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운이 좋군. (2)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 같이 공부하던 형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있었다.
“북유럽에서 술을 먹을 때 무슨 안주로 먹디?”
“여러 가지 있겠지만, 큰 카테고리로 보면 소시지?”
“그럼 스페인 쪽 남유럽에서는?”
“하몽 같은 햄류?”
“그럼 그 둘의 공통점은 뭐냐?”
“음... 고기를 잡아서 천장에 걸어 두는 거?”
“그러면 궁금하지 않냐? 유럽에 있는 소시지랑 비슷한 게 몽골에도 있고, 한국에도 순대가 있는데, 왜 아시아는 소시지나 햄류가 발달하지 못했을까?”
“쌀 문화권이라서요?”
“그것도 어느 정도는 맞지만, 유럽은 밀이 있었으니 쌀 농경 때문이라고 하기엔 좀 부족하지. 유럽도 주식은 빵이야. 고기가 아니라.”
“그럼 뭣 때문인가요?”
“바로 소금이야. 유럽에는 대형 암염광산이 많아서 소금이 내륙에도 풍부했고, 아시아는 천일염이 나오기 전까지는 소금이 귀했지. 염장으로 햄을 만들고 소시지를 만들기가 쉬웠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소시지나 햄이 보편적인 음식이 되었던 거야.”
듣고 보니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는 암염광산이 있다는 소리를 못 들은 것 같기는 했다.
“그리고 소시지와 햄이 있으니 맥주와 술도 같이 발전하게 된 것이지. 특히나, 소시지를 만드는 정육업자들은 벌꿀 술을 같이 만들었거든.”
“그게 연관이 있는 겁니까? 벌꿀 술도 천장에 매달아 둬서 숙성시키나?”
“아니, 그런 연관이 아니야. 이 동네가 장원을 중심으로 돌아가기에 장원 안에서 정육이나, 양봉도 다 같이 한 거지. 그러다 보니 양봉하는 벌이 많으면 소시지나 햄에 알을 까는 파리들이 없더란 걸 알게 된 거야.”
“오, 벌이 파리를 잡아먹는가요? 벌은 꿀만 먹는 게 아닌가?”
“말벌은 아예 먹이로 파리를 잡아먹고, 꿀벌은 파리를 먹진 않지만, 벌집에 침입하지 못하게 그냥 죽인다고 한다더라고. 그래서 정육업자가 햄을 천장에 걸어 두고 그 옆에서는 양봉도 같이하게 되었던 거지. 그러다 보니 꿀로 만든 술도 자연스레 먹게 되고, 그 안주로는 소시지나 햄이 자동으로 세팅되는 거지.”
“오, 그래서 허니머스타드 소스가 햄이나 소시지에 어울리는 거군요.”
***
그때 그 형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냥 술을 마시며 재미 삼아 하는 이야기였는데, 백정들이 벌을 잡아 양봉한다는 말을 들으니 기억이 났다.
“그럼, 마을에 벌집이 더 있나?”
“몇 개가 더 있긴 하지만, 그건 내년에 우리가 써야 해서리.”
“알았네. 오승포 50필을 주지. 그리고, 다른 백정호 마을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 그리고, 다른 백정호 마을에도 이렇게 벌을 키우나?”
“뭐, 예전부터 고기 각 좀 뜨던 이들은 다 벌을 키우긴 했는데, 지금도 다 그런지는 모르지요.”
모른다고 이야길 했지만, 한반도로 들어온 백정호의 무리라면 다 비슷한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을 터였고, 파리를 막기 위해 분명 양봉도 하고 있을 터였다.
백정들에게 벌집 값을 치르고 내년에도 내가 벌집을 살 것이니 최대한 벌집을 많이 키워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영의정으로 계신 한명회 대감의 따님이 몸이 좋지 않으시네. 몸조리에 꿀이 도움이 되다 보니 내년에도 꿀이 많이 필요하네. 그러니 다른 곳에 팔지 말고 내게만 팔아야 하네.”
“아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이렇게 바로 값을 주시니 꼭 나리에게만 팔겠습니다요.”
문경까지 가는 길에 벌들이 얼어 죽지 않게 벌 나무통을 꽁꽁 싸매었고, 가는 길에 물어물어 백정호 마을이 있다고 하면 찾아가 벌집을 사 모았다.
아예 내년에는 벌집 숫자가 많을수록 값을 더 쳐주겠다고 하자 아예 양봉을 전문으로 하겠다는 자들까지 나올 정도였다.
문경새재를 넘어 집에 도착할 때 소달구지에는 22개의 벌통이 자리 잡았다.
이 벌통을 밑천 삼아 강을 따라 올라오는 양봉과 전국 백정호의 벌집을 모은다면 양초를 천 개 단위로도 생산 가능할 것 같았다.
