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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122화 (122/123)

122화 검, 은, 독(劍, 銀, 毒)(4)

서백과 당룡이 전음으로 대화했기 때문에 망자들은 산 사람의 기척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붕이 무너지자 상황은 돌변했다.

서백은 은침에 당했고, 당룡은 몸통 박치기에 당하느라 둘의 호흡이 평소보다 거칠어졌던 것이다.

그러자 창호지가 먹물을 흡수하는 것처럼 망자들이 순식간에 산 사람의 냄새를 맡았다.

키에에엑!

당룡의 머리 위로 수십 구의 망자들이 쏟아졌다.

비록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지만,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린 당룡은 몸을 날려서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서백의 몸통 박치기에 당해서 뇌진탕을 일으켰기 때문.

몸이 말을 듣지 않자 당룡은 쌍검으로 망자들을 베어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쌍검은 도중에서 멈췄다.

목을 베고 사지를 절단 낸다고 해도 망자들은 죽지 않을 터였다. 제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망자들 속에 파묻힌다면 최소 한군데 이상 물리는 것을 피할 수는 없는 일.

‘늦었군.’

당룡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쌍검을 멈춘 것이었다.

그의 무공 수위가 그럭저럭 괜찮았다면 죽지 않으려고 발광을 했으리라.

하지만 고수는 자신이 죽는 순간을 알 수 있는 법.

망자들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순간, 당룡은 두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도 그의 입가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끝인가.’

그런데 게슴츠레 뜬 당룡의 눈에 그림자 하나가 질풍처럼 쇄도하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눈이 부실 정도의 섬광이 두 번 번쩍였다.

그림자는 서백이었다. 당룡의 머리 위로 쇄도한 서백은 전신을 두 번 회전하며 검을 휘둘렀다.

대검이 커다란 원을 두 차례 그리며 회전했다.

피잉. 피잉.

그야말로 섬전 같은 이검(二劍). 검격이 얼마나 빠른지 그 큰 대검에서 회초리 휘두르는 소리가 났다.

대검은 망자들의 목, 팔다리, 몸통을 사정없이 동강 내 버리며 회전했다. 창졸간에 토막난 망자들의 목과 사지가 우박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후두두둑. 철퍽철퍽철퍽.

서백의 석가검법은 말 그대로 망자들을 갈아 버렸다. 하지만 망자들의 잘린 목은 당룡을 물어뜯으려고 덤볐고, 잘린 손목은 당룡의 사지에 들러붙었다.

딱딱딱딱. 여기저기서 턱주가리가 왕복하며 이빨을 부딪쳤다.

그때 서백이 당룡의 뒷덜미를 잡았다.

턱.

‘……?’

당룡은 서백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방금 이검을 휘두를 때 망자들과 함께 도륙해 버렸으면 그만 아닌가. 아니면 목 뒤의 급소에 내공을 불어넣어서 후환을 없애려는 것인가.

순간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이 당룡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휙.

‘……!’

강력한 힘이 뒷덜미를 잡아당기자 도포가 가슴을 압박해서 당룡은 숨을 쉴 수 없었다.

서백은 쏟아지는 망자들의 토막더미 속에서 당룡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빼냈다.

계속해서 서백은 당룡의 뒷덜미를 잡은 채 몸을 날렸다. 그리고 시커먼 독무(毒霧)가 가득한 관제묘를 빠져나갔다.

* * *

사람은 죽는 순간 평생 살아온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한다.

당룡은 천천히 눈을 떴다. 머리 위는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발밑은 뿌연 안개에 휩싸인 암벽이 보였다.

이상했다. 이런 평범한 풍경이 주마등이라니.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보니 자신이 있는 곳은 깎아지른 암벽에 난 잔도였다. 폭이 좁은 잔도에 아슬아슬하게 떨어지지 않고 누워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룡의 뒤에 서백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당룡은 그제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해 냈다.

독공을 써서 지붕이 무너지는 바람에 망자 떼에 깔려서 죽을 위기에 처한 순간, 서백이 그를 붙잡고 관제묘를 탈출한 것이었다.

관제묘를 나온 서백은 당룡을 끌고 암벽 위를 올라갔다.

서백이 나오자마자 관제묘가 독무에 녹아서 무너졌다. 망자들이 건물 파편에 깔려서 추격해 오지 못한 것은 뜻하지 않은 행운이었다.

