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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123화 (123/123)

123화 용과 범이 손잡을 때(1)

서백과 당룡은 잔도를 타고 암벽을 올라갔다.

잔도는 곳곳이 중간에 끊어져 있었다. 손실된 부분을 건너뛰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었다.

서백이 소림승을 구하기 위해 암벽을 건너뛰었던 장소에 도착한 것은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 무렵이었다.

어쨌든 길을 찾았으니 지하당으로 가는 것은 일사천리였다.

서백과 당룡은 암벽 능선으로 이동한 다음 잔도에서 내려갔다. 이후는 숲을 지나쳐서 지하당의 출입구를 찾는 일이 남았다.

“쇠뇌를 쏘던 놈들은 정체가 뭐냐?”

“지하당이라는 방파입니다.”

“이름 한번 괴상한 놈들이군.”

“지하당은 방파명 그대로 땅속에 있는 곳입니다.”

당룡이 지하당에 대해서 묻자 서백은 지하당이 망자 창궐을 피해서 땅속 깊이 토굴을 판 방파라는 등 간략하게 설명을 했다.

“굳이 땅굴을 파고 망자 창궐 지역에 남아 있다고? 필시 무림맹 놈들과 관계가 있겠군.”

“…….”

당룡은 간략한 설명을 듣자마자 지하당의 정체를 추측해 냈다. 싸움을 즐기는 잔혹한 성품과는 어울리지 않게 머리가 좋다는 증거.

“땅속이라면 출입구 경비가 삼엄할 텐데 들어갈 방법은 있냐?”

아니나 다를까 당룡의 지적이 날카로웠다.

“생각해 둔 방법이 있습니다.”

“뭐냐?”

“그건…….”

막 대답하려던 서백이 갑자기 입을 다물고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따로 말을 하거나 신호를 보내지 않았는데 당룡도 즉시 따라서 몸을 숨겼다.

‘머리만 좋을 게 아니라 행동과 판단까지 빠르군.’

서백은 당룡이 좋은 잠행조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사천당문인이 아니라는 가정 하에서, 서백의 목숨을 노리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서의 얘기였다.

둘이 몸을 숨긴 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제각각 다른 복장이라 소속을 알아볼 수 없는 인물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으니, 죽창을 들고 입 가리개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지하당이었다.

당룡도 지하당이냐고 묻는 눈길을 보냈다. 서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당도들이 들고 있는 죽창을 보자 서백은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다시 보자 지하당도들의 죽창은 그냥 창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통이 굵었다.

속에 쇠뇌를 발사하는 기관장치가 들어 있다는 뜻.

또한 군데군데 잎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방아쇠가 보이지 않도록 위장한 게 틀림없을 터.

지하당은 치명적인 병장기를 소유한 동시에 철저히 숨기고 있었다. 마치 꼬리에 독침을 숨기고 있는 전갈처럼.

그런데 지하당도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십여 명쯤 되는 사람들이 밧줄에 줄줄이 묶인 채 죽창을 겨눈 지하당도의 명령에 따라 힘없이 걷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서백은 토굴에 있던 피난민들의 표정이 유난히 어두웠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토굴 벽에 묻어 있었던 핏자국도.

서백은 당룡에게 수신호를 보낸 뒤 사람들 옆으로 접근했다. 서백과 당룡은 번개처럼 나무와 나무 뒤에 숨어서 이동했기 때문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마침 지하당도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 장사는 대박이군!”

“부당주님이, 아니, 당주님이 두둑하게 포상을 내리겠지?”

“당연하지! 십이 두(頭)나 잡았으니 평소보다 두 배는 많은데 당연하지!”

지하당도들의 대화를 엿들은 서백은 그들의 정체를 깨달았다.

‘역시 인신매매였군.’

토굴 속에 있던 사람들은 지하당이 안전하게 지켜 주는 피난민들이 아니었다. 지하당이 강제로 잡아 온 다음 팔아넘기는 상품이었던 것이다.

‘무림맹이 만든 곳이 아니라 녹림이었나?’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지하당이 원래 무림맹의 하부 방파인 것은 틀림없으리라. 그 정도 규모의 토굴을 만드는 것은 일개 녹림이 벌일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지하당이 바뀐 것은 확실했다.

아마도 망자 창궐 이후부터일 것이다. 망자 창궐로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을 안전한 곳까지 피신시켜 주겠다며 끌고 온 뒤 강제로 팔아넘기는 것일 터.

서백의 눈빛이 싸늘한 것을 보고 당룡이 전음을 보냈다.

[뭐하는 놈들인가 했더니 사람 장사꾼들이었군.]

[…….]

