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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무사-104화 (104/123)

104화 술책에는 술책으로(7)

남궁진은 서백과 언자성의 목을 번갈아 봤다.

마치 헛것을 본 것 같은 눈빛.

언자성은 방금까지 말 위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모습이 흐려지더니 약관도 안 된 소년이 나타난 것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란 말인가?

서백이 검지로 언자성의 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건 어깨 위에 붙어 있어야 귀중한 물건일 뿐, 몸에서 떨어진 뒤에야 아무 짝에도 쓸모없지 않습니까.”

“……!”

남궁진은 서백의 말에 움찔 놀라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언자성 말고 다른 자들은 어찌 되었느냐?”

“몰라서 묻습니까? 모두 죽었습니다.”

서백이 고개를 돌려서 눈빛으로 신호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중상을 입어서 말은커녕 호흡조차 가쁘게 내뱉던 세 명이 어느새 멀쩡한 눈빛으로 남궁진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어서 악관비, 팽자걸, 모용화정도 서백처럼 안장에 묶어 둔 보따리를 풀었다.

악관비, 팽자걸, 모용화정의 잘린 목이 땅에 떨어졌다.

“……!”

남궁진이 경악해서 입을 딱 벌리고 있을 때, 일행이 한 명씩 가슴팍에서 부적을 뗐다.

그러자 먼저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오가연맹의 고수들 모습이 눈앞에서 어른거리더니 생전 처음 보는 무림인들로 탈바꿈하는 게 아닌가?

악관비는 키가 훌쩍 크고 비쩍 마른 사내로.

팽자걸은 수염이 덥수룩하고 살집이 붙은 중년인으로.

모용화정은 검은 두건과 장포를 걸치고 눈빛이 도도한 여인으로.

인질로 잡아 온 왕일과 왕이만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다.

“거참. 명문정파에서 손꼽히는 남궁세가 양반이 내가무공도 열심히 수련하지 않고 무얼 하셨나?”

“저자는 내가무공뿐 아니라 외가무공도 뛰어나지 않을 것이오.”

왕이삼이 한 마디 하자 송현이 맞장구를 쳤다.

“아니, 저 인간이 무슨 남궁봉화라면서? 그럼 무공이 별로라고?”

“별호는 무공이 높아서가 아니라 미남자라서 붙은 것이겠지. 남궁진이 죽은 여동생만 못할 줄은 본인도 몰랐소. 동생이었다면 술법을 눈치챘을 테니까.”

“저 얼굴이 미남자라고? 씁, 난 기생오라비 같아서 별론데.”

남궁진의 얼굴을 품평하던 왕이삼이 기지개를 펴면서 말했다.

“그나저나 말을 할 수 있으니 속 시원하구나!”

“왕 선배한테는 입을 막는 게 최고의 고문이죠.”

“후배, 나이답지 않게 독설이 늘었군.”

“쓰면 쓸수록 느는 게 세 치 혀 같습니다.”

서백과 왕이삼은 오랜만에 정겨운 대화를 나눴다.

서백 일행의 대화를 들으며 남궁진은 기가 막혔다.

갑자기 인물들 모습이 바뀐 것도 황당한데, 한가롭게 남의 얼굴을 품평하면서 농담을 건네고 있다니…….

“물건의 가치는 대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법입니다. 저들의 목은 본인들뿐 아니라 주 소저한테도 가치가 있었습니다.”

“맞아요. 목이 있어서 술법을 완벽하게 펼칠 수 있었죠.”

이번에는 주은리가 맞장구를 쳤다.

주은리의 술법은 변신하는 대상의 이목구비를 정확히 살피는 게 중요했다.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할 경우 술법에 어딘가 허점이 생기기 때문이다.

요새에 처음 잠입할 때 마주쳤던 무사들은 부적을 붙인 서백과 주은리를 모르고 지나쳤다. 그때는 부적이 완벽하지 않았지만, 어둠 속에서 횃불만 들고 있던 터라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남궁진을 코앞에서 속이려면 술법이 완벽해야 될 터.

서백이 한 결단은 언자성과 모용화정의 목을 잘라서 가져가는 것이었다.

무사들이 들이닥쳤을 때 서백과 주은리는 언자성과 모용화정의 목을 자른 뒤 도주했다.

그리고 송현을 만났을 때, 그 역시 팽자걸의 목을 갖고 있었다.

