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9화
‘네 할아버지만 기분이 좋았을걸.’
유일하게 옛 추억을 공유하면서 자유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대였을 것이다. 진혁은 피식 웃었다.
「친우였나 보군요.」
「맞아요, 다른 분들을 대할 때와는 온도 자체가 달랐다고나 할까요? 진혁 씨를 만날 때는 또 달랐지만요.」
미미는 다른 서류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 장 어르신과 함께 한국으로 가신다고요?」
「정확히는 그분이 제가 가는 곳이 어디라도 따라간다고 했습니다.」
「이 경우에는 조금 까다로워요. 장 어르신께서는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이거든요.」
「…하아?」
「지금 정부에서 소수 민족을 탄압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잖아요? 장 어르신은 독립 결사 단체의 핵심 위원 중 한 명이었어요. 할아버지가 죽은 것으로 꾸며서 탈출시켰죠. 그래서 황 그룹의 비행기나 병원, 차량은 이용하지만….」
진혁이 이마를 짚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중국 내부의 이동은 가능하지만, 외국까지 가려면 위조 신분이 필요해요. 제가 왕 수석에게 지시해 따로 마련해 볼게요.」
「한국에 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것도 문제겠는데.」
진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미가 웃었다.
「배를 타고 가면 훨씬 쉬울 거예요. 할아버지가 알고 계신 루트가 있을걸요?」
◈ ◈ ◈
우여곡절 끝에 한국까지 도착하는 데에는 만 이틀이 걸렸다.
살인도, 강도도 아닌 밀입국.
본의 아니게 현대의 법률을 어기게 된 장유향이 밀수선에서 내리며 한마디 했다.
「내가 살아서 다른 나라에 올 수 있을 줄은 몰랐네그려.」
「관심이 없어서 타국에 가지 않은 것이 아니었나?」
「중국 땅도 이렇게 넓은데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까지 갈 필요가 무에 있습니까.」
「굳이 따라오지 않았어도 되는데 말이지.」
진혁이 말꼬리를 흘리자 장유향이 말했다.
「주군께서 가시는 길을 이 도객이 어찌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진혁이 경어로 말했다.
「자, 자. 이제부터는 정말로 말을 편하게 하시는 겁니다.」
「노력해 보겠……다.」
항구에서 한참 걸어 올라가자 대기해 있던 차량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포구에서 서울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진혁이 말했다.
「내가 지금 훈련시키는 놈이 하나 있는데 아주 싹수가 좋아.」
「일월 신교의 도량입니까?」
「자, 자. 경어를 쓰지 말고.」
「신교의 도량이 될만한 인물입니까.」
「아니야, 아니야. 신교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인물이야. 아랍의 왕족인데, 미각을 예민하게 하는 훈련을 받고 있지.」
「그거 사천당가의 애들이 어린애들한테 시키는 훈련 아닙니까?」
「반말 쓰기가 그렇게 어렵나?」
「주군께서 쓰시면 되지요. 어차피 이제 만나는 사람들은 전부 중국어를 모르지 않습니까?」
장 노인이 능글맞게 웃었다. 진혁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렇게 태연하게 농담하는 성격이 아니지 않았나?」
「태명이 하고 오래 부대끼다 보면 누구라도 이렇게 될걸요.」
「그래도 서로 이름을 부르는 사이였구만.」
「그 새끼 이름이라도 부르면서 욕해 줘야지, 저 아니면 어디 그놈 이름 부를 놈이 있을 것 같습니까.」
「하하.」
「어디서도 허세 부리고, 머리 좋은 거 티 내서 이득 되는 것만 흘리니 말입니다. 그놈을 존경하거나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놈은 많아도 저처럼 막 대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렇지.」
「저야 그놈이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던 시절을 아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 녀석은 너무 위대하고 훌륭한 인물인 겁니다. 함부로 깠다가 잘못 긁히면 독을 뿜어내기도 하니까, 막 대할 수가 없지요.」
「녀석은 그때도 난 놈은 난 놈이었어.」
「제갈 가문에서 그놈이 그렇게 클 줄 알았으면, 축출한 것을 아주 크게 후회했을 겁니다.」
「잠깐, 그놈이 제갈가 출신인 건 어떻게 알았나?」
「나중에 직접 얘기해 주던데요? 주군께서는 모르셨습니까?」
「…아니, 알고 있었다.」
사실 드라마를 보고 알았다. 하지만 자신은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야기하기 어려웠을 텐데요, 그놈이 그래도 주군께는 진실했지요. 죽는 날까지 충성을 다하지 않았습니까? 그 충성을 바치는 방식이 조금 남달라서 그렇지.」
「맞아. 제멋대로 좋다고 생각하는 건 전부 떠넘기는데, 내가 원하건 원치 않건 그건….」
진혁은 금은보화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것도 아니었다.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아 미미와의 관계가 공고해지며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지기는 했다. 그러나 그는 그저 오랜 친구가 조금 더 살기를 원했다. 그래서 친교를 나누며 서로 알아가고 친해지고 싶어 했다.
