과 차림이 좋아 궁에도 알려지게 되었는데, 궁중에서는 25개의 재료가 들어갔을 정도로 고급 궁중 전골 요리가 되었다.
이러한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음식이었기에 신선로를 먹으면 다들 좋아하였고, 그래서 ‘먹는 즐거움을 주는 탕’이라고 하여 ‘열구자탕(悅口子湯)이라 문헌에 기록되어 불리게 되었다.
아마도, 조선 초 도교의 영향이 남아 있던 때의 신선로라는 이름 대신 유교가 득세한 조정답게 이름에서 도교의 흔적을 지워 열구자탕으로 올린 것 같았다.
그리고, 특이한 화로(火爐)의 모양 때문에 조선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중국이나 중앙아시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도 있는데, 쇠그릇의 중앙에 숯불을 넣어 음식이나 물을 데워 먹는 그릇이 중앙아시아에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러시아의 사모바르(Samovar)나, 페르시아의 처이던(چایدان, châydân) 같은 숯불에 데워 먹는 찻주전자가 남아 있고, 몽골의 훠궈 문화권에도 이런 형태가 남아 있기에 아마도 데워 먹는 찻주전자가 조선에 전해지며 신선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설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 신선로란 음식은 명나라 만귀비를 위해 조선의 요리사가 만들어 보급했다는 것이 문헌에 남아 전해질 터였다.
***
“귀비님께서 치하하시며 후추 300근(약 180kg)을 내리셨소이다. 한부인께서 계시다 보니 그 자리에서 치하를 못 드렸소이다. 조선에서는 후추가 아주 귀하다고 하기에 특별히 내리신 것이니, 따로 그대가 필요한 것이 있다면 사정을 들어보라 하셨소이다.”
만귀비의 수족이자 서창의 우두머리인 왕직이 후추 300근을 하사했다며 알려주었는데, 이 가치가 쉽게 계산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항해 물품을 구하며 시장을 돌아다녔기에 후추 가격을 기억해 내었다.
분명 북경 시장에서 후추 100근에 백은 10냥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이 났는데, 300근이니 결국 은 30냥도 안 되는 금액을 내린 것이었다.
물론 이 300근을 조선에 들고 가게 되면 두 배 이상의 가격이 될 테지만, 후추의 가격이 너무 저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추 100근(60kg)이 은 10냥이니 쌀 3~5가마니의 가치밖에 되지 않았다.
후추의 가치를 논할 때는 같은 무게의 금과 같이 거래되었다고 할 만큼 후추의 귀함을 이야기했다.
한데, 이제는 한 줌도 아니고 100근이 은 10냥이라고 하니 왜 이리 후추 가격이 내려간 것인지 궁금했다.
“되물어 미안합니다만, 후추 가격이 왜 이리 내려갔는지요? 조선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가격입니다.”
“하하하. 그거야 당연하지 않소. 창고에 후추가 가득 쌓여 있으니 가격이 내려간 것이오. 귀비께서 후추를 내려주라고 할 때 의아했는데, 그대의 말을 듣고 보니 이해가 가는구려.”
태감 왕직은 후추가 비싸다고 하는 조선의 후진성을 비웃는 것처럼 웃어댔다.
“뭐, 조선에서 후추가 비싼 것처럼 우리도 후추가 비쌌던 때가 있었소. 하지만 그 시기는 이미 30~40년 전이라고 할 수 있소. 조선의 사신단이 매년 오기는 하나 매년 오는 사신들이 다 다르기에 그런 물가를 제대로 체감하지 못한 것일 거요.”
“30~40년 전이라고 하면... 아, 혹시 정화(鄭和)태감의 원정 이후입니까?”
“오! 맞아. 어찌 바로 아는 것이오?”
왕직은 내가 바로 정화를 떠올려 이야길 하자 이제까지 깔보던 표정을 지우고 놀랐다는 표정을 만들어내었다.
같은 환관이라 그런 건지 정화를 아주 좋아하는 눈치였다.
“후추의 가격이 100근에 백은 40~50냥 하기도 했는데, 정화 님이 참파와 대월에서 함대 가득 실어 온 이후 가격이 100근에 은 5냥까지 떨어지기도 했지.”
“정화 태감님이 돌아가신 지 30년이나 지났는데, 아직까지 그때 가져온 후추가 있는 것입니까?”
“물론이네. 다들 정화 님이 항해를 한번 다녀온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게 아니야. 수십 번이네. 정화 님이 직접 간 것은 7번인가 밖에 없지만, 함대를 나누어 수하들에게 항행시킨 것은 수십 번이지. 그때 가져온 후추와 단목이 아직도 창고에 가득하다네. 그래서 조선과 달리 후추값이 저렴한 것이야.”
이미 정화가 죽은 지 30년이 넘어가는데, 아직까지 후추가 창고에 쌓여 있다고 하니 정화 함대의 규모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 정화 태감께서 망망대해로 떠나가 모험을 하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정화 태감처럼 머나먼 곳으로 항해를 하고 싶어하기에 늘 공경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이거 그렇다면 궁형(宮刑)부터 받아야 하겠는데. 하하하. 그렇다고 바로 울상이 되면 쓰나. 하하하. 그런데, 자네는 왜 머나먼 곳으로 배를 타고 가고 싶은가?”
“그야 새로운 문물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전해 듣기로는 저 멀리 시암과 천축을 지나면 피부가 검은 묵인(墨人)들만이 살고 있다는 곳이 있다 들었습니다.”
“맞네, 맞아. 어찌 그걸 다 아는 건가. 허허. 이제는 아는 이들도 다 없을 터인데.”
왕직은 세월이 흘러 아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했는데, 그러고 보니 정화의 대항해에 대한 자료가 후대에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림을 보았습니다. 네 다리가 달리고 목이 긴 짐승을 그린 그림이었는데, 기린이라고 하더군요. 물론, 4신기인 기린이 아니라 다른 기린이라는 목이 긴 짐승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그런데?”
“귀비님께서 제가 필요한 것을 포상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럼, 정화 태감이 항해하며 남긴 기록들이나 그때 큰 배를 만들었던 조선 기술자를 구해 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항해기록? 흠. 있기는 한데, 그걸로 되겠는가? 그건 포상이 아닌 것 같은데. 그건 크게 돈이 되지 않을 것이야. 불알 없는 이가 세우고 기록한 것이라 다른 이들에게는 큰 가치가 없을 것이야. 다른 큰 포상을 이야기하게.”
“아닙니다. 저는 정화 님이 남기신 기록을 보고 싶습니다. 저는 정화 님을 따라 그 머나먼 곳으로 항해하고 싶습니다.”
정화가 남긴 항해일지를 구할 수 있으면 30~40년 지난 기록이라도 그 지역의 섭생이나 물길 혹은 왕조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씨족들에 대한 매뉴얼을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비법 노트와 같은 정화의 기록이었기에 반드시 필요했는데, 이러한 원종의 모습이 태감 왕직에겐 머나먼 바다로 떠나는 낭만에 사로잡힌 어린 소년의 열정으로 보였다.
“좋아. 환관으로서 비조(鼻祖)로 여김을 받으시는 분의 기록을 이리 좋아하니 내주도록 하겠네.”
< 187. 신선들이 먹는 것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