[뭐 그리 심각하냐. 인육 장사도 아닌데.]

[둘 다 용서받지 못할 짓입니다.]

[그래? 그럼 베어 버릴까?]

당룡이 소리 없이 소매에서 쌍검을 꺼냈다.

[기다리십시오.]

[왜?]

[사람들을 방패로 세우면 곤란합니다.]

[무슨 상관이냐. 몽땅 쓸어버리면 그만이지.]

[죄 없는 사람들까지 휘말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알았다. 좋을 대로 해라.]

뜻밖에도 당룡은 흔쾌히 쌍검을 회수했다.

그는 서백의 목숨을 한 번 구해 주겠다고 한 만큼, 서백의 말에 굳이 반대하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머릿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인물.

또한 서백은 당룡의 시큰둥한 눈빛을 보고 그가 검을 회수한 이유를 하나 더 알 것 같았다.

‘저들을 베어 봤자 별로 재미가 없어서겠지.’

서백도 피난민들의 안전을 최우선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하당도들을 당장 응징하지 않는 것은 일행의 안전이 불투명해서였다.

만약 일행이 지하당에 잡혀갔다면?

‘일행을 안전하게 구출한 다음에 응징해도 늦지 않다.’

문제는 지하당에 잠입하는 것이 만만치 않을 거라는 점이었다.

지하당도들의 뒤를 밟으면 출입구는 쉽게 알 수 있을 터.

그러나 무작정 지하당 내부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천만했다.

나무 뚜껑을 열고 들어간 뒤에도 돌판을 한 번 더 열어야 한다. 게다가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은 침입자가 도검을 휘두르기 어렵게 만든 지형.

사실 계단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서백은 양손으로 대검을 쓰니, 변칙적으로 좌우 손을 바꿔서 검을 왼쪽에서 휘두르면 된다. 당룡도 쌍검을 쓰니 큰 문제는 없을 터.

‘진짜 문제는 쇠뇌다.’

땅속으로 깊게 이어지는 지하당의 비좁은 통로.

맞은편에서 지하당도들이 무차별로 쇠뇌를 발사한다면? 수십수백 발의 쇠뇌가 전신에 박혀서 고슴도치 꼴을 면치 못할 것.

물론 서백은 쇠뇌가 두렵지 않았다. 당룡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지하당도들이 쇠뇌를 쏜다는 것은 잠입이 들통났다는 뜻이다.

‘그럼 지하당도가 일행을 인질로 삼겠지.’

그것만큼은 무조건 피해야 됐다.

만약 지하당도들이 돌판 등으로 통로를 막고 수성에 들어간다면?

내부 구조를 모르는 잠입자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단순히 지하당도들의 뒤를 밟아서 들어가는 것은 승산이 없었다.

‘그렇다면…….’

서백은 잠입에 최적인 출입구를 생각해냈다.

‘우물.’

오행(五行)을 본따 만든 지하당의 출입구는 모두 목화토금수로 모두 다섯 곳.

서백은 지하당의 호법인 강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물이 말라 버린 폐우물을 개조해서 통로로 만들었소.

그렇다면 목화토금수 다섯 출입구 중에 폐우물 통로가 있을 터.

또한 폐우물 통로는 말이 드나들 수 있다고 하니, 다른 좁은 통로보다는 잠입이 수월하리라.

문제는 폐우물 통로가 어디 있냐는 것이었다.

동서남북중이 아니라 목화토금수로 명명한 것도 각 출입구의 위치를 모르게 하려는 지하당의 술수.

이전에 출입한 곳 금(金) 자 통로는 다섯 개 중 중(中), 즉 한가운데 위치한 곳이리라.

‘폐우물은 사방위 중 하나다. 어디지?’

[출입구야 놈들 뒤를 밟으면 나올 텐데 무슨 걱정이냐? 다른 잠입 장소를 궁리하나 보지?]

[…….]

당룡의 지적은 이번에도 정확했다.

말 한 마디 주고받은 것 없이 눈빛만 보고 상대의 생각을 짐작한다는 뜻.

‘좋은 잠행조가 될 수 있는 자인데 아깝군.’

[머리 싸매고 궁리해 봤자 좋은 생각 안 나온다.]

당룡이 나무 뒤에서 몸을 빼낸 뒤 그림자 속을 건너뛰며 지하당도들에게 접근했다.

그때 지하당도들 중 하나가 슬금슬금 뒷걸음쳤다. 그가 무리에서 빠지자 동료가 물었다.

“뭐 하는 거냐?”

“먼저 가고 있어. 소변이 급해서.”

“빨리 와라. 호법이 알면 지랄할라.”

