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이것이 한국 고유의 물만 밥입니다.
한국에선 보통 입맛이 없거나 반찬이 없을 때 밥을 물에 말아 먹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백인백색(百人百色)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반찬이 많아도 물에 밥을 말아 먹는 걸 즐기는 사람도 있다.
물에 말은 밥에 초고추장을 찍은 멸치를 꼭 곁들여 먹는 사람도 있었고, 멸치 대신 잘 구운 보리굴비와 먹는 것을 별미로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이는 옛날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조선의 9대 왕 성종은 40일 연속으로 밥을 물에 말아 먹었는데, 신하들이 건강을 위해 그만 말아먹으라고 간언을 했을 정도로 물에 만 밥을 즐겼다고 실록에 기록될 정도였다.
그리고, 먹는 것에 진심인 한민족답게 물에 밥을 어떻게 마느냐에 따라 이름도 다르게 붙여 물에 말은 밥을 구분했다.
이미 지어놓은 밥에 물을 부어 먹으면 수요반(水潦飯) 혹은 수화반(水和飯)이라고 불렀고, 밥에다 물을 붓고 다시 끓인 밥은 수소반(水熽飯)이라 불러 먹는 이의 입맛에 맞출 정도였다.
이렇게 물에 말은 밥에도 이름을 붙여줄 정도이다 보니 6촌 형인 진기주에게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는 수반을 해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춘봉은 이미 생각해둔 게 있었기에 자신만만했다.
“덕쇠 아재. 집에 차(茶)는 뭐가 있는가?”
저녁 준비로 바쁜 부엌에는 들어가지 않고 집안 살림을 책임지는 덕쇠 아재를 붙잡았다.
“대감마님이 차를 즐기시지 않아서 있는 게 몇 개 없습니다.”
덕쇠 아재를 따라 광으로 가니 종이로 단지 주둥이를 감싼 차들이 있었는데, 주로 대엽종의 녹차였다.
‘몇 개 없는 차를 보니 덕쇠 아재의 말처럼 아버지는 차를 즐기지 않는구나.’
녹차는 크게 대엽종과 소엽종으로 나눌 수 있는데, 대엽종은 잎이 크기에 주로 맛이 강하고 소엽종은 향기가 좋고 색이 곱다는 게 특징이었다.
‘대엽종은 폴리페놀 함량이 높아 그 맛이 강하다. 그래서 주로 홍차를 만드는데 주로 쓰이는 차종인데 그냥 차가 진하게 잘 우러나오니 구색 맞추기로 차들을 놔둔 것이로구나.’
그래도 밥을 말아 먹는 데는 대엽종의 강한 맛도 괜찮을 것 같아 찻물을 끓였다.
육촌 형 진기주에게 물에 말은 밥을 해주겠다고 했을 때 눈치채신 분도 계시겠지만, 지금 춘봉이 해주려는 음식은 찻물 밥이라 불리는 오차즈케(お茶漬け)였다.
말 그대로 따뜻한 녹차를 밥에 부어 먹는 일본 음식이었다.
사실 밥을 물에 말아 먹는 것은 인류가 쌀밥을 지어 먹을 때 같이 생겨난 밥을 먹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차(茶)나 곡식을 끓인 물에 밥을 말아 먹는 것 또한 모든 인류가 같이 시작한 먹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런 찻물 밥을 정형화시키고 문헌에 기록해서 자기 것으로 만든 나라가 일본이었다.
에도시대에 오차즈케에 대한 기록들이 많이 남아있기에 서양에서는 이렇게 찻물에 밥을 말고 고명을 올리는 스타일을 일본식 오차즈케 스타일이라 불렀다.
‘오차즈케가 문헌상에 나온 것이 에도시대 1600년대 초이니 찻물 밥에 대한 기록을 내가 먼저 남기고 그 책을 보급해 버리면 이 물에 말아 먹는 밥을 일본식이라고 하는 서양 놈들은 없어지겠지.’
