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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121화 (121/123)

121화 검, 은, 독(劍, 銀, 毒)(3)

당홍이 사천당문의 비전 암기술을 응용해서 자신만의 비검술로 발전시켰다면, 당룡은 고모의 무공에서 착안하여 암기술을 만들었다.

바로 은침에다 은사를 연결해서 투척하는 수법이었다.

투척한 암기는 상대가 피하면 그만이다. 반면 당룡의 은침은 비검보다는 느리지만 소리도 기척도 없이 날아간다.

마치 가벼운 낙엽이 허공에 둥둥 떠서 떨어지는 것처럼.

그리고 상대의 살에 닿는 순간 혈도 속으로 파고든다.

정호잠룡(靜湖潛龍).

고요한 호수에 용이 숨어 있다는 뜻이 완벽하게 어울리는 암기술.

당홍의 비검술은 손목과 손가락을 튕기는 힘으로 시전하지만, 당룡의 정호잠룡은 은사를 통해 내공을 전달해서 조종한다.

때문에 소리도 낌새도 없다.

암기술의 극의가 무색무취(無色無臭)인 것과 같은 원리.

그러나 정호잠룡의 무서움은 시전자인 당룡 때문에 더욱 배가된다. 상대와 엄청난 공방을 주고받는 동시에 은침을 투척하고 조종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상대가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요혈에 은침이 꽂혀서 점혈당한 뒤인 것.

지금 은침이 꽂힌 곳은 서백의 양 손등의 합곡혈(合谷穴).

합곡혈은 전신의 기혈이 순환하는 곳이다. 당룡의 내공이 은사를 통해 합곡혈에 스며들고 있었고, 그 때문에 서백은 양손에 힘을 줄 수 없었다.

만약 서백이 석가심결을 시전하고 있었다면 은침의 존재를 깨달았으리라.

석가심결이 전신의 감각을 예리하게 만들어서 바늘 하나조차 서백에게 근접할 수 없었을 테니까.

당룡이 팔짱을 낀 채 전음을 보냈다. 승부가 결정되자 흥미를 잃었다는 듯이 그의 눈빛은 시큰둥하게 바뀌어 있었다.

[네놈의 패인이 무엇인지 말해 줄까?]

[…….]

[여덟 글자다. 내가무공의 허접함.]

서백은 침묵했다.

당룡이 두 손가락을 위아래로 살짝 튕겼다. 그러자 반지와 은사가 연결된 부분에서 미세하게 마찰음이 들렸다. 은사를 통해 내공이 흘러가는 소리였다.

끼릭끼릭.

[놓아라.]

터엉. 서백의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서백의 양손이 저절로 움직이더니 손바닥을 펼친 것이었다.

[꿇어라.]

털퍽. 이번에는 서백의 다리가 저절로 움직여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마치 당룡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 같은 장면. 당룡이 은사를 통해서 서백의 몸에 내공을 불어넣어 조종한 것이었다.

보통의 점혈은 상대를 혼절시키거나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 또는 입을 마비시켜서 말만 하지 못하게 만드는 등, 문파에 따라 수없이 많은 점혈 수법이 존재한다.

그러나 당룡은 상대의 몸에 은침을 꽂은 채 내공을 불어넣을 수 있으니, 다른 문파의 수법과는 차원이 달랐다.

서백은 문득 스승의 말이 떠올랐다.

-중원의 무공은 셀 수 없이 많다. 고수가 아니라도 방심하지 마라. 자신만의 필살기를 가진 자는 고수보다 무서운 법.

-그럼 모르는 수법을 처음 당했을 때는 어떻게 대처합니까?

-상대가 숨기고 있는 필살기에 당하지 않는 것은 차선이다.

-최선은요?

-먼저 상대의 목을 베어라.

스승의 충고가 말하는 것은 하나였다.

선수필승(先手必勝).

하지만 석가심결을 시전할 수 없는 바람에 상대를 일검에 베어 버리지 못했으니…….

스승의 충고가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

‘그렇다면.’

서백은 결심했다.

스승의 가르침을 거스르고 정반대로 행동하기로.

인간 신체는 아무리 점혈당해도 혼절하지 않는 이상 움직일 수 있는 부위가 있다.

바로 눈동자.

서백의 두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 눈빛을 보고 당룡이 피식 비웃음을 던졌다.

[목을 빼라.]

끼릭끼릭. 당룡이 손가락을 튕기자 서백이 무릎을 꿇은 자세로 목을 길게 앞으로 내밀었다.

일검에 목을 베기에 딱 알맞은 자세.

