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잔도 위에서(4)
공기를 찢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린 찰나.
송현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과거 하남의 흑도 무리를 찍어 누르며 위세를 떨칠 때의 일등공신, 청위표국의 비전무공인 벽운검법이 폭발했다.
스스스스.
벽운검법이 펼쳐내는 검무(劍霧)가 짙은 안개처럼 송현의 주위를 뒤덮었다.
까까까깡.
날아온 암기는 검무에 튕겨져서 날아갔다.
그러나 암기 급습을 무사히 방어해 냈음에도 불구하고 송현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보통 암기가 아니다.’
귀청을 찢는 금속음.
검을 쥔 손가락에 느껴지는 묵직한 충격.
지하당도들이 발사한 것은 침 같은 암기가 아니라 더욱 크고 강력한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밧줄은 뱀처럼 바닥을 훑으며 암벽 아래로 미끄러졌다.
송현은 암벽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고개를 내밀어 밑을 봤다.
짙은 안개 속에서 추락하는 소림승의 신형이 희미하게 보이고 있었다.
그나마 천만다행인 것은 소림승 진문이 수직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밧줄을 타고 건너오던 중이라 가속도가 붙었기 때문일 것이다.
앞을 향해 포물선을 그리며 낙하하고 있으니 점점 암벽과 가까워질 터.
암벽은 이끼가 덮여서 미끄러웠지만 곳곳에 잡초와 나무뿌리가 자라고 있었다. 천운이 있다면 나무를 붙잡고 매달릴 수 있으리라.
송현이 고개를 돌리자 지하당도들은 어느새 뒤로 물러서며 멀찍이 거리를 두고 있었다.
재차 암기를 발사하려는 준비 태세.
그때 왕이삼이 송현과 지하당도들 사이로 끼어들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오? 지하당 놈들이 밧줄을 놓친 것 아니오?”
순간 다시 파공음이 들렸다.
송현은 손으로 왕이삼의 정수리를 덮어서 아래로 누르는 것과 동시에 바닥에 몸을 엎드렸다. 그리고 소리쳤다.
“암기!”
쉬쉬쉬쉭.
왕이삼은 왜 그러냐고 물으려다가 머리 위로 세찬 파공음이 스치고 지나가자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숙였다.
문제는 주은리였다. 송현과 왕이삼이 몸을 숙이는 바람에 암기가 그녀에게 정통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주은리는 멋지게 암기를 피했다.
암기가 날아드는 찰나 주은리는 발을 고정한 채 몸만 뒤로 젖혀서 등이 지면에 닿도록 수평으로 눕혔다.
그야말로 절묘한 철판교(鐵板橋)의 수법.
암기는 허공에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칼을 몇 올 잘랐을 뿐 목표를 빗나가서 뒤쪽의 암벽에 박혔다.
퍼퍼퍼퍽.
“갑자기 웬 암기 공격이냐?”
“그냥 암기가 아니라 쇠뇌요.”
왕이삼이 어리둥절해서 묻자 송현이 대답했다.
그때 지하당도들이 다시 목표를 겨냥하는 게 보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송현 쪽이 아니라 암벽 건너편을 겨누는 것이 아닌가.
‘서백……!’
소림승 진문이 있던 암벽 건너편은 거리도 멀 뿐더러 짙은 안개에 휩싸여서 쇠뇌를 겨냥하기 쉽지 않다.
그렇다면… 지금 지하당도들이 쇠뇌를 겨냥하는 것은 서백이 암벽을 건너뛰고 있다는 뜻.
송현은 방금 암벽 바닥에 박힌 쇠뇌 하나를 뽑은 다음 지하당도들을 향해 던졌다.
쉭. 퍽.
“아아아악!”
쏜살같이 날아든 쇠뇌가 지하당도 하나의 눈을 관통하며 박혔다. 지하당도는 비명을 지르며 암벽 바닥을 뒹굴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그러나 한 명을 처치해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다른 지하당도들이 서백이 있을 곳을 향해 쇠뇌를 발사했던 것이다.
쉬쉬쉬쉭.
곧이어 안개 너머에서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렸다. 까까까깡.
“저게 무슨 소리요?”
“서백이 쇠뇌 세례를 검으로 쳐 냈을 것이오.”
“역시 우리 후배라니까!”
왕이삼이 호들갑을 떨며 외쳤다.
하지만 그는 송현의 냉랭한 눈빛을 보고서야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침을 삼켰다.
“서백이 이쪽으로 건너오고 있었을 거요.”
“뭐라고?”
“허공에서 쇠뇌를 쳐낸 거요. 안개 속에서 날아 온 쇠뇌를 쳐 냈으니 도약하던 기세가 죽었을 터.”
“그, 그럼 설마…….”
“추락했겠지.”
송현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싸늘해서 왕이삼은 등골이 오싹했다.
