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선봉장이 되어주시오. (1)
“송상이 잠잠하다고? 그럴 리가 있나? 왜인들과 거래해서 가장 크게 남는 것이 도자기인데, 가만히 있다니. 설마, 동래에 내려와 있는 그 최가가 모르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닐겁니다요. 아무리 아둔한 자라고 해도 한양에서 유명한 본자기를 모르겠습니까요?”
“그럼, 왜 대응이 없는 겐가? 당연히 내게 달려와 성의를 보이고 뭔가를 해달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동래부사 김상국은 이 건으로 어떻게든 은전을 좀 챙길 생각이었는데, 송상이 꿈쩍도 하지 않고 있자 조바심이 생겼다.
“그래서 송상의 물건들을 검수하는 색리를 시켜 송상의 대응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오라 했는데 송상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대응하지 않는다고 하옵니다.”
“그렇다면 송상이 춘봉상단과 뭔가 이면 거래가 있는 것이 아니냐? 그렇지 않아도 최가 놈이 개시 물품 검수를 꼼꼼히 한다고 늘 투정 부리며 세(稅)를 낼 때도 미적거리더니 춘봉상단이란 놈들을 불러들여 뒷주머니를 차려는 것 아니겠느냐?”
“그럼, 동래에 뿌리를 두고 있는 내상 박영철과 같이 오라고 할까요? 박영철은 늘 도자기도 거래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을 하는데, 같이 동석시켜 이 이야기를 하면 송상에게 압박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요.”
“그래. 송상의 최한과 내상의 박영철을 속히 불러오거라.”
***
“저희 송상이 나서서 대응하지 못하는 이유가 본자기 라는 도자기를 사옹원에서만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팔 수 있는 물건을 저희가 가지고 있지 않다 보니 그 권리를 주장한다 한들 팔 물건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대응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옹원? 사옹원이 그리 사사로운 것을 만들어 내어도 되는가? 나라의 기관을 자기 마음대로 하다니. 그리고 도자기인데, 다른 곳에서 못 만든다고 하는 게 말이 되는가?”
“그것이 우선은 사옹원 제조(提調)로 있는 전원종이란 자가 그 전권을 쥐고 있기에 다른 이들이 본자기를 취급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본자기 또한 그자가 만들어 낸 것이라 다른 가마에서 아무리 해도 같은 게 나오지 않는다고 하옵니다.”
“허허. 이거 원 혼자서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으니 독점으로 배짱 장사를 하는 것이로군. 허나, 이게 돈이 된다면 그대로 두지는 않을 터인데. 그자에겐 뒷배가 있는가?”
“제조 전원종은 신숙주 대감의 손녀사위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나이가 어려 아직 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집안끼리는 이미 사주단자를 교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하는 물론이고 한명회 대감과도 연이 있어 건드리시면 안 될 것이옵니다.”
“고령군(신숙주)에 부원군(한명회)까지 뒷배로 있다니 다른 이들이 못 건드릴 만도하군. 흐음.”
동래부사 김상국은 뒷배를 믿고, 자신에게 인사조차 오지 않은 것이 괘씸했다.
괘씸한 마음이 커질수록 본자기라는 기물의 유통에 한발 끼게 되면 제대로 돈 좀 만지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뒷배가 크다 한들 멀리 있는 뒷배이지 않은가. 가까운 데서 휘둘러지는 방망이를 어찌 피할 텐가. 아니지. 우선은 좀 더 확인하고 방망이를 휘두르자. 우선은 이제까지처럼 아랫것들을 이용해서 뺏어보자.’
김상국은 자신이 나서지 않고 빼앗아 오거나 그게 힘들면 한 다리 걸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방법을 만들어 내는 것은 바로 눈앞에 앉아 있는 둘에게 일임하면 될 터였다.
“최한 자네는 계속 동래에 있을 텐가? 송상의 이름도 쓰지 못하고, 그저 내상의 일원으로 계속 동래에 남아 있을 것인가? 송악 본단으로는 못가도 한양 송상 지점으로는 가야 할 거 아닌가. 수를 내어보게.”
