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술책에는 술책으로(2)
서백은 악관비를 보고 피식 미소를 흘렸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무슨 소리지? 날 기다리고 있었냐?”
“그건 아닙니다만.”
희미하던 서백의 미소가 어느새 사라지고 예의 싸늘한 무표정으로 바뀌었다.
“몸이 근질근질해서 더는 못 견딜 참이었거든요.”
스윽. 서백이 손을 뻗어 등에 멘 검을 내렸다.
악관비가 그걸 보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하룻강아지가 겁이 없다더니.”
“하룻강아지면 실력도 부족할 텐데 겁이라도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겁이 없으면 목숨 부지하기 힘들다, 꼬마야.”
“맞는 말만 골라서 하시는군요. 보아 하니 산동악가 분이신 듯합니다?”
“꼬마가 눈썰미 하나는 좋군.”
“세 치 혀 한번 잘 놀리시는 걸 보니 과연 산동악가의 악가설법은 명불허전이군요.”
“……!”
악관비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산동악가는 대대로 패도적인 창술이 유명하다.
악가창법이라고 하면 소림봉법과 함께 중원 무림에서 양대 봉법으로 손꼽힐 정도.
살인을 금하기 때문에 봉을 쓰는 소림사. 봉에다 날붙이를 달면 창인 셈이니, 소림과 악가를 봉법의 양대산맥으로 꼽는 것이었다.
그런데 서백은 창(槍)을 빼고 설(舌, 혀)을 넣어서 악가설법(岳家舌法)이라고 했으니, 악관비와 산동악가를 싸잡아서 조롱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문을 욕했으니 악관비와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셈.
악관비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내심 서백을 얕잡아보던 그는 눈길을 위아래로 훑으며 유심히 살폈다.
‘나이는 약관도 안 돼 보이는군. 근골은 제법 튼튼하다만… 저 무식하게 큰 검은 대체 뭐지?’
무림에서 창은 길면 길수록 좋고 도는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좋다는 말이 있다. 창은 길수록 장점인 사거리를 늘릴 수 있으며, 도는 무거울수록 장점인 파괴력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의 경우는 달랐다.
검은 쓰는 자에 따라서 길이와 형태가 천차만별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서백의 검은 지나치게 크고 길어 보였다.
“꼬마야, 그게 검이냐?”
“네. 눈이 어두우신가 봅니다.”
“그 쇠붙이를 녹이면 검을 몇 자루 더 만들겠다. 아니면 차라리 대도(大刀)로 만들지 그랬냐?”
“명검은 명인의 눈에만 보이는 법입니다. 검을 녹여서 도를 만들다니, 지나가는 개가 웃겠군요.”
“…….”
서백이 말 한 마디를 지지 않고 반박하자 악관비는 침묵에 잠겼다.
‘누가 봐도 독 안에 든 쥐 꼴이다. 한데 뭘 믿고 저리 당당한 거지?’
사실 악관비는 말이 많은 자, 이를 테면 남궁진 같은 인물을 싫어했다.
지금 서백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눈 것은 잠입자가 뜻밖에도 어린 소년이어서 호기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싸움에서 계속 지자 싫증이 났다.
“너 같이 어린 꼬마가 소림사는 왜 가려는 것이냐?”
“왜라니, 망자 창궐을 막고 중원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
“댁 같은 자들이야 세상이 망하든 말든 자기 이득만 챙기겠지만 무림인들이 모두 그렇지는 않거든요.”
“꼬마 놈이 감히…….”
“길목에 요새를 세워서 무림맹에 반기를 든 오가연맹은 큰 죄를 지었습니다. 해서 지금 벌을 내리겠습니다.”
“벌? 꼬마 놈이 웃기는군!”
악관비가 등에서 쌍창을 내렸다.
더는 말이 필요 없다는 행동.
그는 쌍창을 두 손에 들고 촉이 없는 쪽을 끼워 맞췄다. 그러자 두 자루의 쌍창이 한 자루의 장창으로 탈바꿈했다.
‘원래 저렇게 쓰는 병장기였군.’
안 그래도 키가 팔 척이나 되는 악관비가 쓰기에는 창이 짧아 보였는데, 실은 붙여서 쓰는 장창이었던 것이다.
서백이 강호출행한 뒤 처음 대결하는 고수.
이전에 상대한 자들은 서백보다 두세 수는 아래였다. 그나마 사천당문의 당홍과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명재가 까다로운 상대였다.
당홍은 열두 개의 비검을 날리는 무공이 독특했다.
그러나 서백은 넓은 검면으로 비검을 튕겨 내서 비껴가게 만든 뒤 검망을 돌파하여 그녀의 목을 베었다.
제갈명재는 꽤 힘든 상대였다.
