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천인천자문(千人千字文).
“그 전에 차이점을 알아야 하니 이 둘을 비교해서 보게나.”
원종은 서탁에서 석탄을 꺼내어 놓았다.
“방금 꺼낸 이건 다들 알다시피 돌 숯이라 부르는 석탄이고, 저것은 석묵(石墨)이라고 불리는 흑연(黑鉛)이네. 석탄과 비교해 흑연은 입자가 더 가늘고 모래처럼 되어 있으니 직접 차이점을 확인해 보게나.”
그제야, 도공들은 두 개를 비교해 볼 수 있었고, 차이점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돌 숯에 비해 이 흑연이라는 것은 너무 무르군요. 손으로 움켜잡는 것만으로도 가루가 뜯겨 나옵니다.”
도공들이 흑연을 받아 이리저리 만지는데, 그러다 세게 움켜쥔 사람이 있었는지 흑연 덩이가 부서졌다.
도공들은 손으로도 쉽게 부서지는 흑연에 놀랐는데, 이리 쉽게 부서지는 광물은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흑연은 광물의 단단함을 나타내는 경도가 1인 납과 비슷할 정도로 물렀는데, 그 덕분에 처음 흑연을 발견했을 때 사람들은 납처럼 쉽게 부서지고 구부러진다고 하여 검은색 납(Black lead)이라고 불렀다.
이 Black lead란 이름이 아시아로 전해지며 검은 납이라는 뜻의 흑연(黑鉛)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이 흑연으로 글이 써진다고 하여 석묵(石墨)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손에 잘 묻고 사용이 불편해 널리 이용되지는 않았다.
“문경의 석탄 광산에서 100개의 석탄 뭉치를 캐면 이런 흑연 1개가 나올 것이네. 먼저 이 흑연을 모으도록 하게. 모은 흑연은 곱게 가루로 만들어 백토(도자기 만드는 점토)와 섞어 이 대나무 젓가락 길이로 가늘게 만들게.”
원종은 대나무를 잘라 만든 젓가락을 보여주었다.
“이 흑연 가루를 굳혀 젓가락을 만드는 것입니까? 검은 게 묻어 날 터인데요.”
“허허. 이 사람들 상상력 하고는 잘 보게. 이 흑연을 중국 사람들이 왜 석묵이라고 부르겠나?”
원종은 반으로 부서진 흑연을 들어 종이에 글씨를 썼다.
“이렇게 묵을 갈지 않고도 바로 글씨를 쓸 수 있기에 중국 사람들은 석묵이라고 부른 것이네. 지금 이건 가루가 떨어지는 흑연이지만, 백토와 섞어 가마에 굽게 되면 가루도 떨어지지 않고 글씨를 쉽게 쓸 수 있는 귀물이 될 걸세. 그리고, 구워진 흑연을 이렇게 대나무 젓가락 사이에 끼워 넣으면 흑연필(黑鉛筆)이 되는 것이네.”
우리가 익히 아는 나무의 중심에 연필심이 들어가 있는 연필 모양이 아니라, 젓가락처럼 얇은 나무 사이에 넓적한 연필심을 넣어 쓰는 ‘콩테’가 만든 초창기의 연필 모습을 그림으로 보여주었다.
김재원은 원종의 설명을 듣고 보니, 먹을 갈지 않고 필기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간편한 일인지 느낌이 왔다.
“상단주님 이 흑연필이 아직 만들기 전이지만, 제대로 만들어지기만 한다면 선비들에게 날개 돋친들 팔릴 것 같습니다.”
“오, 역시 글줄깨나 읽은 사람은 그 가치를 바로 알아보는구먼. 자네들도 들었듯이 본자기가 흰색으로 도자기의 으뜸이 되었으니, 이 흑연필은 검은색으로 문방사우의 으뜸이 될 수 있을 것이네.”
도공들은 먹을 갈지 않고 글을 쓰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지만, 양반들이 좋아한다고 하고 귀물이라고 하니 뭔가 돈이 될 것 같다고 느꼈다.
“저희가 글을 모르는 상놈들이라 이 흑연필이라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도련님이 좋다고 하시니 해보겠습니다요.”
“하하하. 그래 그럼 김 행수가 도공들을 지휘하여 한번 만들어 보게나. 이 흑연필이 붓과 벼루를 대신하여 사용하게 된다면, 문경 가마의 특산품으로 내세울 수 있지 않겠나?”
도공들은 다른 곳에서는 못 만들고 여기에서만 만들 수 있기에 특산품으로 내세울 수 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졌다.
“아, 그리고 하나 더 만들어 줄 게 있네. 얇은 벽돌인데 말이지. 한쪽 면에만 유약이 발려져 한쪽만 반들반들한 벽돌을 만들어 주었으면 하네.”