부사의 말마따나 수를 만들어 한양으로 올라가고 싶은 최한이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추운 겨울에 입는 나이기온 옷으로 송상과 춘봉상단이 얽혀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기에 혼자 나서서 본자기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사람의 힘과 권력은 앉아 있는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야. 동래에서 다른 이들이 하지 못하는 성과를 만들어야 그에 걸맞은 자리를 차지할 것 아니겠는가?”
무조건 수를 만들어 내라는 부사의 말에 최한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며 물러났다.
“내상의 대표라고 하는 박영철 자네도 마찬가지야. 이 동래의 토박이로 내상을 크게 확장하고 싶다면 이런 기회를 놓치면 안 되는 것이야.”
“네네. 맞습니다. 수를 만들어 내겠습니다요.”
이제까지 옆에서 부사와 송상이 주고받은 이야기를 듣고 나온 박영철은 사실 이미 수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다만, 그 수에는 동래부사가 낄 자리가 없었다.
***
“제대로 알아보았느냐?”
박영철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랫것들을 불러 모았다.
“네. 나리. 춘봉상단에 드나드는 어부들에게 생선을 팔며 그 집을 살피게 했는데, 본자기를 담았을 것 같은 그런 상자 같은 것이 없다고 합니다. 물건도 집안에 별로 없다고 합니다. 그 집을 팔았던 집주릅(부동산업자)에게도 물으니 집을 사러 왔을 때도 그런 고급 상자나 짐이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한양에서 본자기를 아직 들여오지 않았다는 말인데, 배로 오겠느냐? 아니면 내륙으로 오겠느냐? 아니다. 두 곳 다 살핀다. 너는 배를 동원해 부산포로 들어오는 해로를 살피고, 너는 사람을 풀어 길목과 수운으로 내려오는 상단 중에서 춘봉상단이 있는지를 살피거라.”
“그럼 예전처럼 쓱싹 하시는 겁니까요?”
“그래. 동래에 와서 왜인들에게 물건을 팔려면 결국 물건을 들여와야 할 터, 그 중간에 가로챈다. 그러니 탐꾼을 더 풀어라.”
“이전처럼 왜구로 분장해서 미리 준비를 시키도록 하겠습니다요.”
***
“대방어른 춘봉상단에서 사람이 왔습니다요. 들일까요?”
송상 대방 최한은 부사와 만난 이후 속을 쓰리고 있었는데, 이리 춘봉상단이 제 발로 찾아오자 버선 차림으로 뛰어나가 사람을 맞았다.
“상단주님의 심부름을 맡은 희재라고 합니다. 이미 한양 공랑점포에서 나이기온이라는 상품의 위탁 판매를 맡겨 서로가 이익을 본 것이 있기에 본자기도 위탁 판매를 해줬으면 좋겠다며 송상의 의중을 알아보라고 저를 보내셨습니다.”
“하하하. 그렇지요. 우리 송상과 춘봉상단은 남이 아니지요.”
최한은 이게 웬 떡인가 싶어 기쁨의 웃음이 나왔다. 급히 술상을 내오게 하고 아랫사람인 희재를 성심을 다해 접대했다.
그런 최한의 웃음을 보며 희재도 웃음이 나왔다.
‘본자기의 등급이 병(丙)급밖에 되지 않고, 거래도 이번 한 번뿐이라는 것을 모르기에 그리 웃음이 나오는 것일게요.’
희재는 원종이 시킨 대로 본자기를 송상을 통해 왜인들에게 팔고 싶다며 조건을 협의해 나가기 시작했다.
“생산이 쉽지 않고, 중국으로 먼저 나가야 하기에 우선은 20조(組)를 팔 수 있습니다. 북경에서는 한 조에 천은 30냥에 팔리는 것인데, 거기에는 북경까지 가는 비용이 추가된 것이니 송상에게는 조당 천은 25냥에 팔 수 있습니다.”
“그 물건을 먼저 볼 수 없겠습니까? 사실 본자기를 아직 실제로 보지 못하여 그 가치를 판단하기 힘듭니다.”
“지금 물건이 오고 있으니 열흘 안에 보여드릴 수 있을 겁니다.”
“하하하. 그렇다면 그 20조를 모두 사겠습니다. 비용은 당일 물건을 보고 내도록 하겠습니다.”
희재는 물건값을 깎으려 들면 20냥까지 해줘도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송상이 전혀 깎지 않자 바로 계약서를 쓰고 웃으며 나왔다.
