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맛있는 피. (2)
“선지피를 넣어 만드는 순대는 먹어보았는데, 피를 넣어 밥도 한다굽쇼?”
피 좀 빨아 봤다는 사냥꾼은 물론이고 전국에서 온 아낙들도 피밥은 처음 듣는다고 신기해했다.
“선지피가 남을 때 피밥을 하기도 하지만, 낱알에 찰기가 없는 곡식으로 밥을 지을 때 선지를 넣어 밥을 하면 피가 엉겨 붙어 찰기 있는 밥이 되네.”
“그렇게 하면 피비린내가 많이 안 납니까요?”
“냄새 걱정을 다들 하지만, 의외로 피비린내 대신 선지의 구수한 맛이 일품일 거네. 우선 솥에 불을 올리게나.”
솥에 물을 올리는 아낙들은 처음 들어보는 피밥이 진짜 먹을만한 음식인지 긴가민가했다.
“솥에 불을 올리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 원래 밥을 안칠 때는 쌀과 물을 넣고 솥에 불을 붙이는 거잖아요. 헌데 지금은 솥에 물부터 넣고 불을 붙이라고 하니 이상하지 않아요? 밥이 타면 곡식만 버리게 될 터인데….”
아낙들은 밥을 안치는데 물부터 넣는 것도 이상하다며 제대로 밥이 될까 걱정을 했다. 하지만, 시키는 일이다 보니 그대로 가마솥에 불을 지폈다.
그런 아낙들의 반응을 원종도 보았기에 설명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피밥을 평소 밥을 안치는 것처럼 솥에 넣게 되면 물보다 무거운 피가 아래로 내려가 층이 나뉘는 밥이 되네. 아래는 피밥이 되고 위는 그대로 그냥 밥이 되는 거지. 그걸 방지하기 위해 먼저 가마솥에 불을 지피고 물을 먼저 끓이는 거네.”
원종은 쌀과 보리, 조, 수수가 들어간 잡곡밥에 마늘, 생강을 갈아 넣었고, 잘게 썬 부추와 숙주까지 넣었다. 그러고는 선지를 넣어 피가 골고루 섞여들게 손으로 치대었다.
가마솥에 물이 끓자 치댄 잡곡을 솥에 넣었는데, 물이 끓고 있었기에 선지가 아래로 쳐지지 않고, 밥과 섞이며 굳어갔다.
한참을 주걱으로 뒤적이자, 곡식들이 익어가며 물을 흡수했고, 전체적으로 뻑뻑해지자 그제야 원종은 가마솥 뚜껑을 닫았다.
“이제부터는 일반 밥과 마찬가지다. 뜸을 들이면 되는 것이지.”
밥을 안쳤으니 반찬으로 먹을 고기를 구워야 했는데, 가마의 불을 관리하는 화장들이 나섰다.
고기가 꽂힌 철봉을 들어 가마의 옆에 나 있는 화공에 집어넣었는데, 철봉이 가마 안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챠즈즈즛~ 하는 소리를 내며 고기 익는 냄새가 진동했다.
가마 안의 온도가 700~900도는 되었기에 고기가 익으며 밖으로 나와야 하는 지방이 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고기에 붙어 기화되는 소리였다.
“고기 굽는 건 금방이구만. 소금과 간장, 된장을 고기에 발라서 넣게나.”
간장과 된장이 발려진 고기는 지방이 기화되며 간장과 된장의 향을 퍼트렸는데, 순간적으로 구워졌기에 짐승 특유의 노린내도 같이 날아가 버렸다.
“이야, 좀 뻑뻑한 감이 있지만, 노린내 나는 고라니 고기도 이렇게 해 먹으니 냄새가 진짜 하나도 안 나는구먼.”
“그러게. 순간적으로 구워지니 냄새가 날 시간이 없었는가 보이.”
여러 짐승의 고기가 섞여 있었지만, 강한 열에 구워져 퍽퍽해진 살은 어느 고기인지도 모르게 만들어 버렸다.
그런 이들에게 뜸이 들어 잘 지어진 피밥도 한 그릇씩 내어졌다.
사람들은 선지가 들어간 피밥이라는 소리에 밥을 받아 들고 구경을 했는데, 고소한 들기름을 밥 위에 살짝 뿌려주었다.
