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새로운 위협(5)
서백은 지하당이 망자 창궐 중심지에 있는 이유가 무림맹과 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길상백이 직접 소림승을 언급할 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지하당은 무림맹의 본진인 소림사와 많은 연락을 주고받고 있소. 중원 동남쪽의 수많은 무림 소식과 정보를 소림사에 전하는 것이 지하당의 중요한 일 중 하나요.”
길상백은 굳이 지하당의 존재 의미를 숨기지 않고 말했다.
“망자 창궐이 시작된 이후 소림사는 삼 개월마다 한 번씩 지하당에 소림승을 보내서 정보를 갖고 가오.”
납득 가능한 얘기였다. 지금처럼 각 문파가 고립될수록 정보의 중요성은 어느 때보다 높으니까.
“그런데 삼 일 전에 도착했어야 할 소림승이 오지 않고 있소. 그제와 어제 수색대를 보냈으나 계속 허탕만 치고 말았지.”
“숭산의 지세가 험한데 소수 인원의 수색대로 찾을 수 있습니까?”
“소림사에서 오는 경로가 따로 있소. 능선을 타는 경로인데, 길을 잘못 들어서면 망자 떼가 도사리고 있지. 오직 소림사와 지하당만이 아는 경로요.”
“그렇군요.”
“오늘 인원을 늘려서 재차 수색을 나갔으나 결과는 아시다시피 허탕이오.”
이어지는 길상백의 말은 옆에서 대화를 듣는 왕이삼조차 짐작 가능한 것이었다.
“내일 다시 수색대를 보낼 예정이오. 당신들도 소림사에 일이 있다고 했으니 같이 가지 않겠소?”
그 말을 듣자마자 왕이삼은 속에서 열불이 났다.
‘내 그럴 줄 알았다! 후배, 당장 거절해라. 기껏 소림사에 다 왔는데 또 시간을 낭비할 순 없지.’
그런데 서백이 포권지례를 하며 길상백의 부탁을 수락하는 것이 아닌가?
“기꺼이 지하당의 청을 수락하겠습니다.”
“감사하오. 오늘은 이만 쉬시고 내일 수색대에 참가해 주시오. 강표, 손님들을 안내해라.”
왕이삼은 한숨을 푹 쉬며 송현에게 속삭였다.
“후배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오. 무슨 놈의 부탁은 몽땅 다 수락하는지.”
“숭산으로 가는 길은 본인도 알고 있소.”
“엥? 그럼 좀 말리지 그랬소?”
“하지만 망자 창궐 이후는 가 본 적 없소. 망자 떼를 피해서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길은 본인도 모르오.”
“그, 그렇소?”
“소림승을 만나서 안내를 받는다면 오히려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거요.”
“쩝…….”
송현의 설명을 듣자 왕이삼은 할 말이 없어졌다.
서백도 송현도 일단 입만 열면 왕이삼으로서는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서백이 얄밉도록 똑 부러지게 이유를 말한다면, 송현은 얼음처럼 차갑게 논리정연해서 반론을 못 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둘 다 입만 열면 분위기 싸늘하게 만드는 것도 재주다, 재주!’
왕이삼은 말은 못하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날이 어두워질 참이니 하룻밤 쉬었다가 가는 것도 좋을 겁니다.”
“소림사 땡추… 아니, 소림승은 어떡하고? 길 잃은 소림승은 밤중에 산속을 헤맬 텐데?”
왕이삼은 논리가 안 통하자 억지를 썼다.
물론 서백은 간단한 말로 그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소림승은 숭산의 지리를 잘 알 테니 하룻밤 노숙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겁니다.”
“만약 소림승이 망자 떼를 만났다면?”
“그럼 수색대가 찾아 봐야 어차피 도리가 없겠죠.”
“끄응.”
주은리가 옆에서 둘을 지켜보다가 한 마디 했다.
“불평불만이 오만 가지인 중늙은이를 거꾸로 꼬마가 위로해 주고 있으니 참으로 볼 만한 풍경이군요.”
그 말에 왕이삼과 서백이 동시에 발끈했다.
“새파란 계집애가 누구한테 중늙은이라는 거냐!”
“저는 꼬마가 아닙니다. 서백이라고 불러 주시죠.”
“이제 꼬마까지 투덜대는 걸 보니 중늙은이한테 불만병이 옮았나 보군요.”
“중늙은이 아니라고!”
