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내실을 다진다. (1)
“도련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요? 저를 버리지 마십시오.”
삼식이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통보를 받자 바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제가 사고를 친 것도 없는데, 도련님이 태어날 때부터 문경에서 진자리 마른자리 제다 다 빗질을 하지 않았습니까요. 이리 나가라고 하시면 소인은 어찌 삽니까요?”
“이놈아 면천시켜 주겠다는 말이다. 이제 중인으로 집 밖에서 일을 해줘야겠다. 일가를 이룰 수 있게 해서 중히 쓰겠다는 의미이니 어서 일어나거라.”
“네? 에이 그럼 그렇게 이야길 하셔야죠. 간 떨어질 뻔했잖습니까요.”
“허허. 그런 간담도 없었느냐. 간이 그리 작아서야 어찌 중임을 맡길 수 있겠느냐. 그럼, 다른 간 큰 이를 찾아볼까?”
“그건 또 아닙니다요. 소인 뱃속은 사실 다 간으로 되어 있습니다요. 뱃속이 간으로 가득 차서 토끼에게 빌려줬던 간도 돌려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헤헤. 이거 배를 갈라 보여드릴 수도 없고.”
“하하하. 그래. 그런 능청이 필요해서 너를 선택한 것이다. 우선 문경에서 들고 온 도자기와 한양에서 산 종이를 들고 큰형이 있는 의주로 가서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을 해줘야겠다.”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이야 뭐 쉽지요. 그럼 제가 의주에 가서 뭘 해야 하는 것입니까요?”
“큰형님의 신분상 친해지기 힘든, 변경을 오가는 상인들과 친해지고 인맥을 넓히도록 하거라.”
“네. 도련님. 헌데, 물건을 사고팔며 이름을 익히고, 친분을 쌓는 것은 지금 그냥 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지 않습니까요? 왜 소인을 따로 나가게 하는 것입니까요?”
“삼식아. 이제는 다 배웠구나. 너를 선정한 내 판단이 잘못되지 않은 것 같아 기분이 좋구나. 하나를 시키면 그 이유를 따져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이 네게 생긴 것 같아 참으로 기쁘구나.”
“하하하. 소인이 이래 봬도 나흘 만에 언문을 깨우친 똑똑한 놈입니다요.”
“저기 언년이는 하루 만에 언문을 깨우쳤고, 박복이는 이틀 만에 깨우치더구나.”
“흠흠. 도련님 그래서 왜 저를 따로 나가 살게 하는 것입니까요?”
“말머리를 돌리는 능력까지 일취월장했구나. 좋구나.”
“헤헤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맡겨만 주십시오.”
“좋아 좋아. 우선 너도 그날 같이 겪어서 알겠지만, 거지 놈들이 쳐들어왔을 때 식겁하지 않았느냐.”
“그렇습죠. 그날 도련님의 기만책이 아니었다면 쉽게 놈들을 처리하지 못했을 겁니다요.”
“그래서 네가 밖에 나가 장사를 하며 상단을 지켜줄 호위들을 꾸려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금산이 같은 금강야차가 도련님 옆에 있는데 더 필요합니까요?”
“금산이가 아무리 힘이 세고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다굴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역발산기개세라는 천하의 항우가 어찌 죽었겠느냐. 금산이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뒤를 받쳐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도 요즘 활을 배우고 있다.”
“그럼, 오추나 달유처럼 착호갑사를 지원하던 사냥꾼들을 모아 부리면 되지 않겠습니까요? 활도 쏘고 창도 잘 쓰는데.”
“손쉽게 호위를 들이려면 그렇게 하면 되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역적으로 몰리게 된다.”
“아아!”
삼식이도 들은 게 있다 보니 바로 이해했다.
조선 초 불안한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삼봉 정도전이 사병 혁파를 추진했으나, 그가 우려한 그대로 사병을 동원해 들고 일어난 이방원에게 목이 떨어졌었다.
그리고, 태종이 된 이방원은 자신처럼 사병을 이끌고 난을 일으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병철폐를 했고, 이후 같은 종친이라 할지라도 사병을 거느리지 못하게 철저하게 막았다.
그래서 세조도 계유정난을 일으킬 때 사병이 아닌, 도성의 무뢰배들을 동원했었고, 사병에 대한 문제는 지금도 엄정하게 처리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호위를 위해 사병을 거느리는 그 자체가 역모의 증거가 되는 상황이 지금의 상황이었다.
드라마 사극에서 양반들의 호위 무사로 한두 명만 있는 것이 그런 이유였다.
“상단을 보호하기 위해 힘 좀 쓰는 장사나 착호갑사에 지원하는 사냥꾼을 내가 모으다 보면 역적으로 몰려 내 목이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 네가 밖에서 상단을 운영하며 필요한 호위들을 키워야 한다. 그것이 네가 독립한 것처럼 밖으로 나가야 하는 이유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요. 맡겨만 주십시오.”
