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동래지점. (2)
“햐아 이 썅놈들. 이런 이유 때문이라니.”
“네?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요? 소인도 살폈지만, 알 수가 없습니다요.”
“금산아 좌판 상인들을 살펴보거라. 상인 중에 남자가 있느냐? 특히 왜놈들이 줄을 서서 물건을 샀던 좌판의 상인이 누구인지 보거라.”
“남자는 없고... 헐. 상인들이 다 여자군요. 특히나 어여쁜 처자가 물건을 파는 좌판은 물건이 동이 났습니다.”
“그래. 그러니 남자 4명이 팔고 있는 우리 포장 수레에는 아예 가격도 물어보지 않은 것이지.”
“허허허. 왜놈들이 왜관에 갇혀만 있다 보니 여인네의 분 냄새라도 맡아보고 싶었나 봅니다. 그럼, 이거 우리도 여인네를 고용하든지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저 여자 상인과 대파를 거래하던 왜놈은 은근슬쩍 종이쪽지를 주더구나. 그걸 여자 상인도 아무 말 없이 쪽지를 챙겼고.”
“네? 쪽지요? 그럼 뭔가 통교(通交)가 있다는 겁니까?”
“그렇겠지. 단순한 밀거래를 위한 쪽지일 수도 있고, 다른 것일 수도 있고...”
동래 왜관의 개시(開市)가 사무역(私貿易)이라고는 하지만, 동래 부의 관리를 받는 제한된 사무역이었기에 알게 모르게 바다 위에서 조선 상인과 왜인의 밀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왜인과 여자 상인이 쪽지를 주고받은 것은 밀무역을 위한 쪽지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밀무역 말고 다른 사건도 떠올랐기에 저 쪽지가 그런 쪽지가 아닐까 싶어 기분이 꺼림칙했다.
그 사건이란 다름 아닌 교간(交奸 성관계) 사건이었다.
숙종 16년(1690년)에 있었던 일인데, 사령(使令 관청에 딸린 하졸(下卒))이었던 이명원이 자신의 처와 딸, 여동생까지 세 명의 여인을 왜관에 들여보내 돈을 받고 몸을 팔게 시켰던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이명원과 세 여인은 물론이고, 왜관을 지키던 책임자까지 목이 잘려 효수되었고, 동래 부사도 파직이 될 만큼 큰 반향을 일으켰던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로 사사로이 통교하지 못하게 아침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일에는 여자가 나올 수 없다고 강제로 바뀌게 되었었다.
그리고, 이명원의 교간 사건이 그때 밝혀지긴 했지만, 지금도 그런 일이 없으리라고는 확답할 수 없었다.
물론, 숙종 때의 왜관과 조선 초인 지금의 왜관은 조금 다르긴 했다.
조선 초 왜관에는 왜인의 가족들까지도 와서 같이 살 수 있었기에 왜인 중에는 여자도 있었다.
하지만, 1510년 삼포왜란(三浦倭亂)이 터진 이후로는 왜관에 가족, 여자들을 아예 살지 못하게 해버렸기에 남자만 가득한 왜관에서 성욕을 풀지 못해 이명원의 교간 사건 같은 것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왜인들은 돈으로 조선 여인을 사려고 했고, 이명원 같은 이들이 달라붙으며 교간 사건이 벌어진 것이었다.
원종은 이러한 일들을 알고 있기에 포장 수레에서 물건을 파는 일에 여인을 내세워 이익을 내고 싶지 않았다.
가게의 간판이 되는 여자 없이도 왜관의 왜놈들에게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호승심이 피어올랐다.
“정리하거라. 문제를 알았으니 오늘은 이만 철수한다.”
금산이와 희재가 수레를 정리해 밀고 움직이는 동안 전체적으로 왜관이란 존재에 대해서 고민을 했다.
조선이 운영하는 왜관과 비슷한 화란(和蘭 네덜란드) 상관을 운영했던 왜국의 사례가 떠올랐다.
왜놈들도 나가사키에 만든 화란 상관에 일반 여인들의 출입을 금지했었다.
