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면식의 시대. (3) >
고주원이 왕십리의 단무지 작업장을 보며 전쟁을 떠올린 이유는 작업장 안에 산처럼 쌓여 있는 무와 항아리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옛날 촉한의 승상 제갈공명은 순무를 수확해서 군량 군막의 천정에 닿을 정도로 쌓았다고 했었는데, 지금 작업장 안에 쌓여 있는 무가 군량처럼 보였다.
제갈공명은 공성전이 조금이라도 길어질 것 같으면 둔전을 실시하여 병사들에게 순무를 심게 했는데, 순무는 짧으면 파종 후 2~3개월 후에 바로 수확하여 병량으로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는 씨를 뿌려두기만 해도 잘 자랐고, 뿌리와 줄기 모두를 먹을 수 있으니 버리는 부분도 없어 병량으로 쓰기 좋은 작물이었다.
그래서 제갈공명이 남만과 촉 땅을 공략할 때도 병사들에게 둔전으로 순무를 심게 했고, 그렇게 순무는 중국 남부로 널리 퍼져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떤 지역에서는 이 순무를 제갈채(諸葛菜)라고 부르기도 했다.
물론, 무가 공격하는 쪽에게만 유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후한의 광무제가 역적 왕망을 물리치고, 황제가 된 이후에도 반란군으로 인해 시끄러웠는데, 이런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광무제는 장안을 비우고 출정을 했었다.
광무제가 없는 그 틈을 노려 반란군이 장안을 포위하였는데, 이때, 궁궐의 궁녀와 내시들이 궁의 정원에 무씨를 뿌려 무를 캐 먹으며 몇 개월을 버텨내었다.
결국, 장안으로 돌아온 광무제가 성을 포위한 반란군을 물리쳤고, 궁녀들이 성을 포위한 반란군에 굴하지 않고 무를 먹으며 버텨내었기에 무를 수절채(守節蔡)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렇게 공격과 수비 모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무였기에 군량으로 쓰기에 좋았고 병략을 좀 안다는 자들은 이후로 무를 군량으로 쓰기 위해 늘 무씨를 비축하였다.
그래서 임진왜란 시절 충무공 이순신도 군량으로 삼을 목적으로 무를 몇 번이나 파종했다고 난중일기에 쓸 정도로 무를 챙겼다.
식량이 부족한 이 시대의 ‘무’란 채소는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반찬 채소가 아니라 주식으로 먹는 구황 채소의 위치였다.
그런 무의 중요성을 알기에 고주원은 이 단무지 작업장이 전쟁을 준비하는 군 시설로 보이는 게 당연했다.
“사대문 인근에는 농사지을 땅이 없어 양주목 노원 면(지금의 월계동)에서 재배하여, 물길로 왕십리까지 옮겨 옵니다. 이렇게 동글동글하게 생긴 중국 무인 순무가 조선 무에 비해 수확이 빠릅니다.”
“수확이 많으면 이 순무를 다 심어야 하는 것 아닌가?”
“단순하게 물량으로 따지면 그렇지만, 순무는 길쭉한 저 무에 비해 딱딱하고 맛이 없습니다. 그래서, 순무는 잘게 썰어, 맛이 강한 단무지로 담그어 먹고, 길쭉한 무는 소금물에 담그어 동치미를 만들어 먹습니다. 물론, 길쭉한 무로 단무지를 만들어도 됩니다.”
“동치미는 만드는 법을 나도 알고 있네. 단무지를 만드는 것을 알려주게나.”
“네. 옛날 방식이라면 쌀겨와 소금을 섞은 것에 무를 재어 절임을 했습니다. 이후 맛을 위해 된장으로 다시 절였는데, 이 방식은 절이고 숙성시키는 시간이 필요하기에 절임을 먹기 위해선 두 달이나 걸렸습니다. 하지만, 이 노란 단무지는 수확하고 가공해서 만드는데 사흘이면 됩니다.”
원종은 무청을 잘라내고, 껍질을 벗겨 썰고 있는 아낙들을 지나 큰 가마솥 앞에 도착했다.