“그래. 네게 맡기겠다. 큰형수님을 잘 모시고 의주로 올라가면 형에게 내가 조만간 배를 타고 올라갈 것이라고 전하거라.”
***
“저도 조만간에 의주로 갈 터이니 먼저 가서 기다리십시오.”
큰형수가 탄 가마와 짐을 실은 4대의 수레, 20여 명의 식솔이 가는 것을 도성 밖까지 따라가 배웅을 했다.
수레나 짐에 비해 가솔들이 부족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이시애의 난 이후 북방 곳곳에 주둔 중인 병졸들이 많다 보니 오히려 늘 있던 화적들도 씨가 말라 버렸다고 했다.
도성 밖까지 배웅한 김에 왕십리에서 닭을 키우고 있는 닭 농장으로 움직였다.
도성 안에서는 농사짓는 것을 조정에서 막았기에 도성에서 먹는 채소류는 왕십리에서 주로 재배가 되고 있었다.
청파동의 미나리밭, 이태원의 토란밭, 방아다리 인근의 배추밭, 왕십리의 무밭이 유명했다.
그러다 보니 벼농사나 보리농사가 주류인 평야 지대와 비교해서 여러 종류의 농산물을 도성 밖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북방 육진에서 개척 농사를 짓다 내려온 함덕 내외가 있었기에 그들을 중심으로 닭 농장 인원을 뽑아 채웠었다.
돌과 흙으로 벽을 세우고, 그 위에 초가를 덮은 양계장을 만들어 닭들이 잘 곳을 만들었고, 그 앞에는 싸리 대와 나무판으로 울타리를 세운 후, 그 위로 칡 줄기로 짠 그물을 덮어 닭들을 키우고 있었다.
“이런 닭장이 4곳으로 400여 마리를 키우고 있습니다. 달걀은 하루에 평균 100개에서 150까지 나옵니다.”
“달걀이 생산되기 무섭게 가패에서 소비되니 닭을 늘리기 힘들겠지?”
“네. 그래서 그 김일란이란 자가 소개해 준 새를 키우는 자들에게 닭을 수시로 사서 닭장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판 달걀을 많이 낳는 종자들이 없었다면 하루 100알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좋구만. 닭장을 하나 더 만들고 100마리 더 추가하게나. 새로운 가패가 문을 열 예정이야. 인원 보강은 내가 돌아가면 바로 해주겠네.”
“감사합니다.”
“화공은 이 닭장도 그림으로 남겨주게나. 이렇게 곡식을 사료로 먹이고, 지렁이와 달팽이를 사육해서 먹이는 것이 새로운 닭 사육법이라고 다른 이들에게도 보여줘야 하네.”
화공 장덕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자리를 깔았고, 언년이와 박복이는 그림 그리는 것이 신기한지 옆에 앉아 구경을 했다.
“그리고, 사람이 먹지 않지만, 닭이나 염소는 먹을 수 있는 줄기들은 잘게 썰어 삶고, 곡식 사료와 같이 섞어 주니 사료가 생각보다 작게 들어갑니다.”
“좋구만. 내가 준 회회총은 심어 봤나?”
“네. 저쪽입니다.”
주위에 나무 울타리에 그물까지 씌어서 양파를 재배하고 있었는데, 줄기가 한 뼘 이상 올라온 것이 20여 개 보였다.
“회회총의 꽃이 피고, 씨앗을 떨구면 씨앗을 잘 챙겨 계속 재배해 주게. 1년에 2번 수확을 할 수 있을 거야. 그때는 회회총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겠지.”
“네. 그리고 송상에서 닭을 잡을 때 나오는 닭털을 마대기 자루 단위로 사가고 싶다고 합니다. 어찌할까요? 알아보니 경기도 일대의 닭과 오리, 거위를 기르는 곳에는 모두 다 들러 털을 모은다고 합니다.”
“닭털 나오는 것의 3할은 우리가 써야 하니 나머지 7할은 송상에게 팔도록 하게. 헌데, 송상이 일을 크게 벌이는구만. 나이기온을 한번 사면 다음 년에 다시 사기 힘들 것인데.”
함덕이에게 닭털 값을 교섭하는 가이드 라인을 만들어 주고, 그 안에서는 마음 놓고 거래할 수 있게 자율성을 주었다.
“그리고 알아보라고 하신 것을 알아보았는데, 도련님의 말처럼 목화를 심는 사람이 어느 정도는 줄어들었습니다. 목화 대신 콩이나 다른 작물을 심는 자들이 많아졌고, 평상시 심던 양보다 작게 심었다고 합니다.”
“다행이로군. 목화를 재배해도 베틀로 포를 짜는 게 힘드니 포를 짤 만큼만 심는 것이겠지.”
