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술책에는 술책으로(1)
서백의 눈빛이 얼음처럼 싸늘해졌다.
촉도관에서 사천당문의 흉계로 벽력탄의 엄청난 위력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가는 곳마다 벽력탄이군.’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천하제일의 무공 비급이나 절세의 명검을 손에 넣고 싶어 하지 않는가?
중원의 패권을 잡으려는 문파와 세가가 벽력탄에 관심이 없다면 거짓말일 터.
‘이번에도 사천당문이 관련되었나?’
그건 아닐 것이다.
오가연맹은 사천당문과 제갈세가를 따돌리고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설령 오가연맹이 손을 내밀었어도 자존심 센 사천당문은 코웃음을 쳤으리라.
벽력탄은 잘만 사용하면 망자 창궐을 뿌리 뽑을 수 있는 물건임은 분명했다.
그런데 벽력탄을 손에 넣는 자마다 왜 중원 무림을 집어삼키지 못해서 안달이 나는 것인가?
서백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망자 창궐을 막은 뒤에야 패권도 의미 있지 않은가? 세상이 멸망하면 패권이 무슨 소용인가?
문득 스승의 말이 떠올랐다.
-중원 무림인들의 생각은 세간의 상식과 다르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굶어죽든 말든 마지막 남은 종자 씨앗으로 밥을 지어 먹을 놈들이다.
-그들에겐 그들의 방식을 그대로 되돌려 줘라. 필요하면 취하고 방해가 되면 없애라.
‘알겠습니다.’
서백은 싸늘한 눈빛으로 결의했다.
작전의 목표가 달라졌다.
소림사행 길을 멀리 우회하지 않으려고 한 요새 잠입. 그러나 이제 벽력탄을 제조하는 기관장치의 파괴가 목표가 된 것이다.
오가연맹이 소림사로 가는 길목에 요새를 지은 까닭도 알 수 있었다.
소림사가 있는 숭산까지 벽력탄을 빠르게 옮길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니까.
서백은 주은리에게 상황을 바뀐 것을 얘기했다.
“저 아래 벽력탄 제조 시설이 있습니다. 요새 탈출 전에 파괴해야 됩니다.”
그런데 주은리의 대답이 없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고개를 돌린 서백은 주은리의 얼굴이 봄날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
서백은 괴이한 낌새를 느끼고 석가심결을 십성까지 시전했다.
팟.
순간 뒤쪽 다락이 보일 만큼 주은리의 얼굴이 반투명하게 변했다.
서백이 손을 뻗자 살이 맞닿기 전에 주은리의 얼굴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는 사라진 게 아니라 원래부터 자리에 없는 것이었다.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
그때 허공에서 부적 한 장이 펄럭거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부적은 한가운데 은(恩) 자가 적혀 있었다.
주은리(朱恩理)의 이름 중 한 글자.
문득 서백은 잠입 전에 주은리가 한 말이 떠올랐다.
-진짜 기문둔갑술이 무엇인지 보여 드리지요.
그 말은 허세가 아니었다.
주은리는 무사들의 부적을 만들 때 자신의 이름을 적은 부적을 몰래 만들었으리라.
그리고 지금 보기 좋게 서백을 속인 것이었다.
벽력탄에 집중하느라 주의를 못 기울였지만, 바로 옆에서 언제인지 모르게 사라진 것은 확실히 놀라웠다.
술법이 아니라 무공이었다면 절정 고수의 수위!
그런데 부적 밑에 종이 한 장이 깔려 있었다.
서백은 종이를 집어들었다.
‘이건…….’
주은리가 서백에게 남긴 서찰이었다.
-요새 후문은 목책 끝에 검날이 박혀 있습니다.
-또한 독을 바른 편전을 발사하는 기관장치가 붙어 있지요.
-제아무리 고수라도 후문을 넘는다면 모두 무사하진 못할 겁니다. 특히 수염 난 중늙은이는 말입니다.
-후문은 정문과 달리 특수하게 제조된 자물쇠로 항상 잠겨 있습니다.
-자물쇠를 풀고 후문을 나가는 방법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요새에서도 오직 남궁진만이 방법을 안다고 합니다.
-이것이 제가 알아낸 정보입니다.
-부디 무사하시길.
주은리는 무사하라는 말로 서찰을 끝냈다.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라는 암시.
왕일과 왕이는 여전히 인질로 붙잡힌 상태였다.
애초에 주은리는 둘을 구할 생각이 없었다.
둘을 구하려는 게 아니라 다른 목적을 가지고 요새에 잠입했던 것이다.
‘배신당했나?’
