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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111화 (111/123)

111화 잔도 위에서(1)

서백과 왕이삼은 이미 잔도를 탄 적이 있었다.

사천당문의 의뢰를 수행하느라 촉도관으로 향할 때 마차가 중간에 폭발해서 길이 사라졌다. 때문에 유소운이 왔던 잔도로 돌아가야 했다.

당시 잔도는 마차 한 대가 통과할 너비였다.

바로 옆은 천길 낭떠러지였지만 발을 헛디디지 않는다면 떨어질 염려는 없었다.

그러나 소림사가 새로 건설했다는 잔도는 차원이 달랐다.

눈앞의 잔도는 암벽의 옆면을 비스듬히 판 뒤 돌계단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계단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암벽을 따라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잔도를 끝까지 올라가면 그야말로 구름 위를 걷는 격이 될 터!

좁은 잔도를 타는 것은 경신법이 뛰어난 무림인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눈앞의 잔도를 타려면 경신법보다 더욱 요구되는 점이 있었다.

바로 담이 클 것.

담이 작은 자는 잔도를 타기도 전에 현기증을 느끼고 주저앉거나 오줌을 지리리라.

먼저 잔도라는 말을 듣고 넌덜머리를 냈던 왕이삼.

그는 천길 낭떠러지에 설치된 계단이 하도 어이가 없자 땅바닥에 퉤 하고 침을 뱉은 뒤 말했다.

“에라이, 좋다! 사나이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한번 작심하자 왕이삼은 용기를 내며 외쳤다.

“시간 없소. 빨리 올라갑시다.”

그런 왕이삼을 보며 서백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평소 잔머리를 굴려도 막상 위기에 처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성품이군.”

“제대로 보셨습니다.”

송현이 왕이삼을 평가한 말에 서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사람은 죽음의 위기에 처하면 본색이 드러나는 법. 공포에 짓눌리면 평소 실력도 다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명문정파인도 마찬가지. 요즘 시대에 용감한 성품은 무공보다 오히려 값진 것이지.”

“왕 선배는 사천에서 오면서 지금까지 죽을 위기를 몇 번씩 넘기고도 끄덕 없으셨죠.”

“그렇군.”

왕이삼이 둘의 대화를 들었다면 콧대를 세우며 기고만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공 수위가 낮은 바람에 아쉽게도 듣지 못했다.

수색대는 잔도를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은 사람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 너비였기 때문에 일렬종대로 한 명씩 발을 들였다.

투박하게 깎인 계단은 의외로 미끄럽지 않았다.

바로 옆이 천길 낭떠러지라는 공포심만 이겨 낸다면 충분히 걸을 만했다.

문제는 암벽의 끄트머리였다.

벽면이 끝나자 계단도 거기서 끊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지금까지 올라온 계단과 반대 방향으로 올라가도록 새 계단이 나 있었다.

즉 계단은 갈 지(之) 자 형태를 하며 좌우로 꺾어지면서 위로 올라가는 모양이었다.

계단이 끝나는 곳 위에는 금속봉이 벽면에 박혀 있었다. 금속봉을 밟고서 윗 계단으로 올라가라는 뜻.

수색대는 한 명씩 금속봉을 밟고 이동했다.

만에 하나 금속봉이 빠지는 날에는 꼼짝없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리라.

왕이삼은 자기 차례가 되자 침을 꿀꺽 삼켰다.

“쳇, 저 짧은 봉에 목숨을 맡겨야 된다고?”

그러나 뒤에서 주은리가 도도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투덜대면서 위로 올라갔다.

이후에도 잔도는 몇 번씩 방향을 바꾸면서 이어졌다.

수색대가 잔도를 오른 지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지났을 때, 드디어 계단이 끝나고 수색대는 암벽의 정상에 올랐다.

“여기서부터는 일직선이오.”

길상백의 말대로 암벽의 정상은 곧게 뻗은 평지처럼 능선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마치 동물의 등뼈 같은 모습이었다.

수색대는 능선을 타고 이동을 재개했다.

간담을 서늘케 하던 계단과 비교하면 능선은 평지를 걷는 것처럼 편했다.