당룡이 검을 들고 서백에게 다가왔다.

그때 서백이 몸을 움찔하더니 천천히 허리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호오, 아직 내공이 남아 있었냐? 곱게 목을 베어 줄 테니 꿇어라.]

당룡이 왼손을 뻗어 두 손가락을 튕겼다. 하지만 서백은 선 채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꿇으라니까.]

순간 서백이 예의 땅을 미끄러지는 듯한 보법을 밟으며 당룡에게 쇄도했다.

스스스스.

아무리 봐도 중원의 무공이 아닌 것 같은 보법에 당룡의 눈썹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약관도 안 된 저 꼬마가 정말 새외에서 온 놈이라는 말인가?

하지만 다음 순간 당룡은 피식 냉소를 머금었다.

중원과 새외의 무공은 겉으로 보기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하나 그 원리는 서로 통한다.

정호잠룡의 은침이 혈도에 박힌 이상 소년의 전신은 당룡의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움직이는 놈을 베면 피가 사방으로 튈 텐데 할 수 없군.]

끼릭끼릭. 당룡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런데 서백의 몸이 일순 멈칫거리는가 싶더니 두 발을 멈추지 않고 계속 보법을 밟는 것이었다.

[이놈이?]

당룡은 내공을 은사를 통해 쏟아부었다. 한순간에 강한 내공이 들어오자 은침이 박힌 서백의 양손이 강시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그러나 서백은 보법을 멈추지 않았다.

당룡은 눈썹을 일그러뜨렸지만 냉정을 되찾았다. 어차피 서백이 당룡의 손을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은침이 손목에 박혀 있는 이상.

[외가무공 하나는 인정하지. 하지만 내공은 부족하고 두 팔은 움직이지 않으니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순순히 무릎을 꿇으면 고통 없이 목을 베어 주마.]

당룡의 단전에 쌓인 내공이 은사를 통해 세차게 이동했다. 이제 소년은 두 팔은 물론 두 발마저 바닥에 꽂힌 채 움직이지 못할 터.

끼릭끼릭끼릭.

[거기까지다.]

당룡이 서백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순간 엄청난 굉음이 터졌다.

터엉!

[……?]

당룡은 눈썹을 찡그리다가 자신이 극히 짧은 찰나이지만 정신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을 차리자 자신은 관제묘의 구석에 서 있는 기둥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당룡은 그제야 상황을 깨달았다. 등을 기댄 게 아니라 엄청난 충격을 받고 몸이 날아가서 기둥에 등을 부딪친 것이었다.

두 팔을 움직일 수 없는 서백은 그대로 당룡의 가슴팍으로 쇄도해서 몸으로 들이받았다. 그야말로 통렬한 몸통 박치기.

[소림 심의파?]

소림사에는 수많은 무공이 있는데, 그중 심의파 무공은 상대에게 돌격해서 강맹한 일격을 폭발시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소림사 무공까지 훔쳐 배웠다니… 소속도 없는 잡종 같은 놈…….]

당룡은 제대로 서려고 했지만 두 발이 후들거렸다.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안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뇌진탕이 일어난 것 같았다.

그때 힘겹게 두 눈을 뜬 당룡의 시야로 자욱한 먼지 속에 서 있는 서백의 그림자가 보였다.

[소림사는 생전 처음 가고 있는 중입니다. 당연히 소림사 무공은 모릅니다.]

생전 처음이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 방금처럼 상대의 일격에 통렬히 당한 것이 당룡에게는 생전 처음이었던 것이다.

[네놈!]

당룡은 단전의 내공을 한 줌도 남김없이 쏟아부었다.

엄청난 내공이 몰려들자 머리칼보다 얇은 은사가 허공에서 파르르 떨렸다.

순간 당룡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지를 낀 두 손가락이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차가워지고 있었다.

이윽고 한겨울에 호수를 깨고 얼음물에 집어넣은 것처럼 손목 전체가 싸늘하게 식었다. 손목에 이어서 팔꿈치, 그리고 팔 전체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쫘좌좌좍.

허공에 뜬 은사가 강한 힘으로 잡아당기는 것처럼 팽팽해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한계를 넘은 고무줄처럼 끊어졌다.

쨍.

그것도 중간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깨진 유리처럼 산산조각 나서 바닥에 떨어졌다.

사천당문이 이름난 장인에게 명령해서 제작한 은사가 끊어졌다고? 도검으로도 끊을 수 없는데 어떻게?

순간 당룡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그는 진심으로 경악했다.

서백을 중심으로 세찬 회오리바람이 불고 있었다.

