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새로운 위협(6)
탁자에서 술을 마시는 자들은 모두 셋이었다.
그들은 복장이 모두 동일했는데, 멋을 부리지 않고 실용적인 두건과 도포를 걸치고 있었다.
‘방파가 고용한 무사들이군.’
당룡의 추측은 옳았다.
세 무사는 융중에 있는 제갈세가의 본관에 고용되었던 자들이었다.
탁자에는 술동이가 열 개 넘게 쌓여 있었다. 셋이서 그걸 다 마셨으니 코가 삐뚤어지게 취한 것도 당연했다.
“아무리 꼬마라고 해도 소림사로 간다는 걸 보면 실력이 있는 게 틀림없지. 그런데 이공자 따위가 함부로 수작을 부렸으니 크게 당할 수밖에!”
무사 하나가 이공자의 흉을 보자 다른 무사들이 반박했다.
“에이, 이공자 놈이 답답하긴 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지.”
“맞아. 설마 약관도 안 된 꼬마 놈과 패거리의 무공 수위가 그 정도일 줄 누가 알았냐?”
동료들이 반박했지만 무사는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웃기는 소리! 제갈세가는 일공자 제갈성 빼고 다 헛물이야, 헛물!”
제갈세가가 배출한 인물들은 구름처럼 많아서 중원 각지에 터를 잡고 있었다. 제갈세가 흉을 보려면 아무도 없는 대나무숲에서 하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사들은 제갈세가 이공자를 비웃으며 술을 마셨다.
그때였다. 술에 취해서 떠드는 무사들 뒤로 그림자 하나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스윽.
“그 꼬마 이름이 뭐냐?”
술에 취한 무사는 동료가 묻는 것으로 착각하고 대답했다.
“꼬마 이름? 뭐라고 했더라… 이백이었던가?”
“이백? 시선(詩仙)과 같은 이름이냐?”
“아차! 이백이 아니라 서백이라고 했었나? 그래, 서백이 맞다!”
“약관이 안 된 나이에 자기 몸집보다 큰 대검을 들고 다니는 꼬마 맞냐?”
“잘 알면서 뭘 묻냐, 끄윽!”
“꼬마가 소림사로 간다고?”
“그래! 무림 놈들은 개나 소나 소림사라면 껌뻑 죽잖아. 꼬마 놈이라고 다르겠냐.”
“그렇군.”
그림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자의 정체는 물론 당룡이었다.
무사가 말하는 소년이 당룡이 찾고 있는 자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약관도 안 된 나이에 대검을 들고 다니는 소년. 아미파 여제자가 실토했던 내용과 동일했다.
‘소림사라고? 마침 잘됐군.’
문주가 내린 명령. 당홍과 당조정을 죽인 자의 목을 베어서 소림사의 지객당 처마에 올려놓을 것.
당룡은 소년 고수와의 대결은 기대하고 있었으나, 자른 목을 소림사에 갖다놓는 것은 내심 귀찮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소년이 제 발로 소림사로 가고 있을 줄이야.
당룡한테는 그야말로 일석이조인 셈.
‘망자 떼를 돌파하고 최대한 속도를 높여서 숭산까지 간다. 숭산에서 꼬마가 오기만을 기다리면 되겠군.’
당룡은 객잔에서 하룻밤 묵을 생각이었으나 계획을 바꿨다.
사천당문이 당홍과 당조정의 시신을 찾아 낸 것은 그들이 죽은 지 대략 이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소년은 그때 촉도관을 떠났을 테니, 당룡은 최소한 이주일 늦게 뒤를 추격하고 있다는 뜻.
그 이주일의 거리를 메우려면 서둘러야 했다.
‘당장 떠나자.’
무사들은 여전히 당룡의 존재는 눈치채지 못한 채 떠들기 바빴다.
“근데 꼬마보다 청의(靑衣) 걸친 놈이 진짜 고수지 않았냐?”
“그래? 난 잘 모르겠던데.”
“네놈은 눈이 멀었냐? 우리 조장이 놈의 일검에 목이 떨어졌다고!”
“그건 네놈 조가 허접해서겠지.”
“이 자식이 감히!”
“해 보자는 거냐?”
무사들이 서로 멱살을 쥐며 드잡이질을 했다.
그러다가 탁자에서 막 몸을 돌리던 당룡을 봤다.
“네놈은 뭐냐? 네놈… 지금까지 우리가 말한 걸 다 들은 거냐?”
당룡은 아무 대답 없이 그대로 걸어갔다.
약한 놈들과는 말 섞는 것조차 짜증 나니까.
무사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아는 정보를 당룡한테 몽땅 풀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 중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이봐! 귀중한 정보를 들었으면 값을 치러야지?”