하지만 서백인 그에게 밀린 것은 석가심결을 시전 못 하는 상태라는 점이 컸다. 설상가상으로 망자가 된 제갈명재는 술법으로 괴력까지 얻었으니.
즉 두 고수와의 대결은 굉장히 특이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반면 악관비는 중원 오대세가의 하나인 산동악가의 인물이다. 명문정파의 고수와 상대하는 것은 서백이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
서백은 스승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창법의 장점은 무엇이냐?
-길이입니다. 적의 병장기가 닿지 않을 때 나는 찌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단점은 무엇이냐?“
-역시 길이입니다. 몸이 닿도록 바싹 붙어서 권각이나 금나수로 공격하면 긴 창은 공격도 방어도 답이 없습니다.
악관비가 장창을 수평으로 들어 서백을 겨누었다.
장창이 어느 순간 하나의 점으로 변했다.
서백은 창을 시야에 넣기 위해 고개를 기울이거나 보법을 밟았다. 하지만 장창은 계속해서 점을 유지했다.
악관비가 서백의 움직임을 꿰고 있다는 뜻.
창이 선(線)이 아니라 점(點)으로 보이면 상대는 피할 방법이 없다. 창을 찌르는지 뒤로 빼는지 알아차릴 수 없기 때문이다.
-창이 점으로 변할 때 가장 위험하다.
-파훼법은 무엇입니까?
-창촉을 눈으로 좇지 마라. 창이 더 빠르니까.
쉭.
파공음이 이는 찰나 서백은 바닥을 굴려서 창촉을 피했다. 서백이 걸친 도포 옆구리가 창촉에 스쳐서 올이 풀렸다.
-소리도 안 된다. 소리를 듣고 피하면 늦다.
-그럼?
-상대의 몸을 느껴라. 창을 찌르려면 보법을 밟고 몸통을 회전해야 한다. 쾌검처럼 연속 찌르기의 수법을 쓰더라도 최소한 팔은 움직인다.
손목과 팔의 움직임. 특히 어깨.
상대 신체의 움직임을 느끼고 반응하는 것만이 악가창법에 당하지 않는 유일한 해법.
쉬쉬쉭. 악관비가 세 번의 찌르기를 마치 한 번처럼 내질렀다.
그러나 서백이 보법을 밟으며 몸을 회전하자 이번에는 창촉이 옷조차 스치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창을 내지르는 악관비의 움직임.
손가락 하나, 털 한 올, 미미한 호흡의 공기 흐름이 모두 느껴졌다.
순간 악관비의 몸통이 슬쩍 회전하며 팔꿈치가 뒤로 젖혀지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이다.’
서백은 검을 비스듬히 든 채 앞으로 달려들었다.
지금까지는 옆으로 피했지만 이번에는 정면으로 돌격한 것이다.
장창을 점으로 보이게 해서 서백을 압도하던 악관비. 그런데 반대로 서백이 선이 아니라 점의 움직임을 행하자 그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마치 얼어붙은 호수를 미끄러지는 듯한 보법.
바닥에 쌓인 먼지는 발에 쓸리지 않고 그대로인 채다.
경신법의 고수나 시전할 법한 보법을 약관도 안 된 소년이 펼치다니…….
동요하던 악관비는 찰나의 순간 냉정을 되찾았다.
현 산동악가를 대표하는 고수.
그는 서백의 경신법이 예사롭지 않음을 깨닫자 약관도 안 된 애송이가 아니라 한 명의 고수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제법이구나, 꼬마야. 하지만 거기까지다.’
악관비는 내질렀던 팔을 회수했다.
이제 다시 어깨와 팔의 근육이 폭발하면 삼삼은 구, 도합 아홉 번의 찌르기가 순식간에 애송이의 몸에 퍼부어질 것이다.
악가창법을 응용해서 악관비가 발전시킨 초식,
섬전초살(閃電秒殺).
쉬쉬쉬쉬쉬쉬쉬쉬쉭.
아홉 번의 창격이 서백을 몸을 고슴도치처럼 꿰뚫었다…….
…고 생각한 것은 악관비가 느낀 착시였다.
순간 악관비의 시야에서 서백이 사라졌던 것이다.
‘피한 건가?’
악관비는 동요했다. 약관도 안 된 애송이가 경신법이 꽤 고명했는데 설마 이 정도 수준일 줄이야.
아니나 다를까 아직 끝나지 않은 아홉 번의 창격을 뚫고 서백의 신형이 번개처럼 접근하고 있었다.
마치 빗방울에 젖지 않으면서 빗속을 돌파하는 것처럼.
그러나 악관비는 여유를 되찾았다.
경신법이 뛰어나면 무공 수준이 몇 수 위로 올라가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경신법만으로 상대를 쓰러뜨릴 수는 없는 일.