가마솥에선 투명한 액체가 끓고 있었는데, 단순한 물이 아닌지 그 김 냄새가 코를 찌를 듯이 독했다.
“독한 냄새는 식초로군.”
“네. 식초와 소금물 간수를 끓인 것입니다. 여기에 색을 내는 치자를 가루로 넣어 노란색의 식초 물을 만듭니다. 그리고 물이 식으면 항아리에 담긴 무에 부어주면 끝입니다.”
원종은 식초 물을 부은 지 하루가 지난 항아리에서 단무지를 꺼내었는데, 노란색의 치자 물이 예쁘게 스며들어 있었다.
칼로 삼등분해서 세 명이 나눠 먹었다.
아삭, 아삭!
“절여서 만든 ‘지’와는 달리 식초 물에 지를 만들면 이렇게 식감도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이 식초 물이 든 항아리에 계속 보관한다면 몇 개월 동안 비축해서 먹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물에서 꺼내어 말려도 오래 보관이 가능합니다.”
원종은 설탕을 넣지 않아 새콤달콤하지 않고 신맛만 나는 것이 아쉬웠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야길 듣고 보니 의외로 만들기가 쉬웠군. 한데, 이렇게 많이 만든 단무지는 어디에 쓰려는 건가? 군사 목적으로 비축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 그러고 보니 말린 곡물 덩어리인 건번이라는 것도 자네가 만들었다고?”
“네. 곡식 가루를 구운 건번과 이 단무지가 병사들의 식사가 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것을 군사용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걸로 장사를 해 볼 생각입니다.”
원종은 국수 작업장에서 들고 온 국수 다발과 단무지를 양손에 들었다.
“국수를 먹어보셨듯이 이 둘을 같이 먹으면 충분히 한 끼 식사가 됩니다. 한양의 번화가에서 국수를 팔 때 반찬으로 이 단무지를 내놓을 생각입니다.”
실제로 무는 탄수화물을 소화시키는 효소인 디아스타아제를 가지고 있어 밀가루 음식과 궁합이 아주 좋았다.
이후 둘은 원종이 국수 가게 자리로 봐두었다는 훈련원 앞으로 갔는데, 한양의 사대문 중 하나인 동대문 근처였다.
“동대문을 통해 들어오는 이들은 대부분이 경기도 인근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팔기 위해 한양으로 들어옵니다. 당연히 그들은 새벽 일찍 출발했을 것이기에 동대문을 통해 한양으로 들어오면 긴장이 풀려 배가 고플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럴듯하지만, 오히려 가지고 온 물건을 다 팔기 전에는 안 사 먹을 것 같은데. 들고 온 짐이나 농산물을 두고 어떻게 국숫집에 들러 마음 편히 있을 수 있겠소?”
“맞습니다. 그래서 앞쪽 공터를 사용할 수 있는 곳으로 터를 잡은 것입니다. 국수를 먹기 위해 짐을 놔두다가 바로 흥정하고 사고팔 수 있게 할 것입니다.”
“그럼, 국수 가게 앞에 난장을 펴겠다는 것인가?”
“네. 새로운 난장을 만들어 상권 자체를 새롭게 만들 것입니다. 경기도에서 들어오는 물자를 국수 가게 앞터에 잡아 둘 수만 있으면 자연스레 사람들이 모일 것이고 자연스레 상인들도 모일 것입니다. 춘봉 가패 주위로 다른 가패가 생겼듯이 우리 국숫집이 생김으로써 다른 국숫집이 들어서게 할 것입니다.”
“흠. 그렇다면, 밀을 갈아 말린 국수를 만든 것도 그런 국숫집에 국수를 팔기 위한 것이었나?”
“맞습니다. 그런 국숫집에 작업장에서 만든 국수를 팔 것입니다. 단무지도 팔 것이고요. 그렇게 한양에서 사간 국수나 단무지를 먹다 보면 전국적으로 국수와 단무지를 팔 수 있을 것입니다.”
