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 신선들이 먹는 법. (1) >
“자네에게 주긴 준다만 이걸 다 가져갈 수는 있겠는가? 아, 배를 타고 왔다고 했으니 가져갈 수는 있겠구먼.”
정화의 기록이 있다고 하여 따라온 왕직의 저택에는 넓은 장서고가 따로 있었는데, 그 장서고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책들이 정화 태감이 남긴 책이었다.
“정화님의 30년을 기록한 책이다 보니 이렇게 많은 것이었군요.”
“30년이 아니네. 정화님이 어릴 때 태감으로 궐에 들어온 기록부터 시작이니 거의 50년의 기록이라고 봐야지. 그리고, 절반 넘는 책이 이런 방식이야.”
왕직이 책을 꺼내어 보여 주었는데, 목간으로 대나무를 엮어 둥글게 말은 책과 두께감이 느껴지는 가죽 양피지로 되어 있는 책이었다.
종이가 아닌 목간과 양피지로 책이 되어 있다 보니 분량이 엄청나게 늘어난 것 같았다.
그가 보여 준 목간 책에는 연왕 주체의 군대에게 집안사람들이 다 잡혀 온 일부터 쓰여 있었다.
연왕 주체는 운남성(雲南省)을 점령하며 성인 남자는 목을 베였고, 어린 남자아이는 불알을 도려내고, 음경을 자르는 거세를 시켰는데, 정화의 글에도 거세에 대한 공포가 쓰여있었다.
당시의 운남성은 한족이 아닌 다른 이민족들이 사는 곳인 것 같았다.
그리고 궐에 들어가서 내시로서 어떤 교육을 받고 했는지가 쓰여 있었는데, 어쩌면 이런 내용들 때문에 정화의 항해일지가 후대에 전해지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거의 이천여 권에 달하는 책인데, 앞부분 몇백 권이 정화가 성장하며 궐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이라 뒷부분을 보지 않는다면, 그저 내시가 기록한 일기로 생각하여 잡서 취급을 받았을 터였다.
잡서로 취급받았다면 양피지를 재활용하기 위해 겉면이 벗겨지거나 해서 사라졌을 터였다.
그리고 조선의 평민이 한자를 모르듯이 중국의 평민들도 한자를 몰랐으니 이런 정화의 기록을 읽어보지도 못했을 터였고, 중국의 지식인들이라고 하는 이들은 책의 앞부분만을 읽어보고는 내시의 흔한 일기라고 생각하여 중히 여기지 않았을 터였다.
더해서 지금은 서창의 우두머리로 권력을 휘두르지만, 태감 왕직도 그리 오랫동안 권력을 누린 인물이 아니었기에 이후 책이 사라져 버렸는지도 몰랐다.
내가 정화의 책을 다 가져가 우리말로 번역해서 누구든 접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더 이득이었다.
그리고 한글로 된 정화의 책을 읽게 될 조선인들은 이 책으로 인해 대항해시대의 꿈을 꾸게 될 것이고, 그런 꿈을 이뤄보고자 배를 타기 위해 나서줄 것이었다.
그런 꿈과 희망을 이루기 위해 나서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런 용기 있는 이들로 인해 조선의 대항해시대가 열리기를 기대해야 했다.
왕직은 정화의 첫 항해가 기록된 책도 보여 주었는데, 대함선 63척 병사 2만 7,800명이 출항했다고 되어 있었다.
인도와 스리랑카까지 가서 2년 4개월 만에 돌아왔는데, 쓰인 것이 모두 진짜라면 범접할 수 없는 대항해 기록이었다.
“정화 님께서 대명의 강한 힘을 서역 천축까지 떨치고 오신 것이지. 아주 대단한 기록이지만, 그저 태감이 이런 일을 했다고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어. 이것이 나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워. 그래도 이 기록의 중요함을 자네에게 전해지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이야.”
“감사합니다. 저는 누구든 읽을 수 있게 여러 부를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오! 그렇게 해준다면야 나도 기쁠 것 같고, 어디 보자. 아니지. 아예 그 여러 부를 만드는 것에 금전적인 지원을 해주도록 하지. 이역만리 넘어 대명의 부강함을 과시했던 책을 새로 만들겠다고 하는 데 지원을 해주지 않으면 쓰나.”
“감사합니다.”
여러 부를 만들지만 한자가 아닌 한글로 만들 것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일단 돈을 준다고 하니 받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금전적인 지원을 주는 것이 귀비 님이 이야기하신 포상과도 들어맞는 것 같구만.”
