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너의 이름은?
울산에서 합류한 어멈 둘을 부르며 부엌으로 가니 물텀벙이를 들고 온 어부들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그리고, 다들 어부가 들고 온 물텀벙이를 보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이것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고기인 것인가?”
“설마, 저걸 먹는다고? 나으리가 뭔가 다른데 쓸데가 있어서 가져오라고 하신 거지 저걸 어떻게 먹나?”
사람들은 어부들이 들고 온 고기를 먹을 수 있나, 못 먹나를 두고 아웅다웅했는데, 어부들이 들고 온 고기가 아귀(餓鬼)였기 때문이었다.
얼기설기 섞인 갈색의 몸통에 큰 입이 붙어 있는 기괴한 모습이었는데, 불교에서 먹을 것으로 고통받는 아귀의 모습과 같다고 하여 아귀어(餓鬼魚)로 불리는 것이 바로 이 물텀벙이였다.
먹을 것을 큰 입으로 집어삼켜도 삼키는 목구멍이 작아 음식을 먹지 못하는 형벌을 받은 아귀였기에 옛날 사람들은 아귀어가 잡혀도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귀가 그물에 잡히면 재수 없다고 바로 물에 집어 던졌는데, 그때 ‘텀벙’ 거리는 소리가 나며 물에 떨어졌다고 해서 물텀벙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물론, 먹을 것이 부족할 때는 이 아귀도 먹었는데, 6·25전쟁까지는 바닷가의 어부들도 먹기를 꺼릴 만큼 그 외모에서 오는 혐오감이 대단했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부산 영남으로 사람이 몰리며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혐오 생선이던 아귀도 잡아먹기 시작했다.
그러다 1960년대 마산에서 고춧가루와 콩나물을 같이 삶아 찜으로 해 먹은 것이 유명해지며 전국에 퍼져 별미 찜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나으리께서 이놈들을 버리지 않고 가지고 오면 곡식을 주신다고 해서 들고 왔습니다요. 헤헤.”
어부들은 5~6kg은 나갈 것 같은 큰 아귀와 2~3kg 정도 나갈 것 같은 작은 아귀 한 마리씩을 들고 왔는데, 나름대로 싱싱해 보였다.
“잘 가지고 왔네. 다음에도 이놈들이 잡히면 가지고 오게나.”
어부들은 잡혀도 버리는 것을 잡곡으로 바꿔주자 무겁게 들고 왔던 수고는 잊고 희희낙락거리며 돌아갔다.
“그런데, 나으리 이게 물텀벙이가 맞습니까요? 제가 알기로는 이게 아닌데...”
귀화한 여진족으로 북방 출신인 김고도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게 맞는 건가 싶어서 아귀를 이리저리 돌려봤다.
“아, 자네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네. 자네가 있던 함흥, 강원도 쪽에서는 물텀벙이란 이름을 다른 고기의 이름으로 부르네. 꼼치라는 고기인데, 다른 말로는 물메기라고도 부르지.”
“네? 같은 이름으로 다른 고기를 부른다는 겁니까요?”
“그래. 지역에 따라 부르는 게 다르다네. 그리고, 같은 지역이라도 꼼치가 장어처럼 생긴 곰치와 이름이 비슷하여 헷갈리다 보니 꼼치보다는 물메기, 미거지라고도 부르는 사람도 있지.”
꼼치는 물메기, 물곰, 미거지라고도 불리는데, ‘미거지’의 경우에도 다른 고기의 이름이었지만 비슷하게 생겼다고 그냥 어민들은 뭉뚱그려 이름을 불러버렸다.
그러다 보니 꼼치를 두고 물메기, 물텀벙이, 물곰까지 여러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출신 지역이 다른 사람들은 하나의 고기를 두고 서로 다른 이름으로 자기 말이 맞다고 다툴 지경이었다.
훗날 쓰이는 정약전의 자산어보(玆山魚譜)에도 이와 관련된 글이 쓰여 있는데 ‘...내가 섬사람들을 널리 심방하였다. 어보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같은 고기를 두고도 제각기 다른 말을 하기에 이를 좇을 수가 없었다...’라고 나와 있었다.
다른 지역이 아니라 같은 흑산도 섬사람인데도 한 고기를 두고 각기 다른 말을 하니 어느 말이 맞는 말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이런 일은 비단 고기 이름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식물을 두고서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많았고, 같은 광석을 두고도 다른 금속이라고 말하는 게 많았다.
이는 체계적으로 사물에 대한 정리가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서양과 중국에서 백과사전이 나와 널리 퍼질 때 조선의 사신들도 북경에서 이러한 백과사전을 보았었다.
그러면 당연히 관리들은 조선의 백과사전을 만들 생각을 해야 했는데, 만들 생각은 하지 않고 중국의 것을 그대로 들여올 생각만을 했었다.