원종은 자신이 종이에 그림을 그려 도공들에게 보여주었는데, 크기나 비율이 보통 벽돌과는 달랐다.
“이게, 넓이는 한자(약 30cm)인데, 두께는 한치(약 3cm)가 안 되는 그런 납작한 모양입니까요?”
“맞네. 이 얇은 벽돌은 바닥에 붙이는 용도이네. 그래서 표면에만 유약을 바르고, 뒷면은 유약을 바르지 말고 그냥 놔두면 되는 것이네. 만들 수 있겠나?”
“네. 수량은 몇 개를 만들면 되는 것입니까요?”
“급한 것은 아니지만 틈틈이 1만 개를 만들어 쌓아두게나. 나중에 배를 이용해서 옮겨쓸 것이네.”
“일만 개라. 수량이 상당하군요. 알겠습니다요.”
도공들은 자신들이 할 일이 생겼다는 것에 만족했는지 바로 돌아갔다.
***
“단주님. 만길 노인과 이야길 해 보니 짐승 잡는 백정들이 파리를 쫓기 위해 벌을 키우는 수량이 상당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에게 매년 꿀통을 사 오는 계약을 추진할까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초의 전매권을 조정에 이야기할 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좋네. 좋아. 문경의 일은 김 행수에게 맡길 수 있다는 게 참으로 좋네.”
“그리고, 새로 배운 언문으로 일지를 써서 한양의 가패에 보내두겠습니다. 일지를 보시면 자리를 비우시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좋아. 믿고 맡기겠네.”
원종은 시키지도 않은 일을 알아서 하는 김재원에게 아주 만족했다. 이제까지는 일일이 일을 시키고 결과를 체크했어야 했는데, 알아서 일을 만들고 진행하겠다고 하니 이래서 사람을 뽑을 때 학벌을 보는구나 싶었다.
문경의 일을 김행수가 챙기게 되자, 원래 목적이었던 배를 가지러 가야 했다.
“작은형님. 영덕으로 가서 해안을 따라 부산포로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갑시다. 이제 광산 일이 없으니 한가하지 않습니까?”
“한가하기는, 애를 위해서 하는 일이 얼마나... 아! 그래, 같이 가자. 영덕으로 가는 길은 내가 잘 알지. 언제 출발하느냐? 내일 당장 가자꾸나!”
사실 유모도 있고, 형수가 애를 보기에 형은 할 일이 없었지만, 아들 보는 재미가 있다 보니, 작은형은 집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갑자기 길을 나서야 하는 이유라도 생긴 듯이 출발을 종용했다.
“이 책을 채워야 하니 어서 가자 구나.”
“천자문(千字文)요? 아, 금동이를 위해 천인천자문(千人千字文)을 만드시기로 하신 겁니까?”
“그래. 우선은 가문의 남자들에게 한 자씩 받아야지 아버지가 하늘 천(天)자를 썼고, 형이 땅 지(地)를 내가 검을 현(玄)을 쓰고, 네가 누를 황(黃)을 쓰면 된다. 처가와 그 인근 향교에서도 한자씩 받아야 하니 어서 출발하자꾸나.”
갑자기 몸이 달아버린 형의 태도가 이해되었다.
양반가의 아버지라면 아이를 위해 해줘야 하는 일이 몇 개가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천자문(千字文) 책을 만드는 일이었다.
조선 시대 양반가에 아들이 태어나면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서 집안의 대를 잇고, 과거를 통해 입신양명하기를 소원했는데, 특히 돌잡이에서 고르는 물건에 따라 아이의 미래가 결정된다고 믿었기에 돌잡이 용 천자문에 정성을 쏟았다.
그래서 주로 할아버지들이 천 명의 선비들에게 한 글자씩 받으러 다녔는데, 훗날 한석봉이 쓴 ‘석봉 천자문’이 유명했을 때도 천 명의 선비에게 글자를 받아와 만드는 천인천자문을 더 높게 쳐줄 정도였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조선 시대에 천 명의 선비에게 한 글자씩 글자를 받아오는 것이 여간 정성이 들어가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유명인이거나 벼슬아치, 혹은 소과(생원시, 진사시)에 급제한 선비들에게 글을 받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그들의 덕망과 지혜가 아이에게 전해지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작은형의 아들인 금동이의 돌잡이까지는 4개월 정도 남았기에 유명한 선비들에게 글자를 받으려면 서두르긴 해야 했다.
***
금산이와 희재, 진기와 언년이, 김고도개까지 5명에 작은형의 종복 2명까지 포함해서 일행이 9명으로 늘어났다.
풍양을 지나 풍천에서 하루를 묵었고, 둘째 날에는 안동 묵계리에 다다를 수 있었다.
“오늘은 안동 김씨 고택에서 묵어가자꾸나. 처가에서 집으로 오갈 때 두세 번 묵었기에 안면이 있다.”