“꼬마 아닙니다.”
“네, 네, 좋을 대로 생각하세요.”
서백과 왕이삼이 분을 못 참고 노려봤으나 주은리는 소매에서 고개를 내민 초랑을 만지작거리면서 둘을 외면했다.
유소운이 잠시 빠지고 없는 사이, 정겨운 대화를 함께 나눌 동료가 새로 합류한 것이었다.
“이쪽으로 오시오.”
강표가 서백 일행을 안내했다.
복도는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을 만큼 길게 늘어져 있었다. 또한 양옆으로 샛길이 나 있어서 지하당의 전체 넓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대체 얼마나 넓은 거야? 땅속에 요새를 팠나.”
왕이삼이 투덜거렸는데, 그 말이 불평으로 들리지 않고 납득이 갈 정도였다.
“헹, 땅속에 틀어박힌 셈이니 안전하긴 하겠다만 지상에서 돌아다니는 건 쉽지 않겠지.”
왕이삼은 스스로 자문자답을 하면서 지하당의 위용을 깎아내렸다.
선두에서 안내하던 강표가 그 말을 듣고 말했다.
“지하당의 목화토금수 통로 중 하나는 말이 드나들 수 있소. 지상으로 나가는 것쯤은 마음만 먹으면 어린애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쉽지.”
“말이 여기까지 들어온다고?”
왕이삼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말의 키와 몸통은 사람보다 두 배 가까이 크다. 정확한 계산은 아니지만 사람 네 명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야 비로소 말이 드나들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땅속에 위치한 지하당에 말이 들어 올 수 있다니……. 왕이삼이 놀라서 반문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물이 말라 버린 폐우물을 개조해서 통로로 만들었소. 수십 필은 불가능하지만 말 십여 필이 드나드는 것은 물론 지하에서 기르는 것도 가능하오.”
“…….”
왕이삼은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평생 돌아다녀도 다 못 가 본다는 말이 있을 만큼 넓은 중원 땅.
그런 중원을 다니려면 말은 필수다. 특히 망자 떼를 피해서 빠르게 도망칠 수 있으니, 말이 없으면 이동이 불가능한 상황.
즉 말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은 지하당이 얼마나 철저히 준비된 곳인지 가늠할 수 있는 척도였다.
지하당의 위용에 질렸는지 왕이삼은 더는 불평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복도는 일행의 걸음소리만 들릴 뿐 적막에 빠졌다.
갑자기 샛길에서 몇몇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강표를 보자 고개를 조아리며 뒤로 물러섰다.
“무림인 같아 보이진 않는데…….”
“피난민들이오.”
왕이삼이 중얼거리자 강표가 대답했다.
“지하당은 주위 민가에 정기적으로 수색대를 파견하고 있소. 그리고 미처 피난 가지 못한 자들한테 지하당에서 살 수 있도록 숙식을 제공하지.”
“정말이오? 그건 대단하군.”
“단지 지하당에 노는 사람은 없소. 자기 밥값은 해야 하니 모두 일을 돕고 있지.”
“그래도 망자 걱정 없이 목숨 붙어 있는 게 어디인가?”
“잘 아시는군.”
틈만 나면 불평을 하던 왕이삼마저 감탄할 정도이니, 지하당의 선행은 망자 창궐 시대에 확실히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서백 역시 왕이삼의 말에 동감했다.
하지만 왕이삼처럼 순진하게 감탄만 하지는 않았다. 스승의 가르침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중원의 문파와 세가는 이유 없이 선행을 행하지 않는다. 소위 명문정파로 불리는 곳일수록 더더욱.
-절대 방심하지 마라. 맹수는 가장 안전해 보이는 그늘에 도사리고 있는 법.
‘명심하겠습니다.’
지하당이 정말 선행을 위해 돌아가는 곳이라면 서백이 나설 일은 없을 터.
그러나 서백은 스승의 가르침대로 방심하지 않았다.
서백은 이동하면서 복도에 연결된 샛길의 개수를 암기했다. 필요할 때 지하당의 전체 모습을 머릿속에 지도처럼 띄울 수 있도록.
강표와 서백 일행이 모두 지나가자 피난민들은 복도로 나와서 어디론가 이동했다.
왕이삼이 그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불평이 아니라 안쓰러워하는 말투였다.
“죽은 시체도 아니고 왜 저렇게 낯빛들이 어둡지.”