원종의 말처럼 난장이 만들어지게 되고, 가패 골목처럼 여러 국숫집이 문을 열게 된다면 자연스레 사람들이 모여 국수 장사는 잘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거기다 저기 훈련원 사람들도 무시 못 할 숫자입니다. 훈련을 받고 나면 얼마나 배가 고프겠습니까? 휴식 시간에 후루룩~ 들이마시듯이 먹고 가기에는 국수가 딱 입니다.”
국수 장사를 위해 입지 조건을 따지는 것이 마치 나라의 도읍을 정하는 것 같이 논리적이었고, 미래를 내다보고 터를 잡는 모습에 대영일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자네는 상인인가? 벼슬아치인가?”
대영일의 뜬금없는 질문에 원종은 요리사라고 이야길 하고 싶었지만, 지금 하는 것을 보면 상인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아 상인인 것 같았다.
“저는 음식을 파는 상인인 것 같습니다.”
“음식 파는 상인이라···. 그럼, 상인이 파는 음식보다 음식을 파는 그 상인을 사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얼마에 살 수 있겠는가?”
“하하하. 저를 사시겠다는 말입니까? 제가 저를 팔지도 않겠지만, 제 몸값은 꽤나 비쌉니다. 하하하.”
“그렇게 웃지 말게, 농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네. 자네의 그 재주를 사고 싶네.”
“발해방의 근거지인 대련에서 제가 하는 가패같은 장사를 하고 싶으신 겁니까?”
원종은 자신의 재주를 사고 싶다는 말이 가패나 국수집의 프랜차이즈를 열고 싶다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였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네. 난 자네를 우리 발해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서 물어본 거네. 자네는 우리가 가진 것이 대련에 있는 발해방이 끝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리 발해방의 사업은 더 많아. 능히 일국을 건설할 정도는 된다고 보네. 우리와 함께 새로운 발해를 같이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떤가? 자네의 그 재주를 내 중히 쓸 것이네.”
원종은 처음에는 단순한 농담이나 장난, 아니면 가게를 열고 싶다는 그런 말로 여겼지만, 갑자기 숨겨진 사업이 더 있고 그 사업이 일국을 건설할 정도라며 무게를 잡고 이야길 하자 그제야 심각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제까지 같은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했기에 고주원을 사형이라고 불렀던 대영일의 신분이 고주원보다 높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물론, 처음 봤을 때도 대씨가 발해의 왕족 성씨이니 어쩌면 이 대영일이 발해의 왕족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이미 망한 지 몇백 년이 지난 나라의 왕족은 현대 한국에서 수두룩하게 봐왔었기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그런데, 새로운 발해를 같이 만들어 보자고 하니 뭔가 어이가 없으면서도 북방에서 뭔가를 획책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발해인들이 흩어지지 않게 자주 들려 달라고 했던 그 요구사항까지도 괜히 의심되었다.
“그 새로운 발해는 어디에 세우실 생각입니까?”
“당연히 요동과 만주네. 대련뿐만 아니라, 옛 땅인 동모산과 서경 압록부 일대에 발해인들이 모여 있어. 태조께서 그렇게 했듯이 발해는 고구려의 유민들이 중심이 되고, 여진인들을 받아들일 것이네. 물론, 조선인도 발해인이 되고 싶다면 기꺼이 받을 것이네.”
대영일의 말을 듣고 보니 마냥 헛된 망상은 아닌 듯싶었다.
정확한 규모는 모르지만, 내륙에 이미 거점이 있고, 대련에서 몇백 석의 곡식을 거래할 정도라면 나름의 저력은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상업 천시의 유교와 공신들로 대표되는 훈구파가 없다는 것, 상업 쪽의 수장으로서 내가 원하는 방식의 상업이나 요식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겠다는 것이 장점으로 와 닿긴 했다.
마음속에 웅심(雄心)이 있는 자라면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펴기 위해 대영일의 영입 제안에 마음이 움직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원종은 이미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자신으로 인해 역사가 뒤틀린다고 해도 자신의 존재만으로 역사에 없던 새로운 발해가 만들어질 리 없을 것 같았다.
기억을 뒤집어 봐도 조선 시대에 북방에서 발해 유민들이 새로운 발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훗날 1600년대에 후금의 누르하치가 대두되기 전까지 만주 지역은 그야말로 유목인과 반 정주인인 여진족들만이 사는 곳이었고, 특별한 역사적 이벤트도 없었다.
