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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113화 (113/123)

113화 잔도 위에서(3)

서백이 진문의 생각을 읽고 말했다.

“제가 자란 석가장은 산속에 있어서 밧줄을 쓸 일이 많았습니다. 사천에서 서장으로 넘어가는 곳의 지세도 숭산만큼 험준하거든요.”

그 말을 듣고 진문은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천은 고래로 지세가 험준하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사천의 중앙은 비옥한 평원이다. 그러나 사천을 둘러싸고 있는 산맥은 무림인도 감히 넘을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였다.

사천에서 중원 땅으로 나오려면 한중에 있는 검문관(劍門關)이나 촉도관(蜀道關)을 통과해야 된다.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 사천을 벗어나는 방법은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험준한 산맥이 병풍처럼 주위를 둘러싸고 있어서 잘못 발을 들였다가는 목숨을 잃을 만큼 위험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천과 서장의 접경지대는 중원 산맥의 험준함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말할 정도니…….

어릴 때부터 그런 곳에서 살아온 소년이 밧줄 매듭에 능숙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무공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대단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소년.

‘나이와 상관없이 무림에 큰 도움이 될 인물이다.’

서백을 만난 지 불과 차 한 잔 마실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으나, 진문은 마음속으로 서백을 그렇게 평가했다.

‘망자 창궐만 아니라면 신진고수가 나타났다고 전 무림이 떠들썩했겠군.’

“그럼 암벽을 건너갑시다.”

서백의 말에 피난민들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밧줄 하나에 의지해서 천길 낭떠러지를 건넌다.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면 겁에 질려서 엄두조차 못 냈을 일.

하지만 그냥 피난민들이 아니라 무공을 익힌 자들이니 결심을 굳힌 것이리라.

세 명의 피난민들은 체구가 제각각 달랐다.

고목나무처럼 깡마른 자, 여름철 수박처럼 배가 불룩하게 나온 자, 키도 제법 크고 근골이 균형 잡힌 자.

가장 먼저 깡마른 자가 그네에 앉듯이 밧줄 고리에 두 다리를 끼웠다. 서백과 진문은 발을 암벽 바닥에 고정하고 밧줄을 틀어쥐었다.

“그럼 부탁하오.”

깡마른 자가 암벽 끝으로 달려가서 허공에 몸을 던졌다.

서백이 힘을 주자 밧줄이 일직선으로 팽팽해졌다.

그러자 깡마른 자의 신형이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가로질러서 반대편으로 미끄러졌다.

촤아아악.

지금 서백이 있는 곳이 건너편보다 지형이 높은 것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만약 지형이 더 낮았더라면 밧줄을 타고 내려가는 게 쉽지 않았으리라.

잠시 후 암벽 건너편에서 쉭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서백이 검을 박아 놓은 암벽에 탁 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송현이 재차 돌멩이를 튕긴 것이었다.

피난민이 무사히 암벽을 건너갔다는 신호.

서백과 진문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공했습니다.”

“아미타불.”

다음 차례는 배가 불룩하고 비대한 자였다.

그는 처음에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표정이었으나 깡마른 자가 무사히 건넌 것을 확인하자 용기가 났는지 밧줄에 몸을 끼웠다.

“그, 그럼 부탁하오……!”

비대한 자가 침을 꿀꺽 삼킨 뒤 허공에 몸을 던졌다.

촤아아악. 비대한 자의 신형은 순식간에 밧줄을 타고 내려갔다.

잠시 후 송현이 돌멩이를 튕겨서 신호했는데, 먼저보다 이른 시각이었다. 두 번째 자가 몸이 무거운 바람에 깡마른 자보다 훨씬 빨리 암벽을 건넌 것 같았다.

마지막 피난민은 싱거울 정도였다. 무덤덤한 눈빛을 한 남자는 밧줄에 대충 몸을 끼운 뒤 아무 말 없이 허공에 몸을 날렸던 것이다.

서백은 행동거지로 보아 남자가 상당한 고수일 거라고 짐작했다.

이제 남은 것은 서백과 진문 둘뿐.

“먼저 가십시오.”

“시주는?”

“저는 암벽에 박아 둔 검을 회수해야 됩니다.”

“그럼 빈승이 먼저 실례하겠소.”

진문은 자신보다 어린 소년을 마지막에 남겨 두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곧 생각을 다시 했다.

짙은 안개 속에서 유일한 탈출로를 찾은 소년.

