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술책에는 술책으로(6)
모용화정이 입을 딱 벌리며 경악했다.
“벽력탄으로 요새를 날려 버리겠다고요?”
“그렇소.”
남궁진의 말투가 여유만만하게 바뀌었다. 모용화정의 놀란 얼굴을 보자 사내 특유의 자신감이 돌아온 것이었다.
“무사들을 시켜서 이미 요새 전역에 벽력탄을 설치해 두었소. 벽력탄에 연결된 도화선은 지하에 묻힌 채 창고까지 이어져 있소. 거기에 불을 붙이면 그만이오.”
“아무리 그래도 힘들게 세운 요새를…….”
“요새를 세운 이유가 무엇이오?”
“이유?”
“그렇소.”
남궁진이 검지를 치켜들었다. 남을 가르치거나 훈계할 때 그가 종종 취하는 버릇이었다.
“요새는 소림사를 패망시키기 위해 세운 것이오.”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이곳 암벽이 무너지면 소림사로 가는 길은 영영 사라지오.”
“…….”
“고수 한둘이 망자 창궐 지역을 돌파할 수는 있겠지만 대규모 인원이 이동하려면 한 달 이상 빙 돌아가야 되지.”
“길을 아예 막겠다는 겁니까?”
“물론이오. 망자 창궐이 계속되는 한 소림사는 중원 무림과 연이 끊어질 것이오. 바로 우리가 처음 계획한 목표가 아니겠소?”
“…….”
모용화정과 악관비, 팽자걸, 언자성은 고개를 돌려 서로를 쳐다봤다.
남궁진의 말은 언뜻 들으면 일리가 있었다. 요새를 세운 것은 소림사의 위세를 약화시켜서 무림맹 맹주 자리를 내어놓게 하려는 것이니까.
그러나 요새를 벽력탄으로 폭파시킨다는 계획은 뜻밖이었다.
남궁진의 얘기를 들었을 때, 그는 오래 전부터 이 계획을 세워 둔 것으로 보였다.
요새 전역에 벽력탄을 두고 도화선까지 지하로 연결해 놓은 것이 그 증거.
모용화정과 다른 고수들은 남궁진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힘들게 세운 요새를 자기 손으로 폭파하면서까지 중원 무림의 패권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다니.
치밀하다고 해야 할지, 미쳤다고 해야 할지…….
그만큼 남궁진의 성품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요새가 무너진다면 다른 세가들도 길이 막히는 셈이 아닌가?
지금 협곡은 단지 소림사로 가는 길목이 아니었다.
소림사는 물론이고 낙양, 개봉, 장안 등.
중원의 고도(古都)인 도시들로 가려면 이 협곡을 거쳐야 된다. 그런데 요새를 파괴하면 그것마저 막는 셈이 되어 버리니…….
모용화정과 고수들이 기가 막혀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창고가 폭발하면 벽력탄 제조 시설은 어떡합니까? 거금을 들여서 만든 것이 아닙니까?”
“망자 창궐 이후에 돈은 썩어나고 있소. 소림사에게 큰 타격을 준다면 요새 건설에 든 비용쯤이야 싸게 먹힌 셈이지, 후후후.”
남궁진이 자기도취에 빠져서 웃음을 흘렸다.
“그럼 모두 대피하라고 알려야 하지 않습니까?”
“천만에. 그럴 경우 요새에 잠입한 쥐새끼들도 알아차리지 않겠소?”
“설마…….”
“그렇소. 우리 다섯만 요새를 빠져나가면 그만이오.”
“그럼 무사들은…….”
“당신들 꼴을 보시오. 지금 부하 놈들 걱정하고 있을 때요?”
“…….”
남궁진이 눈쌀을 찌푸리며 패배를 책망했지만 모용화정과 고수들은 침묵을 지켰다.
“이번 일은 향후 오가연맹이 중원 무림의 패권을 잡는 데 큰 밑거름이 될 것이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셈이지.”
그러자 침묵하고 있던 언자성이 가슴을 부여잡은 채 힘들게 입을 열었다.
“그럼… 앞으로 벽력탄은 못 쓰게 될 텐데…….”
“그건 걱정 마시오.”
언자성이 말을 꺼내는 것마저 힘들어하자 남궁진은 참으라는 듯이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벽력탄 제조법은 따로 서책으로 만들어 두었소. 잠을 잘 때도 항상 지니고 있지.”
“…….”
“제조법이 있으니 다시 만드는 것은 시간문제요. 그보다 상처부터 치료할 생각을 하시오. 중원을 다 가진다고 해도 죽은 다음에는 아무 소용이 없지 않겠소? 하하하하!”