***
“전하. 백성들이 부족한 물건을 구하고, 남는 물건을 팔고자 자발적으로 오 일과 칠 일마다 날짜를 정해 장을 열어 서로가 필요한 물건을 교환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한쪽에 쌓여있던 물산이 다른 곳으로 흐르게 되어 백성들의 삶이 조금은 편안해지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주상전하의 덕이옵니다.”
신숙주는 백성들의 삶이 나아진 것이 왕의 덕이라며 우선 치켜세웠다.
“허나, 공랑 점포가 있는 한양에서도 필요한 물건을 거래하는 상인이 없어 난전을 펴 서로 물건을 교환하는 일이 생기고 있사옵니다.”
“공랑 점포가 있는데, 난전이 생긴다는 말이오?”
“네 전하.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수십, 수백 개의 물건이 필요하온데, 그 모든 것을 점포의 상인들이 취급하기에는 무리가 따르옵니다. 해서, 그런 상인을 대신 할 수 있게 백성들이 남는 물건을 사고파는 시포(市鋪)를 열어 서로를 위하게 해야 하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백성을 위하는 길이라면 시포를 여는 것이 맞겠지.”
“전하!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좌의정이었다가 명나라에 사은사로 가기 위해 예조판서가 된 홍윤성이었다.
“전하! 전조(前朝)의 지지 세력이 어떤 자들인지 잊으신 겁니까?”
“전조의 세력? 흐음... 허면 예판은 시포를 만들게 되면 개경의 왕 씨들에게 힘이 갈 수도 있다는 말이오?”
“그렇사옵니다. 태조대왕께서 개경의 왕 씨들을 섬으로 보내 그 힘을 약화시켰으나, 여전히 개경을 기반으로 하는 송상이라는 천것들이 평안도의 상권을 잡고 있사옵니다. 한양에 시포를 열게 되어 문을 열어 준다면, 개경의 상인들이 한양으로 진출하여 돈을 벌어가게 될 것이 옵니다. 그 돈이 나중에 병장기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유념해 주시옵소서.”
“맞사옵니다. 요즘 저잣거리에 인기가 있는 나이기온 이란 옷도 송상이 대량으로 만들어 크게 재미를 보고 있다고 하옵니다. 그들에게 많은 재물이 가게 되면 큰일이 날까 두렵사옵니다.”
우의정으로 있는 윤자운까지 나서 전조의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개경의 상인들을 조심하라고 하자 예종은 생각이 바뀌었다.
“헌데, 나이기온은 문경의 전씨들이 만든 옷이 아니던가? 내 친히 그자에게 옷을 진상 받았기에 기억을 하는데.”
“전하. 그 문경 전씨들의 조상도 전조의 후신이옵니다.”
예종은 윤자운의 말에 상선을 불러 물었다.
“네. 전하. 문경 전씨들의 시조는 원나라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를 지낸 전유겸으로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배행하여 고려에 들어와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인물입니다.”
“그렇게 들어온 인물이 어디 한둘인가? 그렇게 전조의 벼슬을 했다고 배척한다면 여기에서 그 누가 남을 수 있겠는가?”
“저 그것이... 그 전유겸의 부인이 최영의 누이였습니다.”
“아!”
예종은 태종대왕과 세종대왕이 전조에서 벼슬을 했던 이들을 다시 발탁하여 일을 맡기고 했던 것을 배포가 크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윗대의 대왕들처럼 되기 위해 전조의 후신이라고 해도 발탁하여 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허나, 최영과 관련이 있는 자라면 너무 부담이 되었다.
실질적으로 최영의 직계들은 모두 다 죽었으니, 최영과는 가장 가까운 혈족일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 무덤에 풀이 나지 않아, 적분(赤墳)으로 불리며 무당이나 박수들이 모여 굿을 한다는 말도 있었기에 그의 혈족이라고 해서 괜히 더 꺼림칙해지는 예종이었다.
“전하. 그리고 재물의 사고 팜에 재미가 붙은 양민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신량역천(身良役賤)하여 자신의 신분을 사농공상의 가장 아래인 상인으로 두게 될지도 모르옵니다. 나라의 큰아버지로서 제 아들이 더 낮은 자리로 가는 것을 어찌 두고 보실 것이옵니까?”
우의정 윤자운의 말에 신숙주가 발끈했다.
윤자운과는 매서(妹壻) 관계였음에도 자신을 전혀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방해를 하자, 열불이 났다.
“부족하고 필요한 물건을 서로 주고받는 물물교환하는 것이 어찌 신량역천이 되어 천한 신분이 된다는 말이오!”