송현은 청연검을 쥐고 언제든 쇠뇌를 쳐낼 태세를 하며 생각했다.
‘네 명이 동시 사격, 즉 지하당은 네 발씩 쇠뇌를 쏘고 있다.’
지하당의 수색대는 모두 서른두 명.
지금까지 지하당은 네 발의 쇠뇌를 세 차례 쐈다. 모두 합해서 열두 발의 쇠뇌를 발사한 셈.
쇠뇌는 활과 달라서 한 발을 쏘고 나면 재장전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즉 방금 쇠뇌를 쏜 열두 명은 당분간 재사용할 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쇠뇌가 장전되어 있는 자들은 모두 스무 명.’
그들이 지금처럼 네 명씩 발사하면 전부 다섯 차례 발사가 가능할 것이다.
그래 준다면 오히려 고마울 터였다. 네 발의 쇠뇌를 다섯 번 쳐내는 것쯤은 별것 아니니까.
그러나 길상백이 일제사격을 명령한다면?
송현은 그것도 피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문제는 왕이삼.’
내가무공과 경신법이 일류 수준을 넘는 주은리는 적어도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왕이삼은… 쇠뇌 세례에 고슴도치 꼴을 면하기 힘들 터.
‘저들이 쇠뇌를 쏘기 전에 서른두 명, 아니, 방금 죽은 자를 뺀 서른한 명을 몽땅 베어 버릴 수 있을까?’
송현은 지하당도들과 검법으로 겨룬다면 질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검지만 당기면 발사되는 쇠뇌를 상대로 뛰어드는 것은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중상을 각오해야 되는 일.
게다가 일행이 있는 곳은 좌우가 좁은 암벽의 능선 위.
피할 곳이 마땅치 않은 것은 물론, 짙은 안개 탓에 시야가 가려서 쇠뇌 세례를 소리만 듣고 피해야 되는 상황이니…….
‘당장 정면대결은 무리다.’
송현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 것은 눈 깜빡할 사이도 안 되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상황 판단이 끝나자 송현의 결정은 전광석화처럼 빨랐다.
‘일단 후퇴해서 둘을 구출해야겠군.’
지금 시급한 것은 서백과 소림승 진문의 안위를 확인하는 것.
송현은 멍청히 서 있는 왕이삼의 뒷덜미를 잡고 몸을 날리면서 주은리에게 전음을 보냈다.
[주 소저, 둔갑술(遁甲術).]
* * *
지하당도들은 전방을 향해 쇠뇌를 겨냥한 채 한 걸음씩 전진했다.
암벽 주위는 짙은 안개가 껴서 십 장 너머는 잘 보이지 않았다.
순간 안개 속에서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쏴라.”
길상백의 명령이 떨어졌다.
지하당도들은 먼저처럼 네 명이 한 조로 쇠뇌를 발사했다.
쉬쉬쉬쉭. 파파파팍.
쇠뇌가 사람 그림자에 명중했을 텐데 타격음이 이상했다. 사람의 근골을 관통한 게 아니라 암벽에 박혔을 때 나는 소리였다.
“모두 전진해서 놈들을 찾아라.”
“존명.”
쇠뇌가 장전되어 있는 다른 조가 선두로 나가자 다른 지하당도들이 그 뒤를 따랐다.
십 장쯤 전진했을까, 선두로 나간 지하당도 하나가 바닥에 박힌 쇠뇌를 발견하고 보고했다.
“쇠뇌가 몽땅 빗나갔습니다.”
“뭐라고? 바보 같은 놈들!”
길상백은 방금 쇠뇌를 발사한 조를 노려보며 일갈한 뒤 앞으로 나갔다.
그런데 암벽 바닥을 본 순간 그는 무슨 일인지 알아차렸다. 네 발의 쇠뇌가 붉은 글씨가 적혀 있는 종잇장을 찢어발긴 채 바닥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강표도 그걸 보고 상황을 깨닫고 말했다.
“부적이군요.”
“놈들 중에 술법사가 있었군. 빌어먹을…….”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던 사람 그림자는 부적이 만들어 낸 환영이었던 것이다.
“그 수염 덥수룩한 놈은 아닐 테고, 눈빛이 날카로운 놈일까?”
“제 생각에는 계집이 술법사 같습니다.”
“고관대작의 딸처럼 도도한 척하더니 발톱을 숨긴 흑표(黑豹)였군.”
그때 선두로 나간 지하당도가 정찰을 끝내고 돌아와서 보고했다.
“놈들이 암벽이 끝나는 잔도로 내려간 것 같습니다. 추격조를 보낼까요?”
“그냥 놔둬라.”
길상백이 손을 젓자 강표가 나서서 반문했다.
“하지만 놈들이 지하당의 일을 무림맹에 알리면…….”
“어떻게 말이냐? 반대편 암벽으로 건너가는 밧줄 다리는 우리가 끊어 버렸지 않느냐?”
