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그의 결단.
신숙주의 다 안다는 눈빛은 중국에서 밀무역할 거 아니냐고 확신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보면 맞는 말이지만, 굳이 따지자면 반만 맞는 말이었다.
“아마도 처조부께서는 제가 은을 가지고 북경이나 남경으로 가서 밀무역을 할 것으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것 말고 다른 것이 있더냐? 북경이나 남경으로 가서 돈이 되는 비단과 후추, 사탕 같은 향신료를 가져오기만 한다면 큰돈을 벌 수 있으니 그렇게 하려는 것이겠지.”
“네 그게 밀무역으로 가장 크게 남기는 것이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틀리셨습니다.”
“틀렸다고?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여진족들에게서 은을 받는 것이지? 아무 소용이 없지 않으냐?”
“여진인들에게 잡곡을 팔고 받은 그 은을 가지고 북경이나 남경이 아닌 요동반도(遼東半島)의 대련(大連)과 산동반도(山東半島)의 위해(威海)로 갈 것입니다.”
“대련과 위해?”
신숙주는 대련과 위해란 지명을 되뇌었지만, 쉽게 기억이 나지 않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제가 가진 이 지도를 보시지요.”
원종은 품에서 지도를 꺼내었는데, 직접 그리고 채색한 지도였다.
“으응? 이 지도는 어디서 구한 것이지? 어찌 이런 모양이...”
신숙주는 이제까지 본 적 없는 지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중국 땅 밑의 남만은 물론이고, 왜의 지도까지 그려져 있었는데, 이런 형태로 땅을 그린 지도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동래에서 알게 된 유구(琉球)의 상인에게 구한 지도에 난파되어 안남(베트남)과 섬라곡국(태국)을 다녀왔다는 여러 상인들의 말을 듣고 그린 지도입니다.”
원종 자신이 기억하는 동남아시아 지역을 그린 지도였는데, 그 출처를 의심할 것 같아 미리 유구 상인에게 구한 지도와 직접 가본 이들의 말을 듣고 그린 것이라고 변(辯)을 달았다.
신숙주는 처음 보는 지도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한참이나 지도를 눈에 담았다.
“어쩌면 실제로 이 지도가 맞는 지도일지도 모르겠군. 내가 명과 왜에 몇 번을 다녀오면서 어렴풋이 느낀 땅의 크기가 우리 조선과 비교했을 때 이 지도와 비슷할 거 같구나. 잘 그렸어.”
신숙주는 그렇지 않아도 자신이 명과 왜를 다녀오며 겪었던 일들과 지도를 그려 책으로 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데 손녀사위가 내민 지도는 이제까지 보아왔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와는 그 괘가 달라 충격이었다.
태종때 만들어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지도의 중앙이 그 이름 그대로 중국(中國)이 중심이었고 그 양옆으로 조선과 천축이 그려져 있어, 지도의 중심이자 천하(天下)의 중심이 중국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사실 천하라는 말에는 그 중심을 늘 중국에 둔다는 의도가 있는 것이었기에 지도를 그릴 때는 늘 중국이 중심이자 기준이었다.
그리고, 왜를 멸시한다는 의미를 담아 늘 왜의 땅은 조선의 옆이 아닌 조선의 아래, 조선보다 작은 크기로 왜를 그려두는 것이 조선이 보는 세계였다.
한데, 손녀사위의 지도는 조선이 중심이었고, 왜가 조선보다 더 크게 그려져 있었기에 자신이 왜를 다녀오며 느꼈던 땅의 크기가 제대로 반영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제까지 이런 방식의 지도는 없었기에 순수하게 지도를 보고 아주 잘 그린 것 같다고 소감을 밝힌 것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원종은 신숙주의 말을 듣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현대의 지도를 본 적도 없는 사람인데, 자신이 다녀왔던 경험만으로 왜의 땅 크기를 대충이나마 알고 조선보다 땅이 클 것이라고 추론해 낸 것이 대단하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직까진 왜의 땅이 아닌 북해도(北海道)까지 그려져 있었기에 그리 보는 것인지도 몰랐다.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오라. 여길 보십시오. 여기 툭 튀어나온 땅이 요동반도이고 그 요동반도의 끝에 있는 곳이 ‘대련’이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요동 반도의 반대편으로 삐죽하게 튀어나온 반도는 산동반도로 ‘위해’라는 곳도 산동반도의 끝에 있습니다.”
“흠. 이 지도와 두 지역이 있는 위치만 보아서는 은을 들고 가는 이유를 모르겠군.”