하지만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발밑이 구름처럼 짙은 안개에 휩싸여서 불과 일 장(丈) 앞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좌우로 벗어나는 순간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은 계단이나 능선이나 마찬가지일 터.

수색대가 능선을 이동한 지 다시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지났다.

갑자기 서백이 발을 멈췄다.

“후배 왜 그러냐?”

“쉿.”

서백은 왕이삼이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짙은 안개가 낀 낭떠러지 쪽을 보며 귀를 기울였다.

서백이 정지하자 선두에 가던 길상백이 몸을 돌려서 물었다.

“왜 그러시오?”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사람들? 망자 떼가 아니라?”

길상백이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곳 능선에서 떨어지면 지상은 망자 떼 천지요. 망자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암벽에 반사되어 들린 것일 테지.”

그러나 서백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망자가 아니라 사람들입니다. 수색대가 찾고 있는 소림승일지도 모르죠.”

“…….”

약관도 안 된 소년이 당주의 말에 반박하자 지하당도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때 서백이 한 차례 숨을 들이쉬더니 안개 너머를 향해 말했다.

“거기 누구 있습니까?”

서백의 목소리는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차분했지만 안개를 뚫고 능선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약관도 안 된 소년이라기엔 믿기지 않는 내공 수위. 서백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지하당도들은 깜짝 놀라며 서로를 돌아봤다.

곧이어 안개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빈승은 소림 제자 진문이오. 거기 지하당이시오?”

지하당도들은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서백이 호언장담한 대로 안개 너머에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자가 수색대가 찾고 있는 소림승이라니…….

만약 서백이 지적하지 않았다면 수색대는 소림승의 존재를 까맣게 모르는 채 길을 지나쳤을 것이 아닌가?

체면을 구긴 지하당도들은 입을 다물고 서백과 소림승 진문의 대화를 들었다.

“여기는 지하당의 수색대입니다. 왜 이동을 멈추신 겁니까?”

“……여기 부상당한 피난민들이 있소. 그리고 그쪽 능선으로 넘어가는 밧줄 다리가 끊어져서 발이 묶였소.”

간단한 얘기였지만 어떤 상황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서백은 길상백에게 물었다.

“근처에 밧줄 다리가 있습니까?”

“능선이 끝나는 곳에 건너편 암벽으로 이어가도록 밧줄 다리가 있소. 튼튼한 밧줄인데 끊어지다니 믿을 수 없군.”

이번에는 길상백이 강표를 보며 물었다.

“다리를 보수하는 데 얼마나 걸리느냐?”

“쉽지 않을 겁니다. 다리를 이으려면 지상까지 잔도로 내려가서 반대편으로 가야 하니까요.”

“으음…….”

길상백은 팔짱을 끼고 고민에 빠졌다.

능공허도(凌空虛道)같은 절정 수준의 경공이 아니라면 암벽과 암벽 사이를 건너뛰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밧줄 다리를 만들어 놓은 것.

문제는 밧줄 다리를 다시 이으려면 망자 떼가 들끓는 지상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점이었다.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은 물론, 망자 떼에 당하는 지하당도들이 나온다면 인원 손실이 막대할 터.

그때 서백이 안개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에 암벽이 있지 않습니까?”

서백은 소림승 진문의 목소리가 들린 쪽이 아니라 비스듬한 방향으로 검지를 가리켰다.

“맞소. 그걸 어찌 알지?”

“반향을 듣고 짐작했습니다.”

반향(反響). 소리가 장애물에 부딪친 뒤 반사하여 다시 들리는 현상.

즉 서백은 자신의 목소리가 반향되는 것을 들은 뒤 소림승 진문이 있는 곳 말고 다른 암벽이 안개 속에 있을 거라고 예상한 것이었다.

이어서 서백이 제안했다.

“지금 다리를 만들 밧줄이 있습니까?”

“물론이오. 그러나 밧줄 다리를 만들려면 암벽에 기둥을 박고 건너편으로 연결해야 하니 당장은 무리요.”

“제가 밧줄을 건너편으로 연결하겠습니다.”

“어떻게 말인가?”

“근처 암벽을 타고 소림승 쪽으로 가면 됩니다.”

“…….”