미리 계획한 건 아니었지만 서백과 송현은 주은리의 술법을 써서 오가연맹의 고수들로 변신하려는 임기응변을 발휘했던 것이다.

둘이 서로가 어떤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할지 예측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작전.

서백이 남궁진을 보며 말했다.

“창고에 벽력탄 가루를 뿌리고 화섭자를 시간에 맞춰서 불이 붙도록 할 생각이었는데, 당신이 요새 폭발 계획을 세워 둔 덕분에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

서백 일행은 이미 남궁진의 얘기를 들었으니 전후 사정을 모두 알고 있었다.

특히 남궁진이 자기 손으로 세운 요새를 폭파하는 작전을 야심 차게 설명할 때 왕이삼은 웃음을 참느라 곤욕을 치렀을 정도였다.

“무림에는 이런 말이 있지.”

“무엇입니까?”

“무공에는 무공으로. 술책에는 술책으로.”

서백이 묻자 송현이 대답했다.

“우리 후배가 네놈 같은 기생오라비한테 머리 쓰는 걸 질 리가 없지!”

왕이삼이 농담으로 지껄인 말이 남궁진의 심장을 후벼 팠다.

사실이 그랬다.

약관도 안 된 소년의 술책에 완벽하게 당하지 않았는가.

서백이 말에서 뛰어 내린 뒤 말했다.

“다음은 당신 목을 벨 차례군요.”

“…술법을 쓸 필요는 이제 없지 않느냐?”

남궁진이 다급한 심정으로 억지 논리를 펼쳐 봤지만 통하지 않았다.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망자가 아닐지 확인해 봐야 되거든요.”

“……!”

“잘 아시겠지만 망자는 정체를 숨기고 사람들 틈에 숨는 게 특기입니다.”

스윽. 서백이 등에서 검을 내렸다.

“당신처럼 명문정파의 인물이 망자가 되었다면 더욱 큰일이죠. 명색이 중원 무림을 좌우하는 남궁세가의 인물인데 망자가 됐다면 평판이 추락하지 않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데 남궁진은 송현, 왕이삼, 주은리가 그대로 말에서 내리지 않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니나 다를까 세 명은 서백에게 맡기는 눈치였다.

“마무리는 후배가 하라고.”

“그러겠습니다.”

약관도 안 된 소년이 혼자 다가오자 남궁진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나이답지 않게 고수인 건 알겠다만 네 실수다.’

무림에서는 대개 여러 명이 한 명과 싸울 때 일행 중 하수가 가장 먼저 나와서 적을 상대한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명문정파인의 고집.

평소 누구보다 자존심을 내세우는 남궁진은 목숨이 걸리자 실리를 챙겼다.

‘꼬마 놈을 도륙해서 놈들을 당황케 만들자. 그럼 도주할 기회가 생길 터.’

스릉. 남궁진이 검을 뽑으며 말했다.

“꼬마야, 몇 살이나 먹었냐? 이른 나이에 죽더라도 나를 원망하지 마라.”

“일백 하고 열아홉 살입니다. 이갑자까지 일 년 남았습니다.”

“뭐라고……?”

남궁진은 흠칫 하며 말을 삼켰다.

백이십 살, 이갑자를 먹었는데 약관도 안 된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설마 눈앞의 꼬마가 반로환동한 절세 고수란 말인가?

그러나 다음 순간 서백이 입가에 싸늘한 비웃음을 머금었다.

남궁진은 자신이 거짓말에 조롱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꼬마 놈이……!”

서백과 남궁진이 검을 들고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서백은 두 팔을 어깨 뒤로 돌렸다. 대검을 크게 휘두르려는 준비 태세.

대검의 크기는 물론, 휘두르는 반경으로 볼 때 일 검을 맞는다면 단순히 베어지는 것을 넘어서 근골이 박살나리라.

그러나 큰 동작은 약점이 있게 마련.

남궁진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대검을 휘두르는 걸 보니 외가무공은 상당하다만 머리는 나쁘구나!’

남궁진은 보법을 밟아서 서백이 휘두를 검로(劍路)에서 벗어났다.

악관비와 팽자걸도 알아차렸던 주은리의 술법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던 남궁진.

의외로 그는 보법과 경신법이 제법 뛰어났다.

내가무공은 끊임없는 수련이 중요하다. 또한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견디는 인내가 필수.

그런데 인내심은 남궁진의 성품에서 가장 결여된 부분이었다.

그는 성과가 당장 드러나는 무공만 골라서 수련했다. 때문에 그의 무공은 겉보기엔 화려하나 실속이 없었다.

