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주토피아(酒兎皮芽)를 먹다!
“자, 다들 덕구 어멈 옆으로 서서 잘들 보게나. 토끼는 가죽이 두껍기에 보기보단 살이 얼마 없네. 그 얼마 없는 살을 발라내야 하는데, 최대한 고기가 끊어지지 않도록 길고 크게 발라내야 하네.”
부엌에서 나름 칼을 잘 쓴다는 4명의 어멈들에게 토끼고기의 부위를 설명하고 부위별로 살을 발라내는 시범을 보여줬다.
덕구 어멈은 한번 봤을 뿐인데도 토끼 살을 쓱싹거리며 길게 발라내었는데, 그 솜씨가 발군이었다.
발라낸 살은 물에 담가 핏물을 빼곤 물을 최대한 꽉 짜내었다.
“이 둥글게 깎은 당근을 중심에 두고 물기를 짜낸 살을 겹쳐서 둥글게 만들게나. 주먹보다 크게 뭉쳐지면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게 명주실로 묶어 주게. 작게 발라진 살은 그냥 빼게.”
토끼 한 마리에서 발려진 살로 어른 주먹보다 조금 큰 경단을 만들 수 있었는데, 실을 칭칭 감아 원형인 모양을 유지하게 만들었다.
“솥에 물과 포도 담금주를 1:2 비율로 넣고, 파와 마늘, 생강, 당근을 잘게 썰어 토끼 경단과 같이 넣어 끓이게. 높지 않은 온도에서 천천히 불이 올라 끓여야 고기가 천천히 익을 수 있네.”
“그럼, 국에 양념은 안 하는 건가요?”
“고기가 잠길 정도로 물이 많지만, 이건 국이 아니네. 이 국물은 바로 먹지 않네. 나중에 좀 더 졸여 조림 양념으로 쓰기 위해서, 지금은 간을 하면 안 되네.”
와인을 대신해 포도 담금주를 넣었지만, 토끼고기의 잡내를 없애는 데 필요한 후추나 월계수 잎, 로즈메리 같은 향신료가 없는 게 너무 아쉬웠다.
솥뚜껑을 덮은지 40~50분이 지나 토끼 경단을 꺼내었는데 쇠젓가락으로 안의 당근까지 다 익은 것을 확인했다.
“구이용 솥에 참기름을 치고 열이 오르면 경단을 넣어 겉을 노릇하게 굽고 접시에 담으면 되네.”
“도련님. 그럼 고기를 묶고 있는 이 명주실은 언제 풀면 됩니까요?”
“실은 조림 양념을 위에 올리기 전에 풀면 되네. 먼저 조림 양념을 만들어 보세.”
고기 경단을 삶아낸 국물에 밀가루를 넣어 걸쭉할 정도로 졸이면서 사과 한 개를 갈아 넣었고, 소금, 간장과 식초를 넣어 간을 했다.
‘여기에 토마토를 넣어야 데미글라스 소스가 되는데, 토마토도 남미가 원산지이니 살아생전 먹기는 불가능 하려나.’
토마토는 물론이고 옥수수와 감자, 고추까지 남미가 원산이다 보니 이번 생에서 먹어볼 수나 있을까 싶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을 1492년에 했으니 아직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도 모르겠구나. 확 지도를 그려서 우리가 먼저 발견했다고 증거를 남겨 버릴까.’
아메리카 대륙을 먼저 발견한다는 망상을 하다 보니 소스가 졸아들었다.
“이제 고기 경단의 명주실을 풀게나.”
고기 경단은 명주실을 풀었음에도 둥근 모양을 유지했는데, 그 위로 뜨겁게 졸인 소스를 붓자 김이 나며 소스가 고기 사이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고기 사이로 스며든 소스로 인해 맨 겉의 고기들이 숨을 쉬는 것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천천히 껍질이 벗겨지듯이 펴지기 시작했다.
“어머나! 마치 농익은 꽃잎이 벌어지는 것 같아요.”
어멈들은 소스의 열에 입을 벌리듯이 움직이는 고기 조각이 신기하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렇게 벗겨지는 고기를 젓가락으로 집어 조린 양념에 찍어 먹으면 되는 음식이네. 이렇게 젓가락으로 헤집으면 중심에서 나오는 당근의 이 붉은 색이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지.”