한 나라가 자신들의 것이라며 행패 부리는 것보다는 전 인류가 보편타당하게 알고 있던 먹는 방식이라고 양놈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찻물이 우러나오기 시작하자 거기에 보리와 현미를 넣어 다시 한번 끓였고, 그렇게 나온 찻물을 미리 준비한 밥그릇에 부었다.
그리고 밥 위로 잘게 썬 물김치와 명란젓을 올리고 깨소금을 뿌려 상에 올렸다.
“찻물을 밥에 붓고 고명을 올린 것입니다.”
찻물 색의 특이함을 보고 있는 진기주의 눈앞에서 참기름을 몇 방울 떨어트려 주자 그 향이 진동을 했다.
“오오! 내 한양과 기호지방을 많이 돌아다녔지만, 이런 물만 밥을 받아보는 건 처음이다. 네가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한 이유가 있었구나.”
진기주는 찻물에서 올라오는 녹차의 담백한 향기를 맡았고, 먹기 직전 뿌려진 참기름의 그윽한 고소함에 식욕이 솟구쳤다.
숟가락으로 찻물을 떠먹어 보자 씁쓸한 차향이 아닌 담백하고 고소한 곡물의 향이 입안을 채웠다.
“오. 찻물에서 담백한 곡식의 향이 나는구나. 찻물에 따로 곡식을 넣은 것이냐?”
“맞습니다. 보리와 현미를 녹차와 같이 끓였습니다.”
“그래서 고소한 맛이 난 것이구나. 찻물의 텁텁한 맛에 곡식의 고소함이 들어가니 숭늉의 맛도 나고 그냥 물만 밥의 수준을 넘어선 맛이다.”
[아삭. 아삭.]
밥을 퍼먹으며 고명으로 올린 잘게 썰린 김치를 아삭거리며 씹었는데, 옆에서 보고 있던 전원길도 그 소리에 식욕이 돋아 침을 꼴깍 삼켰다.
“위에 올린 명란젓은 한번 불로 익혀 올리는 것이 좋으나, 저녁 준비로 부엌이 번잡하다 보니 그냥 날것을 썰어 올렸습니다. 명란젓 외에도 장조림, 구운 조기 같은 것을 올려 먹어도 됩니다. 다음에 물만 밥을 드실 때는 그런 고명을 올려서 한번 잡숴 보십시오. 새로운 맛이 펼쳐질 것입니다.”
“이 명란젓을 올린 것만 해도 충분히 새로운 것 같구나. 보기만 해도 짭짜름한 맛이 그려지고 있어.”
진기주의 입은 명란젓이 가진 짠맛을 기억한다는 듯이 침이 고이고 있었다.
“찻물과 밥 그리고 명란의 조합이라니. 아아! 이 조합은 그것이로구나. 물에서 잡혀 육지로 올라온 명란이 다시 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을 나타내는 그것이로구나. 수구초심(首丘初心)을 나타내는 찻물 밥이라니...”
진기주는 찻물 밥을 먹다 말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여우가 죽을 때 머리 방향을 고향 방향으로 돌리고 죽는다는 수구초심의 말처럼 원행으로 지친 객에게 고향을 잊지 말라는 뜻이 담긴 찻물 밥을 내주었으니 그 속 깊은 뜻에 진기주는 감동한 것이었다.
“내 오늘 어린 원종이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했다. 내 이립(而立)에 가까운 나이이지만, 한양에서 내려와 집으로 가지 않고, 친척 집에서 놀 생각만 하였는데, 네가 이 우형(愚兄)을 타이르기 위해 이 찻물 밥을 준비했구나. 너의 속 깊은 마음이 참으로 고맙구나.”
진기주는 한량처럼 돌아다니며 집에 들어가지 않고 놀기만 한 자신을 깨우쳐준 찻물 밥이 고마웠다.
지금 당장 집으로 가기 위해 찻물 밥을 먹다 말고 일어섰다.
“기주 형님. 밥은 다 먹고 가셔야지요. 물에 말은 밥은 내림상도 안 되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허허허 그렇지. 그래. 원종이가 애써 준비한 찻물 밥인데 남길 수는 없지. 내 다 먹고 가마.”