남궁진은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스스로 말했지만 통렬하기 짝이 없는 술책.
아쉽지만 밑질 것 없는 장사.
장사는 손해 볼 때가 있으면 이득 볼 때도 있는 법이 아닌가?
남궁진은 요새 파괴에 대한 책임을 그렇게 얼버무리며 넘어갔다.
“다친 데 덧나지 않게 조심해서 따라오시오.”
남궁진은 고수들을 이끌고 창고로 들어갔다.
창고 안에는 두 명의 무사가 남아서 왕일과 왕이를 지키고 있었다.
“흐음. 저놈들은 어떡한다?”
남궁진은 고민하는 척하며 중얼거렸다.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그만의 수법.
아니나 다를까 성미 급한 언자성이 입을 열었다.
“고민할 게 뭐 있소? 죽여 버립시다.”
“그게 좋을 것 같소?”
“당연하오. 후환을 남겨서 좋을 것이 무엇 있소?”
남궁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기색을 보이자 이번에는 모용화정이 끼어들며 말했다.
“죽이면 안 됩니다. 산 채로 끌고 가야 합니다.”
“무엇 때문이오?”
“혹시 소림사행 놈들이 추격해 온다면 인질로 삼을 수 있지 않습니까?”
“흐음.”
남궁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하는 척했다.
실은 왕일과 왕이를 인질로 끌고 가는 것이 그의 속셈이었다. 마침 모용화정이 그 제안을 했지만 일부러 뜸을 들여서 모두의 제안을 검토하는 척하는 것이었다.
“좋소. 놈들은 인질로 잡아갑시다. 그럼…….”
순간 남궁진의 눈빛이 야비하게 빛났다.
오가연맹의 다섯 고수가 피를 철철 흘리며 도망치는데 적이 무서워서 인질까지 잡았다고?
이 사실은 절대 외부에 발설되어서는 안 될 터.
스릉. 촤악.
남궁진이 예고도 없이 검을 뽑아서 인질을 지키던 무사 두 명의 목을 베어 버렸다. 무사들은 왜 죽는지도 이유도 모르는 채 숨졌다.
“지금은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요. 그러나 우리가 도주하는 것을 아는 자가 있어서 좋을 리 없지. 이 또한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
“…….”
다른 고수들은 남궁진의 처사에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남궁진은 자신의 안위가 걸렸을 때는 귀신처럼 신속했다.
“잠깐 기다리시오.”
남궁진은 고수들을 남겨둔 채 창고 뒤쪽으로 돌아갔다.
그는 기관장치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구석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그가 준비해 둔 것이 있었다.
바로 요새 전역의 벽력탄과 연결된 도화선!
남궁진이 품에서 화섭자를 꺼내 도화선의 끝에 대고 불었다.
훅. 치지지직.
불꽃이 튀자 도화선은 즉시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이제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지나면 벽력탄이 동시에 폭발해서 요새는 흔적도 남지 않을 터.
“큰돈을 들여서 무덤에 묻어 주는 것이니 나를 원망하지 마라, 후후후.”
준비를 끝낸 남궁진은 말 여섯 필을 끌고 고수들한테 돌아왔다.
그는 손수 왕일과 왕이를 포박했다. 다른 고수들은 부상이 너무 심해서 자기 몸 가누기도 힘들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왕일과 왕이를 끌고 후문으로 이동했다.
후문에 도착하자 경비 서는 무사들이 있었다.
남궁진은 모두 가서 불을 끄라고 호통을 쳤다.
“그럼 후문 경비는 어떡합니까…….”
“후문은 우리가 맡을 테니 걱정 마라. 불씨 하나 남겼다가는 화근이 될 터이니 화재 진압에 총력을 기울여라!”
“존명!”
남궁진과 다른 고수들이 함께 있는 것을 보자 무사들은 아무 의심 없이 달려갔다.
실은 그 또한 남궁진의 술책이었다.
이미 왕일과 왕이를 지키던 무사 두 명을 죽였지 않은가. 괜히 무사들을 살려서 데려갔다가는 훗날 말이 새어나갈지도 모르는 일.
게다가 다른 세가의 무사들이 행동이 굼뜬 바람에 요새가 결국 불타고 말았다는 핑계도 생기는 셈이니, 일석이조라고 할 수 있었다.
무사들이 가 버리자 남궁진은 후문으로 다가갔다.
후문의 양옆은 깎아지른 암벽이 구름을 찌를 듯이 솟아 있었다.
허공답보라도 시전한다면 모를까, 제아무리 경신법의 고수라도 저 암벽을 타고 넘는다면 십중팔구 실족해서 땅바닥에 처박히리라.