북방에서 초피 수입량이 줄어들었듯이 목화 재배지도 나이기온 때문에 줄어들 것이라 예상하였는데, 그 사실을 함덕이에게 직접 들으니 마음이 놓였다.
문익점이 북방에서도 잘 자라는 개량된 목화씨를 들여온 이후로 조선에서는 목화솜으로 겨울 이불과 옷을 만들어 입었고, 솜에서 뽑은 면사로 짠 면포를 만들었다.
바로 그 면포가 화폐처럼 쓰이는 오승포였다.
문제는 이 오승포 한 필을 짜기 위해서는 아낙이 몇 날 며칠을 앉아서 베틀을 움직여야 했기에 들어가는 공이 만만찮았다.
하지만, 오승포는 고액의 화폐와 마찬가지였고, 소액은 성기게 만든 이승포로 거래를 했으니 수요는 계속 있었다. 상평통보 이전에는 이 면포가 기축통화였다.
하여, 농민들은 솜을 팔기 위해서 혹은 돈이 되는 면포를 만들기 위해서 멀쩡한 밭을 뒤집고 목화를 심었었다.
하지만, 나이기온 덕에 목화솜의 수요가 줄어들어 자신이 포를 짤 수 있는 만큼만 목화를 심고 있다는 게 아주 좋았다.
원래의 역사에선 조선 중기 이후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밭에 목화를 심어버렸다.
콩이나 수수 같은 잡곡을 심어야 하는 자투리땅마저 목화를 심어 버리니 자연스레 곡물 생산량이 줄어 버렸고, 조금이라도 날씨가 나빠 벼나 보리의 생산량이 부족하면 심각한 흉년이 들어 보릿고개를 넘기가 힘들어져 버렸다.
산업 시대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양모생산을 위해 농경지를 목양지로 바꿔버려 밀값이 몇 배나 폭등했던 일이 조선에서도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계속 넓어지기만 하던 목화 재배는 다행히 상평통보가 나오며 화폐적인 가치가 어느 정도 줄어들자 해결이 되었는데, 그래도 지방에서는 면포가 화폐처럼 계속 쓰여 작물 대신 목화가 심어지는 경우가 여전했다.
그러다, 1800년 후반 인도에서 재배한 목화를 영국에서 방직기로 돌려 만든 옥양목(玉洋木)이 대량으로 들어오고, 일본에서 방직기로 만든 광목(廣木)이 들어오면서 한반도의 목화 재배는 끝이 나게 된다.
물론, 그 여파로 면포를 주력으로 하던 상인들의 몰락이 따라왔었다.
이러한 식량 사정과 민족 자본의 몰락을 알고 있기에 화폐개혁을 빨리 이루어야 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나이기온 옷 덕에 목화 재배지가 넓어지는 것을 막았고, 초피 수입으로 인한 국부 유출도 막아주었으니 옷 하나로 일거양득을 얻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
“화공 장씨에게 그림을 배운 것이냐?”
언년이가 요리 레시피를 쓰고 정리하는 책을 보니 어디서 구한 것인지 형형색색의 물감으로 그림도 그려 넣고 있었다.
“네 도련님. 단순히 글만 써서 음식의 조리법을 남기기보다는 간단한 그림을 그려 두면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아서요.”
그림을 살펴보니, 의외로 그림에 재능이 있는 것 같았고, 글로 전달한 내용을 정리해서 쓰는 것도 꼼꼼하게 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오빠인 박복이도 옆에서 책을 보고 있었는데, 회계장부였다.
원래 박복이에게도 요리를 가르치려고 했으나, 재능이 있는 참렬이를 얻었기에 박복이를 회계로 돌렸다.
송상이 팔아주고 있는 나이기온 옷과 춘봉가패에서 벌어들이는 수익, 지출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하루 매출, 주 매출, 월매출을 정리해서 보고하는 것을 가르쳐주자 나름 숫자 세기를 즐기며 하고 있었다.
봄이 왔기에 나이기온 옷의 판매가 줄어드는 것이 바로 눈으로 보였다.
형이 나이기온을 팔기 위해 송상에게 빌려준 공랑 점포를 찾아올 때가 된 것 같았다.
송상에 들려 진 행수란 자와 판매된 장부를 서로 맞추어 보고 계산을 맞추었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송악의 본단에서도 나이기온을 보고는 더이상 여진족에게서 초피를 사지 않고 있습니다. 겨울에는 이 나이기온이 아주 효자라고 본단에서도 칭찬이 자자합니다.”
점포를 맡고 있는 진 행수는 처음 보는 자였는데, 혈색이 좋은 호인 형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리 닭 농장에도 들려서 닭털을 다 사 가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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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사실 역사적으로도 패딩의 영향은 엄청난겁니다요.
방한용품을 가죽의 시대에서 새털의 시대로 만들어 준 명품입니다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