그러다 보니, 중국서 들어 온 본초강목에서 지칭하는 단어와 예전부터 한반도에서 쓰이던 단어가 서로 달라 같은 민들레를 두고도 민들레라고 부르지 않고, 포공영(蒲公英), 금잠초(金簪草)라고 서로 다르게 불러대니 약을 쓰는 것은 물론이고 일상생활에서도 단어가 달라 소통의 불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세월이 흘러 조선 중기 광해군 때(1614년)나 되어서야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이 나왔는데, 여러 사물과 현상에 대해 쓴 최초의 조선 백과사전이었다.
이후로 성호사설이나 청장관전서 같은 몇 종이 더 나왔으나 카테고리가 정리되어있는 백과사전이라고 부를만한 책은 1800년대에 쓰이기 시작한 실학자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가 유일했다.
공맹(孔孟)의 도는 조선 초부터 선비들이 달라붙어 관념적인 학문연구 책을 수십, 수백 종을 만들어내었으나, 실제 삶에 도움이 되는 사회, 자연과학에 대한 백과사전은 조선 후기 거의 말기에나 나오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 임원경제지도 113권 53책이나 되는 분량이었기에 제대로 인쇄되어 퍼지지 못했고, 작가인 서유구는 이 책을 지키고 관리하는 것을 부탁할 사람마저 없어 안타까워했었다.
서유구의 수필집인 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에는 ‘어쩌다 책을 펼쳐보면 슬픔 때문에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염없이 눈물만 흐른다.’고 쓰여 있을 정도로 주변 선비들에게 이러한 학문적 업적을 인정받지도 못했었다.
2000년대 들어서야 제대로 번역이 되어 출판될 수 있었고, 그전에는 필사로 쓴 1질이 전부였을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분야가 사회과학 백과사전 분야였다.
이러한 것들을 알기에 계집종인 언년이를 데리고 다니며 먹거리와 관련된 것을 쓰고, 조리법을 정리하게 했고, 글로 남겨 책으로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로 만들어진 성경이 유럽의 지식 보급 판도를 바꾸었듯이 내가 만들 먹거리 한글책을 인쇄하여 보급하면, 보릿고개는 물론이고 경신 대기근 같은 재난 상황에서도 굶어 죽는 이들이 최소화될 터였다.
그렇게 죽지 않고 늘어난 인구는 훗날 조선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어줄 것이었다.
그렇게 늘어난 인구는 조선 밖으로 나가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힐 것이었다.
“다들 혐오스럽게 이 녀석을 보고 있지만, 이 흉측하게 생긴 아귀도 손질을 해주면 아주 맛있는 먹거리가 된다네. 우선은 삼베로 만들라고 시킨 장갑을 끼게나. 이 아귀란 고기는 다른 물고기와는 달리 비늘이 없고, 점액을 뿜는 피부와 날카로운 침 같은 지느러미가 있기에 꼭 삼베로 만든 장갑을 끼고 손질해야 하네.”
원종은 삼베로 만든 장갑을 끼고 아귀의 몸을 잡았다.
미끈미끈한 점액이 피부에서 흘러나와 물컹물컹한 몸을 더 잡기 힘들었다.
아귀는 어부들이 들고 오며 이미 죽었을 것 같았지만, 혹시 몰라 눈 뒤 2~3cm 뒤를 칼로 찔러 구멍을 내었고, 날카로운 칼로 척추부터 부러트렸다.
“아귀는 크기가 작더라도 날카로운 이빨이 달려있기에 반드시 눈 뒤의 머리 부분을 찔러 척추를 부수고 손질해야 하네.”
아귀를 옆으로 돌려 입이 시작되는 부위에 칼을 내려쳤는데, ‘팍! 퍽!’ 하는 소리가 울렸다.
물컹물컹한 몸과는 달리 이빨이 달린 입 주변은 모두가 뼈로 되어 있었다.
칼로 내려쳐 떼어낸 입을 잡아 뜯자 마치 입에 달린 틀니가 빠지는 듯한 모양새로 입이 몸에서 떨어졌다.
날카로운 이빨이 달린 입을 들어 보여주자, 다들 왜 아귀의 입부터 떼어내는지 이해를 했다.
그리고, 아귀를 뒤집어 턱을 세로로 잘라내고, 배부터 꼬리까지는 칼집을 얇게 넣어 양쪽으로 잡아 뜯었다.
잡아 뜯는 힘에 의해 아귀의 배에서 창자가 울컥하고 삐져나왔다.
“헐, 창자가 저리 많이 나옵니까?”
“소보다도 더 많은 거 같은데. 물고기가 이리 창자가 많고 컸었나?”
큰 아귀의 배 속에서는 마치 소의 대창 같은 창자가 흘러내렸는데, 뽀얀 흰색의 창자는 왠지 불에 구워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건 창자가 아니라 아귀 알이네. 아귀의 부속물 중에서는 여기 이 간(肝)과 위(胃), 그리고 소의 대창처럼 보이는 이 알이 먹을 만하네.”
원종은 아귀의 간을 꺼내었는데, 성인 남자의 손바닥만 한 크기의 간이었다.
“간도 맛있습니까요?”
“물론이지. 어찌 보면 아귀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 중에서는 가장 맛있는 것이 아귀의 간일 거네.”
