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술책에는 술책으로(5)
실로 대담한 작전 변경.
이어서 서백은 주은리가 서찰에 쓴 내용을 송현에게 얘기했다.
요새 후문은 검날이 박혀 있고 독 편전이 날아와서 쉽게 넘을 수 없다는 것과 남궁진만이 후문을 열 수 있다는 정보였다.
반면 그녀가 잠행조에서 빠지려고 한 일은 말하지 않았다. 일단 요새를 탈출한 뒤에 말해도 늦지 않으리라.
“짐작은 하고 있었다.”
얘기를 들은 송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애초에 소림사로 가는 길목을 막기 위한 요새다. 후문을 쉽게 넘지 못하도록 설계한 것은 당연한 이치겠지.”
“탈출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예상한 바입니다.”
“잠행의 마지막 단계는 무사히 탈출하는 것. 그걸 끝낸 뒤에야 비로소 완벽한 잠행이었다고 할 수 있지.”
송현의 말이 스승의 가르침을 떠올리게 하자 서백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하신 해법이라도 있습니까?”
“나름대로.”
대답을 한 송현이 무언가를 싼 도포를 들어 보였다.
그러자 서백도 씨익 웃으면서 보자기에 싼 물건을 들어 보였다.
“우리 둘이 같은 생각을 했나 보군.”
“맞습니다. 이제 남궁진만 붙잡으면 됩니다.”
둘은 생각이 일치한 것을 깨닫고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평소 무심한 서백과 송현한테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서백, 송현, 주은리 셋은 작전의 세부 사항을 마지막으로 검토한 다음 몸을 움직였다.
“시작하죠.”
그런데 막 이동하려는 찰나, 서백과 송현이 발을 멈추고 서로를 돌아봤다.
“하나 빼놨군.”
“잊어 먹은 게 있습니다.”
둘이 동시에 말하자 주은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작전은 완벽한데 뭐가 문제인가요?”
“왕이삼 선배를 잊어 먹고 있었습니다.”
“아……!”
셋은 요새를 탈출하는 방법에 몰두하느라 그만 왕이삼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었던 것이다.
“자네를 도우라고 했으니 창고 근처에 있을 거다.”
“다행이 요새를 헤맬 필요는 없겠군요.”
송현의 말에 일행은 왕이삼을 찾으러 벽력탄 제조 시설이 있는 창고로 향했다.
이동하는 동안 일행은 혹시나 왕이삼을 발견하지 않을까 싶어서 주위를 유심히 살폈다.
그런데 왕이삼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진주언가의 무사 하나가 다른 무사들에게 호통을 치며 명령을 내리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왕이삼이었던 것이다.
“거기 왜 그렇게 굼뜨냐? 빨리 빨리 움직이라고!”
먼저 송현과 왕이삼은 진주언가의 무사들을 쓰러뜨리고 옷을 벗긴 뒤 그들의 두건을 쓰고 옷을 위에다 겹쳐 입었다.
그런데 왕이삼이 쓴 두건은 테두리에 검은 천이 둘러져 있었는데, 바로 진주언가 무사들의 십부장에 해당하는 표식이었던 것이다.
중원 방방곡곡을 전전하며 도검수 일을 한 왕이삼이 눈칫밥이 빠른 것은 당연지사.
그는 감투를 썼다는 사실을 깨닫자 마주치는 무사들에게 빨리 불을 끄라고 호통을 쳤다. 물론 얼굴을 알아볼 위험이 있는 진주언가 말고 다른 세가의 무사들만 상대했다.
군대와 같은 요새에서 상명하복은 필수.
무사들은 기분이 나빴지만 왕이삼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결국 왕이삼은 몸을 숨기기는커녕 무사들 한가운데 들어가서 떵떵거리며 행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야, 너! 발이 그렇게 느려서 어디다 쓸 거냐? 빨리 움직여라, 빨리!”
“알겠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일행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군.”
“기가 막히는군요.”
“역용술을 가르쳐 보고 싶군요. 연기 하나는 끝내주니 말입니다.”
일행은 잠시 왕이삼의 활약을 지켜보다가 기회를 틈타 그에게 접근했다.
* * *
남궁진은 무사들에게 목이 쉬어라 불을 끄라고 명령했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불길은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제야 남궁진은 한숨을 돌렸다.
