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술책에는 술책으로(3)
송현의 태세가 돌변하자 팽자걸은 잠깐 멈칫했지만 곧 여유를 되찾고 말했다.
“운 좋게 요새에 잠입하더니 피래미가 겁이 없어졌구나.”
그런데 송현이 팽자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화제를 돌리는 것이었다.
“하북팽가가 낳은 괴력의 소유자인 팽자호의 동생 팽자걸. 평생 형을 능가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형이 흑랑성에 들어간 뒤 망자가 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지.”
그 말을 듣는 순간 팽자걸의 얼굴이 미소를 싹 지우고 싸늘하게 바뀌었다.
“형이 망자가 됐다고? 네놈이 그걸 어떻게 알지?”
“팽자호는 역발산(力拔山)이라는 별호를 얻을 만큼 타고난 근골의 소유자. 외가무공으로는 형을 이길 수 없던 동생은 가문의 비전무공인 오호단문도를 자기 식으로 발전시켜서 강호에 이름을 날리게 됐지.”
“…정보 하나는 뛰어난 놈이군. 표사 출신이냐?”
“맞소.”
“어느 표국이냐?”
“지금은 멸문해서 없는 곳이오.”
“하! 멸문한 표국의 일개 표사 따위가 감히…….”
“청위표국이라고 하오.”
“……!”
팽자걸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청위표국은 과거 하남에서 위세를 떨쳤다.
하북팽가는 하남의 접경에 위치한 곳. 세월은 흘렀지만 팽자걸은 청위표국의 명성을 익히 들어 봤던 것이다.
“청위표국은 몇 년 전에 멸문한 것으로 아는데…….”
“한 번 한 얘기는 두 번 하지 않소.”
“잠깐. 예전에 소림사에서 청위표국에 도움을 청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혹시…….”
“본인이오.”
“으음…….”
“당신도 정보력 하나는 뛰어나군. 도법보다 표사 일을 배우지 그랬소?”
송현의 거침없는 입담에 팽자걸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오가연맹 요새는 왜 잠입한 거냐?”
“천하가 당신들 게 아닌데 제멋대로 길을 막아 놨으니 통과할 수밖에.”
“네놈이 사천에서 왔다는 소림사행이었군.”
“아니, 본인 말고 같은 일행이오.”
“네놈은 길 안내냐?”
“그런 셈 치지.”
“남의 구역에 제멋대로 들어온 표사 놈들이 어떤 꼴이 되는지 알고 있냐?”
“모르겠소만.”
척.
더는 말이 필요 없다고 느꼈는지 팽자걸이 허리춤의 도를 잡아서 송현을 겨누었다.
팽자걸의 애병 귀호도(鬼虎刀).
귀호도는 박도의 일종이었지만 그는 장인에게 명령해서 검면을 더욱 넓게 만들었다.
또한 날의 두께를 도끼가 연상되게 할 만큼 두껍게 만들도록 명령했다.
그렇게 탄생한 귀호도는 마치 십여 개의 도끼를 한데 뭉쳐 놓은 듯한 모습이 되었다.
제대로 휘두를 수 있는지 의심될 정도의 무게.
반대로 휘두르기만 한다면 사람의 근골쯤은 장작 패듯이 두 쪽 내 버릴 파괴력.
때문에 하북에서는 ‘팽자호의 귀호도는 피할 수는 있어도 막을 수는 없다’란 소문이 퍼졌다.
귀호도를 막으려다가 도검이 두 동강이 돼서 불귀의 객이 된 무림인이 셀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팽자걸이 귀호도를 머리 위로 치켜든 뒤 두 손으로 풍차처럼 돌렸다.
부웅부웅부웅부웅…….
척.
순식간에 십여 바퀴를 돌린 팽자걸이 단숨에 귀호도를 수평으로 내리며 기수식을 취했다.
“청위표국의 검법이 패도적이란 소문은 들어 봤다. 내 오호단문도와 좋은 승부가 되겠군.”
“좋은 승부?”
송현이 그답지 않게 피식 미소를 흘렸다.
“승부는 서로 무공 수준이 비슷할 때 하는 것. 지금은 한 수 가르쳐 주는… 아니, 일방적인 도륙이 될 터.”
“……!”
“힘만 앞세우는 단순무식한 팽가 형제에겐 좋은 교훈이 되겠군. 단지 아쉬운 것은.”
“이 건방진 놈!”
분노한 팽자걸이 귀호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부우우웅.
도검이든 방패든 어떤 병장기도 두 쪽을 내고 사람까지 베어 버리는 팽자걸의 둔도(鈍刀).
그러나 그는 엄청난 무게의 귀호도를 채찍 다루듯이 벨 만큼 쾌도(快刀) 또한 갖추고 있었다.