짧은 소회를 들은 장유향이 말했다.
「그놈 그거 유산 상속 빨리 하려고 죽은 거네요.」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아무렴요,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승계하기 어렵다는 걸 아니까 빨리 갔구만요.」
「마지막까지 아주 악랄한 놈이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샌가 훈련소에 도착했다.
훈련소 정문 앞에는 양복을 입은 남자들과 트레이닝복을 입은 중년의 아랍인 한 명이 서 있었다.
「어서 오게나!」
진혁이 며칠간 자리를 비운 동안 무하마드는 홀로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소식을 듣고 급하게 마중하러 나온 것으로 보였다. 방금 전까지 운동하고 있었는지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한 비서로군.’
먼저 입국해 장 노인이 머물 준비를 하고 있던 한 비서 역시 시간에 맞추어 나와 있었다.
진혁은 한 비서에게 지시했다.
“일단 장 어르신을 숙소로 모시고, 짐도 챙겨 주게.”
“알겠습니다.”
한 비서와 장유향이 걸음을 옮겼다. 유능한 한 비서는 친절하게 장 노인을 안심시키며 길을 안내했다. 장유향은 길 잃은 송아지처럼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며 진혁이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했다.
「괜찮으니 숙소에 가 계십시오, 저녁 식사 때 뵙지요.」
진혁은 중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장유향에게 철저하게 경어를 썼다. 장유향이 무어라 입을 떼려고 하다가 이내 결심한듯 한 비서를 따라갔다.
두 사람이 숙소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무하마드는 힐끔힐끔 그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누군지는 굳이 묻지 않으려고 애썼다.
「미국과 중국은 어땠나? 항저우의 오리 구이는 듣던 대로 맛있었나? 중국의 오리 구이라면 통째로 구워서 바삭바삭한 껍질을 내는 그거지?」
진혁이 웃으며 말했다.
「그건 북경 스타일의 요리고, 항주의 오리 구이는 진흙을 발라 통째로 찐 것에 가깝습니다.」
「호오, 과연 중국은 넓어. 단순한 오리 요리라고 해도 여러 가지 스타일이 있단 말이지.」
「아랍 역시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이지, 그래서 언제 이야기해줄 건가?」
무하마드는 푸근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아까 같이 온 노인분은 누구신가? 맛에 대해서 가르쳐 주러 온 요리사인가? 숙소 쪽으로 가는 걸 보면 이곳에서 오래 머무실 예정인가?」
호감 어린 시선을 보면서 진혁은 눈을 깜빡였다.
「…학생입니다.」
「뭐? 나 말고 또 학생을 들였다고? 말도 없이?」
무하마드는 흥분하지 않았다. 그는 목소리를 차분히 가라앉히고서 낮게 말했다.
「잠깐 참관했다가 가는 학생이겠지? 이전에 마리오 강이나 동진 김 같은 학생들도 데려오지 않았나.」
「조금 오래 있을 겁니다.」
「나 말고 학생을 또 들인다는 말은 없었잖나.」
「옛날부터 가르치던 학생이라….」
진혁이 말꼬리를 흘렸다. 그는 지금 장유향의 존재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음 맞닥뜨렸다.