동료들이 가 버리자 지하당도는 수풀이 우거진 곳으로 와서 바지춤을 내리고 시원하게 일을 봤다.

그런데 지하당도가 막 바지를 올렸을 때였다.

스스스스.

공기 중에서 무언가가 깃털처럼 날아오더니 지하당도의 뒷덜미에 내려앉았다.

“……!”

지하당도는 한 차례 움찔하더니 목인상처럼 그 자리에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그의 뒷덜미에는 머리카락보다 가는 은침 두 개가 박혀 있었다.

바로 당룡이 독문 암기술인 정호잠룡을 출수한 것이었다.

서백은 당룡이 소매를 휘두를 때부터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정호잠룡의 수법은 눈앞에서 직접 보고도 쉽게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은침과 은사는 너무 얇고 가느다래서 빛이 반사되지도 않을 정도였다. 또한 내공을 불어넣어서 움직이니 날아가는 낌새를 눈치채기도 어려웠다.

말이 암기술이지 무색무취의 독공과 같은 수법.

당룡이 서백의 눈앞에서 대놓고 정호잠룡을 출수한 것도 그런 자신감에서일 것이다.

보고 싶으면 마음대로 봐라. 어차피 막을 수 없을 테니.

지하당도 무리가 멀리 가 버리자 서백과 당룡은 나무 뒤에서 나왔다.

[그럼 심문을 시작해 볼까.]

[…….]

굳이 반대할 필요는 없었다. 서백은 팔짱을 낀 채 당룡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봤다.

[마혈이라도 점혈할 생각입니까?]

[마혈 좋지. 한데 시간이 걸리는 게 흠이야.]

[그렇군요.]

[하나 더. 이놈을 다시 돌려보내지 않으면 놈들이 경계를 강화할 거다. 점혈했다가 풀어 주면 분명 적한테 붙잡혔다고 떠들겠지.]

당룡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심문을 한 자를 다시 돌려보낼 생각이란 말인가? 그럼 결국 똑같이 경계를 강화할 텐데…….

그때 당룡이 손가락들을 움직이며 은침을 조종했다.

끼릭끼릭끼릭.

주의해서 듣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미세한 마찰음. 소리는 작지만 몇 번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기분 나쁜 소리.

순간 지하당도가 고개를 위로 살짝 치켜들더니 입을 헤 벌렸다. 마치 이성이 없는 백치가 된 듯한 얼굴이었다.

당룡이 씨익 웃더니 지하당도에게 물었다.

“지하당의 출입구가 몇 개냐?”

“목화토금수 다섯 곳이오…….”

지하당도가 당룡이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했다. 정말 백치가 된 것인지, 은침 점혈이 심신을 어떻게 조종하는지 원리는 알 수 없었다.

당룡이 고개를 돌려 서백을 봤다. 원하는 질문을 해 보라는 눈치였다.

“폐우물이 금(金) 자 통로에서 어느 방위에 있습니까?”

“남쪽이오…….”

“거리는 얼마나 떨어져 있습니까?”

“백 장(丈)쯤 가면 있소…….”

“폐우물을 지키는 경비는 몇 명입니까?”

“두 명이오…….”

“경비가 왜 그리 소홀하죠?”

“거긴 엄폐된 곳이라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소…….”

듣던 중 반가운 소리. 지하당도의 얘기를 듣고 서백은 폐우물을 잠입 장소로 정했다.

“다 했냐?”

“네.”

모든 정보를 알아낸 서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당룡이 지하당도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은침을 빼면 네놈은 지금 말한 것을 모두 잊어버린다.”

“알았소…….”

“돌아가라.”

당룡이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허공에서 가느다란 은침이 회수되어 옷소매로 들어가는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지하당도는 뒤에 있는 서백과 당룡의 존재는 전혀 깨닫지 못한 채 멍한 얼굴로 걸어갔다.

“저놈은 아무것도 기억 못할 거다.”

“대단한 수법이군요.”

서백은 솔직하게 칭찬했다. 비록 적이지만 효과적인 수법인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사람들을 다 조종할 수 있습니까?”

“아니, 나보다 내공 수위가 현저히 낮은 놈들만 가능하다.”

수법의 단점이 될 수도 있는데 당룡은 흔쾌히 대답했다. 서백이 알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오만함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서백은 지하당의 금 자 통로가 어디쯤 있는지 거리를 짚어 봤다. 그리고 금 자 통로에서 다시 남쪽으로 백 장 떨어진 곳의 위치를 짐작해 봤다.

계산이 끝났다. 남은 것은 행동뿐.

“그럼 이동하겠습니다.”

두 개의 인영이 어두운 숲속을 소리 없이 주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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