길상백은 의문이 가시지 않은 표정이었으나 서백에게 밧줄을 주라고 명령했다. 당주뿐 아니라 당도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왕이삼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후배를 믿지만 딱히 방법이 없어 보이는데…….”

“한번 믿었으면 끝까지 믿어 보는 건 어떤가요?”

“끄응.”

심지 굳은 주은리가 한마디 하자 왕이삼은 입을 다물었다.

오직 송현만이 서백의 생각을 짐작하고 있었다.

송현은 몸을 숙여서 작은 돌멩이 두 개를 주웠다. 그런 다음 안개 속을 향해 말했다.

“본인은 청위표국 출신의 송현이오.”

“아미타불. 얘기는 익히 들었습니다.”

소림승 진문이 화답했다. 그러자 송현은 엄지와 중지에 돌멩이를 끼운 뒤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튕겼다.

피잉.

돌멩이가 일직선으로 날아가 안개를 뚫고 사라졌다.

그 광경을 보고 지하당도들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저건 설마 탄지신공?”

탄지신공(彈指神功)은 손가락을 튕겨서 암기나 지력을 쏘는 무공으로, 소림사의 절기 중 하나다.

그러나 송현은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

“본인은 평소 소림사 무공을 흠모하긴 하지만 불문에 발을 들인 적은 없소.”

그냥 돌멩이를 튕긴 것일 뿐 소림사의 탄지신공은 아니라고 선을 그은 말.

하지만 그 말이 오히려 더 놀라웠다.

되는 대로 손가락을 튕긴 것뿐인데 돌멩이는 포물선을 그리기는커녕 자로 그은 듯이 일직선으로 날아가지 않았는가?

시전자의 내공 수위가 상상 이상이라는 증거.

서백과 송현의 무공 수위가 예상을 뛰어넘자 길상백과 지하당도들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보기 드문 고수다…….

고수를 만나면 경외심과 더불어 이유 모를 거리감이 생기는 것은 중원의 무림인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 자신이 숲의 왕인 줄 알고 있던 여우가 호랑이와 마주칠 때 느끼는 감정이 그러하리라.

곧이어 돌멩이가 목표 지점에 닿았는지 송현이 서백에게 말했다.

“꽤 먼 거리다. 소림승이 있는 곳으로 바로 건너뛰는 것은 무리겠군.”

“아무래도 그렇죠.”

이어서 송현은 먼저 서백이 가리킨 방향, 소림승의 목소리가 들린 곳 말고 비스듬한 방향으로 두 번째 돌멩이를 튕겼다.

피잉. 탁.

이번에는 거리가 가까운지 돌멩이가 암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암벽이 밤이슬에 젖어 있거나 이끼가 끼어 있으면 미끄러울 것이다.”

“신 밑창에 무두질한 곰 가죽을 붙여두었습니다.”

그 말에 지하당도들은 자기도 모르게 눈길을 내려서 서백의 발을 봤다. 가죽신은 거칠고 투박했으나 그만큼 마찰력이 강해서 잘 미끄러지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서백은 밧줄을 허리에 감아서 묶은 뒤 반대편을 지하당도들에게 건넸다. 그리고 남은 밧줄 꾸러미는 어깨에 걸쳤다.

“그럼 부탁합니다.”

“…알았다.”

밧줄을 건네받은 지하당도 네 명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백이 암벽을 타고 반대편으로 건너가리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었다.

길상백도 그걸 깨닫고 말했다.

“암벽을 탈 거면 그 대검은 무거우니 놓고 가는 게 어떻겠소?”

“아니, 이 검을 받침대로 삼을 겁니다.”

“…….”

길상백은 서백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반면 왕이삼은 서백의 작전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촉도관으로 가던 중 마차가 폭발해서 잔도가 무너졌을 때 서백이 추락하던 왕이삼을 구해냈던 방법.

“후배, 설마 그 방법을 또 쓰려고 하는 거냐?”

“물론입니다.”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선배님, 웬 섭섭한 말씀을 다 하십니까. 제 실력 잘 아시면서.”

“그렇긴 하지만…….”

“늦지 않게 돌아오겠습니다.”

서백은 왕이삼에게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인 다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서백의 표정이 금세 싸늘하게 바뀌었다.

휙. 서백이 안개 속으로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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