이후 잔도로 올라와서 안전하게 되자 서백은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지하당의 쇠뇌 세례를 받고 암벽에서 떨어진 뒤 망자 떼와 사투를 벌이느라 석가심결을 반 시진이 훨씬 넘게 시전했다.

관제묘에서는 잠시 시전을 멈췄지만, 당룡과 싸우느라 재차 석가심결을 시전해야 했다.

시전 시간이 반 시진이 넘으면 주화입마에 들 위험이 있는 석가심결.

그러나 아무리 운기조식을 해 봐도 몸에는 별다른 이상이 느껴지지 않았다.

특히 관제묘에서는 당룡을 꺾기 위해서 석가심결을 배운 이래 처음으로 십이성까지 시전했었는데…….

‘혹시 회광반조(回光返照)인가?’

사람이 죽기 직전에 잠깐 기운을 되찾는다는 뜻의 회광반조.

하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운기조식을 해서 그런지 전신이 가벼웠다.

당룡이 깨어난 것을 본 서백은 운기조식을 멈췄다.

“정신이 드셨습니까.”

“…그래.”

서백이 목숨을 구해 주었지만 당룡의 목소리는 여전히 거만하고 싸늘했다.

물론 서백도 그가 고마워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천당문인의 오만한 자존심이 어디 갈까.

서백이 그를 구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당룡도 그게 궁금했는지 물어왔다.

“왜 나를 살린 거지?”

그의 얼굴에 많은 의문이 담겨 있었다.

왜 검으로 자신을 베지 않았는지, 왜 망자들 속에 파묻히던 것을 빼내 주었는지, 왜 관제묘에서 끌고 나와 탈출했는지.

그중 어느 하나만 하지 않았더라도 당룡은 이미 죽은 목숨이리라.

서백은 단도직입으로 말했다.

“거래를 제안하겠습니다.”

“무슨 거래?”

“제가 입고 있는 도포 속에서 바느질한 곳을 뜯으면 기름종이로 밀봉한 서책이 나올 겁니다.”

서백은 검지로 서책이 있는 가슴 부분을 두드렸다.

“제가 죽거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기면 서책을 소림사 방장님께 전해 주십시오.”

“내가 왜?”

“망자 떼에게서 구해 준 보답을 그것으로 대신 받겠습니다. 이것이 거래 제안입니다.”

“웃기는 소리군.”

당룡이 피식 냉소를 지었다.

서백은 관제묘에서 당룡과 싸울 때 이미 죽을 각오를 했다. 때문에 반 시진 넘게 시전하면 위험한 석가심결을 십이성까지 시전했던 것이다.

일단 당룡을 무릎 꿇리고 관제묘를 빠져나와야 서책을 소림사에 전달할 수 있으니까.

그만큼 서백에게는 스승이 내린 임무가 소중했다.

수만 구의 망자 떼가 들이닥치던 석가장.

망자들에게 산 채로 뜯어 먹히면서도 서백만은 탈출시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던 사형제들.

그들의 희생을 헛되게 할 수 없었다. 주화입마에 들어서 광인(狂人)이 된 채 중원 벌판을 떠도는 한이 있더라도.

곧이어 당룡이 입을 열었다.

“거절하겠다.”

“알겠습니다.”

서백은 미련없이 검을 들었다.

애초에 사천당문의 인물이 쉽게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무림에는 은혜를 도검으로 갚는 자들이 셀 수 없이 많다. 강호의 정리라는 말을 믿지 마라.

이제 주화입마에 들기 전에 최대한 빨리 소림사로 가야 했다. 촌음이라도 시간을 아껴야 할 터.

“그럼 다시 상대해 드리겠습니다.”

서백이 좁은 잔도 위에 발을 굳건히 박은 채 검을 어깨 위로 치켜들었다.

그런데 당룡의 대응이 예상 밖이었다. 그는 소매에서 쌍검을 빼기는커녕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지금은 너와 싸우지 않겠다.”

“제 목을 베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그건 아니다.”

“그럼?”

“내가 받은 그대로 돌려주겠다. 네가 내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나도 네 목숨을 한 번 구해 주겠다.”

“지금은 제 목을 베지 않고 살려 두는 대신, 다음에 만나면 목을 베겠다는 말입니까?”

“아니.”