“활짝 펼쳐진 꽃잎 속에 숨어 있는 붉은 당근이라니. 이거는 그걸 나타내는 거 아니유? 여자의 꽃잎...”
“어이구 망측해라! 이것아! 어디 도련님 앞에서 그런 말을.”
아직 서른이 되지 않은 젊은 어멈은 요리를 보고 야한 생각을 한 것인지 은근한 음담을 이야기했고, 덕구 어멈은 급히 말렸다.
하지만, 다들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춘봉도 애써 모르는 척 웃는 연기를 했지만, 현대에서도 주방 이모들의 섹드립은 그 수위가 장난이 아니었다.
“흠흠. 이렇게 움직이며 벌어지는 고기를 먹는 사람이 직접 봐야 하기에 내일 상에 고기를 올린 다음에 졸인 양념을 올려야 할 것이네.”
“네. 도련님 허면 이 요리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술(酒)로 끓여낸 토끼고기(兎)의 껍질(皮)이 새싹(芽)처럼 피어난다고 하여 주토피아(酒兎皮芽)라고 한다네.”
“오오! 주토피아. 뭔가 현기가 가득한 이름 같습니다요.”
“특이한 이름이네요.”
“요리의 이름 안에 조리법과 먹는 법이 다 들어가 있으니 특이한 이름이긴 하지. 그럼 다들 젓가락으로 한 점씩 먹어보게나.”
“오, 토끼고기가 질기기만 해서,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술을 넣어 끓이니 씹으면 씹을수록 포도의 향이 올라오는 것 같습니다.”
“전, 이 조림 양념이 맛있는 것 같아요. 사과와 식초가 들어가서 그런지 새콤달콤한 맛이 토끼고기를 더 맛있게 하는 거 같아요.”
네 명의 어멈들은 음식을 먹어가며 평가를 했는데, 멀리서 지켜보며 군침을 삼키는 어린아이들도 불러 한입씩 먹였다.
“우아와! 도련님. 이게 진짜 토끼고기에요? 너무 맛있어요!”
“이런 맛은 진짜 처음이야!”
아이들의 입맛에도 부담 없이 먹을 정도인 거로 봐서는 나름 성공한 레시피 같았다.
이렇게 고기를 포도주나 물에 데쳐 먹는 걸 포치드 스테이크(poached steak)라고 하는데, 주로 질긴 고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조리 방법이었다.
더불어, 포도주나 술에 데치는 것이다 보니 고기의 비린내도 잡을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었다.
“그럼, 내일 저녁에는 덕구 어멈을 중심으로 해서 상을 올려 보게나.”
***
“이리 오너라! 게 아무도 없느냐? 이거 오랜만에 왔다고 마중 나오는 것도 느린 것이냐?”
호쾌한 목소리에 대문을 밀치고 들어오는 선비가 있었는데, 이미 전가 고택이 익숙한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어이쿠, 진 선비님 오셨습니까?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집안 살림을 맡고 있는 덕쇠는 몇 개월 만에 방문한 진 선비 진기주를 반겼다.
“허허. 내 자주 오고 싶었으나 그놈의 역병이 내 행차를 막았다네. 그래서 내 한양에서 즐겁게 놀다 오는 길이네. 그런데, 당숙께서는 계신가? 설마 이 시간에 첩을 끼고 계신 건 아니시겠지?”
“다행히 지금은 아닙니다요. 문안부터 드리시지요.”
“그러지. 앞장서게.”
마치 자기 집처럼 전가네 고택에 들어온 진기주는 가주인 전기환의 오촌 조카로 지척인 상주에 살고 있었다.
전기환의 오촌 조카이기도 했지만, 큰아들인 원길의 두 살 연상으로 비슷한 연배라 자주 왕래하는 사이였다.
“이보게들 진 선비님이 오셨으니 저녁상이 달라지게 되었네. 대감마님과 두 도련님, 진 선비의 상만 준비하면 되네. 여자들이 먹을 주토피아는 하지 않아도 되네. 그리고 물만 밥은 박복 어멈이 준비하게나.”
“고거 쌤통이구랴.”
“맞아. 나도 첩실이 마님처럼 같이 앉아 대접받는 그 꼴 보기 싫었다니깐.”