‘도련님의 말대로 송상이 물어 주었으니 이제 관아의 일은 송상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우리가 직접 부사를 만나게 되면 성의를 보이고 해야 하지만,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송상에게 넘겨버리면 관아에 받칠 돈은 아낄 수 있게 되겠지.’
그리고,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처럼 열흘 안에 본자기가 한양에서 내려온다는 소문이 퍼져버렸다.
***
“희재공! 우리 서찰을 보셨소?”
“희재공! 상단주를 만나게 해주시오.”
“본자기 20조가 송상을 통해 개시에 나온다고 하는데, 따로 만나 이야기를 하고 싶소이다.”
“배 위에서 만나는 것은 불법이 아니니 부산 앞바다에서 서로 만나...”
며칠째 덮밥을 먹으러 온 왜인들은 이제 몸이 달아서 그런지, 아니면 송상을 통해 20조가 풀린다는 이야길 들어서 그런지 대놓고 희재에게 이야길 하기 시작했다.
이런 왜인들을 단속해야 하는 색리들도 뭔가 들은 것이 있는지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아직 본 물건이 도착하지도 않았소이다. 다들 그 물건을 보고 이야길 하시면 될 것이외다. 그 이후에 상단 주께서 연락을 드릴 것이오.”
왜인들의 이런 반응을 보면 25냥에 송상에 넘기는 본자기를 왜인에게 넘기면 40냥 이상으로 팔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송상이 가만히 앉아서 조당 천은 15냥의 이익을 얻는 것이 아깝게도 느껴졌다.
하지만, 직접 본자기를 팔기 위해 관아와 여러 곳에 뿌려야 했을 돈을 생각하면 오히려 조당 은 15냥으로 그런 과정을 넘겼다는 생각이 들자 이득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눈에 띄지 않으면서 관아와 붙박이 상인 세력을 같은 편으로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이득이었다.
그리고, 차후 본자기를 직접 가지고 가서 팔 때 먼저 거래된 물건이 있다면 가격을 정하기도 쉬울 것이라는 도련님의 말도 생각나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송상은 우릴 대신해 시장 반응을 먼저 확인해주는 초병의 역할을 해주는 것이었다.
***
“열흘? 그렇다면 내륙으로 옮기는 것이다. 바다로 나간 애들까지 불러 모으고, 내륙 길에 애들을 더 보내거라. 인적이 드문 길에서 치도록 해라.”
내상 박영철은 열흘이 걸린다는 소릴 듣고는 배로 운송하는 것이 아니라고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리고, 내륙 산지를 넘어왔다면 말이나 소가 있을 터라 낙동강을 이용한 수운으로 오지 않는다는 것 또한 알아차렸다.
“발이 날랜 이들을 이곳 창원 고갯길로 보내거라. 여기서 처리하고 그대로 돌아 내려오는 것으로 하거라.”
“넵!”
***
“저거 맞어?”
“맞구만. 달구지에 달린 저 붉고 파란 태극 문양이 춘봉상단의 표식이라고 했네.”
“헌데, 사람이 많은데. 우리가 아무리 칼 밥 먹는 산채 영웅들이라곤 하지만, 스무 명이 넘는 상단은 힘든데. 확실히 이거 탈 안 나는 거지?”
“확실하데도. 내상 박상단주가 부사께 언질을 받은 거라니까. 장사 한두 번 하나?”
장사 한두 번 하냐고 되묻는 상봉이의 말에 이미 여러 번 작업해서 돈을 받았던 춘복이는 안심할 수 있었다.
이제까지 박영철 상단주가 시킨 일을 처리했음에도 뒤끝이 깔끔했기에 믿음이 있었다.
‘더구나 왜놈처럼 옷을 입고 덮치면 알아서 도망칠 것이니 이제까지처럼 겁만 주고 물품만 챙겨가면 되는 것이다.’
춘복이는 챙겨온 왜구들의 옷으로 갈아입었고, 머리를 풀어 상투를 틀었던 자국도 모두 없앴다.
춘복이가 다른 이들이 옷을 갈아입은 것을 확인하자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박수로 신호하자 서른에 가까운 이들이 풀숲에서 일어나 뛰어들었다!
“바가야로! 이놈들! 모두 죽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