“말장난할 시간 없습니다. 지금이든 다음이든 어차피 제가 이길 테니 검을 뽑으십시오. 소림사로 가는 길에 후환을 남겨두긴 싫으니까요.”

“내 말을 오해했군.”

당룡이 특유의 심드렁한 표정을 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서백은 이제 알 수 있었다. 눈앞의 남자는 싸우고자 마음먹으면 살기가 흘러넘치지만, 일단 흥미를 잃으면 세상만사 귀찮다는 얼굴이 된다는 것을.

“서책은 네가 직접 전해라.”

“…….”

“나도 네 목숨을 구해 주겠다. 말했다시피 단 한 번뿐이다. 그런 뒤에 네 목을 베겠다.”

평소 철두철미한 서백마저 당룡의 말을 바로 이해 못해서 잠깐 어리둥절하다가 되물었다.

“제 목숨을 한 번, 그러니까 제가 죽을 위기에 처하면 한 번 구해 준 뒤에, 다시 대결하자는 말입니까?”

“이제 알아들었냐. 검과 눈처럼 머리도 느리구나.”

서백은 어이가 없었다.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보답으로 한 번 위기에서 구해 준 다음 다시 목을 베겠다는 말이 아닌가.

왕이삼이 들었다면 약 주고 병 주냐며 기가 막혀 했을 말.

그러나 서백의 눈빛은 금세 진지해졌다.

-사천당문은 허언을 하지 않는다. 자존심 때문이라도 자신이 한 말을 반드시 지키지. 놈들이 지닌 그나마 유일한 장점이다.

스승의 말처럼, 당룡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지금부터 한시도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되리라.

서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당룡이 목숨을 구해 준다면 다음 순간 바로 검을 뽑고 달려들 인물이니까.

즉 언제 깨질지 모르는 휴전 상황이나 마찬가지.

서백은 검을 내렸다.

“좋습니다.”

“바로 검을 거둔다고? 내가 암수를 쓰면 어쩌려고?”

“목숨을 한 번 구해 주겠다는 말이 거짓입니까?”

“그건 아니다만.”

“암수를 쓰겠다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때 가서 베어 버리면 그만이니까요.”

“하!”

서백의 단호한 말에 당룡이 가소로운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서백은 심호흡을 하며 단전에서 내공을 돋워봤다.

다행히 주화입마의 낌새는 없었다.

하지만 언제 몸이 나빠질지 모르는 일. 그렇다면 최후의 순간이 오기 전까지 할 일을 하는 것 외에 도리가 없었다.

서백은 몸을 돌려서 잔도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디 가는 거냐? 소림사는 반대쪽일 텐데.”

“지하당으로 갑니다.”

“그놈들은 왜?”

“지하당은 쇠뇌를 발사해서 저와 소림승을 해치려 했습니다.”

“복수를 하겠다는 말이냐?”

“당신과 같습니다. 받은 대로 돌려줄 생각입니다.”

“그렇군.”

당룡은 시큰둥한 얼굴로 뒤를 따라왔다.

사실 서백은 당룡처럼 고지식하게 은원(恩怨)을 따질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지하당은 그냥 넘어가면 안 됐다.

‘소림사를 고립시키고 망자 창궐을 이용해서 세를 불리려는 자들이니 일망타진해야 한다.’

지하당으로 가는 이유, 하나 더.

‘일행이 놈들에게 잡혔을지 모른다.’

서백은 송현이 있는 만큼 일행은 무사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지하당이 일행 중 누군가를 해쳤다면?

‘몽땅 베어 버리는 수밖에.’

서백의 두 눈이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식었다.

잔도를 올라가던 당룡은 문득 앞서 가는 서백의 전신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호오.’

먼저 관제묘에서 봤던 것처럼 엄청난 내공심결 시전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공을 끌어올리지 않았는데 전신에서 은은히 살기가 배어나오는 것은 웬만한 무림인은 어림도 없는 경지.

그런 살기를 가진 자는 두 가지로 나뉜다.

천성이 사람 죽이는 것을 즐기는 자.

아니면 피칠갑의 도검삼림에서 사투를 벌인 끝에 간신히 살아남은 자.

당룡이 생각하기에 서백은 후자였다.

‘소림사에 오기를 잘했군.’

방금까지 시큰둥하던 당룡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목을 베는 재미가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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