“…….”
당룡이 아무 말 없이 걸어가자 무사는 손을 내밀어서 그의 어깨를 붙잡으려고 했다.
“귀가 멀었냐? 술이라도 한 동이 사고 가라!”
“더러운 손 떼시지.”
순간 당룡의 신형이 바닥을 미끄러지는 것처럼 앞으로 나아갔고 무사의 손은 허공을 짚었다. 이어서 한 줄기 섬광이 번쩍였다.
스팟.
무사가 정신을 차리자 당룡은 그대로 걸어서 객잔을 나간 뒤였다.
“저 자식이 감히……!”
무사는 무시 당한 것이 괘씸해서 검을 뽑으려고 했다.
그런데 손에 감각이 없었다.
무사가 어리둥절해서 팔을 들어 보는 순간, 손목에 둥글게 붉은 선이 그려지더니 피슉 하는 소리와 함께 핏방울이 새어나왔다.
이어서 깨끗하게 베어진 손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무사의 비명소리가 귀곡성처럼 객잔에 울려 퍼질 때, 당룡은 말을 타고 소림사가 있는 숭산을 향해 떠났다.
* * *
서백 일행은 강표가 안내한 방에서 여장을 풀었다.
방은 좁지만 아늑했다. 선반에는 기름불이 놓여서 어둠을 밝혔고, 내부는 낮 동안 데워진 땅의 열기가 돌아서 훈훈했다.
사방이 막힌 땅속이라서 답답한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차가운 밤이슬을 맞으며 노숙하는 것보다는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잠시 후 사람들이 식사를 가지고 왔다.
사람들은 피난민처럼 보였는데, 일행이 핏자국을 발견했을 때 마주쳤던 자들처럼 표정이 어둡고 말이 없었다.
왠지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눈치.
왕이삼이 그들에게 말을 걸려는 것을 서백이 막았다.
“왜 그러냐?”
“무림 문파는 각자 사정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시죠.”
“쩝, 그건 나도 알고 있다만.”
망자 떼를 피해서 간신히 목숨을 구한 자들이 표정이 좋을 리 없으리라.
혹시 다른 이유가 있다고 해도 서백은 간섭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지하당의 일은 지하당의 책임.
제아무리 영웅호걸이라도 세상의 모든 책임을 혼자서 등에 짊어질 수는 없다. 그건 영웅이 아니라 위선자에 불과하다.
일행은 지하당이 마련한 밥을 먹었다.
식사는 잡곡밥에 공심채를 볶은 반찬이 전부였다. 그러나 딱딱하고 거친 벽곡단을 씹는 것과 비교하면 진수성찬이나 마찬가지였다.
밥을 먹은 뒤 서백 일행은 오랜만에 단잠을 잤다.
다음날. 지하당은 새벽 일찍 수색대를 조직했다.
당주 길상백과 호법 강표가 주축이 된 수색대는 서른 명의 무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하당의 인원은 모두 서른두 명.
거기에 서백 일행 네 명이 추가되자 수색대는 총 서른여섯 명이 되었으니, 지금 같은 시기에 적지 않은 숫자라고 할 수 있었다.
당주 길상백은 당도들을 이끌고 지상으로 나갔다.
서백 일행도 그 뒤를 따랐다.
대나무 사다리를 올라가서 통로를 나가자 지상은 아직 해가 뜨지 않아서 어두컴컴했다.
땅속 깊은 곳에 있는 지하당은 횃불이 타고 있어서 밝은데 지상은 반대로 어두우니 기분이 묘했다.
곧이어 사람들이 모두 지상에 올라왔다.
“지금부터 할 일을 설명하겠소.”
당주 길상백이 서백 일행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수색대의 목표는 소림승을 찾는 것이오. 지하당은 삼 일 동안 주위 숲을 샅샅이 수색했으나 소림승의 흔적은 없었소.”
주위는 이미 수색을 끝냈으니 오늘 수색은 범위가 더욱 넓어지리라.
그런데 길상백은 수색 목표지를 분명하게 언급했다.
“오늘 갈 곳은 지하당에서 반나절 거리에 있는 잔도요.”
서백은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해가 뜨기 전에 일찍 나온 이유가 있었군.’
산은 해가 빨리 진다. 수색대가 반나절 거리까지 갔다가 해가 지기 전에 귀환하려면 일찍 떠나는 것은 당연했다.
지하당도들의 안전 역시 당주가 신경 써야 할 요소 중의 하나일 터.
“숭산은 본래 잔도가 없으나 망자 떼가 들끓자 소림사가 새로 건설했소.”
그런데 길상백의 말을 듣고 한숨을 쉬는 자가 있었다.
바로 왕이삼이었다.