그렇게 따지자니 애매했다.
중간에 잠행조에서 빠지는 것은 군대라면 탈영으로 볼 법한 행동.
그러나 주은리는 요새 잠입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한 탈출에 필요한 정보도 서찰을 통해 모두 알려 주지 않았는가.
‘주 소저, 제게 빚진 걸로 해 두겠습니다.’
주은리를 찾아서 응징할 필요까지는 없으리라.
하지만 이번 빚은 반드시 받아내겠다고 서백은 결심했다.
그때 아래에서 무사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들었던 수장의 목소리였다.
“일호(一號) 건물에 불이 났다! 창고로 번지면 큰일이니 모두 불을 끄러 간다!”
“인질은 어떻게 할까요?”
“둘만 남아서 인질을 감시하고 모두 따라와라!”
곧이어 무사들이 창고에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송 선배와 왕 선배로군.’
일호 건물은 아마 송현과 왕이삼이 맡은 건물 중 하나일 터.
둘은 왕일과 왕이를 발견하지 못하자 서백이 맡은 곳에 있으리라 짐작하고 불을 지른 것이리라. 요새의 무사들이 한쪽으로 몰리게끔 말이다.
동쪽에서 소리를 지르고 서쪽을 친다.
바로 성동격서(聲東擊西) 작전.
불 지르는 것은 미리 계획한 적 없었다.
분명 송현이 임기응변으로 적을 끌어들이고자 행한 작전일 터.
‘송 선배가 만들어 준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서백은 왕일과 왕이를 구하기 위해 아래로 내려가기로 했다.
다락을 둘러보자 중앙에 바닥 뚜껑이 보였다.
‘저기군.’
그런데 서백이 다가가는 순간 뚜껑이 열리더니 그림자 하나가 위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쥐새끼가 숨어들어 있었다니 남궁진 놈의 말이 진짜였군.”
다락 위로 올라온 그림자가 똑바로 서자 머리가 대들보에 닿을 만큼 키가 컸다.
게다가 등에 메고 있는 쌍창.
오가연맹 다섯 고수 중 산동악가의 악관비였다.
먼저 서백과 주은리를 지나쳤던 악관비는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둘을 쫓아왔다. 낌새를 따라 움직인 그는 결국 다락에 숨어 있던 서백을 발견한 것이다.
‘잠입은 여기까지인가.’
서백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송 선배, 많이 배웠습니다.’
일행이 암벽에서 요새 잠입을 준비할 때, 작전은 서백이 짰지만 방향을 제시해 준 것은 송현이었다.
서백이 작전을 짤 때 중요한 세부 사항을 지적하거나 수정하도록 눈짓으로 제안했던 것이다.
서백은 송현의 도움을 받아 충실히 잠입 작전을 실행했다.
그러나 요새에 잠입하는 동안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답답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잠행보다는 돌격.
눈앞의 적을 맞아 은신하는 것보다 정면 대결을 펼쳐서 꺾어 버리는 것이 서백의 성품에 맞았다.
서백은 주은리의 서찰을 품에 넣고 몸을 일으켰다.
‘이제부터 제 방식대로 하겠습니다.’
* * *
“불을 꺼라!”
요새 전체에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사들은 불이 난 건물을 향해 물동이를 옮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후문을 경비하는 무사들은 멀리서 치솟은 불길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갑자기 웬 불이지?”
“날씨가 건조하면 산에 불이 잘 붙는 법이다.”
“그럼 암벽을 막고 요새를 지은 게 결국…….”
“자충수를 둔 거지. 누구는 여기가 길목인 줄 모를까. 아무도 요새를 안 세운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선데 남궁세가 놈이…….”
그때 무사가 욕하던 장본인, 바로 남궁진이 후문에 나타났다.
무사들은 화들짝 놀라서 입을 다물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뭐하고 있냐? 당장 가서 불을 꺼라!”
“네? 잠입자가 올지 모른다고 절대 자리를 뜨지 말라고 들었습니다만…….”
무사들은 난처한 눈빛으로 서로를 돌아봤다.
그들은 진주언가 소속이었다. 수장인 언자성은 고지식하기로 유명해서 토씨 하나라도 명령을 어기면 불호령을 내리곤 했다.
“놈들이 이쪽으로 오면 고마운 일이지. 후문이야 열릴 일이 없으니까… 일단 불을 끄는 게 급선무다. 창고로 번지지 않게 막아야 한다.”
“그럼 후문 경비는…….”
“너희 둘만 남고 모두 가라. 당장!”
“존명!”
무사들은 할 수 없이 불을 끄러 달려갔다.