그걸 두고 남궁진은 실전 무공이라는 말로 자신을 합리화했다.

어쨌든 그의 검법과 보법은 상당한 수준이어서 남궁세가가 군소 문파와 방파를 찍어 누를 때 이름을 떨쳤다.

쉬쉬쉭. 남궁진의 검이 서백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서백의 검로가 지나치게 큰 반경을 그리는 허점을 노린 수법.

‘죽어라!’

그러나 순간 남궁진은 생각을 바꿨다.

‘아니, 죽이면 안 된다.’

소년이 죽으면 모두 복수를 위해 나설 것이다.

반면 중상만 입히면 일행이 소년을 살리려고 정신이 없을 때 도주할 기회를 잡을 수 있을 터.

남궁진은 검이 서백의 심장을 비껴가게, 그러나 가슴을 관통하는 중상을 입히도록 내질렀다.

검이 소년의 가슴을 사정없이 꿰뚫었다.

남궁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잡았다, 요놈!’

그런데 귓가에 들린 소리가 이상했다.

빠악.

‘……?’

검이 가슴을 꿰뚫었으니 푹 소리가 나야 정상일 텐데…….

남궁진의 검은 찌르기에 적합하도록 특수하게 벼려진 애병이었다.

내가무공이 떨어지기 때문에 상대의 근골을 피해서 급소를 찌르는 것이 남궁진 특유의 수법.

그런데 검날이 뼈를 가르거나 부딪치는 소리도 아니고 근골을 부수는 소리가 난다고?

남궁진이 어리둥절할 때,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빡. 빠가가가각.

그런데 다시 보자 검날은 서백의 심장이 아니라 팔과 옆구리 사이로 빠져나가 있었다.

그럼 방금 들린 소리는……?

무심코 시선을 내린 남궁진은 경악하고 말았다.

서백이 검자루로 남궁진의 가슴팍을 후려쳐서 갈비뼈가 모조리 분질러졌던 것이다.

이어서 들린 서백의 싸늘한 목소리.

“술책에는 술책으로.”

그제야 남궁진은 깨달았다.

방금 소년의 검로는 허초였다는 사실을.

‘말도 안 돼……!’

병법은 물론 무공에서도 허허실실이 중요하다

상대의 집중을 빼앗고 노림수를 숨기기 위해 실초 속에 허초를 섞는 것은 굳이 술책이라고 할 것도 없는 기초 중의 기초.

이 모든 것이 서백이 약관도 안 된 소년이라고 여긴 탓!

“너무 뻔한 허초라서 막힐 줄 알았는데 뜻밖이군요. 허초를 막았으면 석가검법을 보여 드리려고 했는데 아쉽습니다.”

“……!”

자승자박. 자기 꾀에 자기가 걸린 꼴.

남궁진은 가슴이 박살나는 고통이 더 큰지, 눈앞의 소년에게 망신당하는 고통이 더 큰지 알 수 없었다.

털퍽. 가슴뼈가 송두리째 부러진 남궁진은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오가연맹의 다른 고수들보다 내가무공은 약하지만 나름 검법이 표홀한 남궁진.

그러나 서백에게는 단 일 초식을 넘기지 못하고 처참하게 패배했다.

그런데 무릎을 꿇은 남궁진은 다시 한번 경악했다. 소년의 일행 세 명이 말에 탄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소년의 무공을 철저히 믿고 있기에 가능한 일.

“고, 고수…….”

“고수? 당신은 하수입니다만.”

“그, 그런 뜻이 아니라…….”

“중상을 입고도 말씀이 많은 걸 보니 망자가 맞군요.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서백이 검을 들고 성큼성큼 다가오자 남궁진은 기겁해서 외쳤다.

“기다려라, 목숨만 살려다오. 그러면 남궁세가 재산의 사분지일을 네게 주겠다. 제발!”

그 말에 서백이 걸음을 멈추자 남궁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서백이 멈춘 것은 단지 목을 벨 사정거리에 들어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잠깐! 재산의 절반을 주겠다! 싫다고 하면 네놈은 천하의 바보…….”

팟. 휘이이잉.

남궁진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한 줄기 질풍이 휘몰아치면서 그의 목이 허공 높이 떠올랐다.

“아, 이런.”

서백이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큰돈을 벌 기회를 놓쳤군요. 저는 천하의 바보인가 봅니다. 안 그렇습니까, 왕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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