피밥은 팥물이 들어간 것처럼 검은색을 띠었는데, 군데군데 부추나 숙주가 들어있어 이게 먹는 것이 맞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
일단 먹으라고 준 음식이기에 다들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처음 한 숟가락을 떠 입으로 가져갔다.
“응? 이야 이거 처음 이야기 들었을 때는 피로 끓인 피밥이니 피비린내 나서 이거 먹을 수나 있을까 했더니, 그런 피 냄새는 나지 않고 은은하고 고소한 맛이 끝내주는구만. 들기름 향이 딱 알맞구만.”
다들 첫 숟갈은 호기심 때문에 머뭇거리며 한 입 먹었지만, 이게 맛이 꽤 괜찮자 다들 두 번째 숟갈부터는 정신없이 숟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밥에 잘게 썰려 들어간 부추와 숙주가 있어서 그런지, 몇몇은 아예 반찬도 없이 밥만 퍼먹었다.
“이건 그냥 밥이 아니라, 반찬까지 다 같이 넣어서 지은 그런 솥밥 같구만. 선지의 구수하고 고소한 맛이 뭔가 중독성이 있는 맛이야.”
“그러게. 잠자기 전에 누웠을 때 딱 생각날 것 같은 맛이야.”
“우리 고향에선 이렇게 비슷하게 피밥을 먹긴 하는데, 이게 훨씬 더 맛있구만.”
“난 이게 순대에 들어가는 그 속 재료 같은 느낌인데.”
“그러게. 껍질 없는 순대 속 재료를 그냥 먹는 것 같아.”
“아까부터 계속 순대 순대 하는데, 도대체 그 순대라는 게 뭔지 궁금하구만.”
피밥과 고기를 먹으면서도 전국 팔도의 사람들이 모여있다 보니 몇몇은 피밥을 먹어봤다고 했고, 또 몇몇은 순대가 뭐냐고 물어보는 이들도 있었다.
조선이 작은 나라라고는 하지만, 각 지역 간의 교류가 힘들다 보니 어떤 곳에서는 잘 없는 피밥이나 피전이 있었고, 어떤 곳에서는 흔한 순대도 모르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1970년대 당면이 들어간 당면순대가 나오며 분식집에서도 파는 서민들이 즐겨 먹는 음식의 이미지가 되었지만, 사실 순대는 반가의 음식이었다.
우선, 돼지나 소의 창자에 여러 재료와 고기를 넣고 만들어야 했기에 소, 돼지를 잡아먹을 수 있는 재력이 있어야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물론, 잔칫날에는 소, 돼지를 잡아서 사람들과 나누어 먹어야 했기에 순대는 잔칫날에나 먹을 수 있는 별미 중의 별미로 귀한 음식이었다.
마침, 짐승들의 내장을 씻으러 갔던 이들이 돌아왔기에 순대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풀만 먹는 초식 동물들은 간과 허파, 염통을 다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도 바로 생으로 먹는 것은 좋지 않아. 그러니 물에 한 번 삶아내어 요리한다. 아, 창자들은 삶지 말고, 이리 가지고 오고.”
피밥을 안치기 위해 미리 물을 넣어 열을 올려두었던 가마솥에 고기의 부산물들이 들어갔고, 시간이 지나자 금세 뽀얀 국물과 기름기가 쏟아 올라오기 시작했다.
“국물은 버리지 말고 국밥에 쓰면 맛있을 것이다. 삶아진 부산물들은 칼로 잘게 다지도록 하거라.”
여러 명의 아낙이 앉아 칼질로 부산물들을 토막 내기 시작했다.
몇몇 남정네들은 그 육향에 이끌려 부산물들을 집어 먹기도 했는데, 아예 몇몇 부산물은 밥반찬으로 먹을 수 있게 썰어 내주기도 했다.
원종은 씻겨온 창자들을 살펴보니 돼지의 창자보다 가늘고 지방이 확실히 적었다. 하지만, 양의 창자처럼 길쭉하게 길었는데, 순대보다는 소시지에 더 어울리는 창자 껍데기(케이싱 casing)였다.
피밥을 하기 위해 선지와 섞어 두었던 잡곡을 가져오게 하여, 메밀가루와 선지를 좀 더 넣었고, 썰려진 내장 부산물도 넣어 문대었다.
양념을 위해 소금, 간장, 된장을 넣었고, 냄새를 잡기 위해 마늘, 생강, 부추를 더 넣어 비비고는 창자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피밥을 바로 순대에 쓸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요. 이렇게 하면 효율이 확실히 높아질 것 같습니다요.”