그걸 피하기 위해 후문을 뛰어넘는다면 더욱 끔찍한 최후가 기다리고 있었다.
후문 목책에는 수없이 검날이 박혀 있을 뿐 아니라 독을 바른 편전이 발사되어 탈출자를 고슴도치 꼴로 만들 테니까.
그야말로 자연이 만든 천혜의 장벽.
남궁진은 품에서 후문의 열쇠를 꺼냈다. 어른 손바닥만큼 큰 열쇠는 생긴 모양이 기이했다.
그가 후문 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리자 기관장치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굳게 닫혀 있던 후문이 벌어졌다.
철컥. 끼이이익.
“시간이 없으니 서두르시오.”
남궁진은 사람과 말이 통과할 만큼만 후문을 열고 다른 고수들을 재촉했다.
모용화정을 비롯한 고수들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힘없이 말을 끌고 후문을 통과했다. 밧줄에 묶인 왕일과 왕이는 말 한 마리에 태운 채였다.
마지막으로 남궁진이 통과한 다음 후문을 다시 닫았다. 그리고 열쇠를 돌려서 후문을 잠갔다.
철커덕. 끼이이익… 쿵.
이제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지나서 요새가 폭발하면 목숨을 부지할 자는 아무도 없으리라. 잠입자들은 물론 세가의 무사들까지 모두…….
남궁진과 고수들은 말에 올라서 이동을 재개했다.
“모두 부상이 심하겠지만 참으시오.”
“알았어요…….”
모용화정이 신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이랴!”
남궁진은 박차를 가해서 말을 달리게 했다.
요새 폭발의 여파가 클지 모르니 암벽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게 안전했기 때문이다.
말을 타면 위아래로 몸이 요동쳐서 상처가 벌어지기 때문에 부상자는 조심해야 했다. 하지만 남궁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고수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해 낙마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장차 오가연맹의 맹주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를 제거하는 셈이니 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네 명의 고수들은 남궁진의 뒤를 바싹 붙어서 따라왔다.
얼마나 오래 숲길을 달렸을까, 갑자기 등 뒤에서 굉음이 들렸다.
쿠우우웅.
곧이어 세찬 바람이 일행을 휩쓸고 지나갔다.
휘이이잉.
광풍이 휘몰아친 뒤에 흡사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요동을 쳤다. 말들이 놀라서 투레질을 할 정도였다.
오가연맹의 요새가 폭발한 것이었다.
수개월 간 비축해 둔 벽력탄에 동시에 불이 붙자 그 위력은 예측한 것 이상이었다. 일행은 잠시 입을 다문 채 멀리 하늘 위로 시키먼 연기 구름이 솟아오르는 것을 지켜봤다.
남궁진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다 끝났군. 이제 쥐새끼들은 흙속에 매장되어서 귀신이 되지 않는 이상 소림사로 가지 못할 것이오, 후후후.”
“…….”
그런데 자신만만하게 웃음을 흘리던 남궁진이 무언가를 보고 눈썹을 찡그렸다.
다른 고수들의 말안장에 무언가를 싼 보따리가 묶여 있었는데, 거기에서 붉은 핏물이 새어서 뚝뚝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게 대체 뭐요?”
“무엇 말이오?”
“각자 들고 온 보따리 말이오.”
남궁진은 검지로 보따리를 가리키다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피식 웃었다.
“아하, 급히 탈출하는 중에도 귀중품은 잊지 않고 챙겼군.”
그런데 언자성의 대답이 왠지 이상했다.
“그렇소. 어떤 이들한테는 한때 귀중품이었을 것이오.”
“한때? 지금은 아니고?”
“지금은 전혀 필요 없는 물건이 되었지.”
“말이 이상하군. 한 번 귀중품이면 영원히 귀한 물건이지, 지금은 아니라니 무슨 뜻이오?”
“궁금하면 직접 보시오.”
언자성이 안장에 묶은 보따리를 풀었다.
그러자 둥글고 묵직한 물건이 땅바닥으로 떨어져서 몇 바퀴를 굴러갔다.
털퍽. 데굴데굴.
고개를 돌리던 남궁진은 물건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물건의 정체는 바로 언자성의 잘린 목이 아닌가?
“저, 저건… 당신의 목…….”
“저건 언자성의 목이지, 제 목이 아닙니다.”
서백이 가슴팍에 붙여둔 부적을 떼자 모습이 어른거리더니 언자성의 이목구비가 싹 사라지고 서백의 얼굴로 돌아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사천 석가장 출신의 서백이라고 합니다. 부적 술법을 써서 언자성으로 변신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