“그럼, 여기 명나라의 중간에 세로로 그려진 줄을 보십시오. 이 선이 무슨 줄인지 아시겠습니까?”
“선이 항주에서 시작해서 소주, 양주, 제녕을 거쳐서 그려져 있는... 아! 이 선은 운하를 그린 것이구나. 맞느냐?”
“네. 맞습니다. 중국 남부의 곡창인 항주와 소주, 양주를 거쳐 가는 운하입니다. 곡식이 잘 자란다는 남부 중에서도 항주, 소주, 양주는 날이 좋고 비가 잘 내려 다른 곳보다 갑절로 곡물을 생산해 낸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그래서 운하가 거길 출발해서 거쳐 가는 것이지. 거기서 난 곡식들이 운하를 타고 북경으로 가기에 천하의 물산이 북경으로 모이는 것이고.”
“네. 하지만, 제가 이야기한 요동반도의 ‘대련’과 산동반도의 ‘위해’는 어떻습니까?”
“일단 운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지역이구나.”
“네. 맞습니다. 운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지역이지요. 그럼 운하와 상관없는 지역에서 나는 곡물은 어떻게 운반하겠습니까?”
“그야 당연히 반도의 끝이니, 아! 운하와는 상관없는 지역이니 곡물들이 항구인 대련과 위해로 모이게 되는 것이구나.”
“네. 맞습니다. 요동반도와 산동반도는 험한 산이 없고, 평지가 완만해 소문난 항주, 양주에 비해서는 부족해도 조선의 전라도에 버금갈 만큼 곡식이 나는 곳입니다. 거기서 나는 산물은 배로 북경으로 옮겨지기 위해 항구인 대련과 위해에 모이게 됩니다.”
“곡식이 많아지면 자연스레 그 가격은 내려가게 되겠지.”
“네. 맞습니다. 흔하면 가격이 낮아지지요. 그래서 저는 대련과 위해에 가서 조선보다 저렴한 곡식을 구해오고자 합니다.”
“조선의 곡식을 여진인들에게 팔고, 그 은으로 다시 중국의 곡식을 사온다라...”
일견하기에는 곡식을 팔고 곡식을 사 오는 것이기에 그 이문이 얼마 남지 않는 상행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달리 보면 한번이 아닌 수십, 아니 수백 번을 다녀도 어느 정도의 이문을 보장하는 안정된 상행 같기도 했다.
조선은 땅이 좁아 가을에 난 곡식이 다음 해 3, 4월만 되어도 떨어져 보릿고개가 찾아왔다.
하지만, 중국은 땅이 넓어 가을에 수확한 곡식을 다 먹게 되는 3, 4월이 되면 다시 남부에서 곡식이 수확되니 부족한 곡식을 채워 넣는 것이 가능했다.
그래서 중국에는 보릿고개라는 말이 없었다.
다만, 치세하지 않으면 그 곡식의 유통이 되지 않아 생기는 문제는 별도였다.
하지만, 손녀사위가 제시한 운하와 떨어진 곡창지대인 대련과 위해에서 저렴한 곡식을 계속 사 올 수 있다면 시기에 따라서는 큰 이문이 남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더해서, 그 곡식이 조선의 보릿고개를 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백성들의 처지에서는 꽤 좋은 상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의주에서 대련까지 나흘, 대련에서 위해까지 다시 나흘, 위해에서 황해를 건너 강화도까지 이레(일주일)하면 거의 보름 만에 곡식을 구해올 수 있습니다.”
“빨라야 보름이고, 늦으면 한 달을 잡아야겠지.”
“네. 누전선 두 척에 곡식을 가득 실을 때 천석이 실리옵니다. 전국에 흉년이 질 때 이렇게 한 달에 천 석의 곡식이 들어온다면 그것은 마치 가뭄의 비처럼 백성들의 배고픔을 채워줄 것입니다.”
“누전선 두 척?”
신숙주는 전하께 받은 배가 누전선 한 척인 걸 알고 있었지만, 우선은 넘어가 주었다.
“그게 열 척이 된다면 5천 석이로군.”
한 달에 5천 석의 곡식을 실어 올 수만 있다면 매년 겪는 보릿고개를 쉽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고, 물산이 풍부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만큼의 곡식을 사 올 수 있느냐가 문제였지만, 손녀사위를 보니 그것도 해결이 바로 되는 문제였다.
“여진인들의 은(銀)은 아마도 그 반의반도 안 되겠고, 본자기를 팔아 번 돈으로 곡식을 살 것이냐?”
