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요리숙(料理宿). (1)
“그럼 상을 내어가고 숭늉을 들이거라.”
남자들의 저녁 이후 내림상은 집안의 아녀자들에게 내려가는데, 원길의 안사람인 홍 씨는 얼른 내림상을 살폈다.
하지만, 자신이 먹고 싶었던 주토피아는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상을 든 종들과 안채로 가는데, 홍 씨의 발걸음에는 힘이 없었다.
“저, 마님.”
“왜 그러느냣?”
홍 씨는 무엇 때문인지 자신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덕구 어멈에게 뾰족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홍 씨는 막내 도련님이 만들었다는 포계를 먹었을 때처럼 당연스레 주토피아라는 토끼고기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친척인 진기주가 끼면서 자신은 그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실망했었다.
‘그래. 그이가 내림상으로 주토피아란 요리를 남겨주겠지.’ 하는 희망찬 생각도 잠시나마 했었다.
허나 매정한 바깥양반은 다른 반찬은 남겼지만, 그 주토피아라는 고기는 한 점 남김없이 다 먹어 버렸다.
갑자기 집에 찾아온 6촌 진기주를 원망하려 했지만, 원망해봤자 바뀌는 게 없지 않은가.
그저 여자로 태어나 남자들과 같이 밥을 먹을 수 없다는 이 환장 맞을 현실이 서글플 뿐이었다.
“...저 마님. 막내 도련님이 마님이 드실 주토피아도 따로 준비하라고 했는데, 어떻게 할깝쇼?”
“무어어?”
홍 씨는 자신이 잘 못 들은 건가 싶었지만, 덕구 어멈의 뒤로 말녀라는 아이가 조린 양념을 들고 있는 게 보이자 자신이 옳게 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그걸 왜 이제야 이야기 한 것이냐. 어서 가자!”
갑자기 홍 씨의 발걸음에 힘이 들어가며 급하게 움직였고, 우울했던 얼굴에는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홍 씨는 주토피아의 둥근 토끼고기가 조린 양념에 의해 하나하나 벗겨지자 그 모습에 감격해 눈물이 다 났다.
“토끼고기가 참으로 부드럽고 맛있구나. 알싸한 포도와 사과의 향이 나는 이런 요리를 내가 먹게 되다니.”
내림 상에 남겨진 게 없기에 주토피아란 요리를 먹는 걸 포기하고 있었는데, 생각지 않게 먹게 되자 마음이 들떴고, 자연스레 친정어머니가 생각났다.
‘어머니가 치아가 빠져 고기를 드시지 못한다고 기별이 왔었는데, 이 불효막심한 나는 이리 맛있는 것에 즐거워하며 먹고 있다니.’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어 기뻐 흐르던 눈물이 이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엄마가 보고 싶어 우는 슬픔의 눈물이 되어 버렸다.
제대로 고기를 먹지 못하신다는 엄마에게 주토피아를 먹여드리고 싶었다.
“덕구 어멈. 이 주토피아란 요리를 혼자서만 배웠는가?”
“아닙니다. 저를 포함해 네 명이 요리법을 배웠습니다요.”
“그래?”
홍 씨는 덕구 어멈 혼자가 아닌 네 명이 요리를 배웠다는 소리에 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날 저녁 친정으로 보내는 편지를 급히 썼다.
***
“박복어멈. 이렇게 먹는 게 맞수? 양념을 부으니 고기가 움직이며 벌어지는데.”
“네. 막내 도련님이 알려주신 그대로예요.”
“헤헤헤. 그럼 다행이구나. 난 그쪽들이 날 싫어하기에 욕 먹이는 건가 했수.”
“우리 문경 사람들이 그 정도로 옹졸하지는 않소. 더구나 막내 도련님이 직접 안 마님과 그쪽을 챙겨주라고 했는데, 어찌 욕을 먹이겠소.”
“헤헤. 그럼 먹어볼까나. 아, 그쪽은 먹어 봤소?”
기생 출신이라고 은근히 종들에게 무시당했던 둘째 첩 원홍은 젓가락을 드는 마지막까지도 확인을 했다.