손바닥만 한 아귀의 간은 프랑스 3대 진미로 꼽히는 거위의 간 푸와그라(Foie gras)에 맞먹을 정도로 기름진 맛을 내었는데, 실제로 수육을 해서 먹으면 입안에서 부드럽게 부서지는 기름진 맛이 별미 중의 별미라고 할 수 있었다.
거기다 푸와그라는 거위나 오리를 묶어두고 먹이를 먹여 강제로 간을 지방간으로 만들어야 했지만, 아귀의 간은 자연 상태 그대로 그 맛을 내기에 오히려 더 각광받는 식재료였다.
“이건 위인데, 뭔가를 먹어서 이리 커져 있구만.”
원종은 손바닥보다 더 크게 부풀어 있는 아귀의 위를 갈라 보았는데, 잡어와 가자미가 들어앉아 있었다.
‘아귀 먹고 가자미 먹고.’라는 속담처럼 생선이 한 마리 더 생기는 이득이 생긴 것이었다.
“고기의 배에서 나온 고기를 먹으면 수명이 길어진다고 하는 속설도 있으니 가장 나이 많은 이가 가자미를 먹게.”
김고도개와 삼정이가 서로 눈치를 보다, 더 늙어 보이는 고도개가 은근슬쩍 챙겼다.
내용물을 꺼낸 위는 소의 천엽처럼 안쪽이 꺼끌꺼끌했는데, 채를 썰어 먹으면 그 쫄깃쫄깃함이 소보다 더 맛있었다.
“아귀의 쓸개와 창자도 먹을 수 있지만, 간과 위, 알이 휠씬 더 맛있기에 그냥 먹을 사람만 먹으면 되네. 쓸개는 술에 타 먹으면 정력이 강해진다고도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네.”
아귀의 내부가 정리되자 양쪽 날개 지느러미를 도려내는데, 뼈가 단단하여 나무를 자르듯이 칼을 내려쳐 뼈를 잘라내었다.
척추 옆으로 붙어 있는 두툼한 통살이 복어에 맞먹는 쫄깃한 식감을 가졌지만, 신선도가 문제였다.
살아있는 생물일 때 잡았다면 횟감으로 최적이었겠지만, 기생충 문제도 있고, 몇 시간이나 지났기에 어쩔 수 없이 회로 먹는 것은 포기했다.
토막 낸 아귀살들은 왕소금을 뿌려 박박 문질러주는데, 물을 3~4번이나 갈아가며 문질러주자 그제야 점액질이 줄어들고 나오지 않았다.
“솥에 물을 안치거라. 그리고 작은 녀석은 어멈들이 손질해보게.”
내가 손질한 것을 보았던 어멈들이 작은 아귀를 손질했다. 내장 손질까지는 괜찮았지만, 아귀의 날개 지느러미와 척추뼈를 빠개며 자르는 것에는 힘이 부족했다.
“앞으로 아귀가 잡혀 올 때마다 손질하게 될 것이니 익숙해지도록 하게.”
“한데 도련님. 이 아귀가 맛이 있긴 있습니까요? 아무리 맛이 있다고 해도 매일 이게 올라오면 잘 안 먹을 것 같은데요.”
희재는 토막이 난 아귀를 보며 그리 당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번 아귀탕과 찜, 수육을 먹어 보면 그 생각이 바뀌게 될 거다. 그리고, 아귀는 우리가 매일 먹기보다는 왜관 아침 시장에서 파는 주된 음식이 될 것이다.”
“네? 왜관 아침 시장에서 판다구요? 탕이나 찜이라면 거기서 조리를 해야 한다는 말인데, 그게 되겠습니까요?”
“아귀를 아침 시장에 팔 때는 탕이나 찜이 아닌 다른 요리로 팔게 될 것이다.”
“뭐 다른 요리라고 해도 저렇게 괴상하게 생긴 것들을 왜놈들에게 먹인다고 생각하니 재미는 있습니다만, 팔리겠습니까요?”
희재의 말에 울산 마을 출신들은 괴상하게 생긴 아귀를 왜놈들에게 먹인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은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큰 아귀로 오늘은 탕부터 먹어 보거라. 아마 지금의 그 생각이 바뀔 것이다. 물이 끓으니 아귀를 넣거라.”
*
[작가의 말]
아귀가 1~2kg 때는 손질하기 쉬운데, 3kg이 넘어가면 뼈가 진짜 엄청나게 단단해서 손질이 어렵습니다.
척추뼈도 세로로 빠개듯이 잘라야 하는데, 숙련되지 않은 분들은 손질하기가 힘듭니다.
더불어 악귀의 껍질은 죽고 나서도 계속 점액질이 나와서 씻어주고 하는데, 거기에 물을 엄청나게 씁니다.
한마디로 집에서 직접 손질하기 어려운 생선이라는 뜻입니다요.
그러니 손질된 아귀를 구매하셔서 집에서 해 드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물론, 손질된 것도 소금으로 한번 씻어주면 더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