“처조부님의 말씀처럼 5천 석을 실어와야 한다면 본자기는 물론이고 인삼을 팔아서라도 자금을 만들어야겠지요.”
대련이나 위해는 작은 항구도시이니 본자기나 인삼을 살 수 있는 자들이 한정적일 것이고, 결국 북경, 남경도 이유가 있다면 갈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리 내게 말하는 것은 내게 뭔가를 해달라는 것이겠지?”
“네. 혹여나 이 교역이 드러나게 되면 뒷배가 되어 주십시오.”
“하하하. 녀석아. 밀무역이 드러나게 되면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뒷배라고 다들 볼 것이다.”
“그래서 찾아온 것입니다. 나중에 아시는 것보다는 먼저 이렇게 허락 같지 않은 허락을 받으려고요.”
“허허 이놈 참 완전히 똥배짱이구나. 종희가 이놈 때문에 고생 좀 하겠어. 허허허”
신숙주는 이미 계획은 다 짰고, 그걸 통보하듯이 알려주기 위해 온 손녀사위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정말 50년만 일찍 태어났다면 함께 조정에 출사해 조선의 부유함을 위해 같이 노력했을 인재였다.
백성과 나라를 부유하게 하여 고통받는 이들이 없는 치세를 이루고자 밤낮을 잊어가며 일을 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들을 제대로 써주고 알아주었던 세종대왕 때의 젊었던 자신을 기억했다.
하지만, 그때 혈기를 가지고 일했던 자신이나 능력 있던 이들은 다들 나이가 들어 이름 그대로 노신(老臣)이 되어 버렸다.
물론, 자신이 젊었던 그때만 능력 있는 이들이 있었던 것은 아닐 터였다.
지금도 능력 있는 이들은 출사하여 젊은 혈기로 일을 하고 싶어 할 것이었다.
문제는 그런 새로운 인재가 솟아오를 구멍을 자신과 한명회로 대표되는 훈구파의 노신들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젊었을 때 구닥다리로 일을 처리하며 세상이 바뀐 걸 아직도 모른다고 흉을 보았던 융통성 없던 노신의 자리에 자신이 앉아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지 못한 일을 젊은 혈기로 밀무역이라도 해서 곡식을 들여와 백성들을 배불리 먹일 생각을 하는 손녀사위가 부러웠다.
그의 젊다 못해 어림이 부러웠고, 과감한 생각을 할 수 있게 깨어있는 가능성이 부러웠다.
그리고 그런 과감성과 가능성이 자신의 집안에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편치 못했던 마음과 부러웠던 마음이 어느 정도는 아물어졌다.
“네 마음대로 한번 해보아라. 그리고 네 생각처럼 이문이 남고, 백성들의 고픈 배를 채울 수 있다면, 내 목숨을 걸고 주상께 상신하여 곡식만이라도 교역할 수 있게 해주겠다.”
신숙주의 결단을 듣게 되자 신숙주도 각오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노신의 결단을 들으면 원래라면 더 각오를 단단히 해야 했다. 하지만, 원종은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자신만만해했다.
***
신숙주의 지원이 있자 신 씨의 곡물창고에서 곡식 500석을 받았다. 훗날 대련과 위해에서 가져오는 곡식 550석으로 돌려주기로 했다.
그리고 남는 공간에는 여진인들이 필요로 하는 생필품과 약재도 실었고, 본자기도 중국에 팔기 위해 챙겼다.
한양에서 만난 삼식이도 이제 육로가 아닌 바닷길을 알아야 한다며 배에 태웠다.
한양에서 출발해 의주와 대련, 위해를 잊는 4각 무역 항로를 책임질 사람이 삼식이었기에 배를 타고 가며 모든 것을 알려주고자 노력했다.
그렇게 한양을 떠나 큰형이 있는 의주로 향한 것이 양력으로 1469년 12월 15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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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첨부 사진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입니다.
출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https://kyudb.snu.ac.kr
태종 2년에 만든 지도인데, 지도의 중심이 중국입니다.
그리고, 소중화라고 하던 조선은 나름 크게, 왜는 저기 발밑에 작게 그리는 것이 저 당시 세계를 보는 시선이었습니다.
원나라를 겪으며 저 멀리 아라비아나 서역이 있는 것도 알았지만, 말 그대로 중화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사고방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기에 저런 지도를 그리게 된 것입니다.
더해서 조선 초에 인도네시아나 태국에서 사신이 왔었음에도 동남아시아는 안중에 없었기에 아예 지도에 그릴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