“어제 도련님께 만드는 걸 배우면서 먹어 봤는데, 진짜 생전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소.”
박복 어멈의 생전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다는 말에 원홍은 기대를 가지고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으음. 지, 진짜 그대의 말이 맞구랴. 이런 맛은 나도 처음 먹어보오. 한양은 물론이고 평양에서도 먹어 본 적이 없는 맛이우.”
원홍은 교방에 있을 적 궁에서 열리는 행사에도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때 궁에서 내리는 밥과 찬도 먹어 봤지만, 포계나 주토피아의 맛에 비할 정도의 음식은 없었던 것 같았다.
“용왕이 원했다는 토끼의 간은 먹어보지 못했지만, 어쩌면 이게 토끼의 간보다 더 맛있을 것 같수.”
“그러우? 난 토끼 간을 먹어 봤는데, 별거 없었소이다. 아마 용왕님이 우리 도련님의 요리들을 알았다면 토끼의 간 보다 포계나 주토피아를 원하셨을거유.”
“호호호. 그건 나도 인정하우. 수궁가(水宮歌)를 바꾸어야겠구먼.”
원홍은 맛있는 음식을 먹었고, 나름 자신과 이야기를 하며 마주 앉아 있는 박복 어멈을 만나자 교방에서 같이 있었던 동기들 생각이 났다.
몸값이 백미 90섬이라는 말에 대단하다며 부러워하던 동기들은 한양이 아닌 문경으로 가게 되었다는 말에 태도를 바꿔 그녀를 비웃었었다.
원홍은 그 동기들의 비웃음이 은근히 마음에 걸려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동기들이 겪어보지 못한 포계나 주토피아로 그들의 콧대를 꺾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제깟 년들이 먹어보지 못한 산해진미를 내가 먹고 있다고 실컷 자랑해 주지.’
홍씨는 물론이고 원홍은 중간에 박혀있는 붉은 색의 당근까지 모두 먹었는데, 그러자 묘하게 색감이 있었는지 그날 저녁 화촉에 불을 밝혔다.
문제는 먹은 고기가 토끼고기였기에 밝혔던 화촉도 빨리 꺼져버릴 수밖에 없었다.
토끼가 왜 토끼겠는가.
***
“아니 박복 아범 이게 다 뭔가?”
서라벌 닭을 사러 비봉산에 갔던 박복 아범이 돌아왔는데, 닭은 10여 마리밖에 없었지만, 끌고 갔던 소달구지 위엔 천으로 둘린 짐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그게. 도련님께서 비봉산 김일란의 농장에 가면 서라벌 닭을 사 오고 닭털이나 새의 깃털이 있으면 가져오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걸 이렇게 들고 온 것입니다요. 너무 많이 가져온 것인가요?”
박복 아범은 괜히 쓸데없이 많이 싣고 왔다는 생각에 어찌할 줄 몰라했다.
“오! 그럼 이게 다 새털이란 말인가!? 허허.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는걸.”
춘봉은 말로는 몰랐다고 했지만, 기쁨에 입이 찢어지고 있었다.
바느질을 잘한다는 아버지의 전직 첩 다희와 테스트로 겨울 패딩을 만들어 봤었는데 롱패딩은 한 벌에 15~20마리의 새털이 들어갔었다.
허리까지 오는 숏패딩의 경우에는 10~15마리의 털이 들어갔고, 경량패딩으로 솜과 천을 섞어 보충제로 넣는다면 10마리 내외로도 만들 수는 있었다.
그래서, 패딩을 만들어 팔기 위해 닭털이나 오리털을 최대한 모아야 했는데, 박복 아범이 소달구지 한가득 새털을 가져왔기에 입이 찢어질 정도로 기쁠 수밖에 없었다.
“도련님 그리고 김일란이 서라벌 닭을 더 구하려면 한 달은 걸린다고 했습니다요. 이 근방에 있는 서라벌 닭을 우리가 다 가져갔다고. 경주에서 가져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수급이 딸리는구나. 그래도 구할 수는 있다고 하니 다행이다.”