하지만, 직업적으로 몸을 파는 기녀(妓女)들은 출입을 허용했는데, 기나긴 항해 끝에 도착한 서양 선원들의 욕정을 풀어주지 않으면 다른 사고가 터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는 기녀와의 스폰서십 비슷한 관계를 맺은 왜국 관리들의 의도도 있었는데, 관리들은 기녀를 통해 네덜란드의 정보를 알아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기녀들의 화란 상관 출입을 권장했다.
그 결과 네덜란드인들과 기녀 사이에서 혼혈이 많이 태어났고, 그 혼혈들의 신체적인 장점을 확인하자 일부러 백인과의 혼혈아를 낳는 세태가 만들어지기도 했었다.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랐기에 이러한 혼혈아들은 나가사키의 관청에서 보육을 했고, 언뜻 보면 백인으로 보였기에 이후 일본을 방문하는 외국 상인들에게 스파이로 활용하기도 좋았다.
하지만, 조선은 일본이 아니었다.
더운 여름에도 유교적 논리에 입각하여 의관을 정제하는 사람이 조선 사람이었기에 선원들의 욕정을 이해하기보다는 예법으로 교화시켜 막을 수 있다고 이야기할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서 있는 위치가 다르고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기에 왜관에서 사고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언제 터질지 알 수 없는 시한폭탄을 들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왜관을 운영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는 조선이 대마도를 점령하여, 대마도에 왜관을 설치하여 특별 섬으로 관리한다면 지금 겪고 있는 왜관의 문제 대부분은 해결될 수 있었다.
어떻게든 성종 시절 훈구파의 한명회와 신숙주를 앞세워 대마도를 점령하고 직할로 통치하는 형태로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되면 규슈로 가기 위한 안전한 징검다리가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계획도 지금 당장은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우선은 왜인 상인들에게 춘봉상단이 왔다는 걸 알리고, 아침 시장에서도 특별함을 보여주어야 했다.
“희재야. 왜관개시는 언제 연다고 하더냐?”
“사흘 후입니다. 전날까지 개시에서 팔 물건의 항목을 제출하여 검수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럼 개시부터 준비하고, 삼정이와 마을 사람들을 교육 좀 해야겠다.”
***
“도련님 왜놈들이 이 초절임 다시마와 볶은 미역을 사겠습니까? 그냥 개시에 가서 이걸 내놓고 있다가 오라고 하시니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품목이 곡식과 어패류인데, 지금 우리가 팔 수 있는 게 이거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 하지만, 해가 기울어 개시가 끝이 날 때쯤에는 네가 내놓은 주전부리 같은 다시마와 미역을 사겠다는 상인들이 줄을 설 것이다.”
희재는 원종의 말을 듣고는 아닌 거 같은데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이제까지 원종의 행동을 쭉 보아왔기에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시간이 흘러 왜관개시가 열리자, 상인들이 동서로 늘어앉아 내놓은 물건들을 보고 흥정이 오고 가기 시작했다.
역시나 흔하디흔한 다시마와 미역을 내놓은 희재에게는 그 누구도 와서 말을 걸지 않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백사장이나 바닷가 돌밭에만 가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기에 돈을 주고 사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희재가 목이 말라 대나무로 만든 물통과 손잡이 잔을 꺼내어 물을 마시자 몇몇 상인들의 눈이 희재에게 향했다.
희재는 그런 것도 모르고, 원종에게 받은 물잔으로 물을 마시고 탁자에 물잔을 그냥 놓아두었는데, 흰 밀가루를 바른 듯이 뽀얀 빛을 내는 물잔의 자태에 왜인들의 눈이 흔들렸다.
“나츠오. 저기 저것 봐라.”
“뭘 봐? 어엇!”
“저게 뭐야? 어떻게 저렇게 흰색의 잔이 있을 수 있는 거지?”
“천축에 있다는 그 코끼리의 이빨인 상아로 만든 것 아닐까?”
“도자기를 가져온 상인들과 거리가 있지만, 멀리서 봐도 색 차이가 난다는 건 알겠는데. 저건 어떤 도자기인 거지?”
발 빠른 이들은 벌써 움직여 초절임 다시마에 관심을 가지는 척 희재 앞에서 얼쩡거리며 본자기로 만든 물잔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
“춘봉 상회란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데 어디서 오신 겁니까?”