진기주는 다시 자리에 앉아 찻물 밥을 먹는데, 밖이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큰 도련님. 대감마님께서 저녁을 들게 사랑으로 오시라고 합니다요.”
“허허 원종이가 손수 찻물 밥을 해준다고 해서 당숙의 저녁도 빨라진 것 같구나. 이거 어쩐다.”
“형님 기왕 이렇게 된 거 객이 먹어야 하는 물만 밥도 먹었으니 저녁까지 드시고 가십시오. 오늘 저녁은 원종이가 토끼고기를 따로 준비했다고 합니다.”
“토끼고기? 내가 토끼고기는 질겨서 즐겨하지 않는데. 하지만, 준비한 사람의 성의를 봐서 한번 맛은 봐주는 게 인지상정이겠지. 흠흠. 그럼 가자꾸나.”
사실 진기주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토끼고기였음에도 기대를 하고 있었다.
물만 밥을 생전 처음 보는 찻물 밥으로 만들어 온 원종이가 준비했다는 말에 이 토끼고기 요리 또한 특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기대되었다.
사랑채 안방에 남자 넷이 자리를 잡자 개인상이 놓이기 시작했는데, 삼첩반상 중앙에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토끼고기 경단이 놓여있었다.
“아버님 바로 젓가락을 드시면 안 됩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응? 기다리라니 그러면 고기가 식지 않느냐.”
“식혀서 먹는 토끼고기 요리는 처음 들어 보는데. 어떻게 먹는 것이냐?”
아버지와 형들이 궁금해 할 때 덕구 어멈과 박복 어멈이 토마토가 빠진 데미글라스 소스를 담아 들어왔다.
그리고 김이 펄펄 나는 소스를 고기 경단 위에 붓자 둥글게 뭉쳐있던 고기 경단의 고기들이 움찔거리며 고기 꽃으로 피어났다.
“오오! 뜨거운 양념국물에 고기가 부드럽게 풀리는것이구나.”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한 것이냐?”
“찻물 밥만 먹고 집으로 갔다면 이거 크게 후회할 뻔했구만!”
진기주는 당숙이 수저를 들지도 않았는데, 먼저 젓가락을 놀려 입안으로 고기를 넣었다.
“아아~ 이게 정녕 토끼고기가 맞는 것이냐? 어찌 이리 부드러운 것이냐? 토끼고기가 이리 부드러웠다면 내 소고기보다 더 좋아했을 터인데. 이게 참으로 토끼고기가 맞느냐?”
고기의 부드러움에 반한 진기주는 정녕 이것이 토끼고기가 맞는지 몇 번이나 물었다.
“네 형님. 토끼고기가 맞습니다. 토끼고기를 부드럽게 하는 조리법이 있습니다.”
“허허 그런 조리법이 있다니. 그 조리법이 알려지게 되면 조선 팔도의 토끼가 씨가 마를지도 모르겠구나. 하하하.”
진기주는 질겨서 먹지 않던 토끼고기가 이렇게 부드러우니 씨가 마를 거라며 농을 부렸다.
“먹다 보니 포도와 사과의 향이 나는데, 설마 토끼에게 포도와 사과를 먹인 것이냐? 그래서 포도와 사과의 맛이 나는 것이냐?”
포도와 사과를 먹인 것이냐는 아버지의 말에 원길의 눈이 크게 떠지며 춘봉에게 큰소리를 쳤다.
“원종이 이놈아! 아무리 요리의 맛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너무 한 것 아니냐? 닭에게 곡식을 먹이는 것은 이해하겠지만, 토끼에게 포도와 사과를 먹이는 건 정녕 잘못된 일이다!”
원길은 재물을 아끼지 않는 동생에게 화가 난다는 듯이 이야길 했지만, 그러면서도 토끼고기는 입으로 가져갔다.
“형님 토끼에게 사과나 포도를 먹인들 그 향기로움이 고기에 배어나지는 않습니다. 그저 포도로 담은 담금주와 사과 한 개를 갈아 이 양념에 넣었을 뿐입니다. 그건 덕쇠도 보았습니다.”