“네. 그리고 서라벌 닭은 없지만, 새털은 남아돈다고 언제든지 와서 더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박복 아범이 며칠 쉬었다 다시 가서 새털을 더 가지고 와주게나. 그런데, 따로 돈이나 뭘 달라는 말은 않던가?”
“원래 버리는 것이라 가져가겠다고 하자 오히려 좋아했습니다요.”
“공짜라 좋기는 하지만, 아예 값을 치르지 않아서는 안 되지. 잡곡 한 섬을 가져다주고 새털을 받아오게나.”
지금은 이왕 버려야 하는 새털을 대신 가져가 주니 김일란도 좋아하겠지만, 나중에 겨울 패딩점퍼가 돈이 되는 것을 알고 나면 거기에 들어간 털 값을 달라고 할 수도 있었다.
이렇게 미리 잡곡으로 값을 치러둬야 뒷말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오! 원종아 드디어 서라벌 닭이 온 것이냐? 그럼 오늘 포계를 먹을 수 있는 것이냐?”
진기주는 원길에게 자랑만 들었던 포계를 먹게 된다는 생각에 기분이 들떴다.
“네. 물론입니다. 오늘 해 올리겠습니다.”
“하하하. 내 기대하마.”
그날 저녁 진기주는 기본 맛과 마늘 맛, 파상깻잎 맛의 포계를 먹을 수 있었고, 사흘 동안 더 포계를 해달라고 전가의 식구들을 졸랐다.
하지만, 상주의 본가에서 사람이 오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겨우 돌아갔다.
***
“아니 기주 그게 무슨 말인가? 한양의 음식이 별로였다니? 자네 늘 가던 기방이 아니라 다른 곳에 간 거 아닌가? 새 기방에서 내상이라도 입은 건가?”
한양에 갔던 진기주가 돌아왔다는 말이 돌자 그의 친우들이 진가 고택으로 몰려들었다. 다들 한양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한양의 기방에서 나온다는 12첩 반상 같은 안주 이야기는 없고, 한양 음식들이 별로였다는 진기주의 이야기에 다들 의아해했다.
“아니야. 이번에도 늘 가던 천성루에 갔었네. 그리고 새로운 곳을 개척해본다고 다른 곳도 더 가보긴 했었네. 하지만, 한양에서 먹은 음식들은 그냥 평범했네. 그럭저럭한 맛이었다고나 할까. 음식에 독창성이 있지는 않았네. 그러니 한양으로 식도락 여행을 특별히 갈 이유가 없다는 거네.”
“독창성? 음식에 그런 것도 있는 건가? 그게 있어야 가볼 이유가 생기는 건가?”
“허허. 이 정저지와(井底之蛙) 같은 친구들이 있나.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같은 음식만 주야장천 먹다 보면 물릴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런 물리는 맛을 없애주는 요리가 바로 독창성을 가진 요리라고 할 수 있는 거네.”
“오호. 기주 자네 드디어 나름의 미식론을 세운 것인가? 그렇담 그런 독창적인 음식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건, 바로 주토피아와 포계라는 음식이네. 아 거기에 찻물 밥도 포함되어야겠지. 이립 가까이 살아온 나 진기주의 인생에서 아주 큰 충격이었네. 내가 이제까지 먹어 봤던 그 어떤 음식과도 궤를 달리하는 요리였어.”
“허허 무슨 음식을 하나 먹고 와서 이리 입을 터는 것인가? 낮술이라도 한잔한 것인가?”
“낮술은 무슨. 자네들이야말로 한양에 가보지 않은 자가 숭례문이 더 큰지 흥인지문이 더 큰지 다 안다며 떠벌린다고 하더니 딱 자네들이 그 짝이로세.”
“허허. 도대체 어느 정도나 충격적이고 독창성을 가진 요리이기에 자네가 이러는 겐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으이.”
“하긴 혀와 입이 맛보고 기억하는 건데 그걸 모르는 자네들을 탓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이건 확실하네. 자네들은 인생을 헛산 거네. 그건 내가 자신할 수 있지.”
