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잔도 위에서(2)
서백은 팔다리를 밀착해서 몸을 둥글게 말았다.
공기와의 마찰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방법.
송현이 튕긴 돌멩이는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반면 서백의 도약은 포물선을 그리고 있으니, 돌멩이가 암벽에 부딪쳤을 때와는 시간 차이가 있을 터였다.
서백은 그 차이를 염두에 두고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했다.
‘셋, 둘, 하나… 지금이다.’
순간 안개 속에서 암벽이 나타났다.
숭산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칠십이 개의 봉우리로 유명하다. 눈앞에서 송곳처럼 삐죽 솟아 있는 암벽도 그중 하나이리라.
서백은 접었던 팔다리를 펴며 등에서 검을 들었다.
석가심결 시전.
팟.
서백은 두 손으로 검을 빙글 돌려서 거꾸로 쥔 다음 암벽에 꽂았다.
써억. 검이 두부 썰듯이 암벽에 박혔다.
서백은 암벽에 박힌 검에 몸을 의지한 채 도약을 정지하고 매달렸다.
암벽은 송현 말대로 이끼가 잔뜩 끼어 있는 것은 물론 밤이슬에 흠뻑 젖어 있었다. 무두질한 곰 가죽을 신에 덧대었지만 발을 대는 순간 미끄러질 정도였다.
만약 대검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미끄러져서 천길 낭떠러지로 추락했을 터.
물론 서백의 도약은 그것까지 계산한 것이었다.
‘일차 도약은 성공이다.’
다음은 소림승 진문이 있는 암벽까지 이차 도약으로 건너가는 것.
지하당이 있는 곳에서 진문이 있는 암벽까지는 거리가 한참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한 번에 건너뛰는 것은 불가능했다.
능공허도를 시전할 수 있다면 가능하다는 것은 농담이나 다름없는 말. 능공허도는 시전자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다는 우화등선 수준의 무공이 아닌가.
때문에 서백은 소리가 반사되는 것을 듣고 다른 암벽이 있으리라 예상해서 징검다리로 삼은 것이다.
서백은 발로 암벽을 디디며 최대한 미끄럽지 않은 부분을 찾았다.
‘여기다.’
운 좋게 암벽에 움푹 파인 곳이 있었다.
서백은 밧줄을 충분한 길이만큼 잡아당긴 뒤 검자루에 한 바퀴를 돌려서 감았다. 이어서 암벽에 발을 단단히 고정하고 이차 도약을 했다.
탓. 서백의 몸이 안개를 뚫고 날아갔다.
그때 소림승 진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쪽이오.”
진문은 서백이 도약하는 소리를 듣고 어떤 작전인지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목소리를 듣고 서백은 도약한 방향이 정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감사하군.’
송현이 돌멩이를 투척해서 거리와 지점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진문이 확인까지 시켜주니 금상첨화가 따로 없었다.
순간 눈앞에 새 암벽이 나타나자 서백은 끝자락에 발을 걸쳤다.
동시에 어른의 허벅지만큼 거대한 팔뚝이 안개 속에서 뻗어 나와 서백의 손을 잡았다. 턱.
덕분에 서백은 일차 도약보다 편하게 착지할 수 있었다.
서백은 손을 잡아 준 소림승에게 포권지례를 하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저는 서백이라고 합니다.”
“아미타불. 소림 제자 진문이오.”
진문은 소림승답게 오른손으로만 합장을 했다.
소림사 특유의 반장.
진문은 기골이 장대하고 팔다리가 우람해서 소림 무승다운 면모가 돋보였다. 망자 창궐 시대에 연락책을 맡은 자라면 소림사에서도 중책을 맡은 승려일 터.
소림사의 장삼과 가사를 걸친 진문을 보자 서백은 드디어 소림사에 왔다는 것이 실감나서 가슴이 벅찼다.
암벽에는 진문 외에도 세 명의 사람이 더 있었다.
“저들은 누구입니까?”
“잔도에서 만난 피난민들이오. 망자 떼를 피해서 암벽으로 올라와 간신히 목숨을 구한 듯하오.”
피난민 세 명이 서백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인사했다.
“이렇게 몸소 구하러 와 주다니 감사하오.”
“진정한 소년 영웅이구료!”
“별말씀을.”
서백은 그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포권지례를 했다.
그러나 입가에는 미소를 걸린 반면 시선은 냉정하게 피난민들의 면면을 살피고 있었다.