원길은 동생의 말이 맞는지 확인하려 덕쇠를 보니 덕쇠는 고개가 떨어질 것처럼 끄덕이며 신호를 했다.
“흠흠. 그렇다면 다행이다. 토끼고기임에도 포계에 지지 않는 맛을 가진 요리로구나. 그럼, 이 요리의 이름은 무엇이냐?”
“이 요리의 이름은 주토피아(酒兎皮芽)라고 합니다. 술(酒)로 끓여낸 토끼고기(兎)의 껍질(皮)이 새싹(芽)처럼 피어난다고 하여 주토피아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오, 주토피아라 좋은 이름이로구나. 그럼 이 요리는 포계와 달리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는 것이냐?”
“네. 이건 토끼고기와 포도 담금주만 있다면 다른 것은 흔한 재료이기에 언제든지 드시고 싶으실 때 드실 수 있습니다.”
“하하하. 그건 더 마음에 드는구나.”
전기환은 서라벌 닭이 부족하면 먹지 못한다는 포계와 달리 언제든지 먹을 수 있다는 주토피아란 요리에 기뻤다.
“원길아 아까 내가 집으로 간다는 걸 말려줘서 고맙구나. 이걸 먹지 못하고 갔다면 내 크게 후회했을 것이야.”
고기 경단 안의 잘 익은 당근까지 꼭꼭 씹어먹은 진기주는 처음 먹어 보는 음식의 독창적인 맛에 기쁘고 행복했다.
찻물 밥을 먹고 바로 집으로 가야겠다는 그의 의지는 이미 사라졌고, 당숙이나 동생이 이야기하는 포계라고 하는 음식을 꼭 먹고 가야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런데 기주 형님은 한양에서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 보지 않았소? 맛있는 음식이 줄줄이 나온다는 기방에는 이것보다 더 맛있는 음식이 즐비했을 터인데.”
“그래, 맛을 따진다면 더 맛있는 요리집이나 기방의 요리들이 있겠지. 하지만, 이런 처음 먹어 보는 맛의 독창성은 그것들과는 다르다고 해야겠지. 그리고, 당숙집에서 먹는 밥은 공짜가 아니더냐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다. 하하하.”
진기주는 다른 걸 다 떠나서 공짜로 먹는 밥이라는 사실이 즐거워 웃었다.
“이런, 형님네에 가서 밥이라도 축내고 와야 겠수다.”
“하하하. 아쉽게도 우리 행랑어멈들은 재주가 이냥 저냥 해서 별다르게 맛있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주토피아란 요리를 원종이 네가 만든 것이 맞느냐?”
“네. 제가 식료의가 되고 싶다 보니 여러 가지 음식이 가지는 장점과 단점을 두고 생각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다 토끼고기를 연하게 하는 조리법이라거나 담금주로 조린 양념을 만드는 법 같은 것을 고안하게 되었습니다.”
“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네게 내린 재주로구나. 그래서 포계는 내일이면 되는 것이냐? 난 그걸 꼭 먹고 집에 갈련다!”
*
전가의 요리서(전씨가문의 요리서)
단기 3800년 10월
두 번째 요리.
찻물밥. 수반(水飯)
ㄱ.요리의 연원 : 먼 길을 온 손님의 위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요리법.
ㄴ.만드는 법 : 지리산의 녹차, 보리를 볶은 보리차, 볶은 현미차, 말린 다시마로 끓여낸 다시마차 등등
찻물에 밥을 말아 먹으면 된다.
(차가 없다면 그냥 뜨거운 물도 된다.)
찻물 밥의 고명으로 깨소금과 김을 올리는 게 기본이며. 잘게 썰은 김치를 올려도 된다.
명란, 창란, 꼴두기젖 등등 여러 젓갈을 올려도 되며, 장조림, 구운 조기를 올려도 된다.
젓갈이나 고기가 없을 때는 매실청을 고명으로 올려도 된다.
추가글 : 태고부터 물에 말은 곡식을 먹어왔으나 이를 정리하여 체계화 시킨 것이 전가의 찻물 밥이다.
집안에 오랜만에 방문한 6촌 형 진기주를 위해 만든 전가식 찻물 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