근골이 튼튼하기로 유명한 하북팽가의 핏줄과 팽자걸 특유의 외가무공에 대한 집착이 탄생시킨 패도적인 도법.
그런데 귀호도가 전광석화처럼 날아드는 판국에 송현은 엉뚱하게도 서북쪽을 슬쩍 쳐다보며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상대하는 명문정파의 고수라서 말을 너무 늘어 놨나. 서둘러야겠군.”
이어서 송현이 귀호도를 막기 위해 검을 들어 올렸다.
그걸 본 팽자걸은 어이가 없다 못해서 황당했다.
‘이놈이 미친 건가?’
설령 팽자걸의 귀호도가 아니더라도 검으로 도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
하물며 송현의 검은 수십 개를 녹여서 합치더라도 팽자걸의 귀호도 한 자루를 못 만들 터.
즉 나뭇가지로 통나무를 막는 거나 다름없는 셈.
팽자걸은 하남의 흑도 무리를 싹쓸이했던 청위표국의 인물과 상대하자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송현이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벌이자 금세 얕잡아보기 시작했다.
‘오냐. 죽고 싶다면 소원대로 해 주마!’
팽자걸은 송현의 머리 위로 귀호도를 내려찍었다.
이제 놈의 검은 고드름처럼 산산조각 나고 귀호도가 정수리를 쪼개 버릴 터.
그런데 도검이 맞부딪치는 소리 대신 정체 모를 괴음이 들리는 것이 아닌가?
츠츠츠츠.
순간 얼어붙은 호수처럼 검푸른 빛을 띤 청연검이 귀호도를 종잇장처럼 가르며 파고들었다.
청연검이 파고들자 귀호도가 양쪽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한 번 틈이 벌어지면 결을 따라서 쭉 갈라지는 대나무처럼.
‘……!’
귀호도를 세로로 갈라 버린 청연검이 허공을 베었다.
팟.
한 줄기 검광이 팽자걸의 어깨에서 가슴팍을 비스듬히 그리며 번쩍였다.
탁.
검광이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송현은 청연검을 검집에 넣었다.
그리고 먼저 못 다한 말을 중얼거렸다.
“아쉬운 것은 교훈을 깨달아도 더는 써먹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
투웅.
그제야 두 조각난 귀호도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송현은 팽자걸은 두 번 다시 쳐다보지 않고 몸을 돌려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끼익.
문이 열리고 진주언가의 무사가 방에 들어왔다.
암벽 사이에 세워진 삭막한 요새임에도 불구하고 방은 은은하게 분향이 배어 있었다. 아마도 여인의 방일 터였다.
무사는 재빠른 동작으로 방을 뒤졌다.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한 행동.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푸른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방에 들어왔다.
“웬 놈이냐?”
오가연맹 요새에 단 한 명 있는 홍일점 여인.
바로 모용화정이었다.
무사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방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아서…….”
“언자성이 내 방을 조사하란 명령을 내렸다고?”
“그렇습니다. 부디 용서를.”
“좀스러운 사내가 내릴 만한 명령이군. 한데 언자성이 역용술도 가르치더냐?”
“…….”
무사가 고개를 치켜들더니 냉랭한 눈빛으로 모용화정을 노려보며 말했다.
“모용세가는 잔꾀만 밝히는 인물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내가무공 수위가 나쁘지 않군요.”
슥. 무사가 가슴팍에 붙은 부적을 떼어 냈다.
그러자 진주언가 무사의 모습은 아지랑이처럼 흐느적거리다 사라지고 검은 무복을 걸친 주은리가 나타났다.
“소림사로 가는 줄 알았더니 실은 도둑질을 하러 왔군. 무엇을 훔치러 온 것이냐?”
“…….”
여인의 육감은 속이기 어렵다.
모용화정은 주은리의 눈길이 자신이 허리에 차고 있는 요대로 향하는 것을 느끼고 물었다.
“이 요대(腰帶)를 훔치러 온 거냐?”
“훔치다니. 본래 주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본래 주인?”
“고호문(古狐門)을 기억하십니까?”
그 말에 모용화정이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얘기를 들은 적 있어. 내가 어렸을 때 감히 모용세가에게 반항했다가 멸문한 문파가 있었다지.”
“고작 모용세가 따위에게 패배했을 리가요. 모용세가, 하북팽가, 진주언가 세 곳이 비열하게 손을 잡고 문파 하나를 공격했으니 아쉽게도 패배한 것입니다.”
“그랬나?”
“그도 모자라서 화공을 펼쳤습니다. 고호문이 있는 마을 전체가 불길에 타 버리고 말았죠.”
“우리 조상님들이 똑똑했군.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피라미들한테 굳이 무공을 쓸 필요는 없는 법, 호호호!”