“또 잔도야? 사람 환장하겠군.”
사천당문의 의뢰를 수행하던 중 잔도에서 마차가 폭발해 죽을 고비를 넘겼던 왕이삼.
목표지가 잔도라는 말을 듣고 그가 치를 떠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숭산 지리를 잘 아는 송현이 설명했다.
“숭산은 일흔두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소. 망자 떼가 즐비한 평지를 피해서 암벽을 타려면 잔도가 필수지. 소림사도 그래서 새로 잔도를 만들었을 것이오.”
하지만 왕이삼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뚱한 표정은 좀처럼 풀지 않았다.
“알았소. 잘나신 소림사가 하는 일이니 어련하실까.”
서백은 왕이삼이 죽을 고생을 한 걸 잘 알기에 응원의 한 마디를 건넸다.
“중간에 망자 떼와 마주치는 것보다야 낫지 않습니까?”
“끄응.”
그때 주은리가 소매에서 고개를 내민 초랑을 보며 말했다.
“초랑아, 너는 잔도가 안 무섭지?”
“캥.”
“초랑도 괜찮다고 하는데 다 큰 어른이 벌벌 떠는 꼴이 참으로 볼 만하군요.”
“뭐야, 이 계집애가!”
왕이삼은 크게 소리치다가 지하당도들의 시선이 모이자 입을 다물었다.
“산 사람의 피를 오래 마시지 못한 망자는 고목나무처럼 말라서 땅에 쓰러져 있을 것이오. 그러나 피 냄새를 맡으면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일.”
길상뱅이 눈짓으로 신호하자 지하당도들이 서백 일행에게 천으로 만든 입 가리개를 건넸다.
“망자는 피 냄새뿐 아니라 산 사람의 숨결을 맡고 움직이니 모두 입을 가리시오.”
서백 일행은 익히 알고 있는 정보.
반면 길상백은 더 이상 망자 대비책을 말하진 않았다.
망자가 산 사람의 기척을 눈치 채는 것은 세 가지 경우다. 피 냄새, 숨결, 희로애락의 표정.
‘세 번째 주의 사항은 모르는 모양이군.’
그럴 만하다고 서백은 생각했다.
망자가 창궐한 중심 지역. 곳곳에 망자가 도사리고 있으니 일단 기척을 들키면 죽든지 도망치든지 둘 중 하나이리라.
호흡을 오래 참을 수 있을 만큼 내공 수위가 높지 않은 이상, 표정 관리는 무의미할지 모른다.
어쨌든 지금까지 겪어온 어떤 조직보다 지하당이 망자 대비가 철저한 것은 분명했다.
서백과 송현은 물론 주은리 또한 내공심법이 뛰어나니 굳이 입 가리개는 필요 없었다.
그러나 지하당의 배려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룻밤 숙소와 식사를 도움받은 터에 그들의 자존심을 꺾는다면 오히려 원한을 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무림인들은 실속보다 명분을 먼저 챙긴다. 그들의 콧대를 꺾는 일은 삼가라. 만약 어쩔 수 없는 경우 그들을 적으로 상대해야 될 것을 각오해라.
서백은 스승의 말을 떠올리며 입 가리개를 둘렀다.
“전진하라.”
길상백이 명을 내리자 척후조가 선두로 나갔다.
이어서 남은 수색대가 그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한 발짝 걸을 때마다 조심해서 발을 내디뎠다.
돌부리나 나무 그루터기에 걸려서 발을 접질리는 것은 오히려 다행이리라.
만약 발바닥에 딱딱한 돌부리가 아니라 물컹거리는 무언가가 닿는다면 땅에 뒹굴고 있는 망자를 밟았다는 뜻이니까…….
잠시 후 해가 떴다.
날이 밝은 후에도 수색대는 이동을 멈추지 않았다.
앞서 가던 척후조가 돌아와서 상황을 보고한 것은 숲속을 이동한 지 두 시진 가량이 지났을 때였다.
“망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잔도는 안전합니다.”
“알았다.”
길상백은 고개를 끄덕인 뒤 수색대에게 말했다.
“모두 일렬종대로 잔도에 진입한다.”
당주가 명령하자 당도들은 일제히 세로로 늘어서서 일렬 대형을 만들었다. 수색대의 선두에 있는 서백 일행도 네 명이 한 줄로 섰다.
척후조가 앞으로 나가자 길상백이 명령했다.
“전진하라.”
차 한 잔 마실 시간을 이동했을 때 드디어 숲이 끝나고 암벽에 건설된 잔도가 나왔다.
서백 일행은 천천히 고개를 치켜들다가 하늘을 쳐다봤다.
깎아지른 암벽을 파서 계단 형태로 만든 잔도가 구름을 뚫고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