묵계리의 안동 김씨 고택은 그리 크지 않았는데, 조선 후기 세도 정치를 했던 안동 김씨의 위명에 비하자면 소박한 느낌도 들었다.
“오, 자네 첫아들을 위한 천인문이라면 글을 써주어야지. 본가로 갈 때 부인이 임신했다고 하더니 그새 낳았구먼. 세월이 참으로 빠르구먼.”
안동 김씨 김덕형은 서른 줄의 풍채가 좋은 양반이었는데, 목소리도 크고 호탕한 남자였다.
“그러고 보니 아들을 낳았다는데 그냥 넘어가면 쓰나. 축하주를 마셔야지.”
호탕한 남아답게 술을 밝히는지 해가 채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술상을 올리라고 했고, 종복들도 김덕형의 양을 알기 때문인지 청주를 동이째 가지고 들어 왔다.
“우리 집에서 자랑하는 술이네. 한잔 마셔보게나 기가 막힐 것이네.”
김덕형은 아직 어려 보이는 원종에게도 잔 가득 술을 따라주었는데, 그의 호언장담처럼 잔에 부어진 술에서 꽃향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입 가까이 대기도 전에 향이 흘러넘치는 술은 처음이라 살짝 입을 대어보니, 코로 느껴지는 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꽃향기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강한 향과 함께 혀를 아리는 독한 술맛이 느껴졌는데, 금세 그 뒤로 달짝지근한 단맛이 은은하게 피어올랐다.
첫맛은 독한 듯했지만, 금세 단맛이 따라오며 입안에서 느껴지는 술맛을 씻겨줬다.
그리고, 단맛이 나는 술 대부분은 입안에 술 특유의 찝찝함을 남기지만, 이 술은 단맛도 깔끔했다.
아마도, 인공향미 없이 술을 만들었기에 뒷맛이 깔끔한 것 같았다.
깔끔한 뒷맛에 나도 모르게 잔에 가득 담겨있는 술을 쭉 들이켜고 말았는데, 현대에서는 물론이고, 한양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술의 풍미에 몸이 반응하는 것이었다.
“어떤가? 향이 끝내주지? 단순한 청주가 아니라 여러 꽃을 넣어 빚은 백화주(百花酒)라네. 헌데 도령은 아직 어린 듯한데 용케도 술맛을 아는구만. 크게 되겠어. 하하하.”
김덕형은 내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고는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정말 맛있습니다. 이 술을 어떻게 담은 것입니까?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허허. 원종이라고 했나? 자네는 형과 성격이 완전히 다르구만. 많이 급하구만. 뭐, 나도 형제들이랑 좀 다르긴 하지만...”
김덕형의 말에 내가 결례를 한 것 같아, 궁금한 호기심을 일단 접었다.
“술은 말이야. 급하게 조급증을 가지고 마시면 안 되는 것이야. 괴롭고 슬플 때도 마시면 안 되는 것이고. 술은 말이지 기쁠 때 마시는 것이네. 자네도 생각해 보게 술을 빚는 사람도 자신이 빚는 술이 즐거울 때 마시는 축하주가 되길 원하지, 화가 나서 홧김에 들이 부어지는 말술이길 원하겠나?”
김덕형의 말을 듣고 보니 술도 요리와 같았다. 사람을 즐겁게 하려고 술과 요리가 존재하는 것이었다.
화를 내며 배만 채우기 위해 맛도 모르고 먹는 손님이나 ‘어떻게 만드는 거예요?’ 하면서 묻는다. 제대로 음미하지 않고 물어보기만 하는 손님은 요리하는 입장에서도 별로였다.
“술을 빚는 사람들도 오늘처럼 축하주로 마시길 원할 것 같습니다.”
“맞아. 술은 즐거울 때 마시는 것이야. 뭐, 유일하게 예외인 것은 상을 당했을 때겠지. 그때 말고는 즐겁게 술을 음미하며 마셔야 하는 법이네. 오, 이제 오는구만. 우리 집에서 백화주 다음으로 자랑할 수 있는 것이 들어 왔구만.”
종들이 소반상을 들고 들어왔는데, 상에는 닭으로 만든 요리가 올라가 있었다. 그릇에 따로 담아 개인상에 덜어 올려주었는데, 어디서 많이 맡아본 냄새를 풍기는 닭요리였다.
그래. 이 냄새는 간장에 졸인 찜닭 냄새네.
그러고 보니 안동 찜닭이 여기에서 나온 음식이었지.
*
[작가의 말]
문경의 탄광에는 실제로 석탄과 흑연이 같이 나왔습니다.
현재는 채산성도 좋지 않고, 효율도 좋지 않아 현재 국내에서는 흑연을 채굴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