실패가 뻔해 보이는 대영일의 NEW 발해 건국에 인생을 걸 이유가 없었다.
잔뜩 기대하고 있는 대영일에게 거부 의사를 밝히려는데, 불현듯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이들을 돕는 만큼 이들도 나를 돕게 되는 일을 생각해 낸 것이었다.
기브 엔 테이크로 서로 돕는 방식이 된다면 내가 발해를 돕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문제는 그렇게 하려면 내가 아주 큰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
[작가의 말]
무는 따로 무과가 있는 게 아니라, 십자화과 배추 속(束)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배추의 뿌리가 굵어지는 돌연변이가 무가 된 것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김치, 깍두기를 담아 먹는 배추와 무는 1950~60년대 우장춘 박사님이 개량한 종자들입니다.
옛날 배추는 지금 배추처럼 속이 꽉 차지도 않았고, 잎도 많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자라지 못한 배추처럼 홀쭉했습니다.
무도 마찬가지로 가늘고 긴 왜무와 같았지, 먹음직스럽게 두께가 두껍지 않았습니다.
현재와 같이 개량된 이후로는 중국의 순무와 가늘고 긴 왜무, 유선형의 조선무 세 가지가 재배되고 있으며 조선무는 국물용과 김치용으로 긴 왜무는 단무지로, 동글동글하게 생긴 순무는 그 특징상 맛이 없어 여러 교잡을 통해 생식이나 건강식으로 먹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양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이나 히틀러도 군용 식량으로 무를 이용했는데, 세계 1차 대전 독일군이 1916~17년 겨울을 순무의 겨울(Turnip Winter)이라고 부를 정도로 겨울 동안 먹을 것이 순무밖에 없었던 상황도 있었습니다.
무를 그냥 삶아서 먹거나 갈아서 빵으로 만들어 주식으로 먹었답니다.
고대부터 근대까지 인류의 배고픔을 무가 곡식으로서 채워주었던 것입니다.
세계대전 이후 화학비료가 나오며 곡식들의 생산량이 폭증하자 무를 비상식량으로 쓸 이유가 없어졌고, 지금의 현대인들은 무를 식량으로 생각하지 않고 부가적으로 먹을 수 있는 반찬으로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 178. 면식의 시대. (3) > 끝
작가의말
무는 따로 무과가 있는 게 아니라, 십자화과 배추 속(束)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배추의 뿌리가 굵어지는 돌연변이가 무가 된 것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김치, 깍두기를 담아 먹는 배추와 무는 1950~60년대 우장춘 박사님이 개량한 종자들입니다.
옛날 배추는 지금 배추처럼 속이 꽉 차지도 않았고, 잎도 많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자라지 못한 배추처럼 홀쭉했습니다.
무도 마찬가지로 가늘고 긴 왜무와 같았지, 먹음직스럽게 두께가 두껍지 않았습니다.
현재와 같이 개량된 이후로는 중국의 순무와 가늘고 긴 왜무, 유선형의 조선무 세 가지가 재배되고 있으며 조선무는 국물용과 김치용으로 긴 왜무는 단무지로, 동글동글하게 생긴 순무는 그 특징상 맛이 없어 여러 교잡을 통해 생식이나 건강식으로 먹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양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이나 히틀러도 군용 식량으로 무를 이용했는데, 세계 1차 대전 독일군이 1916~17년 겨울을 순무의 겨울(Turnip Winter)이라고 부를 정도로 겨울 동안 먹을 것이 순무밖에 없었던 상황도 있었습니다.
무를 그냥 삶아서 먹거나 갈아서 빵으로 만들어 주식으로 먹었답니다.
고대부터 근대까지 인류의 배고픔을 무가 곡식으로서 채워주었던 것입니다.
세계대전 이후 화학비료가 나오며 곡식들의 생산량이 폭증하자 무를 비상식량으로 쓸 이유가 없어졌고, 지금의 현대인들은 무를 식량으로 생각하지 않고 부가적으로 먹을 수 있는 반찬으로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