“본점은 한양에 있고, 동래에도 지점을 만들게 되어 이렇게 개시에 참여를 한 겁니다. 다시마나 미역을 살 것입니까?”
“저... 그게...”
왜인 상인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주위를 서성였고, 다른 왜인 사인들도 두셋이 모여들자 그제야 희재도 왜인 상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를 챘다.
“다들 말을 많이 하셔서 목이 마르실 텐데 물 한 잔씩 하시겠습니까?”
희재가 물을 부어 잔을 내밀자, 일본 상인은 눈을 빛내며 물잔을 이리저리 더듬었고, 물을 다 마시며 물잔을 거꾸로 들어보았다.
“아! 사옹원!”
물잔 밑에 새겨진 글씨를 본 상인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뭐? 사옹원의 자기라고?”
“그럼, 저 흰 물잔이 그 본자기라고 하는 그 귀물인 것이야?”
순식간에 대청 앞에 늘어서 있던 왜인 상인들 사이로 본자기라는 말들이 오가기 시작했고, 모든 왜인이 희재 앞으로 몰려들었다.
“이건 얼마요?”
“본자기는 그릇과 접시, 잔으로 해서 조(組)로 판다고 하던데, 다른 건 없소?”
“본자기를 어디서 구한 것이요?”
“물잔만 파는 것이요?”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희재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결국 동래 부에서 나온 색리들이 나서 왜인들을 막아서자 주변이 정리되었다.
“이 잔은 거래 품목에 없는 것 아니오? 그리고, 곡식과 해산물만 거래 가능한 것으로 아는데.”
“그대 말이 맞소. 이 물잔은 내가 물을 마시기 위해 들고 온 것이오. 파는 게 아니오.”
희재는 말을 하며 물잔을 짐에 넣었는데, 짐 속에서 이제는 흰색의 넓은 접시 두 개를 꺼내었다.
역시나 하얀 자태를 나타내는 흰 접시에 왜인들의 시선이 몰렸다.
다시마와 미역을 담고 있던 나무 접시 대신 본자기 접시 위에 다시마와 미역을 올려두자, 같은 물건이었음에도 그 색 대비로 인해 더 좋아 보였다.
“다시마 초절임을 구매하고 싶소.”
“나는 미역을 구매하고 싶소이다. 대량 거래가 가능하오? 창고는 어디에 있소?”
“나는 다시마 미역 모두 다 구매하고 싶소. 물량이 어느 정도인지 알려줄 수 있소?”
이제까지 거들떠보지도 않던 다시마와 미역을 사가겠다고 상인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다시마와 미역을 거래하게 되면 가마니 단위 거래이다 보니 왜관으로 가져오기 위해 밖에서 따로 만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물잔에 이어 접시를 내놓은 것은 분명 본자기를 팔겠다는 방증이다. 개시에서는 색리들의 품목 관리가 있고, 물건값에 붙는 세금 때문에 거래할 수 없지만, 다른 때에는 충분히 된다는 걸 저자는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분명 본자기를 판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나 왜인들은 희재의 행동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이날 개시에서 다시마와 미역을 20가마니 이상 계약을 맺고 희재가 돌아왔다.
***
“이제 내일 아침에 포장 수레에 본자기를 올려두고 한번 물건을 팔아 보거라.”
“하하하. 줄을 서겠지요. 헌데 이렇게 본자기를 내 걸고 판매를 해도 되는 것입니까요?”
“왜인들에게 파는 것은 병(丙)급으로 갑급과 을급보다 못한 제품이다. 병급은 왜인들에게 팔아도 된다. 문제는 이게 개시를 통하지 않고 판매하는 것이라 문제가 되는 것이지.”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동래 부사를 만나봐야지. 그게 아니면 개시에서 도자기를 파는 권리를 가진 송상을 만나 협상을 해야지. 희재 너는 내일 송상을 먼저 만나보고, 동래 부사를 만나러 가거라. 먼저 송상을 만나면...”
“네. 알겠습니다요.”
“나으리. 어부들이 물텀벙이를 들고 왔습니다. 나으리께서 어부들에게 물텀벙이가 잡히면 가지고 오라고 하셨다는데 어찌하면 되겠습니까요?”
“오, 그래? 부엌으로 들고 오게 하고, 어멈 둘을 불러주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