모용화정이 목소리를 높여 웃은 뒤 물었다.
“그래서, 사문의 복수를 하러 온 것이냐?”
“당신 하나 죽인다고 복수가 될 리 없어요. 오늘은 고호문의 물건을 찾으러 왔습니다.”
“요대 말이냐? 이건 아버지가 준 건데 실은 전리품이었군.”
“멍청한 모용세가가 그 물건의 가치를 알 리 없으니 순순히 내놓으시죠.”
“웃기는군. 무림에서 약자의 물건은 강자의 것이다. 그런 당연한 진리를 왜 모르느냐?”
“잘 알고 있습니다. 해서 강자가 되찾아가겠다는 것입니다.”
“강자라고? 네년이?”
모용화정이 코웃음을 치며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반면 주은리는 어떤 병장기도 꺼내지 않았다.
대신 몸을 비스듬히 선 다음 양팔과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무공의 기수식이겠으나 그 동작이 마치 모용화정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였다.
“모용세가는 상대의 무공을 따라하는 무공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제가 검을 쓰지 않으니 안타깝게도 제 무공은 베끼지 못하겠군요.”
“그 입 두 번 다시 열지 못하게 해 주마!”
모용화정이 계속되는 조롱을 참지 못하고 달려들어서 검을 찔렀다.
쉬익.
주은리가 보법을 밟으며 몸을 반 바퀴 돌렸다.
그러자 그녀의 신형이 달려들던 모용화정의 뒤로 돌아갔고, 두 여인은 서로 등을 맞댄 모습이 되었다.
이어서 주은리가 무릎을 굽히며 엉덩이로 모용화정의 허리를 쳤다. 기상천외한 초식에 당황한 모용화정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순간 주은리가 빗자루처럼 발로 바닥을 훑으며 모용화정의 발목을 찼다.
동시에 모용화정의 가랑이에 손을 넣고 만세 부르듯이 양팔을 들어 올리며 일어섰다.
균형을 빼앗고, 발을 차고, 몸을 뒤집는 세 가지 동작이 하나로 어우러진 초식.
탁. 붕.
모용화정의 몸이 속절없이 허공에 떠오르는 찰나.
주은리가 쌍장을 뻗어 그녀의 복부에 결정타를 넣었다.
스스스스.
강맹한 위력은 없어 보이나 적중할 경우 상대의 기혈을 뒤집고 내장을 파괴하는 내가무공의 정수.
그러나 모용세가를 대표해서 오가연맹에 파견된 모용화정도 일 초식에 당할 상대가 아니었다.
쌍장이 배에 닿는 순간 모용화정은 허공에서 몸을 뒤집어서 피했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연검을 뽑아 휘둘렀다.
촤르르르.
연검이 뱀처럼 좌우로 꿈틀거리며 주은리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자유자재로 낭창낭창 휘어지는 연검(軟劍).
모용화정은 요대 위에 연검을 허리띠처럼 차고 다니다가 상대가 방심할 경우 뽑아서 치명상을 가했다.
그게 아니면 지금처럼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경우에 연검을 사용했다.
그녀에게는 마지막까지 숨겨 두는 구명절초인 셈.
모용화정이 구명절초를 단번에 꺼내게 만든 만큼 주은리의 선제공격이 통렬했다.
하지만 모용화정이 내공을 실어서 자유롭게 휘어지도록 만드는 연검을 뽑자 상황은 단숨에 역전됐다.
무공 수위가 동일한데 한 쪽만 병장기가 있다면 세 배는 더 유리하다는 게 무림의 상식.
그런데 그냥 병장기가 아니라 모용화정이 평생 갈고 닦은 애병을 꺼내 들었다면?
맨손으로 상대하는 주은리가 몇 배 불리한 것은 누가 봐도 뻔한 일!
그러나 주은리도 숨겨둔 한 수가 있었다.
연검이 주은리의 목을 베려는 순간, 그녀가 품에서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꺼내서 빠르게 펼쳤다.
차라락.
이어서 사방팔방으로 휘어지는 연검이 주은리의 애병과 부딪쳐서 정지했다.
채앵.
“감히 내 연검을 막다니…….”
“명문세가의 인물들만 특수 제작한 애병을 다룬다는 소문은 강호의 호사가들이 퍼뜨린 헛된 얘기일 뿐이지요.”
“그래, 네년의 애병은 무엇이냐?”
두 눈을 사납게 뜨고 주은리의 손을 살피던 모용화정은 무엇을 봤는지 초승달 모양의 두 눈썹을 심하게 찡그렸다.
“부채?”
주은리가 모용화정의 연검을 막은 애병은 검은 먹물로 산수(山水)를 옛스럽게 그려 넣은 부채였다.