“대신 며느라기님은 안 좋겠구만. 주토피아를 먹으실 수 없다니.”
“뭐 어쩔 수 있나. 법도가 그런 것을.”
“큰 도련님이 마누라를 위해서 내림상 하실까?”
“내림상으로 주토피아를 남겨도 진 선비가 뺏어 먹을걸. 다들 진 선비 성격을 알지 않나.”
“하긴. 진 선비라면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지.”
남녀의 내외 법도가 있다 보니 친인척이라 해도 그 법도를 지켜야 했고, 일전 포계를 먹을 때처럼 남녀가 한자리에 모이지 못하고 여자들은 내림상을 뒤에서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래 원종이 너는 죽다 살아났다고? 역병을 이기고 살아났으니 내가 기방에 한번 데리고 가야겠구나. 하하하.”
춘봉은 자신을 기방에 데리고 가겠다며 호통하게 웃는 진기주를 보며 같이 웃어줬다.
‘원종이의 기억에 따르면 고모할머니의 손자로구나.’
현대인이었던 춘봉은 이모나 고모의 아이들인 4촌까지는 기억을 해도 6촌은 명절에나 한번 정도 보는 그런 관계였다.
가끔 결혼식이나 초상이 났을 때 ‘니가 춘봉이구나.’하며 어색한 미소나 짓는 사이가 6촌 형제였고, 8촌은 누군지도 잘 모를 때가 더 많았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6촌은 물론이고 8촌 형제까지도 자주 왕래하며 지내는 혈족사회였다.
즉, 진기주란 6촌 형은 자주 볼 사이라는 뜻이었다.
“아 형. 막내가 이번에 역병으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의원이 되겠다고 할 정도유.”
“의원? 크하하! 그건 또 무슨 장난질이냐? 아무리 사화로 인해 이 근방 사족들이 과거에 나서지 않는다고는 하나, 중인들이나 하는 의원질을 하려고 하다니. 쯧쯧쯧 너는 기방이 아니라 한양부터 가서 아리수부터 먹어야 하겠구나. 한양의 그 화려한 물맛을 알면 그런 소리가 쑥 들어갈 것이다.”
“형 한양 갈 때 나도 데리고 가주시오. 나도 아리수 좀 마셔 봅시다.”
“넌 한양 가려면 마눌님에게 허락받아야 하지 않느냐. 그게 아니라면 합법적으로 한양에 갈 수 있게 과거 준비부터 하거라.”
“과거라면 되었수다. 그냥 마음 편히 포계나 뜯으며 문경에서 사는 게 나을 것 같수.”
“포계? 그건 무엇이냐?”
“하하하. 한양 다녀왔다는 사람이 포계도 모르오?”
원길은 한양에 다녀온 자랑만 하는 진기주를 놀린다고 포계에 대해 두리뭉실하게 이야길 했다.
“막내가 되고 싶다는 식료의가 고안한 닭요리인데 가히 닭요리의 최고봉이라 할 만하오.”
“에잉 닭요리가 거기서 거기 아닌가. 난 또 공작이나 금계 같은 특이한 닭으로 하는 요리인 줄 알았어.”
“후후 형. 나도 포계를 먹기 전엔 그렇게 생각했다오. 근데 한번 먹어보니 이제까지 먹어왔던 닭요리는 닭이 아닌 것 같더이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아버님도 인정하는 것이니 아마 형도 한번 먹으며 더 해달라고 난리를 칠 것이오.”
“그게 그렇게 맛있나? 그럼 저녁에 포계란 음식이 상에 올라오나?”
“허허 형 그게 무슨 소리요? 형님은 객(客)이지 않소? 처음 온 날 첫 끼는 물만 밥 아니오.”
“아차! 그렇구나.”
진기주는 원길이 그렇게나 자랑하는 포계를 못 먹을 것 같자 금세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하 형. 얼굴 표정 푸시오. 내 농을 한 것이오. 사실 포계라는 요리를 하려면 특별한 닭을 써야 하는데, 지금은 그 닭이 없어서 먹지를 못하오. 대신 원종이가 토끼고기로 뭘 해준다고 하니 그거나 먹어 보시오.”