“그만하게. 우선 시포를 열어 난전을 펴는 것은 불가. 백성들이 부족하고 필요한 물건들이 있다면 공랑 상인들에게 그 부족한 물건을 구비하도록 하여 백성을 도우라고 하게. 그것이 공랑을 설치한 이유이니.”
“하오나...”
“되었네. 사은사로 가는 이야기를 하지...”
***
“그러길래 내 이야기 했잖은가. 시포를 설치하기보다는 국영 상단을 만드는 것이 빠를 것이라고.”
궐을 나오는 한명회는 마음먹은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의기소침한 신숙주를 달래었다.
“국영 상단을 만들게 되면 결국 화폐의 유통에는 별 차이 없을 것이네. 백성들이 자율적으로 화폐를 쓸 수 있는 상황이 되어야 비로소 돈이 돌게 되는 것이야.”
“이미 물 건너갔네. 그리고, 문경 전씨의 조상이 무민(武愍 최영의 시호)과 연관이 있다고 하니 그걸 또 꼬투리 잡을지도 모르네. 그거나 조심하게.”
“조선이 건국된 지 몇 해가 지났는데도 지금까지 전조의 망령이 무서워 상업을 멸시한다는 이 상황이 너무나 아쉽네. 이러한 것들이 조선을 더 가난하게 만든다는 것을 본인들도 알 터인데. 휴우... 술이나 한잔하세. 오늘은 취하고 싶구만.”
***
“상단을 만든다고? 네 이름을 걸고? 감당할 수 있겠느냐?”
“상단을 운영하는 것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허나, 가문의 명예가 장사치의 가문으로 되는 것은 막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건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리 집이 장사를 한다고 해서 이곳 문경에서 우릴 괄시할 사람은 없다. 오히려, 한양에 있을 너와 원길이가 힘들 수 있다.”
“큰형과는 이야기했습니다. 둘째 형님은 내일 만나서 이야길 하겠습니다.”
“둘째도 데릴사위이니 별 상관없다. 오히려, 건번이라는 그 일이 끝나면 첫째와 둘째 모두 벼슬을 버리고, 상단에서 장사하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을 것이다. 이번에 남이와 영의정 강순이 죽는 것을 보았지 않았느냐. 사화에 목이 떨어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아버지는 예전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 불리는 순흥도호부에서의 참상을 보았기에 여전히 벼슬하는 것이 불안한 듯했다.
“그러니, 가문의 명예는 생각지 말고, 상단을 제대로 해보거라.
***
“도련님. 이 집은 뭘 하는 집입니까요? 안쪽을 정리하지 않고 벽부터 쌓으라고 하시니 영문을 모르겠습니다요. 지붕도 이렇게 기울어지게 만드는 것도 처음입니다.”
“벌들이 살 온실 집이다.”
벌집을 들고 왔으나 벌들이 추위를 피할 방도가 있어야 했다.
자연 상태에서도 한겨울 추위를 버티지 못하고 몰살하는 경우가 있었기에 에너지 효율 면에서 극악인 것을 알면서도 온실을 만들고 있었다.
벽돌에 진흙을 발라 벽을 세우고, 남향으로 지붕을 기울게 만든 집은 낮에는 햇빛으로 온도를 올리고, 밤에는 장작을 태워 온도를 올려야 했다.
특히나 지붕은 나무로 창을 만들고 한지를 발라 볕이 들게 했는데, 밤에는 한지로 만든 지붕을 통해 한기가 들지 않게 볏짚으로 만든 거적을 일일이 덮어야 했다.
[부웅, 붕붕, 붕웅]
만길 할아범이 가지고 있던 벌통까지 24개가 들어찬 온실에는 온도 2~3도의 차이였음에도 따뜻해졌다고 벌들이 날아다녔다.
혹여나 꿀이 부족하여 싸움이 나지 않게, 잘 익은 사과와 감을 던져두어 당을 보충케 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겨울을 날 수 있을 겁니다. 원래 한겨울에 벌을 3할가량 잃어버리는데, 이러면 벌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내년에는 만길 할아범이 이걸 40통으로 늘려주게. 그러면 내 큰 상을 내리지. 아 형님!”
온실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밖에서 쭈뼛거리며 둘째 형이 왔다.
건번으로 인해 얼떨결에 벼슬을 얻어서 그런지 둘째 형은 관복을 입고 있음에도 뭔가 눈치를 보고 있었다.
*
[작가의 말]
실제 말벌은 잠자리부터 꿀벌, 파리, 모기, 나비 등등 자기보다 작으면 다 잡아 먹는 놈입니다.
꿀벌은 파리를 먹지는 않지만, 마주치면 죽입니다.
꿀벌은 참 고마운 곤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