서백이 걸친 피풍의가 사시나무 떨듯이 세차게 펄럭거렸고, 자욱하게 낀 먼지가 사막의 모래폭풍처럼 회오리바람을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휘이이이잉.

석가심결 십이성(十二成) 시전.

서백이 바닥에 떨어진 검을 잡은 뒤 당룡에게 걸어왔다.

저벅저벅저벅.

당룡은 심장이 쿵 하고 울렸다. 서백의 신장과 체구는 당룡보다 작은데, 거인이 다가오는 것처럼 위압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백의 싸늘한 전음이 전달됐다.

[내공이 중요하다는 유언 깊이 새기겠습니다.]

[……!]

당룡은 자신의 패배를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인정할 수 없었다.

[네놈… 고작 내가무공 따위로 사천당문인을 겁박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당룡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품에 넣어서 무언가를 꺼냈다.

둥근 사발처럼 생긴 물건은 검은 입마개인 흑면구(黑面具)였다.

당룡의 흑면구는 평범한 입마개가 아니라, 무색무취의 독을 채취하는 금잠(金蠶)이란 누에에서 나온 실로 만든 것이었다.

호흡은 가능하지만 물은 물론 어떤 독도 통과시키지 않는 흑면구.

당룡이 흑면구를 입에 쓴 다음 양팔을 좌우로 활짝 펼쳤다.

순간 당룡의 양쪽 소매에서 검은 연기가 확 뿜어져 나왔다. 연기는 서백이 내공으로 일으킨 회오리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관제묘 전체에 퍼졌다.

푸슛. 화아아악.

당룡의 독공은 금잠고독과 다른 독을 섞어서 제작한 것이었다. 금잠고독이 무색무취인 반면, 그의 독은 검은 색과 함께 코를 찌르는 유황 냄새가 났다.

무색무취를 버리는 대신 독성을 배가한 것.

독을 들이마시면 순식간에 혼절해서 사망하는 것은 물론, 눈이 일각 이상 독에 노출되면 실명에 이르는 위력.

얼마나 독성이 강한지 검은 연기가 돌바닥과 나무 기둥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독이 스며든 곳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썩어들어 가기 시작했다.

치지지직.

당룡의 흑면구는 금잠 실로 만들었기 때문에 독을 막을 수 있었다. 그조차 일각을 넘기면 호흡기가 영구히 손상을 입을 정도.

[뒈져라, 크하하하하……!]

서백은 검은 연기를 본 순간 당룡이 극악의 독공을 시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령 자신도 당할지라도 상대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악의에 찬 독공.

석가심결을 십이성까지 시전했기 때문에 서백의 전신은 은은히 흘러나오는 호신기(護身氣)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독공의 위력이 워낙 사특했다.

석가심결을 멈춘다면 즉시 독을 흡입해서 죽음에 이르리라.

‘이곳을 나가야 된다.’

서백은 출입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관제묘를 탈출할 수 없었다. 당룡이 몸을 날려서 서백과 출입구 사이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이런 독무 속에서 일각을 넘긴다면 입마개를 쓰고 있더라도 당룡 역시 치명상을 입을 터.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어딜 가려고? 네놈은 사천당문의 독으로 오늘 죽는다!]

[언젠가 죽겠지만 오늘은 아닙니다.]

서백은 검을 등 뒤로 넘기고 당룡을 향해 쇄도했다. 당룡도 쌍검을 좌우로 펼치며 서백에게 달려들었다.

그때였다.

관제묘의 지붕이 무너지면서 대들보와 서까래들이 우르르 아래로 쏟아졌다.

와지끈. 우당탕탕.

망자 창궐로 오랜 기간 관리되지 않고 방치된 관제묘. 그런데 당룡의 독공 때문에 곳곳이 썩어들어 가자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지붕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문제는 지붕 파편이 아니었다.

관제묘 위에는 피를 흡수하지 못해서 고목나무처럼 말라 있던 망자들이 수십 구 넘게 쌓여 있었다.

그런 판에 지붕이 무너지자 망자들도 함께 떨어진 것이었다.

서백을 도륙 내겠다는 일념만으로 쇄도하던 당룡은 상황 파악이 늦었다. 하필 망자들이 떨어지는 위치가 당룡의 바로 위였다.

수십 구의 망자들이 당룡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

사천당문의 신진 고수가 허망하게 목숨을 잃어버릴 찰나,

서백이 망자들을 향해 쇄도하며 검을 휘둘렀다.

스으으으, 팟.

석가검법 제오로(第五路) 홀혼계이백동(忽魂悸以魄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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