희재도 이제 본 것이 많다 보니 한번 만든 재료로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드는 것에서 효율이 어떤지를 알아보고 있었다.
사실, 이 피밥이나 피순대도 현대 프랜차이즈에서 한번 시도가 되었던 레시피였다.
이북에서나 먹던 피밥을 햇반처럼 만들어 팔아보려는 사람도 있었고, 그런 피밥으로 순대를 만들어 병천순대처럼 피밥순대로 전국 프랜차이즈를 노렸던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선지로 밥을 짓고 그 선지 밥으로 순대를 만든다는 것에 호불호가 너무 강했다.
선짓국밥을 먹지 않는 사람은 대부분이 피순대나 피밥도 안 먹었기에 어쩔 수가 없는 것이었다.
더해서, 한국인은 순대도 당면순대나 찹쌀순대보다는 고기류가 많이 들어간 고기 순대를 선호했기에 제대로 프랜차이즈 회원을 모집하기도 전에 가게는 문을 닫아야 했었다.
그래도 나름 프랜차이즈를 노렸던 방식이기에 하나의 재료로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드는 효율성에서는 나름 좋은 점수를 줄 수 있는 레시피였다.
기름을 담을 때 쓰는 깔때기를 창자에 끼워 선지 반죽이 된 것을 집어넣고 실로 끝을 묶어 순대를 마무리 했는데, 이것도 여럿이 하다 보니 금방 수십 줄의 순대가 만들어졌다.
“이걸 다시 물에 삶아내면 피순대가 되는 것이네.”
뜨거운 물에 삶아내어 김이 술술 올라오는 순대를 썰자 검붉은 색이 가득한 피순대가 만들어졌다.
하나 먹어보니 선지와 부산물의 풍부한 육향이 과하다고 할 정도로 올라왔다. 소나 돼지였다면 괜찮았겠지만, 산 짐승들이다 보니 그 냄새가 심하긴 했다.
간이 싱거워서 그 향이 더 강한 듯하자 가져다 놓은 갓김치를 하나 올려서 먹어보고, 소금을 쳐서도 먹어보았지만, 뭔가가 부족했다.
물론, 부엌에서 같이 일한 아낙들이나 다른 이들은 별미라며 맛있게 잘 먹었다.
고춧가루나 쌈장 같은 게 있었다면 어떻게든 맛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겠지만, 산짐승 특유의 그 향을 잡기가 힘들었다.
최후의 수단으로 산초 가루를 소금과 섞어 뿌려 먹어보았지만, 산초의 강한 맛만 남게 되어 별로였다.
“도련님 별로입니까요?”
“흠 비린내가 심하구나. 호초가루를 친다면 또 모르겠지만… 흠. 피전은 다 구운 것이냐?”
“네. 선지 반죽을 다 써서 이제 피전은 굽지 않고 있습니다.”
피전을 굽던 솥뚜껑 프라이팬에 순대를 올려서는 구웠다.
구워진 순대는 뜨거운 열기가 있어 그 열기에 냄새가 나름 묻혔다.
그래도 뭔가 부족해서 마늘과 파를 채 썰어 넣고, 부추와 숙주, 간장과 식초를 넣어 볶아내었다. 불향과 같이 간장과 식초의 향이 입혀지자 부산물의 냄새가 사그라들었다.
순대 볶음에도 고춧가루가 없다는 게 너무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했다.
“산짐승의 순대이기에 냄새가 심하지만 이렇게 해 먹으니 맛이 있구나. 먹어 보거라.”
[쩝쩝쩝]
“오, 뭔가 뻑뻑하면서도 깊은 맛이 느껴집니다. 잡내가 조금 있지만, 괜찮습니다요.”
“피순대를 이렇게 구워 먹는 것은 또 생각도 못했습니다요.”
순대볶음으로 냄새를 가려 기사회생했지만, 몇십 줄이나 만들어둔 순대는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이미 피전과 피밥에 고기까지 구워 먹은 후였기에 다들 배가 부른 것이었다.
“갑조 조장은 내가 만들라고 한 가마는 만들었는가?”
“네. 지금 가마에 불을 때고 있으니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요.”
“그럼 남은 순대를 들고 올라가 보지.”
분원에 있는 9개의 가마는 언덕을 오르듯이 기울기가 있는 올림 가마였는데, 그 맨 끝 위에는 가마의 열기가 빠져나가게 만들어 둔 화통이 있었다.