‘이걸 내가 설명해야 하나?’
「아니, 말하기 싫으면 말할 필요 없네.」
무하마드가 눈을 번득였다.
「제자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엄청나게 많은 분이시던데. 내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가 아닌가 싶어. 그런데 자네에게서 또 배우려고 하다니, 정말로 대단한 분이시군. 그러한 열정을 나도 배워야겠어.」
무하마드는 갑자기 뒤돌아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어디 가십니까?」
「아무래도 오늘 운동이 좀 부족한 것 같아.」
무하마드 왕자가 움직이는 뒤로 다른 경호원들이 조르르 따라갔다. 어미 오리를 따라가는 새끼 오리들처럼 여러 사람이 우르르 움직이는데, 수석 경호원인 카심만이 뒤에 남았다.
카심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진혁 쉐프 님께서 계시지 않은 동안에도 무하마드 왕자님은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으셨습니다. 체력 단련은 물론이며 검은 방에도 계속해서 들어가셨지요.」
「?예.」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항주에 가서 오리구이를 먹을 때까지는 지속적으로 전자우편을 확인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장유향을 만나러 갈 때는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입국 문제를 처리하고 한국에 들어올 때까지도 정신이 없었다.
‘이 부분은 확인하고 제대로 피드백을 주어야겠군.’
「혹시 무하마드 왕자님의 성취가 부족하다고 느끼셔서 옛 제자분을 다시 데려오신 것이신지요?」
진혁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아니요, 전혀 아닙니다. 그쪽 계열의 제자가 아니에요.」
「왕자님은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진혁이 잘라 말했다.
「제가 알아듣게 설명하겠습니다. 미각 훈련을 받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아! 알겠습니다. 함부로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카심이 고개를 숙이며 덧붙였다.
「혹시 진혁 쉐프님께서 설명하시기 전에 제가 그 사실을 왕자님께 말씀드려도 괜찮으십니까?」
「물론이지요, 상관없습니다.」
「감사합니다.」
◈ ◈ ◈
무하마드 왕자와 짧은 대담을 마친 후, 진혁은 장유향을 찾아갔다. 장유향은 깔끔하고 단정한 숙소를 보고서 감격해 있었다.
「비단 침구에 매트리스까지, 제가 쓰던 것을 기억해 주시고 챙겨 주셨군요.」
「늙어서 불편한 데서 자면 허리가 뻐근할 테니까.」
「세심한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는 몇 번이고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진혁이 제지했다.
「하루 이틀 지낼 것이 아니니 자리라도 편하게 자야지.」
숙소는 좁지 않았다. 침실로 사용될 방 한 칸이 딸려 있고, 별도의 주방과 욕실 그리고 거실이 있었다.
두 사람은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주군께서 빵을 굽는 일을 하고 계시는지는 몰랐습니다.」
진혁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 정보는 한 비서에게 들은 것처럼 보였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몰라도, 장유향은 단단히 결심한 것처럼 보였다.
「제가 오리구이를 어떻게 구우면 되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완벽하게 전수해 드리겠습니다. 그 기술을 익히시면 이번 생이 아니라 다음 생에도 먹고 살기는 어렵지 않으실 겁니다.」
진혁이 눈을 깜빡였다.
「어, 아니 안 가르쳐 줘도 되는데.」
「전부터 비밀 약초를 알고 싶어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재료는 사실-.」
「감초 아닌가?」
「?! 어떻게 아셨습니까!!!」
「먹어보면 알지.」
「수천, 수만 명의 사람이 제 오리구이를 먹어봤지만 알지 못했단 말입니다!」
「그건 그 사람들이 제대로 된 맛을 모르는 사람들이니까 그렇지. 미각 훈련을 조금만 하면 알 수 있게 돼.」
「그 미각 훈련이라는 건, 저 아랍 왕족이 받고 있다는 훈련 말입니까? 새끼 암살자들의 감각을 예민하게 하는 그거!」
「아, 비슷하지. 좀 더 개량하긴 했어.」
「그거, 저도 받겠습니다.」
장유향이 매처럼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