그러다가 벽에 대나무가 삐죽하게 튀어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라? 숨구멍이 여기도 있네?”
호기심이 왕성한 왕이삼은 본능적으로 대나무 속을 보려고 눈을 갖다 댔다.
물론 대나무 속은 텅 빈 어둠뿐이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강 호법, 부당주님이 찾으십니다.”
“부당주?”
왕이삼이 고개를 돌리자 강표가 매서운 눈빛으로 왕이삼과 대나무 사이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지하당의 일에 참견하지 마시오.”
그러더니 대나무에 입을 대고 말했다.
“곧 가겠다고 말씀드려라. 손님이 있으니 말을 삼가라.”
강표는 입단속을 시킨 뒤 다시 앞장을 섰다.
왕이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백에게 물었다.
“대나무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리던데?”
“제갈세가에서 보셨지 않습니까. 사자상과 같은 원리입니다.”
“아아…….”
“땅속에서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속이 텅 빈 대나무를 벽에 박아서 명령을 전달하는 거죠.”
“그야말로 땅속의 요새군!”
서백의 설명을 듣고 왕이삼은 재차 감탄했다.
그런데 문득 벽에서 무언가를 보고 흠칫 놀랐다.
횃불이 어른거리고 있는 곳에 검붉은 얼룩이 묻어 있었던 것이다.
“저건 설마 핏자국…….”
주은리가 핏자국 쪽을 향해 소매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소매에서 초랑이 고개를 내밀더니 킁킁 냄새를 맡았다.
이어서 초랑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작게 그르렁거렸다.
“사람의 피입니다.”
“……!”
앞서 가던 강표가 일행의 대화를 듣고 말했다.
“별것 아니오.”
“저 정도 얼룩이면 사람 피가 왕창 흩뿌려졌을 텐데 별것 아니라니?”
반문은 왕이삼이 했지만 서백 일행은 모두 의문을 품었다. 핏자국이 흙벽에 스며들 정도로 짙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누군가가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뜻!
서백 일행이 조용한 눈빛으로 침묵하고 있자 강표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설명했다.
“얼마 전에 망자 소동이 있었소.”
“망자 소동?”
“피난민 하나가 지하당에 망자가 들어왔다고 난동을 피웠소. 그는 공포에 질려서 당도들을 해치다가 스스로 자결했지. 핏자국은 그 흔적이오.”
“…….”
“물론 지하당에 망자는 없으니 안심해도 좋소.”
설명을 끝낸 강표는 몸을 돌려서 앞장을 섰다.
그러나 서백은 그의 설명이 불충분하다고 느꼈다.
‘저게 한 명이 흘린 핏자국이라고?’
서백은 피가 뿌려진 범위와 형태로 볼 때 한 명 이상이 숨졌을 거라고 짐작했다.
어쨌든 강표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손님 입장에서 더 캐물을 수는 없는 일.
왕이삼이 그답게 머리를 긁으며 중얼거렸다.
“이런 땅속에서 살라고 하니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도 당연하지. 사람은 역시 하늘 아래서 살아야 하는 법. 암!”
서백도 그 말에 동감했다.
왕이삼이 생각 없이 툭 던지는 말은 지금처럼 정곡을 꿰뚫을 때가 있었다.
* * *
한편, 서백 일행이 지하당에 들어가기 몇 주 전.
사천당문의 당룡은 강서성의 허름한 객잔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문주의 명을 받고 당홍과 당조정을 살인한 자를 추격해서 중원 땅에 들어온 당룡.
그는 아미파 여제자가 말했던 약관이 안 된 소년 고수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소년이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알아내기 힘들었다.
과거에는 무림인의 행방을 알려면 객잔과 흑점을 조사하면 됐다. 하지만 망자 창궐 이후로 객잔은 물론 흑점마저 문을 닫은 곳이 천지였으니…….
예상은 했지만 모래사장에 떨어진 바늘 찾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
그때 옆의 탁자에서 술에 취한 목소리가 당룡의 귀에 들어왔다.
“제갈세가도 이제 끝났군. 소림사로 간다는 꼬마 하나 때문에 이 꼴이 나다니.”
중원 무림이 아무리 고수가 즐비하다고는 하나, 어린 나이에 고수 반열에 오르는 자는 드물게 마련이다.
‘놈이다.’
당룡은 저들이 언급한 꼬마가 자신이 찾는 소년 고수라는 것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