혹시 모를 화재에 대비해서 물을 충분히 비축해 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큰 화재로 번져서 요새 전체가 불탔을지 모르는 일.
남궁진이 보건대 화재는 자연 발생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요새에 잠입한 쥐새끼들이 불을 지른 것일 터.’
그러나 잠입자에 대한 보고는 하나도 들어온 것이 없지 않은가?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
신 오대세가를 꿈꾸며 결성한 오가연맹.
그러나 오가연맹은 오합지졸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했다. 다른 세가들은 남궁세가에 머리 숙이는 것을 고깝게 여겼으며, 남궁세가도 그들을 지배할 힘이 부족했다.
특히 오가연맹이 이렇게 된 것은 남궁진의 책임이 컸다.
좀처럼 남을 믿지 못하는 속 좁은 성품.
남궁진은 일이 틀어지면 남 탓부터 했다. 그러니 임시 맹주의 위세가 설 리 없었다.
요새는 그럴듯하게 완성됐으나 정작 요새를 돌아가게 하는 동력이 부족한 셈.
남궁진은 화재 현장을 뒤로하고 몸을 돌렸다.
‘하나같이 멍청한 놈들뿐이다! 차라리 직접 쥐새끼들을 찾는 게 빠를 터.’
요새는 절대 잠입 불가능 하다고 주장할 때는 언제고,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그는 이번에도 남 탓을 했다.
그런데 남궁진은 무언가를 보고 발을 멈췄다.
건물 담벼락에 붉은 색으로 글자 하나가 써져 있는 것이 아닌가?
木
글자 자체는 별것 아니었다. 나무를 뜻하는 목.
그러나 남궁진은 목 자를 보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소림 십팔나한?’
木(목)을 둘로 나누면 十(십)과 八(팔)이 된다.
그 둘을 합치면 十八(십팔).
소림사는 무공 수위가 뛰어난 젊은 무승들을 모아 만든 집단으로 유명했다.
모두 열여덟 명의 소림 무승들을 통칭하여 중원 무림에서는 십팔나한이라 불렀다.
십팔나한은 방장 아래 배분의 제자들로 구성되었는데, 꼭 일대 제자가 아니라도 배분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었다.
드문 일이지만 적게는 나이가 어린 무승, 많게는 늙은 고승이 포함되는 경우도 있었다.
즉 십팔나한은 방장과 원로들을 제외하면 당대 소림사의 최정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간혹 중원 무림에 중대사가 있을 때 강호에 출행한다는 십팔나한.
그러나 최근 십여 년간은 십팔나한이 강호에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십팔나한은 새외에 파견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오직 서장 구륜사가 중원 무림에 전쟁을 선포했을 때 십팔나한이 단 한 번 모두 모였을 뿐.
그런데 십팔나한이 강호출행할 때는 암호를 남긴다는 소문이 있었다.
중원 명문정파는 각자 행방을 파악하기 위해 남기는 암호가 있었다. 흑도로 치면 일종의 흑화인 셈.
그리고 십팔나한의 암호가 바로 木이었다.
때문에 어딘가에 木 자가 적히면 흑도 무림인들은 겁을 집어먹고 도망친다는 소문마저 떠돌 정도였다.
그런데 건물 담벼락에 木 자가 적혀 있다니…….
‘소림 십팔나한이 출동했다고?’
그 사실을 깨닫자 남궁진은 무릎에 힘이 빠졌다.
‘빌어먹을. 조금만 더 버티면 요새가 완성되는데.’
보름만 지나면 남궁세가와 다른 오가연맹의 무사들이 요새에 대거 합류할 예정이었다.
수천 명의 군세가 모이고 오가연맹의 가주들이 요새에 왕림하면 비로소 요새는 완벽해진다고 할 수 있었다.
바로 남궁진이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한 계획.
그런데 하필 이 시점에 소림 십팔나한이 요새에 잠입했을 줄이야……!
공든 탑이 무너진다고 느끼자 남궁진은 허탈한 마음에 기운이 빠졌다.
그는 이를 부드득 갈며 마음을 다잡았다.
‘일단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
소림사가 최정예 십팔나한을 보냈다면 요새는 무너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다면 몸을 빼내서 도주하는 것이 중요했다.
목숨을 구하고 나서야 훗날을 도모할 것이 아닌가?
공들여 세운 요새와 벽력탄 제조 시설이 아깝긴 하지만, 남궁세가의 자금력이라면 다시 만드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자.’