소년은 경신법은 물론 위기 돌파에 필수인 결단력 역시 소림사의 십팔나한인 자신에 결코 뒤지지 않을 터.

아니, 오히려 위일지도.

중원 무림에서 나이를 보고 무공 수위를 짐작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으니 말이다.

‘내 생각이 짧았군.’

만약 소림 방장이 자리에 있었다면 진문의 생각이 어리석다며 정곡을 찌르는 일침을 했을 것이다.

진문은 그런 상상을 하자 겉으로는 인자하지만 심사는 누구보다 매서운 소림 방장을 떠올리며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럼 부탁하오.”

진문은 몸 대신 팔뚝을 밧줄에 끼운 뒤 빠지지 않게 틀어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날렸다.

서백은 진문이 피난민들보다 더욱 무거울 거라고 짐작했다. 근골이 튼튼한 자는 비대한 자보다 훨씬 무거운 법이니까.

서백은 진각을 밟듯이 암벽에 발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욱 강하게 밧줄을 잡아당겼다.

그런데 진문이 절반쯤 건너갔을 거라고 생각될 때였다.

팽팽하던 밧줄이 갑자기 느슨해지는 것이 아닌가.

“……?”

밧줄을 당기던 힘이 사라지자 서백은 넘어질 뻔했으나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균형을 잡았다.

이제 밧줄은 느슨해진 정도가 아니라 중간이 축 늘어지고 있었다.

그게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건너편에 있는 지하당도들이 밧줄을 놓쳤다는 뜻.

‘대체 왜?’

서백은 재빨리 밧줄을 당겼다.

밧줄은 흐느적거리며 그대로 딸려왔다. 진문의 몸무게가 밧줄에 전혀 실려 있지 않다는 증거.

송현이 돌멩이를 던져서 신호를 보내지 않았으니 진문은 아직 건너편에 도착하지 못했으리라.

그렇다면… 진문이 추락했을지도 모르는 일!

‘큰일이다.’

위기가 닥쳤는데 서백의 머릿속은 오히려 명경지수처럼 맑아졌다.

흐으읍. 탓.

서백은 심호흡을 한 번한 다음 검을 박아둔 암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안개 속에서 검이 보이는 순간 서백은 검자루를 잡고 매달렸다.

먼저와 달리 숨을 고를 여유가 없었다.

서백은 움푹 파인 곳에 발을 댄 다음 검을 뽑았다. 동시에 암벽을 박차며 지하당도들이 있는 암벽을 향해 도약했다.

그때였다.

쉬쉬쉬쉭.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가 서백의 코앞으로 들이닥쳤다.

‘암기……?’

서백은 허공에서 몸을 회전하며 검을 휘둘렀다.

까까까깡.

암기는 넓은 검면에 막혀서 튕겨나갔다.

실로 천만다행인 결과.

그러나 암기를 튕겨 낸 것은 다행이어도 그다음이 문제였다.

암기를 쳐내기 위해서 몸을 회전하는 바람에 도약하던 힘이 사라진 것이었다.

경신법의 고수라면 삼 장쯤 되는 높이는 가볍게 뛰어오를 수 있다.

좌우로 뛰는 것은 더욱 쉽다. 위로 뛸 때와 달리 자신의 몸무게를 적게 받기 때문에 고수는 십여 장을 징검다리 건너듯 뛸 수 있다.

그러나 허공에서 솟아오르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경신법의 고수는 발로 허공을 차서 도약하던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도 일 장 정도의 범위 안에서나 가능할 뿐, 허공을 계단처럼 밟으면서 공중을 걸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게 가능한 것은 우화등선을 한 신선밖에 없을 터.

서백은 도약하던 힘을 잃고 아래로 떨어졌다.

그때 허공에서 무언가가 떨어지고 있었다. 서백은 손을 뻗어 물건을 낚아챘다.

그것은 방금 서백에게 날아왔던 암기였다. 검으로 쳐 낸 암기 중 하나가 추락하는 서백 옆으로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암기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서백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쇠뇌?’

강철로 된 화살을 틀에 물린 뒤 기관장치의 힘으로 발사하는 쇠뇌.

서백이 쥔 쇠뇌는 흡사 제갈세가의 판관필을 연상케 했다. 차이점이라면 판관필보다는 쇠뇌 쪽이 길이도 짧고 가늘었다.