남궁진은 불길을 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암벽 사이에 세운 요새.
열한 개의 망루가 하루 십이 시진 물샐 틈 없이 수색하는 경비망.
요새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무사들의 눈길.
준비는 철저했다. 그런데 소림사행 놈들은 잠입을 한 건지 아닌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불이 난 것이다.
만약 놈들이 잠입해서 불을 지른 것이라면?
대체 놈들은 어디에 있길래 아무도 찾지 못한다는 말인가!
‘하나같이 게으르기 짝이 없는 놈들!’
남궁진은 상황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다른 세가를 욕하며 남 탓을 했다.
‘오가연맹에 끼일 자격이 없는 놈들은 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 일은 반드시 따지고 넘어갈 것이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남궁진은 죄 없는 두 무사를 노려보다가 어디론가 가 버렸다.
남궁진이 가고 잠시 후.
근처 어둠 속의 담벼락이 스르르 내려가더니 송현과 왕이삼이 모습을 드러냈다.
왕이삼이 목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저놈이 요새의 수장 같은데 우리 낌새를 눈치 못 채는군? 주 소저의 법기가 진짜 신통하단 말야.”
“…….”
송현은 왕이삼의 말에 반만 수긍했다.
방금 들은 대화와 얼굴의 검상으로 볼 때 수장은 남궁세가의 남궁진이리라.
남궁진 정도면 주은리가 준 심의를 꿰뚫어 보진 못해도 기척 정도는 알아차려야 될 터인데…….
송현은 그가 눈치 채지 못한 것은 심의가 신통해서도 있겠지만 절반은 다른 이유 때문일 거라고 추측했다.
‘내가무공이 볼품없는 건가?’
오랜 세월 오대세가 중 으뜸으로 여겨지는 남궁세가. 그런 세가의 가주가 될 몸이니, 오가연맹의 다섯 고수 중 무공이 최고라고 생각되는 것은 당연하리라.
하지만 눈앞에서 본 남궁진은 뜻대로 상황이 돌아가지 않자 당황하며 무사들을 독촉했다.
고수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가벼운 언행.
그러고 보니 남궁진의 수법과 계책이 교활하다는 소문은 많이 들었어도, 무공이나 검법에 대한 소문은 들은 적이 없었다.
‘생각한 것보다 피라미였군.’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힘보다는 머리, 머리보다는 세 치 혀가 지배하는 곳이 당금의 중원 무림이니까.
무공이 약한 자가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일인자 행세 하는 것만큼 우스꽝스러운 것도 없다.
문제는 요새를 어떻게 탈출하는가였다.
송현은 방금 남궁진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던 것이다.
-놈들이 이쪽으로 오면 고마운 일이지. 후문이야 열릴 일이 없으니까…….
‘후문은 절대 뚫릴 리 없다고 자신하고 있군.’
그 증거로 남궁진은 후문에 무사 두 명만 남기고 몽땅 불을 끄러 보냈다.
후문이 보통 방법으로는 열리지 않는다는 뜻.
또한 후문을 넘는 것도 불가능하리라.
술책으로 유명한 남궁진이라면 분명 함정을 파놓았을 테니까.
‘독을 발라놓았나? 독이야 피하면 그만. 기관장치? 그쪽이 좀 더 가능성 높겠군.’
물론 기관장치가 있더라도 후문을 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서백은 몰라도 다른 사람, 특히 왕이삼은 기관장치에 당할 위험이 컸다.
‘남궁진 놈이 어떤 술책을 부렸는지 알아내야겠는데.’
밤하늘을 밝히는 불길은 아까보다 조금 사그라들어 있었다.
요새의 모든 무사들이 불을 끄고 있다는 소리.
‘움직일 때군.’
송현은 왕이삼에게 눈신호를 보낸 뒤 어둠 속에서 나왔다. 그리고 번개처럼 달려들어서 후문을 지키는 무사 두 명을 점혈했다.
송현과 왕이삼은 무사들을 끌고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그런 다음 무사들의 옷을 벗겨서 웃옷 위에 걸치고 머리에는 두건을 썼다.
“천 뒤집어쓰느라 답답했는데 이게 훨씬 낫군.”
왕이삼다운 말이었다.
이제 타인의 눈에 송현과 왕이삼은 진주언가의 무사들로 보일 것이다. 대낮이라면 모를까 어두운 밤이니 쉽게 발각되지 않으리라.
그런데 송현의 이번 임기응변은 금세 들통 나고 말았다.
‘……?’
송현이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고개를 돌리는 찰나, 뒤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잡았다, 쥐새끼들.”
팽자걸이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