결국 상대의 몸에 주먹을 꽂든 검을 쑤시든 해야 싸움은 끝나는 것이다.
악관비가 보기에 서백은 그럴 능력이 없었다.
‘그 대검! 치켜들기도 힘들 법한 대검을 애병으로 삼았다고? 얼치기 삼류 놈들이나 허세로 삼을 법한 무기다.’
스스스스.
서백의 검이 천천히 수평으로 움직였다. 물론 악관비의 눈에 느리게 보인다는 것일 뿐 실제 움직임은 전광석화와 같으리라.
검의 움직임은 악관비의 예상대로였다.
수평 베기. 즉 검(劍)이 아니라 도(刀)의 초식.
무거운 대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니 서백의 용력이 예사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둘이 있는 장소는 창고의 다락이었다.
아무리 창고가 거대하다고 해도 다락은 다락. 사방에 굵은 기둥이 수없이 수직으로 뻗어 있었다.
이런 곳에서 평범한 수평 베기를 시도하다니, 검은 허무하게 기둥에 박혀 버릴 것이다.
악관비는 잔인한 미소를 흘렸다. 경신법과 외가무공은 제법 그럴듯하나 병법에는 바보나 마찬가지. 장소를 고려하지 않고 싸우는 것은 삼류나 하는 짓일 터.
악관비는 팔을 회수했다가 두 번째 섬전초살을 출수했다.
‘네 어리석음이 죽음을 자초한 거다.’
순간 쩍 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도끼로 장작을 단숨에 쪼개면 나는 소리.
‘……?’
서백의 검이 어른 허리통만큼 굵은 기둥을 갈라 버리는 소리였다.
워낙 사방에 기둥이 솟아 있는지라 검의 경로에는 두 개의 기둥이 더 있었다. 그러나 서백의 검은 연속으로 기둥 두 개를 더 가르며 전진했다.
평생 한 번도 본 적 없는 괴력에 악관비가 경악할 때, 이상한 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렸다.
서백의 검이 그의 왼쪽 허리 갈비뼈를 모조리 박살내는 소리였다.
* * *
진주언가 무사들의 옷을 걸친 송현과 왕이삼.
둘의 술책은 금세 들통 나고 말았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팽자걸이 어둠 속에 숨어 있다가 둘을 보고 덜미를 잡은 것이었다.
팽자걸이 잔인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런 허술한 술책으로 지금까지 어떻게 숨어 다녔는지 신통하구나, 크흐흐.”
“별것 아니오. 당신들이 눈이 어두워서 못 알아봤을 뿐.”
송현은 슬쩍 주위를 살폈다. 팽자걸 말고 다른 무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당장 포위될 위험은 없다는 뜻.
그렇다면…….
“불길이 꽤 높이 솟았는데 금세 끄는 걸 보니 소방 준비가 철저했던 것 같소만?”
“산속이라 불이 번지면 큰일이라서 말야.”
“그게 아니면 요새에 불타기 쉬운 물건이라도 있는 거요?”
“…….”
여유만만하던 팽자걸이 갑자기 말을 삼켰다.
팽자걸이 대답을 안 해도 송현은 그의 생각을 추측할 수 있었다. 애초에 팽자걸을 통해 요새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일부러 질문을 유도한 것이었으니…….
‘서백 성격상 그냥 물러나지 않겠군.’
“왕이삼, 당신은 서백을 도우러 가시오.”
“나만? 나 혼자 가란 소리요?”
송현의 말이 뜻밖이자 왕이삼이 영문을 몰라서 되물었다.
“나는 저자를 처리하고 가겠소.”
“하지만 꽤 고수 같은데…….”
“당신이 있든 없든 달라질 건 없으니 얼른 가시오.”
“…….”
송현이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왕이삼은 침을 꿀꺽 삼킨 뒤 몸을 돌려서 달렸다.
“그, 그럼 난 가겠소!”
고수 말은 누구보다 잘 듣는 왕이삼.
송현도 왕이삼의 그런 성품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기에 일부러 강하게 압박한 것이었다.
‘말 잘 듣는 것 하나는 장점이군.’
팽자걸은 왕이삼이 가든 말든 상관없다는 눈치였다.
송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한 명이 도망치는데 괜찮소?”
“흐흐흐, 저런 피라미는 그냥 놔둬도 스스로 그물에 걸릴 터. 나는 진짜배기만 상대하지.”
“본인도 그러고 싶소만 피라미를 상대하게 됐군.”
“…내가 피라미란 소리냐?”
“아닌가?”
스릉. 송현이 청연검을 뽑자 얼음처럼 싸늘한 검광이 어둠을 밝혔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끝내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