하지만 맨몸에 쇠뇌를 맞았다면 근골을 찢고 관통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방금 전에는 다급히 쳐내느라 암기의 종류가 무엇인지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침이나 비수가 아니라 쇠뇌였다니…….

그것도 한 발이 아니라 다수의 쇠뇌.

그게 뜻하는 것은 하나였다.

‘지하당도들이 쏜 쇠뇌다.’

죽창 말고 이렇다 할 병장기가 없던 지하당도들이 어떻게 쇠뇌를 발사했을까?

수색대로 나온 지하당도들은 등에 혁낭을 메고 있었다. 하지만 쇠뇌는 활과 발사장치가 수직으로 붙어 있기 때문에 혁낭에 들어갈 크기가 아니다.

그럼 어디에 쇠뇌를 숨기고 있었을까?

순간 어떤 생각이 서백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것이었군.’

서백은 지하당이 어떻게 쇠뇌를 발사했는지 알아차렸다.

지하당은 진문이 건너가는 중에 밧줄을 놓아 버렸다. 또한 진문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진 서백을 겨냥해서 쇠뇌를 발사했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꾸민 술책이었던 것이다.

지하당이 배신을 한 이유는?

‘알 필요 없다.’

서백은 궁금하지 않았다.

중원 무림에서 배신을 때리는 자들이 내세우는 이유가 어디 하나둘이었던가.

서백이 생각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인과응보.

‘받은 대로 돌려준다.’

끝없는 낭떠러지에 펼쳐진 어둠이 서백의 몸을 집어삼켰다.

* * *

서백이 아직 암벽을 도약하기 전.

밧줄에 몸을 맡긴 피난민들이 지하당도들이 있는 곳으로 하나씩 도착했다.

깡마른 자, 비대한 자, 눈빛이 무덤덤한 자.

그런데 깡마른 자와 비대한 자가 암벽 위에 도착한 다음 길상백한테 다가가는 것이었다.

송현의 무심한 눈길이 그 모습을 포착했다.

‘이상하군.’

수색대가 소림승 진문을 찾아냈을 때, 그는 밧줄 다리가 끊겼으며 부상당한 피난민들이 함께 있어서 이동하지 못하고 말했다.

그런데 먼저 건너온 피난민 둘은 어디 한군데 부상당한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부상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중상이 아니라 가벼운 상처를 입은 걸지도 모르니까.

피난민 두 명이 길상백과 알고 있는 눈치라는 것이 진짜 문제였다.

그게 뜻하는 것은?

‘피난민이 아니라 지하당의 세작이군.’

지하당은 소림사를 위해 무림 정보를 수집하는 방파이니 중원 곳곳에 세작을 뿌려 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작전은 소림승보다는 두 명의 세작을 구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르는 일.

송현은 단전에 내공을 모으며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길상백과 피난민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송현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송현의 예상대로 피난민들은 지하당의 세작이었다.

“…임무는?”

“완수했습니다.”

지하당이 맡긴 임무를 비밀리에 수행하고 귀환한 세작들.

그런데 다음 대화가 송현의 주의를 끌었다.

“저놈은 누구냐?”

길상백이 마지막으로 건너온 세 번째 피난민을 가리키며 물었다.

“모르는 놈입니다. 길 잃은 도검수 같습니다.”

“그래? 그럼 상관없겠군. 시작하라.”

“존명.”

저들의 대화가 수상했다. 수색 작전은 이미 성공리에 끝났는데 무얼 다시 시작하라는 말인가?

길상백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표가 휘파람을 불며 팔을 위로 치켜들었다가 아래로 내렸다.

동시에 밧줄을 잡고 있던 지하당도들 네 명이 손을 놓아버렸다.

휘리리릭. 팽팽하던 밧줄이 느슨해지면서 안개 속으로 뱀처럼 빨려들어 갔다.

‘……!’

송현은 몸을 날려서 밧줄을 잡으려고 했다.

그때 어떤 생각이 송현의 뇌리를 스쳤다.

‘아니다. 저들은 밧줄을 놓친 게 아니라 일부러 놓았다. 그렇다면…….’

길상백과 지하당도들의 행동이 뜻하는 것은 하나였다.

배신.

위기를 직감하자 송현은 허리춤에서 청연검을 뽑아들었다.

순간 지하당도들이 몸을 돌리고 있는 송현의 등을 향해 암기를 발사했다.

쉬쉬쉬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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