그 화통에서 그냥 사라지는 열기가 아까워 화통을 연결하는 작은 훈연가마를 만들도록 지시했었다.
화통의 열기가 있기에 훈연 가마에서는 최소한의 나무만 태워도 그 효과를 볼 수 있는 구조였다.
“이제 사냥하고 남은 고기와 순대는 훈제하게나.”
“순대를 볶거나 구워 먹는 것도 처음 보았는데, 이렇게 훈연까지 한다는 건 처음 들어봅니다요. 이렇게 훈연하면 오랫동안 먹을 수 있는 것입니까요?”
나름대로 전국을 다니며 사냥했던 사냥꾼들도 순대를 훈연하는 것을 신기하게 보았다.
사실, 순대는 삶지 않고 소시지처럼 훈연만 해도 먹을수 있는 음식이었다.
더불어, 훈제 고기와 훈제 순대를 도공들의 가족들을 데리고 와준 보부상들에게 특별식으로 제공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장기간 보부상들이 들고 다니며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는 이런 훈제 고기나 순대가 알맞았다.
“훈제할 때는 고기와 순대의 표면에 간장을 발라주게. 짠 간장이 더 오랫동안 먹을 수 있게 만들어 줄 것이야.”
이후 이틀 동안 도자기 가마에서 나오는 열기와 연기를 내기 위해 태운 향나무에 훈연 된 고기와 순대는 스모크 향이 입혀져 잡내가 없는 고급 보관 육류가 되었다.
먹고 남은 사슴과 산양의 뼈는 또 공탕으로 해 먹었고 골수가 다 빠진 뼈는 구워서 가루로 만들어 백토에 섞었다.
야생 짐승도 버릴 것이 없었다.
도공들의 가족들을 데리고 와준 보부상들에게는 이렇게 만든 훈제 육포와 순대가 주어졌는데, 보부상들은 움직이며 먹을 수 있는 것이라 아주 기뻐했다.
“그런데, 자네 아직도 육포나 순대가 남았나? 분명 어제 다 먹은 거 같은데, 봇짐에서 계속 그 육포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말이지.”
“자네도 맡았구만. 나도 혹시나 안 먹은 게 있는 건가 싶어 몇 번이나 짐을 살폈지만, 육포나 순대가 없어. 그런데 냄새는 또 계속 나니 참으로 신기해.”
“자네들 혹시, 이번에 받아 온 토기 냄새를 맡아 봤나? 여기에서 나는 거 아닌가? 한번 맡아보게.”
“진짜다! 그릇에서 나는 냄새였어. 어떻게 그릇에서 고기 냄새가 나는 것이지? 이번에 막 구운 것을 받아 왔는데.”
“그러네. 신기하구만. 이거 그러면 이 그릇은 더 비싸게 팔아야 하는 건가? 고기 향이 나는 그릇이라니 신기하잖나.”
“오! 역시 장삿꾼이구만. 나도 이 고기 굽는 냄새가 나는 그릇은 한 푼 더 받아야겠구먼.”
보부상들은 가마에서 고기가 구워지며 그 육향이 그릇에 뱄다는 것을 몰랐지만, 특정한 날짜에 구워진 토기 그릇에서 고기 향이 난다고 하여 더 비싸게 팔렸다.
그 그릇을 산 사람들도 그릇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겨 나오니 은근히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막 쓰는 그릇들도 분원에서 만들어진 것을 더 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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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사실 우리나라의 피순대는 고려 때 원나라에서 들어왔던 몽골인들의 요리인 게데스 초스(гэдэс цус)가 그 원류입니다.
일본을 공략하기 위해 몽골인들이 한반도에 들어와 살며 양을 잡아 양 창자에 고기와 곡물가루, 피를 넣어 만든 것이 고려인들에게 전래되어, 양 대신 소와 돼지의 창자로 바뀌며 피순대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후 1900년대 초반 독일인 선교사가 한국에서 최초의 소시지를 만들게 되었는데, 피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순대와 소시지는 만드는 게 거의 같습니다.
당시에는 그런 소시지를 양순대라고 부를 정도였다고 하니, 순대와 소시지는 거의 같은 음식이라고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삶아서 내면 순대, 찌거나 훈제하면 소시지로 구분한다는 차이가 있지만, 맛만 좋으면 다 좋은거쥬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