“뭐? 자네에게 이런 취급을 받다니. 흥. 좋네. 그 요리를 먹으러 가세. 한양 어디에 있는 집인가?”
진기주의 친우들도 상주에서 알아주는 양반 자제들이라 바로 한양으로 가자고 외쳤다.
“한양이 아니네. 바로 내 오촌 당숙집이네. 거기서 먹었네.”
“오촌 당숙? 자네 당숙이면... 그럼 문경 전씨 집안 말인가?”
“맞아.”
“그 집안이라면 나도 안면이 있지. 원길이와는 향교에서 술도 같이 한잔했었네.”
“전씨 집안의 행랑어멈이 대단한가 보구만. 몇몇은 원길이와 안면도 있으니 다 같이 가는 게 어떤가?”
“좋아. 그럼 다들 채비하게.”
“채비? 아니 상주에서 문경인데, 무슨 채비가 필요한가? 한 달음 거리인데.”
“하하하. 그건 자네들 생각이지. 아마 한번 가서 먹게 되면 그 집에 눌러 않아 몇 번이고 먹기 위해 일정을 늘리게 될 것이네.”
“허허 기주 이 친구가 한량이긴 해도 허풍은 없었는데, 그 정도로 장담하니 내 채비를 차리고 오지. 다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세나.”
***
“아니 형은 말도 없이 이리 사람을 데리고 오면 어쩌우.”
“하하하. 원길아 그렇게 되었다. 내가 그만 자랑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 이렇게 되어 버렸구나. 원종이도 이해해다오.”
진기주가 친우 4명과 들이닥쳤는데, 왠지 자신이 먹고 싶어서 친우들을 데리고 온 느낌이었다.
그의 친우들이 머물 곁채가 부족하여 원길이 살던 곁채를 비워줄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원길은 심통이 났다.
원래라면 춘봉이 사는 작은 곁채를 비워줘야 했지만, 안방에서 달팽이와 지렁이를 키우고 있다 보니 원길의 방을 비워 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형님. 포계를 하게 되면 서라벌 닭을 잡아야 하는데, 저 닭은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닭이라고 했잖소.”
“그, 그게. 어떻게 안 되겠느냐? 내가 보니 닭 우리에 10여 마리가 있긴 있던데. 하하하.”
이미 닭 우리까지 확인했다는 듯이 진기주는 의뭉스럽게 웃었다.
달걀을 많이 낳지 않는 서라벌 닭이다 보니 김일란에게 꾸준히 사 오고 있음에도 포계에 맛을 들인 아버지와 형 내외로 인해 그 숫자가 늘어나는 게 더디었다.
“포계는 안 되오. 우리도 먹을 게 부족해서 안 되는 거요.”
“아니 원길아. 내가 친우들을 데리고 왔는데, 내 체면도 좀 봐줘야 하는 게 아니더냐. 내 닭값은 내도록 하마.”
“아니 형님. 돈이 있어도 못 구하는 닭이라니까요. 뭐 그래도 값을 치른다고 하니 받긴 받겠습니다만... 포목으로 가져오셨더군요.”
이미 원길은 진기주와 친구들이 음식값으로 챙겨온 포목을 확인했는지 계산을 이리저리 맞추어 봤다.
그러곤, 계산이 합당하다고 여겼는지 웃음을 지으며 포목을 챙겼다.
“원종아 네가 힘 좀 써 보거라. 나도 친우들과 안면이 있다 보니 담소 좀 나눌 테니 찻물 밥부터 준비해서 올려다오.”
원길과 기주가 곁채로 가버리자 춘봉은 빡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그래 자고로 장사는 VVIP를 상대로 해야 마진이 좋은 법이지. 이제 요리로 돈 좀 벌어 볼까.’
*
[작가의 말]
화촉(華燭)을 밝혔다는 말은 결혼을 한다는 말로 통용되는데, 화촉은 붉은 빛깔을 들인 밀초를 말하는 말입니다.
주로 혼례식에 이 초를 쓰다 보니 자연스레 화촉을 밝혔다는 말이 결혼이나 남녀의 교합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