‘그냥 피난민이 아니군.’
피난민들은 행색이 남루해서 망자 떼를 피하느라 갖은 고초를 겪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허리춤에 검 한 자루씩을 차고 있는 것이 눈에 걸렸다.
명문정파 소속은 아닐 테지만 적어도 무림밥을 먹고 있다는 뜻.
특히 눈빛이 살아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망자 떼에 쫓기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면 심신이 지쳐 있어야 마땅할 텐데, 피난민들의 눈빛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은은하게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수상한 구석이 있는 자들이군.’
무림인들이 각자 사정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무엇보다 지금 같은 망자 창궐 시대라면.
무림의 각 문파는 정보를 수집하는 연락책을 중원 곳곳에 파견한다. 중원은 흑도와 녹림이 즐비한 곳이니, 변장은 필수일 터.
지하당도 무림 정보를 소림사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피난민들 중에 지하당의 인물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
즉 그들의 신분을 일부러 알아낼 필요는 없었다.
단지 신분을 숨긴 것이 서백 일행을 방해하기 위해서라면…….
‘베어 버리면 그만.’
어쨌든 평범한 피난민이 아니라는 사실은 서백의 어깨에서 짐을 덜어 주는 셈이었다.
경공을 익힌 자들이니 밧줄만 연결하면 암벽을 건너는 것쯤은 쉬울 테니 말이다.
‘그건 편하게 됐군.’
상황 파악이 끝나자 서백이 진문에게 물었다.
“왜 잔도에서 고립되신 겁니까?”
“원래 시주가 건너온 곳과 이곳은 밧줄 다리로 연결되어 있소.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다리가 끊어져 있는 걸 발견했소.”
“누가 일부러 끊은 것입니까?”
“밧줄 파편이 남아 있지 않아서 아직 모르오. 다리가 있던 곳은 지상과의 거리가 가까우니 조사하면 알 수 있을 것이오.”
“망자 떼가 위로 올라왔을 가능성은요? 망자가 밧줄을 물어뜯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충분히 가능한 예상이오.”
진문과 피난민들이 잔도에서 지하당으로 오지 못한 이유는 확실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지하당으로 오지 못한다면 뒤로 돌아서 소림사로 귀환하면 되는 것 아닌가?
서백은 즉시 그 의문을 꺼냈다.
“소림사로 가지 않고 잔도에 머문 이유가 무엇입니까?”
“소림사로 돌아가는 길에는 망자밭을 가로지르는 잔도가 있소. 원래 망자 떼가 행동이 굼뜬 대낮에 잔도를 돌파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데 요 며칠 망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어서 지나갈 수 없었소.”
“그렇군요.”
생각 외로 의문은 쉽게 풀렸다. 소림사까지 가는 잔도는 안전이 완벽하게 확보되어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당장 잔도를 돌파하는 것이 어렵다면 일단 지하당으로 귀환하는 것이 좋으리라.
진문과 피난민들은 이삼일 간 잔도에서 밤이슬을 맞았을 테니 피로를 푼 다음 소림사로 출발하면 된다.
서백은 결정을 내리고 말했다.
“그럼 건너편으로 갈 준비를 하겠습니다.”
서백은 허리에 감고 있던 밧줄을 푼 뒤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안개 속 너머 밧줄이 향하는 곳에 검이 꽂힌 자리가 있을 터.
서백은 방향을 확인한 뒤 손목을 위아래로 튕겼다.
부웅. 밧줄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진동을 앞으로 전달했다.
서백은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하다가 이번에는 손목을 빙글 돌렸다. 그러자 밧줄이 소용돌이처럼 허공에서 빙빙 휘감겼다.
짙은 안개 너머라 보이지는 않지만 검자루에 한 바퀴 감아 두었던 부분이 풀어졌으리라.
‘됐다.’
검자루에 밧줄을 감은 것은 검이 박힌 위치를 확실하게 알아 두기 위해서였다. 만약 몸을 날렸을 때 검이 박힌 위치가 예상과 어긋난다면 그야말로 낭패가 아니겠는가.
소림승 진문은 그런 서백의 행동거지를 보며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약관도 안 된 소년의 행동이 실로 놀라웠던 것이다.
삼베를 십여 겹을 꼬아서 만든 밧줄은 질기고 튼튼하여 장강에서 배를 모는 수로채 사람들도 둥글게 마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런데 소년이 밧줄을 쥔 손목을 한 차례 튕기고 비틀자 굵은 밧줄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요동을 친 것이다.