“…….”
길상백의 말이 의표를 찌르자 강표는 말을 삼켰다.
“아니면 놈들이 잔도를 내려가서 소림사로 간다는 말이냐? 잔도 밑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망자 떼가 숭산 전역에 깔려 있으니 갈 곳이 없겠군요.”
“내 말이 그 말이다. 놈들이 미래는 두 가지뿐. 잔도를 내려가지 못하고 암벽을 헤매다 굶어 죽거나…….”
“굶주림을 참지 못해서 잔도를 내려갔다가 망자 떼에게 포위돼서 잡아먹히거나 같은 망자가 되겠군요.”
“이제야 말귀를 알아듣는군. 게다가 어린 꼬마 놈은 소림사로 간다고 하지 않았냐. 꼬마 놈은 대수롭지 않으나 무림맹이 조금이라도 힘을 얻을 싹은 애초에 뽑아버려야지.”
“옳은 말씀입니다.”
길상백과 강표는 서로를 보며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밧줄을 타고 암벽을 건넌 세작 두 명이 길상백에게 다가가서 고개를 조아렸다.
“소림사를 중원 무림으로부터 고립시키라는 명입니다.”
“이미 진행 중이다. 잔도를 건너는 밧줄 다리를 없애버렸으니 당분간 소림사는 정찰대도 연락책도 내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당주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러자 길상백이 손날로 목을 그어 보였다.
“불귀의 객이 되었지.”
“드디어 거사를 치르셨군요, 부당주님.”
깡마른 자가 씨익 웃으며 말하자 옆에서 비대한 자가 끼어들었다.
“부당주라니, 이제 새 당주님으로 모셔야지!”
“맞아, 그렇군. 당주님, 지하당을 접수하신 걸 감축드립니다.”
“저희를 구하고 소림승은 떨궈 버리다니, 손자 못지않은 병법이었습니다.”
“손자라니, 아첨이 심하구나.”
두 세작이 아부하자 길상백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곧이어 길상백이 지하당도들에게 명령했다.
“모두 당으로 돌아간다. 혹시 놈들이 살아 돌아올지 모르니 입구를 폐쇄하고 경비를 강화하라.”
“존명!”
길상백과 지하당도들은 몸을 돌려서 귀환을 시작했다.
그런데 길상백이 발을 멈추더니 세작들에게 물었다.
“잠깐. 한 놈은 어디 있지?”
“누구 말입니까?”
“네놈들과 함께 암벽을 건너온 피난민 말이다.”
“아, 눈빛 흐리멍텅한 놈 말이죠? 아까 저기 있었는데…….”
고개를 돌리던 세작들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무덤덤한 눈빛을 한 채 멍하니 암벽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었다.
* * *
송현 일행은 주은리의 부적으로 지하당을 속여서 시간을 번 다음 반대편으로 도주했다.
어느새 암벽이 끝나고 잔도 계단이 나오자 일행은 아래로 내려갔다.
급경사가 지긴 했지만 잔도는 오래 가지 않아 끝났다. 암벽 건너편과 이어지는 밧줄 다리가 나왔던 것이다.
물론 밧줄 다리는 잔해만 남아 있을 뿐 현재 사라지고 없는 상태였다. 예전에 밧줄을 묶어 두었을 두 개의 쇠말뚝만이 암벽에 외롭게 박혀 있었다.
송현이 기척을 살폈지만 지하당이 추격해 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일행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숨을 고를 여유가 생겼을 뿐 마음이 편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낭떠러지로 추락한 서백을 놔두고 도주한 셈이 아닌가?
특히 성품이 단순한 왕이삼은 자책감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왕이삼은 전신에 힘이 빠져서 바닥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후배…….”
그렇게 잠시 망연자실하고 있던 왕이삼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내 반드시 후배의 복수를 해 주마!”
왕이삼은 몸을 돌려서 잔도를 올라가려 했다.
그때 송현이 왕이삼의 앞으로 가로막으며 어깨에 손을 올렸다.
턱.
“멈추시오.”
“뭐라고? 그렇게는 못한다! 내 지하당 놈들의 간을 씹어 먹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왕이삼은 송현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그런데 왕이삼은 몸이 굳어서 꼼짝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점혈 당한 것도 아니고 그저 어깨 위에 손이 올려졌을 뿐인데 대체 어떻게?
게다가 몸이 안 움직인다는 사실보다 더욱 섬뜩한 것이 있었다.
바로 싸늘하게 식어 있는 송현의 눈빛이었다.
“지금 경거망동하다가 당신이 개죽음을 하면 나중에 후배가 얼마나 상심하겠소?”
“……!”
그 말에 왕이삼은 혹시 모를 희망을 품고 물었다.
“그럼 후배가 죽지 않았을 거란 말이오?”
“그렇소.”
송현이 굳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담하지. 서백은 살아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