왕직은 정화의 원양 항해가 명나라의 부강함을 조공국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한 것이라고 했지만, 사실 정화의 항해 목적에 대한 말이 많았다.
정난의변(靖難之變)에서 도망쳐 행방이 묘연한 건문제가 해외로 도망을 쳤기에 그런 건문제를 잡기 위해 원양 항해를 추진했다는 설도 있었고, 경제 문제라는 말도 있었다.
영락제가 조카를 밀어내고 황제가 되었지만, 4년간의 전쟁과 수도를 북경으로 이전하며 돈을 많이 썼는데, 당연히 재정이 좋지 못했다.
그래서 돈이 되는 향료 무역으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정화를 보냈다는 설이 가장 그럴듯했다.
정화의 대항해를 경제학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훌륭한 인플레 방지책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영락제는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는데 들어가는 자본을 대명보초(大明寶鈔)라는 종이돈을 찍어내어 메꾸었는데, 이 대명보초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온 것이었다.
초기 대명보초는 백은과 가치가 같았기에 대명보초 1000관은 백은 1000냥과 같고, 금으로는 250냥의 가치를 가졌었다.
하지만, 과도하게 찍어낸 대명보초의 가치가 폭락하여 대명보초 1000관에 백은 12냥, 금으로는 2.5냥에 달할 정도로 가치가 없어졌다.
물가가 20년 만에 100배가 오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인플레이션을 막아내고자 당시 가치가 컸던 향신료를 직접 가져오게 한 것이 정화의 대항해 이유였던 것이었다.
동남아에서는 나지 않는 비단과 도자기를 들고 가고, 올 때는 향신료와 상아, 보석 같은 사치품을 들고 왔는데, 이 물품들을 비싸게 팔며 대명보초를 회수하자 물가를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런 물가 관리 정책 덕분에 그 비싸던 후추가 100근에 은 10냥 대로 떨어질 수 있었던 것이었고, 명에서 후추를 사가야 하는 조선으로서는 저렴하게 구할 수 있으니 영락제와 정화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정화의 대항해처럼 1499년 세계 일주를 하고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돌아온 바스쿠 다가마의 배에도 후추가 가득 실려 있었는데, 그로 인해 리스본의 후추 가격은 이탈리아 베니스의 5분의 1수준으로 폭락하기도 했었다.
이후 동남아에서 후추를 가져온 용기 있던 자들로 인해 유럽의 후추 가격은 1kg에 6센트까지 떨어졌는데, 덕분에 부자들만 먹을 수 있었던 고급 향신료인 후추가 대중화될 수 있었다.
용기 있던 이들이 세상을 바꾼 것이었다.
***
일꾼들이 책들을 우마차에 옮겨 싣는데, 우마차 두 대에 겨우 실릴 정도였다.
목간과 양피지를 종이책에 한국어로 옮겨 적으면 절반 이상 줄일 수 있을 것 같긴 했는데, 그러려면 한자와 한글을 다 아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언년이와 진기에게 맡기면 될 것 같았지만 두 사람이 하다 보면 언제 끝이 날지 알 수 없었다.
아예 남방으로 향하는 배에 실어 배 안에서 번역하고, 한글을 수군들에게 가르쳐 필사하게 하면 될 것 같았다.
‘아니지. 이참에 목판 인쇄를 하는 게 맞으려나.’
이미 고려 시대 팔만대장경을 만들 정도로 목판 기술자가 많았고, 금속 활자 인쇄도 다 있는 기술이었기에 대량으로 찍어내는 것은 일도 아닐 것 같았다.
거기에 태감 정화의 책을 알리겠다고 해서 지원금까지 왕직이 준다고 하니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
“이리 앉게나.”
조선 상관에 만들어진 숙소로 돌아오니 사신사의 책임자인 서거정이 원종을 따로 불러 앉혔다.
“조선에 가서도 신선로라는 음식을 알릴 것인가?”
“네. 좌참찬 어른. 명나라의 귀인에게 칭찬을 받았고, 포상으로 책과 지원금까지 받을 것 같은데, 신선로라는 요리를 숨겨야 하는지요?”
“흐음. 나는 이 신선로라는 요리를 숨겼으면 하네.”
서거정은 아주 마땅찮은 표정을 지었는데, 왜 신선로를 숨겨 달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만 귀비가 칭찬을 했기에 사신단의 다른 이들도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자네가 만들어 둔 화로를 가져다가 신선로를 해 먹고 있네.”
조선에서 놋쇠로 화로를 만들 때 미리 몇 개를 더 만들어 왔기에 화로를 쓰는 것은 그다지 문제가 없었다.