‘대단한 내공이군.’
서백의 내공 수위는 약관이 안 된 소년이라고 하기엔 믿기 힘든 경지였다.
무림의 태산북두로 군림하는 소림사는 내공심법 역시 첫째로 꼽힌다.
어린 나이에 소림사에 들어와 바로 정식 제자가 되어 내공심법을 전수받았다면 저렇게 성장할 수 있을까?
진문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백을 능가할 수 있는 내공의 소유자는 현재 무림에서 열 명쯤 될 것이다.
그러나 서백 나이에 저만한 내가무공의 수위에 도달한 자는 아무도 없으리라.
문득 진문은 어떤 얘기가 떠올랐다.
‘방장님이 과거 소년 시절 내가무공으로 무림에 위명을 떨치셨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눈앞의 소년이 장성한다면 현 소림 방장만한 고수가 된다는 뜻.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에, 스무 살이 넘을 때부터 무림에서 내가무공으로 둘째가라면 서럽다는 말을 듣게 될지도…….
암벽을 건너올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으나 이제 진문은 서백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외공은 몰라도 내공심법만 따지면 눈앞의 소년을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내공은 내가 한 수 아래인가?’
문득 진문의 뇌리에 어떤 생각이 스쳤다.
“실례지만 한 가지 물어도 되겠소?”
“얼마든지요.”
“소림사는 지금 사천에서 오는 손님을 기다리는 중이오. 혹시 시주가?”
“저 맞습니다.”
“아미타불…….”
웬만한 일에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는 소림사 십팔나한 진문이 일순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을 멈췄다.
‘방장님이 기뻐하시겠구나.’
“소림사에서 방장님과 무림맹의 명숙들이 시주를 기다리고 있소.”
“그렇군요. 저도 빨리 방장님을 뵙고 싶습니다.”
진문은 다시 한번 감회에 젖어 서백을 바라봤다.
소림사가 기다리고 있던 손님이 약관도 안 된 소년일 줄이야.
망자가 들끓는 중원 땅을 가로질러 사천에서 하남의 숭산까지. 이미 몇 번씩 증명했지만, 서백의 실력은 절대 무시할 수 없겠다고 진문은 재차 실감했다.
“그런데 잔도는 어쩐 일로 온 것이오?”
“지하당에서 소림승의 소식이 두절됐다고 해서 수색대를 도우려고 왔습니다. 어차피 소림사로 가는 중이니까요.”
“그랬군. 소림 제자 진문이 시주에게 감사드리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서백은 어깨에 걸치고 있던 밧줄 꾸러미를 내린 뒤 매듭을 만들기 시작했다.
먼저 밧줄을 둥글게 만 다음 위에 고리가 생기도록 매듭을 만든다. 이어서 허리춤에서 푼 밧줄에 고리를 끼운 다음 아랫부분을 서로 묶으면 끝.
곧이어 여(呂) 자처럼 생긴 매듭이 네 개 만들어졌다.
계속해서 서백은 암벽 건너편 지하당도들이 잡고 있는 밧줄에다 呂 자의 위쪽 고리를 통과시켰다.
이제 呂 자의 아래쪽 고리에 몸을 끼워서 그네처럼 앉은 뒤 밧줄을 타고 내려가면 건너편 암벽으로 건너갈 수 있을 터.
그냥 피난민들이 아니라 무공을 익힌 자들이니 굳이 그네처럼 앉지 않아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매듭이 있는 편이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해서 훨씬 나으리라.
진문은 서백의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고 깨닫고 물었다.
“혹시 수로채 일을 했소?”
“아닙니다. 장강은 태어나서 이번에 처음 와 본걸요.”
‘우문현답이었군.’
진문은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다.
약관도 안 된 소년이 험한 사내들도 꺼려하는 수로채에서 일을 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문이 물어본 것은 서백의 매듭 만드는 솜씨가 워낙 능숙해서였다.
사람들은 중원 무림에 은거고수가 해안의 모래알처럼 많다고 얘기한다.
또한 최소 십여 년에 한 번씩 신진고수가 나타나 무림질서를 새로 세운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눈앞의 소년은 명문정파의 제자도 아니며 나이는 약관이 안 되어 보였다.
즉 은거고수와 신진고수의 자격을 둘 다 갖추고 있는 셈이 아닌가!
‘대체 이 소년은 뭐지?’
진문은 서백의 정체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