“아니다. 내 물만 밥이나 먹어야지. 그게 법도 아니겠느냐. 그 법도를 따르는 것이 몸에도 좋으니 따라야지.”
춘봉은 아까부터 사촌 진기주와 큰형의 이야길 들으면서 왜 집에 온 손님에게 물에 말은 밥을 준다고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물만밥은 말 그대로 물에 밥을 말은 밥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현대에서는 주로 밥반찬이 없을 때 물에 말아 먹거나 그게 아니라면 여름에 입맛이 없어 간단히 먹기 위해 말아먹는 대충 먹는 밥의 대명사였다.
그런 대충 먹는 밥을 손님에게 준다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일반 손님도 아니고 혈족이 왔는데, 그런 찬 없는 물만 밥을 내준다고 하니 왜 그런지 궁금했다.
하지만, 금세 원종이의 기억에서 물만밥에 대한 것이 떠오르자, 금세 납득이 갔다.
‘이 시대에는 물만밥이 대충 먹는 그런 의미가 아니었구나.’
현대에서는 반찬 없이 물만 밥을 손님에게 내놓으면 결례에 가까웠지만, 조선 시대에는 그게 결례가 아니라 배려였다.
물에 만 밥, 수반(水飯)은 먼 길을 왔기에 몸이 피곤한 손님을 배려한 식사였다.
먼 여행으로 지친 몸에 고기 같은 것을 먹으면 그게 소화가 되지 않아 탈이 날 수도 있는데, 그런 부담을 위에 주지 않기 위해 물만 밥을 주는 것이었다.
마라톤이나 운동선수들이 몸이 힘들 때 액상으로 된 에너지 보충제를 먹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런 마라토너에게 비할 바는 아니지만, 조선 시대에는 주로 도보 여행이었으니 몇 날 며칠을 도보로 움직여 온 손님이라면 물만 밥으로 그의 속을 배려해 주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조선 시대 사람들이 참으로 과학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저, 기주 형님. 특이한 물만 밥을 한번 드셔보시겠습니까?”
“응? 특이한 물만 밥? 그런 게 있느냐? 설마, 국밥을 끓여서는 물만 밥이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아마 한 번도 보지 못한 물만 밥일 겁니다. 물론, 속을 보하는데도 일반 물만 밥보다 더 좋을 겁니다.”
“오, 그런 것이 있다면 얼른 내어 오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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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가의 요리서(전씨가문의 요리서)
첫 번째 요리
주토피아(酒兎皮芽)
ㄱ.요리의 연원 : 질긴 토끼고기를 부드럽게 먹기 위해 만든 요리법. 단기 3800년 10월
ㄴ.만드는 법 : 포를 뜬 토끼고기를 둥글게 말아 명주실로 모양을 지탱하게 만든다.
이후 포도주 및 담금주에 끓여 익히고, 고기 겉이 갈색으로 익을 정도로 참기름으로 구워준다.
끓여내고 남은 포도주 국물에 밀가루, 사과, 소금, 간장, 식초를 넣어 조림양념을 만들어 고기 경단에 부어 먹는다.
먹는 이의 눈앞에서 뜨거운 소스를 부어 고기들이 자연스레 벌어지는 모습을 만들어야 먹는 맛뿐만 아니라
보는 맛도 있는 요리가 된다.
추가글 : 전가 원종이 만든 비법 요리로 단기 3800년 10월 가족들을 위해 만들었으며, 머나먼 남쪽 미국(米國)에서 자라는 도마도 라는 채소를 넣으면 더 새콤달콤해져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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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현대의 요리를 조선 시대에 구현하며 비틀 경우에는 전가의 요리서가 글의 말미에 추가됩니다.
참고로 남미에서 전래 된 것 같은 당근은 당나라 시대에 전해진 작물로, 당나라에서 건너온 근(뿌리)이라는 의미입니다.
당면도 마찬가지로 당나라에서 전해진 면이라는 이름입니다.
그리고, 당근은 원래 붉거나 주황색이 아닌 흰색이나 아이보리색이었다고 합니다.
단맛도 아예 없고, 쓴맛만 있는 뿌리였답니다.
그러다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에서 단맛이 강하면서 뿌리의 색이 주황색, 붉은색인 종자가 나왔고, 그게 퍼진 것이 지금의 당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