“헌데, 그 신선로에 들어가는 재료가 문제일세. 다들 신선의 음식을 먹는다고 중국에서 나지 않는 김을 찾고 있고, 버섯도 종류별로 사며, 닭과 꿩, 오리, 돼지, 소고기를 골고루 갖추어 먹으려고 하네.”
“아, 신선로 요리로 인한 사치를 걱정하시는 것이옵니까?”
“그렇다네. 조선은 공맹의 도가 선비들의 길잡이가 되어주고 있지만, 도가의 영향은 아직도 남아있네. 명나라의 귀비와 황제가 신선로를 즐겨 먹는다는 이야기가 돌게 되면 어찌 되겠나? 신선이 되고자 혹은 황제와 귀비가 먹는 것을 먹어보고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신선로를 해 먹겠나? 물산이 부족한 조선에서 이러한 요리는 ‘악(惡)’이네.”
선비들과 양반들의 사치를 걱정하여 신선로를 악으로까지 규정하는 서거정을 보고 있으니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갑갑했다.
일견하기에는 서거정의 말처럼 신선로로 인해 도가의 사상에 심취해 옛날처럼 단약을 만들어 먹고, 신선로에 음식을 해 먹으며 향락에 젖어 사치하는 것이 가능성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이런 신선로를 해 먹기 위해서는 산(山) 모양의 화로를 만들어야 했고, 거기에 들어가는 김과 갖은 채소, 고기를 사야 했다.
그런 화로와 김, 채소, 고기를 사기 위해 돈 있는 자들은 재화를 지불할 것이고, 그런 재화가 흘러내려 공인과 채소를 재배하는 농민, 짐승을 키우고 잡는 백정들에게까지 재화가 흘러갈 수만 있다면 조선의 경제는 성장할 수 있을 터였다.
대한민국에 IMF가 터졌을 때, 무조건 허리띠를 졸라매고 아껴야 한다는 관념이 나돌 때 정부에서는 오히려 소비를 무작정 줄이면 안 된다고 공익 광고를 집행했었다.
건강한 소비가 일어나 돈이 돌아야 상업이든 공업이든 돌아간다는 것을 알리는 광고였고, 힘든 IMF 시정에 부자들이 돈을 많이 쓰는 것을 역겹게 보지 말라고 말이 나오기도 했었다.
그런 부자들이 돈을 써줘야 돈이 도는 것처럼, 이런 신선로 요리를 먹기 위해 양반들이 재화를 써줘야 했다.
그래야 상업이 발전할 터였다.
물론 이런 건강한 소비를 설명하여 상업이 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서거정에게 이야길 하면 아마도 다시 농업 기반의 조선에는 그런 상업이 아닌 농업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도돌이표 이야기가 시작될 터였다.
어떻게든 유교적 관계에 입각한 이야기로 서거정을 설득해야 훗날 조선에 돌아갔을 때도 신선로나 다른 비싼 음식들이 보급될 수 있을 터였다.
“좌참찬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혹시 숙소에 오셔서 신선로를 드셔 보셨습니까?”
“다른 이들은 신선로를 먹었지만, 나는 먹지 않았고, 내가 금지시켰네.”
“그렇다면 저와 같이 신선로를 먹어보시지요. 소생이 신선로를 하며 그런 사치에 대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신선로를 먹으면서 설명을 하겠다고?”
“네. 이참에 다른 분들도 모셔서 신선로를 같이 드시지요.”
신선로를 ‘악’으로까지 이야기한 서거정은 물론이고 사신단에서도 나이가 많은 이들 세 명을 더 불러 탁자에 앉혔다.
그러곤 만 귀비에게 접대를 한 것처럼 화로에 숯불을 넣었고, 조선에서 챙겨왔던 말린 김을 물에 불려 화로에 붙였다.
검적색의 김은 신선로의 열기에 의해 녹색으로 변했으며 화로에 부은 육수도 열을 받아 끓기 시작했다.
“사실 자네가 오길 아주 오랫동안 기다렸네. 서창의 태감은 무슨 말을 그리 오래 했는가?”
“저 김은 이제 다 익은 것 같은데 먹으면 안 되는가? 채소랑 고기는 언제 넣는 건가?”
만 귀비가 먹었던 신선로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다들 몸이 달았는지 젓가락을 들었다가 놓았다가 난리였다.
“만 귀비께 접대를 할 때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사실, 이 신선로는 아주 위험한 음식이옵니다.”
< 188. 신선들이 먹는 법.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