그는 소위 권력을 쥔 자들이 입버릇처럼 떠드는 말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자기 목숨을 살리고 오가연맹을 버리는 것을 남궁진은 대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억지 명분을 내세웠다.
천하의 소인배들이 그러듯이 남궁진은 자신의 안전이 걸리면 귀신처럼 생각과 행동이 빨라졌다.
‘요새를 무력화시킨 다음 빠져나간다. 그러면 십팔나한도 뒤를 쫓지 못할 터.’
남궁진은 무사들의 눈을 피해서 은밀히 움직였다. 그리고 벽력탄 제조 시설이 있는 창고로 향했다.
창고는 따로 경비하는 무사들도 보이지 않았다. 남궁진이 모조리 화재 진압 현장으로 보냈기 때문.
‘일이 잘 풀리는군.’
주위 시선이 없자 남궁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때 등 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남궁 공자…….”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돌린 남궁진은 목소리의 주인이 모용화정인 것을 깨닫고 나서야 안심했다.
“어서 오시오. 그런데 몰골이 왜 그러시오?”
“쥐새끼들이… 쿨럭……!”
모용화정이 남궁진에게 몇 발짝 다가오다가 무릎을 꿇으며 피를 토했다.
중상을 입은 모용화정을 보고 남궁진은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소, 소저?”
남궁진은 그녀를 부축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모용화정의 한쪽 소매가 힘없이 덜렁거리는 것을 보고 세 번째로 놀랐다.
“……!”
다시 보자 모용화정은 도포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 안에 입은 겉옷은 소매가 찢어진 것은 물론 붉은 피가 번져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한쪽 팔이 잘린 중상!
남궁진은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모용화정의 뒤에서 나타난 인물들을 보고 낯빛이 창백해졌다.
모용화정에 이어서 온 자는 오가연맹의 다섯 고수들, 즉 악관비, 팽자호, 언자성이었다.
네 명은 하나같이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악관비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숨소리가 가는 것으로 보아 가슴에 중상을 입은 것 같았다.
팽자호는 가슴에 검을 맞았는지 옷이 아예 붉게 물들어 있을 정도였다.
언자성은 오른팔과 오른발이 인형처럼 흐느적거리는 것으로 보아 근골이 박살난 것 같았다.
넷 중에서 그나마 모용화정이 가장 상태가 나아 보일 정도였다.
팔 한쪽이 잘렸지만 지혈하면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 그러나 다른 세 명은 근골이 박살난 것으로 보아, 차라리 몸통에서 떨어져 있느니만 못하지 않은가?
그들은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부축하며 걸어왔다.
누구 하나가 쓰러지면 함께 쓰러질 정도로 위태로운 모습.
현 중원 무림에서 내로라한다는 세가들이 대표로 보낸 고수들이 피를 뚝뚝 흘리며 일패도지해 있으니, 직접 보지 못하면 아무도 믿지 못할 광경이었다.
경악하던 남궁진이 간신히 입을 열어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오?”
“우리 모두 잠입자들한테 당했습니다… 상당한 고수들이에요…….”
남궁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철통같은 경비망을 세웠는데 잠입자를 막지 못할 줄이야.
원래 남궁진은 혼자 도망칠 생각이었다. 소림 십팔나한이 출동했는데 시간을 낭비하다가 뒤를 잡히면 낭패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을 바꿔 먹었다.
‘차라리 잘됐군.’
어차피 일을 망친 바에야 다른 네 명과 함께 도망치는 것도 좋으리라.
오가연맹에 파견한 고수들이 모두 죽는다면 남궁세가는 다른 네 곳의 세가에게 할 말이 없어진다.
하지만 네 고수들이 목숨을 건진다면 적어도 소림사에 대항했다는 증거는 남는 셈.
그럼 요새에서 철수한 것은 소림사의 음흉한 기습 때문이었다고 둘러댈 수 있을 것이다.
“잘 알았소. 이제 본인이 쥐새끼들을 처단할 테니 염려 놓으시오.”
“놈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처단한단 말입니까…….”
“최후의 방법을 쓰겠소.”
남궁진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씨익 웃었다.
“요새를 벽력탄을 써서 통째로 폭파하겠소. 쥐새끼들은 요새와 무너지는 암벽에 깔려서 산 채로 흙 속에 파묻힐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